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왔던 PIFF 중 가장 기분 좋다"
<빈 집>관객과의 대화...다음 작품은 총 또는 여자가 주인공

PIFF
12일 부산극장 1관. <빈 집> 상영이 끝나고 곧 이어 김기덕 감독과 주연 배우 이승연, 재희의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이어졌다. 김 감독은 "매번 PIFF를 찾았지만 오늘처럼 기분 좋은 날은 없었다"며 객석을 가득 매운 관객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고, 이승연씨는 어려웠던 당시에 자신을 도와줬던 감독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다음은 관객과의 일문일답 요약

-김기덕 감독과 같은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노하우는 무엇인가?

김(이하 김) : "노하우라고 하긴 그렇고 상상을 옮겼을 뿐이다. 줄거리보다는 느낌이 머리에 떠오르는 순간 진심을 옮기는 게 노하우라면 노하우다."

-그림자를 연습하는 과정에서 손바닥에 눈동자를 그리는데 어디서 모티브를 얻은 것인가?

김 : "모티브를 땄다기보다는 태석이 좋아하는 선화와 함께 살기 위해서 감옥에 있는 5년 동안 사람 뒤에 숨는 유령 연습을 한다. 영화 중 팔을 뻗어 날개짓을 하는 것은 사각을 계산하는 것이고 손바닥을 앞 사람의 머리로 생각해 숨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남자가 빨래를 하고 고장난 것을 고치는데. 나쁜 것을 새로 태어나게 한다는 말인 거 같다. 그래서 여자도 새로운 사랑을 찾게되는 것인가?

김 : "3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영화를 그대로 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태석이 존재하지 않고 선화가 꿈을 꾼 이야기로 보는 것이다. 세 번째는 반대로 태석이 늘 빈 집에만 들어가다가 꿈을 꾼 것일 수도 있다. 각도를 다르게 해서도 봐도 문제가 없다."

-왜 대사가 점점 없어지기 시작했나? 또 영문 제목 '3-iron' 뜻은 무엇인가?

김 : "골프를 쳐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3번 아이언이 가장 사용하기 어렵고, 강력한 채다. 그리고 요즘 들어서 대사가 없어지는 것 같다. 외국 관객들이 자막을 안 좋아하기도 하고 누가 봐도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시나리오는 어떻게 얻었는가? 그리고 다음 작품은?

김 : "소재는 어느 날 밤 우연히 얻게 되었다. 영화 제작하기 한 달 전부터 쓰기 시작해서 영화 시작 10일 전에 마무리했다. 그러니깐 20일 만에 시나리오를 다 썼다. 대신 그 기간동안 메모를 많이 했다. 다음 작품은 권총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과 아름다운 여자가 아름다움을 포기해가는 영화 중 하나를 생각 중이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부터 부드러운 정서를 뿜어내는데 차후 의도는 어떻게 되는가?

김 : "나는 원래 부드러운 남자다. 감성적이고, 여리다. 충무로에서 캐스팅이 어려운데 이승연씨를 느닷없이 만나게 되었고, 재희씨도 눈빛을 보고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렸는데 거절을 하면 어떡하나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데 배우들이 OK를 해줘서 배우들에게 고맙다."

-영화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이승연(이하 이) : "전화받으면서 악을 쓰는 부분이 어려웠다. 평소에 악을 안 쓴다. 그리고 방송하면서 키스신을 했는데 이렇게 노골적인 키스신은 처음이었다."

재희 : "힘들었던 것은 없고, 교도소에서 유령연습하던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김 : "에피소드 하나 알려주겠다. 내가 영화를 하면서 장난을 잘 친다. 그래서 둘이 키스를 시켜놓고 컷을 안 불렀다. 원래 필요한 건 10초 분량인데 내가 카메라 감독에게 카메라 끄라고 조용히 말한 다음 그냥 뒀다.

그래서 1분 정도 둘이 키스를 했는데 배우들은 리얼리티가 안 살아서 그러는 줄 알고 더 밀접하게 키스를 했다. 그래서 쪽쪽거리는 소리가 스태프들에게도 다 들렸다. 그 중에서 가장 고생한 것이 선화의 남편(권혁호 분)이었는데 그 분은 귀 바로 옆에서 그 소리를 다 들어야 했다. 제일 섭섭하셨을 거다."

