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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원의 소설쓰는 법
한승원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09년 3월
평점 :
작가 한승원을 알게된 건 10년 전쯤에 읽은 <사랑>이란 소설을 통해서였다. 하도 오래 전에 읽은 것이라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다분히 샤머니즘적이면서도 환상적이고 강렬하면서도 물 흐르는 듯한 문체는 지금도 또렷히 기억한다.
그후 그의 다른 작품도 읽을만도 한데 그 강렬한 문체가 눈이 부셔서였을까? 나는 단 한 작품도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야 겨우 선생의 책을 또 한 권 읽고 이렇게 글을 쓴다. 그런데 내가 이번에 읽은 건 그의 소설이 아니라 소설 쓰기에 관한 책이라는 것이다.
다른 여타의 작가들의 글쓰기에 관한 책은 종종 읽어왔다. 내가 이런 책을 읽는 것은 물론 그들의글쓰기의 노하우를 알고 싶어서다. 물론 읽기만 한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부단한 자기 연마가 있지 않으면 그런 책들은 한낱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글을 쓰지 않을 사람은 이런 책을 읽을 자격이 없다고 한다면 그건 너무 심한 모욕이 될 것이다. 어떻게 글을 쓰지 않을거라고 해서 이런 책을 읽지 말라 하겠는가?
그런데 나는 이런 책이 나름 재미가 있다. 물론 글을 잘 쓰고 싶어서 읽기도 하겠지만 읽다보면 작가들의 세계관이나 스타일, 보이지 않는 이면들을 볼 수가 있어 나름 흥미롭다.
나는 지금까지 이승우 씨와 스티븐 킹, 김탁환 씨 등의 책을 읽었는데, 이승우 씨는 논리가 있으면서 깊이가 느껴지고, 스티븐 킹은 마치 오두막 집을 짓는 느낌이다. 또한 김탁환 씨는 그 스펙트럼이 넓다고나 할까?
그런데 비해 한승원 선생은 글쓰기에 관한 책 하나에도 자신의 사상과 깊이를 잘 녹여내고 있어서 위에 나열한 책과는 또 좀 다른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비록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소설만큼이나 에로틱하며, 샤머니즘적이며 불교적이고 기독교적이다. 즉 말하자면 그 필력이 글쓰기에 관한 책에서도 그대로 녹아진 느낌이든다는 것이다.
사실 난 그 옛날 <사랑>이란 소설을 읽으면서 선생이 불교 신자거나 적어도 불교 사상에 심취한 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이분은 불교 신자라기 보단 범신론자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내가 이 책에서 놀라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이런 글에서도 자유자제로 녹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두고 감히 말하건데 '소설 사상가'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이런 수식어가 있으며 이렇게 불린 사람이 있어왔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읽다보면 선생이 얼마나 글쓰기를 사랑하고, 글을 쓸 때 자기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태워가며 글을 쓰고 있는가가 느껴진다. 하지만 사랑이란 말, 자신의 영혼을 태운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이고 고행인지 조금이라도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실감하고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선생은 기꺼이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며 이 세계에 오라고 초대한다. 올곧게 상업주의를 배격하고 자신의 글만 써 낼 것만 같은 선생은 오히려 이런 상업주의에서 어떻게 어떻게 살아 남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즉 자신의 글쓰기 경험을 말씀하시며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란 성경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고나 할까?
이 책을 읽다보니 갑자기 그 옛날 생전 처음으로 글 쓰기를 배워 보겠다고 만난 나의 사부님 말씀이 생각이 났다. 그 분은 자신이 과연 글을 쓸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인해 볼 수 있는 두 가지 척도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는 내 안에 분노나 원한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작가가 되어서 그들을 보란 듯이 눌러줄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과 글쓰기를 다 마쳤을 때 그 다음 번에도 글을 또 쓰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확실히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작가가 될 수 있다고 하셨다.
내가 나의 사부님으로부터 그런 말씀을 들었을 때 전기에 감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단 말인가?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을 하건 그것의 동기와 정의가 확실해야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보니 후자는 몰라도 전자는 좀 아니겠다 싶기도 하다. 그래서 미움이나 원한 때문에 내뱉는 독설과 가시가 그러한 세상에 동조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여기 한승원이란 작가는 그의 책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세상은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의 몫이다.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 삶을 아름답게 가꾸려 하고 용서하고 더불어 살려 하고 착하게 살려고 한다. 착하게 살려 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좋은 작가는 좋은 눈(시각)이 만드는 것이다. 좋은 눈은 착한 생각과 좋은 책 읽기와 세상을 살아갈 만한 곳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의지를 가질 때 더 잘 만들어진다.
혁명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꽃 한 송이가 되어 세상에 장식되려 하는 노력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글쓰기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말이 나에겐 좀 더 옳은 말 같다(지금은 그 선생님도 그렇게 가르치시진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당신 자신이 그 옛날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기억도 못할지 모르고).
그런데 우리의 한승원 선생 또 짖궂게도 책 말미에 이런 말씀도 남기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설가'도 하나의 상품이라고 하시면서 소설가를 창녀에 비유한다.
"고객이 오르가슴에 이르도록 연출할 뿐만 아니라 고객이 성적으로 그녀를 제압한 제왕이 되도록 연기도 능숙하게 해야 한다. 침대안에 들어온 고객으로 하여금 성적으로 열등감을 맛보게 하거나 그녀를 제압하는 데 실패하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소설가도 창녀와 같다. 당신은 고객인 독자를 위해 성심을 다해 책을 읽어야 하고 열정적으로 소설을 써야한다. 독자가 당신의 책을 읽는 한 시간을 위하여 작가인 당신은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쏟아부어야 한다.
나는 소설가를 잡식성 동물이라고 규정한다. ...... 몸을 파는 창녀가 몸뚱이 하나만으로 창녀 행위를 하지 않고 자기의 온 인생, 온 운명을 던져서 미친 듯이 고객을 위해 사랑행위를 하듯이 소설가는 먼저 책 읽기에 미쳐야 하고 소설거리를 하나 붙잡으면 그 소설을 미친 듯이 써내야 한다."
지금히 당연한 말이지만 창녀에 비유하니 처절하면서도 묘한 느낌이다.
또한 그는 이렇게도 말한다.
"뜻 있는 작가는 자기를 스스로 유배 보낸다. 그 유배지는 자기가 마련한 작가실이다. 작가는 그 유배지에서 자기를 양생해야 한다. 작가는 세상과 자기에게서 유배당할지라도 외롭지 않은 기이한 사람이다. 그것은 그가 자기 소설 속에 설정한 인물들과 함께 살기 때문이다."
과연 멋진 말이다. 그러니 작가는 외롭고 고독한 존재라고 자위하며 휘청대지 말지어다.
아무튼 작가 한승원 선생은 멋진 분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소설 사상가라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