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집>은 김기덕 영화의 에센스가 모여 가지런히 정돈된 영화다.
나는 김기덕의 근작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과 <사마리아>를 보고 나서 혹평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그에 대해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고수해왔지만, 저 두 편은 다분히 불순한 의도가 엿보이는 작품이었다. 그는 성경을 인용하여 신도들을 농락하는 사이비 목사처럼, 석가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호가호위하고 있었다. 승복을 입고, 사제복을 입고, 관객들을, 또 영화제 심사위원들을 압도하려고 했다.
종교에 투항한 작품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다. 그것은 간증이며 전도 행위지 예술이 아니다. 60년대에 주옥같은 작품을 쓴 김승옥은 종교에 귀의하는 순간부터 소설을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종교적인 전제와 해답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와 세계의 긴장은 깨어지고 서사는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간증과 예술을 동시에 이루어내겠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종교를 소재로 한 대부분의 작품들이 거짓 간증과 거짓 성찰로 가득 찬 종교적인 키치(Kitsch)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한 작품들은 세상과의 싸움을 포기하는 동시에 종교적으로도 무지한, 전형적인 거짓 예술이다.
어쨌든 세계와 비교적 팽팽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한국에서 몇 안 되는 작가였던 김기덕은 갑자기 엉터리 선문답으로 읊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음 작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거품이 빠진 세계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빈 집>에서 김기덕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예전에 종교적인 퇴행을 했으니 원래 자기 자리로 돌아간 것은 분명 축하할 만한 일이다. <빈 집>은 김기덕 영화의 에센스가 모여 가지런히 정돈된 영화다. 이 영화에는 ‘남의 집이 비어 있는 사이 그곳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생활 한다’는 김기덕 특유의 한 줄짜리 기발한 시놉시스가 있고, 입을 도통 열지 않는 인물들이 있으며, 주인공과 세상의 단절이 있고(누군가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칭하는), 후반부의 판타지가 있으며, 공격성과 폭력의 표출이 있다. 이 모든 것이 김기덕의 세계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들이다. 이것들이 ‘모이고’, ‘정돈’되었으니 어찌 보면 김기덕은 진일보한 셈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그 외에 새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 그렇다. 이 영화는 김기덕의 필모그래피에서 전혀 새롭지 않은 작품으로 보인다. 소재만을 바꿔 수평 이동한 영화에 불과하다. 하지만 거품이 모두 빠져 김기덕 영화의 정수만 남은 이 영화는 나름대로 중요한 작품이다. 이 영화를 통해 김기덕이 구사하는 언어의 정체는 보다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내 귀에 도청 장치가 있다
어느 한국 사람이 “문이 열리자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날 반긴다. 나는 프랑크푸르트의 소년이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를 미친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우리가 지하철에서 종종 마주치는 광인들은 저런 말들을 하염없이 늘어놓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저 ‘미친 소리’는 요절한 시인 진이정의 시 <새벽 세 시의 냉장고> 중 한 대목이다. 일상적으로 소통될 수 없는 저러한 광인의 언어는 문맥에 따라 은유나 상징으로 사용된다. 광인의 언어에 방향성과 의도가 결합되면 은유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디까지가 ‘미친 소리’고, 어디서부터가 ‘시어’인지 도통 알아채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어느 광인이 9시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 곁으로 뛰어들어 카메라를 향해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외칠 때 그 광인에게도 나름의 의도와 컨텍스트가 있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그런 식으로 수사학을 구사하며 전 국민을 상대로 퍼포먼스를 감행했을 수도 있다. 단지 우리가 그 함의를 해독하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반대로 시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정상인’이 썼지만 그 의도와 방향성을 도무지 파악하기 힘들어 해독이 전혀 불가능한 언어도 많다. 과문한 나의 입장에서는 이것이야 말로 ‘미친 소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결국 광인의 언어와 시인의 언어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그래서 양귀자의 ‘원미동 시인’과 같은 소설에서처럼 시인은 흔히 어딘가 이상하고 제정신이 아닌 인물로 그려지는지 것인가).