-두 배우는 완전한 사랑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이 : "완전한 사랑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나도 완전한 사랑을 해보고 싶다."

재희 : "완전한 사랑은 사랑을 위해 자기를 포기한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감독의 이전 영화는 약간 불쾌했는데도 사람들이 찾게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느낌을 존중한다. 찍으면서 느낌을 찍으려고 하고 불쾌한 장면도 담는다. 그 느낌에 감염이 되는 것 같다. 이런 현상은 지속되어야 한다." (웃음)

-대사가 없었는데. 내면 연기를 하는 것이 힘들지는 않았나?

이 : "대사가 없는게 훨씬 힘들었지만 당시 나도 어렵고 힘든 시기였다. 그것이 선화에게 녹아났다. 나도 아무 말도 하기 싫었고 선화도 아무 말도 하고 싶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려운 시기에 같이 해준 감독님에게 감사하다."

김 : "한 마디가 더 하고 싶다. 이렇게 행복한 적이 없었다. 이 자리가 처음 <파란대문>을 들고 3회 PIFF에 왔을 때 반도 차지 않았던 자리다. 그때는 마이크를 던지고 나갔다.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행복하고 행복하다." / 정민규 기자



빈 집에 들어간 것은 광인인가 시인인가 특집 비평 | <빈 집>
[필름 2.0 2004-10-05 20:50]

<빈 집>은 김기덕 영화의 에센스가 모여 가지런히 정돈된 영화다.

나는 김기덕의 근작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과 <사마리아>를 보고 나서 혹평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그에 대해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고수해왔지만, 저 두 편은 다분히 불순한 의도가 엿보이는 작품이었다. 그는 성경을 인용하여 신도들을 농락하는 사이비 목사처럼, 석가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호가호위하고 있었다. 승복을 입고, 사제복을 입고, 관객들을, 또 영화제 심사위원들을 압도하려고 했다.

종교에 투항한 작품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다. 그것은 간증이며 전도 행위지 예술이 아니다. 60년대에 주옥같은 작품을 쓴 김승옥은 종교에 귀의하는 순간부터 소설을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종교적인 전제와 해답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와 세계의 긴장은 깨어지고 서사는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간증과 예술을 동시에 이루어내겠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종교를 소재로 한 대부분의 작품들이 거짓 간증과 거짓 성찰로 가득 찬 종교적인 키치(Kitsch)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한 작품들은 세상과의 싸움을 포기하는 동시에 종교적으로도 무지한, 전형적인 거짓 예술이다.

어쨌든 세계와 비교적 팽팽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한국에서 몇 안 되는 작가였던 김기덕은 갑자기 엉터리 선문답으로 읊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음 작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거품이 빠진 세계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빈 집>에서 김기덕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예전에 종교적인 퇴행을 했으니 원래 자기 자리로 돌아간 것은 분명 축하할 만한 일이다. <빈 집>은 김기덕 영화의 에센스가 모여 가지런히 정돈된 영화다. 이 영화에는 ‘남의 집이 비어 있는 사이 그곳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생활 한다’는 김기덕 특유의 한 줄짜리 기발한 시놉시스가 있고, 입을 도통 열지 않는 인물들이 있으며, 주인공과 세상의 단절이 있고(누군가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칭하는), 후반부의 판타지가 있으며, 공격성과 폭력의 표출이 있다. 이 모든 것이 김기덕의 세계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들이다. 이것들이 ‘모이고’, ‘정돈’되었으니 어찌 보면 김기덕은 진일보한 셈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그 외에 새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 그렇다. 이 영화는 김기덕의 필모그래피에서 전혀 새롭지 않은 작품으로 보인다. 소재만을 바꿔 수평 이동한 영화에 불과하다. 하지만 거품이 모두 빠져 김기덕 영화의 정수만 남은 이 영화는 나름대로 중요한 작품이다. 이 영화를 통해 김기덕이 구사하는 언어의 정체는 보다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내 귀에 도청 장치가 있다

