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의 이미지를 기호로 인식하거나 나를 의미화시키려고, 본래의 나로부터 변형시키는 바로 그 순간부터 또 다른 체계가 성립된다. 이때부터 기호는 코라와 코라의 영원한 회귀를 억압하는 것이다. 오로지 욕망만이 이 '기원적인' 싸움에 증인이 될 것이다. (...) 결국 아브젝시옹이란 일종의 나르시시즘의 위기이다. 즉 아브젝시옹만이 '나르시시즘'이라 불리는 이 상태의 덧없음을 증언하며, 신은 비난하는 질투로 그 사실에 침묵한다. 게다가 아브젝시옹은 나르시시즘(사물이나 개념에 대한)에 '외관'을 부여한다. 39
왜 어떤 학자들은 어렵게 쓸까? (내가 질문하는 어렵게 쓰여진 글은 멋 부리려고 모호함을 추구하는 글이나 잘못된 번역은 예외로 한다. 아직은 내가 그것들을 모두 명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는 수준이긴 하다.)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철학책들을 조금씩 찾아 읽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 질문이 나를 줄곧 따라 다녔다. 왜 쉽게 '내가 말하고 싶은건 00야'라고 말하지 않고 에둘러 말하는 걸까? 그것도 독자를 데리고 아주 멀리 미로가 섞인 숲길을 돌아가면서 장황하고 불분명하게 집으로 가는 방법을 설명하듯이 말이다. ㅡ크리스테바의 표현을 빌리자면'질서 없는 중구난방의 언어'로ㅡ 아직 확답을 얻지 못했지만 그건 기존의 언어가 권력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언어로는 제대로 무언가를'전달'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을 깔고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 즐겨보던 오락 프로그램에서 여러 사람이 나란히 서서 하는 게임이 있었다. 대략 7명 내외의 사람들이 서 있고 왼쪽 끝에 있는 사람이 어떤 문장을 옆 사람에게 전달하면 그 옆 사람도 같은 식으로 그 문장을 귓속말로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마지막에는 대부분 황당한 답이 나와서 폭소를 자아내곤 했다. 어느 정도 재미를 위해 과장한 측면이 있겠지만 일상에서도 이런 일은 낯설지 않다고 느꼈다. 어떤 말이 와전되고 왜곡되어 전달되고 본래 의미를 잃는 경우를 때때로 봤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갈등을 겪고 서로를 미워하기도 한다. 이런 문제는 인간사회에서 필연적인 것 같다. 어느 사회에나 작건 크건 '언어'로 인한 갈등은 존재하니까. 언어가 전달되는 상황과 발화자,발신자의 상태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되어버리는 일은 다반사다. 법정 스님이 그래서 사랑도 미움도 모든 것이 오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현실 속에서 제대로 된 이해가 불가능할지라도 어쨌든 살아가려면 분명하고 명확하게 전달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또 최대한 이해시켜야 한다.
비주관성 혹은 비객관성이라는 이 불가능을 마침내 가능으로 만드는, 언어로 씌어진 현대 문학의 다양한 변조 속에서의 아브젝시옹의 승화를 제안할 것이다.- 크리스테바
인문학을 통해서 언어가 권력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지 않으면 인간이 궁극적으로 해방되기 어렵다. -김누리 교수
공부하는 많은 여성들이 '잃어버린 언어를 찾고 싶다'고 말한다. 나는 이것을 기존의 남성중심적인 세계의 언어로는 담을 수 없는 타자의 현실(고유한 가치)을 살려내고 싶다는 욕구와 그 이상의 뭔가라고 해석한다. 기존의 질서를 상징하는 가장 큰 힘에는 '글쓰기'가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질서를 부여하고 규칙을 주며 합법화하는 행위이므로 절대적으로 무정부적인 글쓰기란 없는 것이다.206
착각, 그 속에서 우리는 원한다면 사회 현상의 전개와 다양한 합리화를 알게 된다. 즉 문학적으로 말하건데, 착각은 미쳐 가는 것을 막아 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학이라는 것, 즉 동일화 과정의 횡단을 위협하는 미쳐 버린 심연을 펼쳐 보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테바
위의 문장들은 크리스테바가 어렵게 쓰는 이유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녀는'동일화 과정'의 힘. 그 합리화의 질서를 무질서를 통해 실감하게 하는 것이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오히려 분명히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경계를 통해 내부를 들여다보는 과정의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브젝시옹(비체)은 대체 무엇일까? 아브젝시옹은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계를 구성하는 개념이다. 그 경계는 기존질서를 더 명확하게 하고 합법화하며 권력화한다. 경계에는 그런 이유로 억압되고 배제, 불법화된 것, 오염된 것으로 치부된 존재들, 상징들이 위치한다. 말, 공포, 배설물, 죽음, 파열, 도착증, 불가능성, 겁먹음,피, 벌어진 상처, 묵시록과 카니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것들이 거기 담겨있다. 그러므로 아브젝시옹은 단 하나로 간단히 정의내릴 수 없다. 포착하려고 노력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크리스테바가 아브젝시옹을 문학- 도스토예프스키와 프루스트, 조이스, 카프카, 사르트르, 루이 훼르디낭 셀린-을 통해 반복적으로 설명한 이유다. 개인적으로는 여기 더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페르난두 페소아도의 글도 아브젝트하다고 느꼈다.
