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책
김이경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아주 어린 시절, 디즈니 만화에서였던가? 인류 역사에 책이 어떻게 처음 출현하게 되었는가를 밝혀놓은 흥미로운 만화를 본 기억이 있다. 좀 웃기고 단순하긴 한데, 어떤 인류학자(?)가 어느 섬에 표류해서 원주민을 대상으로 우리 하회탈 같은 얼굴이 웃는 상과 우는 상을 번갈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그것을 보는 사람이 그에 따라 얼굴 표정이 바뀌더라는 것이다. 

이 사람은 이것을 더 발전시켜 그 얼굴 모양을 종이에 인쇄했는데, 한 줄은 웃는 상을, 다음 한 줄은 우는 상을 넣었더니 그에 따라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음엔 좀 더 다양한 표정의 얼굴을 삽입해 넣었더니 그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짓더라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지만 그것은 문자 이전 책과 인간의 교감은 이랬을 것이라는 상상을 가능케 한 것으로서 지금도 나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만화 중 하나다.  

정말 우리 인간은 언제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일까? 아니 인류 역사상 책이 처음 출현했던 건 언제부터 였을까? 

이 책은 책의 문화사 중 열 장면을 간추려 놓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책이라는 것도 인간만큼이나 굴곡 많고 책에도 생(生)을 부여한다면 참 쉽지 않은 생을 살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책에 왜 생을 부여해도 좋은가?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책은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고 그 작업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그저 잠깐 있다 사라질 것에 역사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니 유사이래 책이 책으로 존재하기까지의 역사가 쉽지 않았으니 앞으로 쉽지 않은 생을 살아갈 것이라는 게 첫번째 이유고, 또한 책에는 인간의 혼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발자취, 생각, 사상 등이 이 책이라는 물건에 오롯이 담겨져 책으로서의 생명력을 갖게되고 그것을 유지시켜 와야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인간의 생이 그렇듯, 장수하는 책 즉 오래도록 우리에게 읽혀지는 책이 있는가 하면 단명하는 책도 있다.  

어떤 사람은 그 누구에겐가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겐 있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책 역시도 그와 같아서 일부러 태워없애거나 찾는이가 없어 절명(여기선 절판) 되기도 하는 것이다. 

예전엔 분서라고 해서 책을 태워 없애기도 했다지만 요즘엔 웬만해 의도적으로 그런 일을 행하는 일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여러 해 전, 누구라면 알만한 작가의 작품이 분서 다시 말하면 화형식이 보도된 적이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잘잘못을 떠나서 그에게는 치욕스런 개인사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걸 보면서 책을 좋아해서일까 그 사람을 단죄하는 방식이 너무 가혹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 사람의 죄가 중하기로서니 그 방법만은 피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사람도 글 써서 벌어먹고 사는 사람인데 그 사람의 책과 그 사람의 죄과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저렇게까지 할까? 가혹하다 못해 야만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만한 일을 했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항변했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책을 저리 경히 여기는 민족이 사료(史料)를 귀하게 여길까? 싶기도 한 것이다. 본래 사료라는 것이 문자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문자를 담는 그릇이 책이 아니겠는가? 남기고 싶은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소각해 버릴 것이 아니겠는가 이말이다.  

책은 그렇게 단명 또는 절명도 하지만 유령 같은 면도 있어 언제든지 형체를 변이시켜 연명해 가기도 한다. 예를들어 그렇게 어느 문인의 책이 화형 당했다 하면 그 사실이 어떤 식으로든 문자화 되어서 책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아님 말구). 어쨌든 그렇게 책은 어찌보면 인간의 그것보다 더 질긴 운명을 타고 낳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어떤 책은 아무리 눈을 씻고 지구 끝까지 찾고 싶어도 끝끝내 못 찾고마는 책도 있다. 그런데 반해 책과 영혼과 바꾸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책을 향한 열정이다 못해 열애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기행을 하기도 한다. 과연 책이란 인간에게 무엇인가?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1년에 책 한 권 읽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알량한 독서량을 자랑하면서 독서가 취미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런 사람은 그냥 책을 조금 읽은 사람이지 취미라고 말하면 안되는 것이다. 정말 취미면 조금 읽어도 상관없겠지만 사실 독서는 취미가 아닌 것이다.  

뭐 좀 뻔한 말 같아 별로 쓰고 싶지 않은 말이긴 하지만 책은 밥이고 옷과 같다고 생각한다. 밥은 삼시세때 먹으면서 왜 책을 읽지 않는가? 이 질문을 받고도 여전히 밥만 먹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책은 옷이다. 사람이 벌거벗고 살 수 없듯이 책도 그런 것이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몇해 전, 옷 좋아하는 엄마와 책 좋아하는 내가 혈전을 벌인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엄마가 갑자기 안 읽는 책은 버리라는 것이다. 그러자 지지않고 엄마도 안 입는 옷 있으면 버리라고 맞섰다. 그러나 엄마는 옷과 책이 같냐고 했다. 그래서 내가 엄마가 옷 좋아하는 거랑 내가 책 좋아하는 거랑 무엇이 다르냐고 항변했다. 서로의 취향이 다른 걸 가지고 아무리 딸이라도 상대의 것을 비하시키는 엄마의 태도가 나로선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날까지도 엄마와 체형이 얼추 비슷해 일부 옷은 같이 입거나 가끔은 엄마가 내옷을 사 주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엄마는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책 선물을 해 본적이 없다. 더구나 눈이 나빠 읽을 수도 없다. 그러니 옷에 있어서만큼은 나는 아직도 엄마에게 신세지고 있으니 나의 그런 태도는 항변이라기 보단 불손이라고 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가끔 나는 정말 책을 좋아하는가에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지금 내 방엔 읽은 책 못지 않게 읽어야할 책이 잔뜩이다. 어느 순간 이것들을 보면 미소 짓고 싶고 뿌듯할 때도 있지만 읽어야할 책에 비해 나의 독서의 속도는 형편없이 느리다. 언제 죽을지 모르고 언제 눈이 나빠질지 모르니 빨리 읽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 맞는가 묻는 것이다.  더구나 나는 책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나의 책들은 싸게 싼 책들이거나 기증 받은 책들이 대부분이다. 만약 읽고 싶은 책이 있는데 엄청 비싸다 하면 일단 그 의지를 접고 만다. 그리고 무슨 책이 떴다고 해서 그것을 기필코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성격도 못된다. 그러니 내가 진정한 비블리오 마니아인가?라는 질문에 결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을 못 읽을 건 아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영히 '책'에 대해 궁금할 것은 당연하다. 이 책은 책의 역사에 대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교양서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책이란 게 다 그렇듯이 자기 궁합에 맞는 책이 있고 맞지않는 책이 있다. 아쉽게도 이 책은 나와는 딱 맞는 책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읽다보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을 때가 종종있다. 

편집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이를테면 이 책은 글쓴이가 편저했다고 볼 수가 있는데 뒤에만 참고문헌을 밝혀두었다. 그 보단 오히려 쳅터 하나가 끝날 때마다 이 이야기는 어디에 실린 이야기라고 밝혀야 하지 않을까? 그런 것을 감안한다면 읽어 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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