어느 한국 사람이 “문이 열리자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날 반긴다. 나는 프랑크푸르트의 소년이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를 미친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우리가 지하철에서 종종 마주치는 광인들은 저런 말들을 하염없이 늘어놓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저 ‘미친 소리’는 요절한 시인 진이정의 시 <새벽 세 시의 냉장고> 중 한 대목이다. 일상적으로 소통될 수 없는 저러한 광인의 언어는 문맥에 따라 은유나 상징으로 사용된다. 광인의 언어에 방향성과 의도가 결합되면 은유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디까지가 ‘미친 소리’고, 어디서부터가 ‘시어’인지 도통 알아채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어느 광인이 9시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 곁으로 뛰어들어 카메라를 향해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외칠 때 그 광인에게도 나름의 의도와 컨텍스트가 있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그런 식으로 수사학을 구사하며 전 국민을 상대로 퍼포먼스를 감행했을 수도 있다. 단지 우리가 그 함의를 해독하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반대로 시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정상인’이 썼지만 그 의도와 방향성을 도무지 파악하기 힘들어 해독이 전혀 불가능한 언어도 많다. 과문한 나의 입장에서는 이것이야 말로 ‘미친 소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결국 광인의 언어와 시인의 언어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그래서 양귀자의 ‘원미동 시인’과 같은 소설에서처럼 시인은 흔히 어딘가 이상하고 제정신이 아닌 인물로 그려지는지 것인가).

광인의 언어

김기덕 영화에 있어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는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빈 집>의 주인공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아무 빈 집에나 들어가,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소파에 앉아 편히 쉬다가 침대에 누워 자위 행위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주인이 돌아올 때가 되면 어떤 물건에도 손대지 않고 집 밖으로 조용히 빠져나온다. 이것은 분명 ‘미친 짓’이 아닌가. (이승연이 연기하는) 여자 주인공은 더욱 가관이다. 주인이 마당을 지키고 있는 집에 들어가 안면 없는 주인에게 아무 말 없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거실 의자로 가서 눕는다. 그리고 잠에서 깨자 다시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태연하게 집 밖으로 나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미친 사람들이고,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사람들은 더욱 미쳐간다.

감옥에 갇힌 남자 주인공은 골프를 치는 양 맨손으로 진지하게 골프 스윙을 한다. 그리고 유령처럼 사라졌다 나타나며 간수들을 쓸데없이 괴롭힌다. 여자 주인공은 남편에게는 보이지 않는 남자 주인공을 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은 밥사발이 저절로 움직이는데 전혀 알아채지도 못한다. 다들 조금 모자라거나 미쳤다. 김기덕은 매우 태연자약하게 이러한 언어를 구사하는 감독이다. 이를테면, 김기덕은 진지한 표정으로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외치는 사내인 것이다.

시인의 언어

그런데 김기덕이 스스로를 시인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또한 뉴스 카메라 앞에서 “내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외친 사람도 자신을 미쳤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김기덕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 심지어 베니스영화제의 심사위원들도 그를 빼어난 시인으로 평가하고, 나 역시 그가 시인의 자격으로 이 영화를 연출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가 늘어놓는 ‘미친 소리’는 분명 광인의 언어인데, 이 영화의 작가는 시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비유하자면, 그 도청 장치의 사내가 어느새 계관 시인이 되어 있는 격이다. 그런데 사실 이는 이제까지 우리가 김기덕의 영화를 볼 때마다 봉착한 딜레마와 관련이 있다. <해안선>에서 강 상병이 부대로 돌아가서 부대원들을 하나씩 죽이는 대목이나, <수취인불명>에서 후반부에 지흠이 화살을 쏘아 사람을 죽이는 장면은 매우 코믹해 보인다. 그것이 코믹한 이유는 등장 인물들이 조금 모자라거나 미쳤는데, 그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김기덕의 표정은 지극히 진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언어가 의도된 유머인지, 미친 소리인지, 시적 은유인지 파악할 수 없어 혼란스럽다. 김기덕에 관한 모든 논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김기덕은 코미디언이거나 광인이거나 시인인데 우리는 그 정체를 명확하게 규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훼손된 리얼리티

이 영화에서 권투 선수인 집주인이 집으로 돌아와 침입자를 발견하자, 그는 난데없이 권투 글러브를 끼고 달려들어 그들을 구타한다. 김기덕 영화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러한 장면은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코믹하기 그지없는데, 감독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하다. 우리는 그래서 김기덕의 언어를 광인의 언어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내 귀의 도청장치’를 외치는 사내가 광인이라는 가장 분명한 근거도, 그의 표정이 진지했다는 사실이었다.

