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념의 인간 야곱 - 야뽁강을 넘어서
송봉모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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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남자가 있다.  

형과 같은 날 태어났으나 차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의 관심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형을 시기했던 열등감 많은 남자가.  

그는 조용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꿈이 있었다. 그냥 보통 사람들이 갖는 그런 꿈이 아니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열정 하나만으로도 그 꿈을 이룰 수 있다지만 그의 꿈은 보통 사람이 갖는 그런 꿈이 아니었기에 열정 하나만으로는 이룰 수가 없었다.  

그의 꿈은 운명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즉 자신의 쌍둥이 형과 어머니 뺏속에서부터 몇 분 상관으로 장남의 자리를 내어줘야 했기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장자권을 빼앗아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너무나 중요했다. 영원히 차남으로는 살 수마는 없었다. 그러나 차마 형과는 겨룰 수는 없었기에 기회를 틈타 장자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아주 기발하고도 우스운 방법으로 장자권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사람의 희생을 요구했다. 

 그냥 장자권만 자신 것으로 만들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를 도운 어머니가 그 때문에 멸문을 당해야 했고, 장자권을 갈취한 것 때문에 형을 피해 낮선 땅으로 가 교활한 외삼촌 밑에서 20년 동안이나 뼈 빠지게 일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와중에 외참촌의 딸을 사랑했지만 그녀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원치 않은 그녀의 언니도 아내로 맞아야 하는 굴욕을 감내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굴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외삼촌의 사위가 되었지만 여전히 종속되어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때고 그가 당하고만 사는 것은 아니었다. 교활한 장인에게 통쾌한 복수도 하면서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끔은 반전이 일어나 주기도 하지만 그의 인생은 장자권을 뺏은 형으로부터 복수를 당하지 않을까 늘 겁내하고, 평생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은 한 사람인데 뜻하지 않게 네 명의 부인을 거느리며 그들에게서 낳은 자녀들 때문에 평생을 마음 졸이고 고통해야만 했다. 

어디 그뿐인가? 사랑하는 아내와도 오래도록 해로하지 못하고 아내가 막내 아들을 낳다가 목숨을잃는 비운을 맞는다. 또한 그것도 모자라 그녀가 낳은 첫째 아들을 그의 다른 아들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잃어야하는 비운도 겪어내야만 했다.  

그의 인생이 얼마나 비참했는가는 여기에 일일이 다 적지도 못할 것이다. 그저 이만하면 하나님도 버린 사람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지 않을까? 도대체 그놈의 장자권이 뭐라고!   

하지만 그의 인생의 시작은 참으로 창대했다. 보라, 그의 어머니가 꿈을 꿨는데(그것은 동시에 신탁이기도 했다.) 뱃속의 쌍둥이는 두 민족을 가리키며 형이 아우를 섬긴다고 했다. 아우가 형 보다 낫다는 말이다. 하지만 실재는 어떠한가? 그는 오랜 세월 형의 낮을 피해 살아야만 했고 더 이상은 남의 땅에서 자손을 번식시키며 살 수 없기에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마음 먹지만 도저히 형을 만날 자신이 없다. 20년이란 세월이 지났는데도 복수의 서슬이 시퍼런 형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한다. "당신이 나를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당신을 놓아줄 수 없습니다!" 절체절명의 사투였다.  

민족이라도 일으킬 즉 왕이 되어야 할 사람이 이토록 찌질하게 자기 형 하나 때문에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해야하다니? 그것도 모자라 그는 씨름하는 과정에서 엉덩이 뼈가 탈골돼 평생 다리를 절며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댓가였는지도 모른다. 그 옛날 그가 팥죽 한 그릇에 형에게 장자권을 샀던 것처럼 그는 그렇게 불구의 몸이 됐지만 하나님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함께 하시겠다는 그 언약을 산 것이다. 그에 대한 표로 그는 불구의 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겟다는 약속 하나 받은 것 외에 달라진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장자권은 가졌지만 형 보다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살았던 것도 아니다. 분명 태어날 때 민족을 일으킬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태어났지만 그는 왕 커녕 족장도 되지 못했다. 이쯤되면 도대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그것이 무슨 의미냐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말한 그의 아들들의 모반과 아내를 상처(喪妻) 한 것, 그토록이나 사랑했던 아들 요셉을 잃은 것 등은 그가 야복강에서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란 말씀을 듣고도 계속됐던 그의 비운들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누가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의 말년에 잃은 줄만 알았던 아들 요셉이 한 나라의 재상이 되어 해후하게 되고 그가 마련해 준 처소에서 편히 쉬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 외에 그의 복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하지만 그 아들을 다시 만나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모진 세월을 보내야만 했는가? 

이것이 저자 송봉모 신부의 성경 인물 시리즈중 야곱에 관한 부분을 풀어 놓은 것을 내 나름대로 요약 정리한 것이다.  