광인의 언어
김기덕 영화에 있어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는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빈 집>의 주인공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아무 빈 집에나 들어가,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소파에 앉아 편히 쉬다가 침대에 누워 자위 행위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주인이 돌아올 때가 되면 어떤 물건에도 손대지 않고 집 밖으로 조용히 빠져나온다. 이것은 분명 ‘미친 짓’이 아닌가. (이승연이 연기하는) 여자 주인공은 더욱 가관이다. 주인이 마당을 지키고 있는 집에 들어가 안면 없는 주인에게 아무 말 없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거실 의자로 가서 눕는다. 그리고 잠에서 깨자 다시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태연하게 집 밖으로 나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미친 사람들이고,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사람들은 더욱 미쳐간다.
감옥에 갇힌 남자 주인공은 골프를 치는 양 맨손으로 진지하게 골프 스윙을 한다. 그리고 유령처럼 사라졌다 나타나며 간수들을 쓸데없이 괴롭힌다. 여자 주인공은 남편에게는 보이지 않는 남자 주인공을 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은 밥사발이 저절로 움직이는데 전혀 알아채지도 못한다. 다들 조금 모자라거나 미쳤다. 김기덕은 매우 태연자약하게 이러한 언어를 구사하는 감독이다. 이를테면, 김기덕은 진지한 표정으로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외치는 사내인 것이다.
시인의 언어
그런데 김기덕이 스스로를 시인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또한 뉴스 카메라 앞에서 “내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외친 사람도 자신을 미쳤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김기덕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 심지어 베니스영화제의 심사위원들도 그를 빼어난 시인으로 평가하고, 나 역시 그가 시인의 자격으로 이 영화를 연출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가 늘어놓는 ‘미친 소리’는 분명 광인의 언어인데, 이 영화의 작가는 시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비유하자면, 그 도청 장치의 사내가 어느새 계관 시인이 되어 있는 격이다. 그런데 사실 이는 이제까지 우리가 김기덕의 영화를 볼 때마다 봉착한 딜레마와 관련이 있다. <해안선>에서 강 상병이 부대로 돌아가서 부대원들을 하나씩 죽이는 대목이나, <수취인불명>에서 후반부에 지흠이 화살을 쏘아 사람을 죽이는 장면은 매우 코믹해 보인다. 그것이 코믹한 이유는 등장 인물들이 조금 모자라거나 미쳤는데, 그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김기덕의 표정은 지극히 진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언어가 의도된 유머인지, 미친 소리인지, 시적 은유인지 파악할 수 없어 혼란스럽다. 김기덕에 관한 모든 논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김기덕은 코미디언이거나 광인이거나 시인인데 우리는 그 정체를 명확하게 규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훼손된 리얼리티
이 영화에서 권투 선수인 집주인이 집으로 돌아와 침입자를 발견하자, 그는 난데없이 권투 글러브를 끼고 달려들어 그들을 구타한다. 김기덕 영화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러한 장면은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코믹하기 그지없는데, 감독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하다. 우리는 그래서 김기덕의 언어를 광인의 언어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내 귀의 도청장치’를 외치는 사내가 광인이라는 가장 분명한 근거도, 그의 표정이 진지했다는 사실이었다.
김기덕이 광인인지 시인인지 판단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한국의 많은 평론가들은 그를 동물적인 광인으로 몰아붙여 왔고, 해외에서는 그를 훌륭한 시인으로 떠받들며 번번이 상을 안겨줬다. 나로서는 그의 귀에 달린 도청 장치의 정체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설명할 재간이 없다.
하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모든 논란 원인이 그가 ‘관념’으로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리얼리티를 심하게 훼손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한 줄짜리 시놉시스로 출발해 그 아이디어 하나를 끝까지 밀고나가며 거기에 무리하게 관념의 무게를 부여하려고 한다. 그는 이야기 구성에 대한 공학적인 계산 없이, 여러 ‘이상한 행위’들을 나열하며 거기에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관객들에게 들이미는 것이다. 바로 그 이상한 행위들이 ‘미친 소리’로 들리기도 하고 ‘시적 수사학’으로 감지되기도 하는 것이다.
문일평(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