'밤'은 우리의 인생 그 자체를 가리킨다. 불가사의하고 어처구니없으며, 갖은 함정이 혀를 널름거리는 곳, 그 공간과 시간이 곧 인생이라는 기나긴 밤이다. 그 밑바닥을 알 수 없는 한없이 깊은 수렁, 그것도 한번 빠지면 영영 헤어날 길 없는 더러운 수렁. 온갖 부유물과 배설물, 온갖 거짓, 위선, 비열함, 광기가 뒤섞여 썩고 있는 아수라. 그것이 셀린느가 그리고 있는 밤, 즉 우리의 인생이다.
-[밤 끝으로의 여행] 중에서'옮긴이의 말'
진실은 지상적인 낮은 것에 있다. 벌거벗겨진 면, 그럴 듯함이 제거된 가식 없는 오염되고 죽은, 불편함과 질병.공포에 있는 것이다. 217
이런 글이 읽기 힘든 이유는 우리가 기존의 형식에 묶여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단순하고 명확한 구속적인 글들. 셀린의 말처럼 '명료하게 쓴다는 것. 그건 그리 대단치 않다.' p.240 크리스테바는 기존의 글과 달리 오독의 자유를 독자에게 주고 있는 셈이다. 여러 장면들을 수없이 제시 함으로써 아브젝시옹의 공포를 자연스럽게 각인시킨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극도의 난해함을 경험하고 아무것도 남은게 없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아브젝시옹이 뭘 말하는 걸까 수없이 스스에게 질문했을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아브젝시옹을 펼쳐보이면서 글을 읽는 사람들 각자가 오롯이 자신의 시각에서 아브젝시옹을 '발견'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사는 동안 이미 아브젝시옹을 무수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크리스테바는 사례들을 나열하면서 아브젝시옹이 어떻게 질서에 의해 경계로 밀려나있는지 반복적으로 '상기'시킨다.
물론 나는 이 책에 나온 모든 글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모르는 용어가 많았다.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문장들, 단락들 위주로 읽어나가며 그 길을 나름대로 찾으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이 책을 100% 이해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보다는 크리스테바의 의도, 접근 방법이 보다 중요해 보인다. 크리스테바는 불친절한 선생님이다. 답을 제시하기 보다 방향을 그려주는 선생님이다. -사실 크리스테바는 선생님보다는 분석가라고 해야하고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보다는 스스로 알아가는 과정을 제시한 것으로 보이지만-보다 적극적으로 능동적인 공부를 요구한다. 크리스테바가 언급한 불친절한 소설가들도 마찬가지다. 좀 더 공부한 뒤에 이 책을 다시 만난다면 어떨까 기대가 된다. 전반적으로 어려웠지만 크리스테바가 내게 남긴 지문指文이 앞으로 공부하는데 또 하나의 지도가 되어주길 바란다.
크리스테바의 다른 책들. 그리고 셀린의 소설을 꼭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