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젝트가 되는 것은, 부적절하거나 건강하지 않은 것이라기보다 동일성이나 체계와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에 더 가깝다. 그것 자체가 지정된 한계나 장소나 규칙들을 인정하지 않는데다가 어중간하고 모호한 혼합물인 까닭이다. 반역자, 거짓말쟁이, 양심을 속이는 일, 파렴치한 강간자, 구하는척하면서 살해하는 자……… 이 모든 범죄는 법의 취약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아브젝트일 수 있다. 게다가 사전에 계획한 범죄나 음흉한 살해, 선의를 가장한 복수는 그것이 취약한 법을 노리기 때문에 훨씬 더 아브젝트에 가깝다. 그러나 도덕을 거절하는 것은 아브젝트가 아니다. 왜냐하면 도덕을 거절한다는 것은 도덕에 대한 관념이 부재하거나, 법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반항 · 자유주의 · 자살적인 범죄처럼 모종의 위대성을 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아브젝시옹은 도덕을 알면서도 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어서 훨씬 더 음흉하고 우회적이며 석연찮은 어떤 것이다.  - P25

이때부터 기호는 코라와 코라의 영원한 회귀를 억압하는 것이다. 오로지 욕망만이 이 ‘기원적인‘ 싸움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욕망은 자아를 또 다른 주체로 쫓아보내고, 더 이상은나르키소스적인 자아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르시시즘은 타자의 뒤로 처져서 퇴행으로 나타나거나, 아니면 스스로생각하고 보존하며 자기 만족하는 장소를 향해서만 돌아올 수 있다. 사실상 이 나르시시즘은 결코 평화로운 샘물에 비친 완벽한 그리스 남신상만은 아니다. 바닥을 뒤흔드는 충동의 갈등이 물을 흐려 놓고, 주어진 기호 체계를 위해 그것에 통합되지 않는 모든 아브젝시옹을 끌어당긴다.
결국 아브젝시옹이란 일종의 나르시시즘의 위기이다. 즉 아브젝시옹만이 ‘나르시시즘‘이라 불리는 이 상태의 덧없음을 증언하며,
신은 비난하는 질투로 그 사실에 침묵한다. 게다가 아브젝시옹은나르시시즘(사물이나 개념에 대한)에 외관‘을 부여한다. - P39

공포증이 사라지지 않고 말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두번째 이유는 공포의 대상이 원초적 글쓰기이고, 뒤집어 말하면 모든 말의 연습이 글쓰기에 대한 것일 때는 공포에 대한 언어에 다름 아니기때문이다. 나는 기호와 주체와 대상을 각자의 자리에 위치시키는그와 같은 결핍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 언어는 결핍의 저편에서사람들이 욕망과 의사소통에 대한 사회적인 계약 속에서 서로 주고받는 대상이나 전언, 욕망의 언어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결핍이나 공포의 언어는 그곳에 다가서고 그것의 경계를 짓는다. - P72

작가란 겁에 질려 죽지 않기 위해, 그리고 기호들 속에서 부활하기위해 은유화 작업을 성공시키는 공포증 환자에 다름 아니다. - P73

최초로 금한 음식물이 인간에 의해 위반된것에는, 여성과 뱀의 유혹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왜냐하면 <레위기>에서 후일 가증한 것으로 치부한 예가운데서도 우연히 여성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J. 솔레르가 지적하였던 것처럼, 음식물은 인간과 신 사이를 최초로 분할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 P150

금전이나 금송아지상들과 마찬가지로 《성서》의 텍스트에서 버려야 될 것으로 추측되는 아브젝시옹의 절정은 시체이다.  - P166

모두가 알고 있는 것, 즉 비천하고도 대중적이며 인류학적인 모든허위 속에 자리잡은 비밀의 장소, 셀린은 바로 그같은 것들이 진실이며, 유일하게 진정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믿게끔 한다. - P204

사회적으로 정당화된 환상 속에 주체를 위치시키는 한 그것은 하나의 난간이다. 착각, 그 속에서 우리는 원한다면 사회 현상의 전개와 다양한 합리화를 알게 된다. 즉 문학적으로 말하건대, 착각은미쳐 가는 것을 막아 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학이라는 것, 즉 동일화 과정의 횡단을 위협하는 미쳐 버린 심연을 펼쳐 보이기 때문이다…………. - P207

삶을 주는 자이면서 삶을 빼앗는 자, 이렇듯 셀린의 어머니는 또한 아름다움과 죽음이 결합하는 야누스이다. 아름다움과 죽음의 결함이야말로 글쓰기의 조건이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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