사춘기 때 신앙에 입문하고 성경의 제일 앞부분이 가장 많은 손 때가 탈 정도로 창세기는 많이 읽었다. 읽을 때마다 나는 요셉에게 매료 당했지 그의 아버지였던 야곱에게는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얼마나 찌질하고 비겁한 사내란 말인가? 그러나 나는 나이가 들고부터는 요셉보단 야곱에 더 많이 동화되고 이 책을 읽으면서는 그의 모진 인생 여정에 가슴 뭉클해 누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시작은 미약하나 후일엔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이있지만 그는 한번도 창대해 본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을 말 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까지 부른다. 이것은 대단한 영예로써 성경에 많은 인물들이 언급되지만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누구를 빚대어 지칭하신 이 세 사람 밖엔 없다. 도대체  뭐가 그리 대단해서 하나님은 친히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인가? 도대체 이 사람이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기에 이 사람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인가?   

그러나 그를 가만히 생각해 보라. 야곱이 우리네 인생과 얼마나 흡사한가? 거짓말이나 하고, 사기치고, 위험한 상황에선 비굴하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뭐하나 자랑하고 내세울 것이 없다. 그는 그렇게 미약하게 시작해서 고통속에 살다가 쇠하여져 간 것이다. 그런데 또 보라. 성경이 읽혀지는 곳마다 이 사람의 일생이 읽혀지고 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사람들 뇌리속에 각인시켜 놓으시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 가운데 늘 함께 하셨다는 것을 증거하시기 위함이다. 야곱이 쫓기고 있을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을까? 야곱이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을까?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을 때 어디 계셨을까? 아들을 잃었을 때 어디 계셨을까? 거기 그렇게 그와 함께 계셨다. 그 고통속에, 그 고독속에, 슬픔 속에 말이다. 그것을 증거하시고자 하나님은 성경이 씌여지고 읽혀지는 곳에 이 사람의 삶도 읽혀지도록 하신 것이다. 

사실 사람의 인생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가끔 하나님 믿고 입신양명에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말도 심심찮게 듣고, 또 세상에 성공한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인 경우가 많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매스컴의 영향 때문이지 전체적으로 봤을 때 몇 퍼센트 되지 않으며 그런 이유로 하나님을 믿으려 한다면 성공하지 못할 확률이 더 많을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믿고 성공했다면 그건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것 뿐이다.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했다고 앞으로의 인생이 탄탄대로고 아무 고통이나 고난이 없을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그 모든 것들은 여전히 나의 앞길을 가로막을 것이다. 단지 중요한 것은 나의 고통과 고난 앞에 하나님이 동행하시는가 아닌가를 알면 되는 것이다. 야곱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세상의 어떤 인생도 성경에 나오는 인물 보다 더 고난 받지 않았으며 더 고통당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말하면 세상 어떤 사람도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만큼 고통 당했거나 그 보다는 낫다는 말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고통 당하거나 평범하게 살 뿐이다. 야곱의 인생이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다면 야곱의 하나님도 그렇게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야곱을 예시로 하여 보여주시는 것이 아닐까? 야곱의 고통속에, 고독속에, 기쁨과 외로움 속에 항상 함께 하셨든 것처럼 별 볼 일 없는 내 인생 속에도 함께 해 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 믿고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야곱과 같이 비겁하고 굴욕적인 삶을 산다고 해도 그것을 창피해 하거나 슬퍼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리고 또 한가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중요한 사실은 야곱 그 별 볼 일 없는 그 사람의 계보를 통해 예수가 오셨다는 것이다. 이게 새삼 나를 놀랍게 했다. 그래서 성경이 읽혀지는 어느 곳이나 누구에게나 야곱의 일생이 전해지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야곱은 그 나라 왕조의 기록속엔 단 한 줄도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족보엔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나에게 큰 위로가 된다. 이제 나이 먹어 세상에서 크게 명성은 떨칠 것 같지 않지만 예수님의 족보에 내 이름 하나는 올라 갈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야곱처럼 말이다. 내가 앞에서 어렸을 때 요셉을 좋아했다가 나이 들어 야곱을 좋아했다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요셉은 자라 갈수록 큰 인물로 성장해갔지만 야곱은 갈수록 작아졌고 노쇄해져 갔다. 그는 젊었을 땐 욕망의 덩어리었지만 얍복강의 사건을 계기로 영의 것들을 생각하는 인물로 바뀐 것이다. 요셉을 보면 리더는 정말 하늘이 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에 비해 야곱은 인간적이고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에서 영적이고 하나님의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니 우리의 나이들고 늙음이 전혀 추하거나 절망적인 것이 아님을 야곱을 통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모르긴 해도 성서인물을 강해해 놓은 책 중 가장 탁월한 책이 아닐까 싶다. 문체는 평이하면서도 그 영적 깊이는 정말 놀라우리만치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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