김기덕이 광인인지 시인인지 판단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한국의 많은 평론가들은 그를 동물적인 광인으로 몰아붙여 왔고, 해외에서는 그를 훌륭한 시인으로 떠받들며 번번이 상을 안겨줬다. 나로서는 그의 귀에 달린 도청 장치의 정체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설명할 재간이 없다.

하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모든 논란 원인이 그가 ‘관념’으로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리얼리티를 심하게 훼손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한 줄짜리 시놉시스로 출발해 그 아이디어 하나를 끝까지 밀고나가며 거기에 무리하게 관념의 무게를 부여하려고 한다. 그는 이야기 구성에 대한 공학적인 계산 없이, 여러 ‘이상한 행위’들을 나열하며 거기에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관객들에게 들이미는 것이다. 바로 그 이상한 행위들이 ‘미친 소리’로 들리기도 하고 ‘시적 수사학’으로 감지되기도 하는 것이다.
문일평(영화평론가)


기사제공 :
말이 필요없는 영화 <빈 집>
[오마이뉴스 2004-10-14 10:56]

[오마이뉴스 정민규 기자]


 

 

 

 

▲ 남자는 여자를 위해서 그림자가 된다. 그것이 그들이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다

ⓒ2004 PIFF

 

'김기덕표 영화'라고 하면 으레 생각나는 것이 선혈이 낭자하는 폭력이었다. 또 내용은 어찌나 어려운지, 한두 시간 넘게 앉아서 우두커니 영화를 보고 나서 드는 생각이란 게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라는 냉소적인 시선이었다.

보기는 본다마는 보고나서 기분 나쁜 영화, 김기덕의 영화는 그랬다. 그런데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부터 그의 영화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마리아>를 거쳐 이번 영화 <빈 집>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가 변했다.

그에 대한 엇갈린 선입견을 버리고 그냥 영화만 보자면 <빈 집>은 그의 영화답지 않게 보기 편한 영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많은 것을 안겨준다. 영화에서는 빈 집을 돌아다니며 사는 남자와 빈 집에서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여자가 나온다.

남자의 이름은 태석이고, 여자의 이름은 선화라고 하는데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냥 편하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나온다고 생각하고 보면 된다. 주변 인물들의 대사가 많은 것도 아닐 뿐더러 남자 주인공은 대사가 없고 여자 주인공 대사라고 해봤자 두 문장이 전부다. 그렇다! <빈 집>은 말이 필요 없는 영화다.

남자는 몰래 빈 집에 들어가 빨래도 하고, 밥도 먹고 고장 난 물건까지 고쳐 놓는다. 남자의 이 기막힌 짓을 보고 있는 관객들은 그 황당함에 웃음을 터트린다. 이런 착한 도둑(?)이라면 매일 들어도 좋겠다고 느끼는 듯하다.

▲ 세 사람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2004 정민규
여자는 의처증에 걸린 남편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채 빈 집에서 살아간다. 이 두 상처받은 영혼은 서로 이해해 간다. 영화는 사랑한다는 달콤한 말이 판치는 세상, 감성을 자극하는 한 마디가 어록으로 묶여 돌아다니는 세상에 대해 일갈하는 듯하다.

결국 사랑이란 것은 세치 혀가 아닌 마음인 것이란 것을 영화는 조용히 보여준다. 심금을 울리는 대사가 없어도 그들의 사랑이 전해지는 것은 결국 말이 사랑의 전부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하지만 세상은 이들의 사랑을 비정상적인 것이라 치부한다. 그리고 그런 세상의 시기와 질투에 남자는 그림자가 된다. 인간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반대편 180도로 그는 숨어 들어간다. 그리고 여자의 집에서 남편 모르게 함께 살아가게 된다.

여자의 첫 대사이기도 한 "사랑해요"란 말이 나오는데 70분이 걸리는 영화. 하지만 <빈 집>은 절대로 지루하지 않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특별한 상황설정 탓이다. 12일 상영 당시에도 그의 영화답지 않게 보기 편했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14일 오후 2시 대영극장에서 한 차례 상영만을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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