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저는 이를 본다고 불쾌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신적 절름발이를 대하노라면 짜증이 인다.

다리가 불편한 이들은

나머지 다른 이들이 바르게 걷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마음을 저는 이들은 상대가 절뚝인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 블레즈 파스칼, 『팡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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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 패러다임, 법 - 규칙은 어떻게 세계를 만드는가
로레인 대스턴 지음, 홍성욱.황정하 옮김 / 까치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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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년 영국의 과학철학자이자 후에 대법관까지 역임한 프랜시스 베이컨은 새로 재무부 남작에 임명된 존 데넘 경에게 다음과 같은 임무를 지시했다. “그대는 무엇보다도 국왕의 특권을 지켜야 하는데, 국왕의 특권과 법은 서로 다르지 않고 국왕의 특권이 바로 법이고 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법에서 가장 우선하는 것이므로, 그대는 대권행위를 지키고 유지함으로써 곧 법을 지키고 유지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하오.”(334) 베이컨의 이 지시는 당시 법에 관한 한 가지 인식을 잘 보여준다. 소위 국왕의 “대권행위”는 법보다 우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이 17세기의 이상을 21세기에 온몸으로 구현하는 반역자들을 목격했다.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은 통치 행위로서 그것이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제한사항들을 얼마든 어기더라도 정당하다는 대통령 변호인들과 여당의 궤변, 그리고 자기의 임무는 대통령을 경호하는 것이기에 사법부에서 발부한 영장도 얼마든지 무력을 동원해 거부할 수 있다는 왕조시대 호위무사에게나 걸맞은 의식을 가진 대통령 경호처(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기관)의 책임자들.(+ 그 외 온갖 모지리들)


여기서 우리는 법의 지위, 성격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읽어낼 수 있다. 법(조문에 쓰여 있는 글씨의 내용)은 어떤 경우에도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일까, 법은 모든 상황을 충분히 다 고려하고 있는가(또는 그럴 수 있는가), 나아가 이런 법을 포함한 규칙이라는 것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또 그 내용은 어떻게 변해왔을까. 이 책은 이런 질문들과 함께 규칙의 역사에 관한 연대기적 연구를 담고 있다.





사실 책 제목 때문에 정작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한참 헤맸다. 알고리즘과 패러다임, 그리고 법은 규칙이 갖는 서로 다른 양상들을 가리킨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는 “규칙”하면, 사람의 개입이 들어설 여지가 별로 없이 그저 기계적으로 따르면 되는 무엇으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애초의 규칙은 그런 식으로 형성되지 않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가장 이른 시기 규칙은 어떤 사람이 따라야 할 ‘모델’을 가리켰다. 모든 면에서 그것을 닮을 것을 요구받지만, 대상을 완전히 모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컨대 초기 규칙서 중 하나인 베네딕투스 수도원 규칙서에는 수도사들이 따라야 하는 수십 가지의 규정과 그 이상의 세부사항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규칙서로도 수도사들의 모든 행동을 규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수도원장들에게 굉장히 높은 수준의 재량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그는 상황을 살펴서 규칙서의 예외적 상황들을 분별하고 허용해야만 했다. 그 당시의 규칙이란 규칙서라는 규정만이 아니라 수도원장의 재량까지도 포함하는 것, 일종의 패러다임이었다.


알고리즘이라는 용어도 원래 의미와는 많이 달라졌다. 알 콰리즈미라는 이름의 아랍 수학자의 이름에서 온 이 단어는, 오늘날에는 어떤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명확한 명령어들의 기계적 집합 정도로 여겨지지만, 애초에 이 단어는 그 계산은 물론, 그 계산을 수행하는 인간들을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이건 20세기까지 “컴퓨터”라는 단어가 계산을 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을 가리켰던 것을 떠올리게도 한다.(영화 “히든 피겨스”를 참고하라. 명작이다.)





저자는 언뜻 기계적이고, 완벽할 것만 같은 “규칙”이라는 것에, 실은 얼마나 많은 예외적 상황과 판단이 개입될 수 있는지를 오랜 역사적 추적을 통해 잘 보여준다. 하나의 규칙이 받아들여지는 과정은 지난한 시행착오와 반발, 그리고 전국가적인 교육과 계몽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현대국가에 법치주의라는 이상을 정착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했는지.


그런 차원에서 최근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탄핵 심판을 받고 있는 대통령과 폭동까지 저지르면서 그런 대통령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반란 옹위세력들의 움직임은 굉장히 우려스럽다. 우리는 법치주의가 꽤나 안정적이라고 착각하지만, 그건 그 사회 구성원들 대다수가 그 체제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고 있을 때만 작동할 수 있는 섬세한 체제다. 대통령부터 나서서 사법부의 영장조차 거부하는 식으로 법을 무시하고, 나아가 메뚜기 같은 폭도들이 날뛰기 시작하면 그 안정적이라고 느껴지던 체제도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지난 20세기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일들은 수도 없이 일어나곤 했다.


우리는 때로 상식에 맞지 않은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을 보면서, 차라리 판사들을 AI로 바꾸는 게 낫겠다는 식의 말을 할 때가 있다. 판결을 온전히 기계적 결정의 영역으로, 그러니까 알고리즘으로 치환하고 싶다는 의미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것은 불가능하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 법과 규정은 그런 식으로 구성되거나 작동되는 게 아니니까.


뭐든 깊이 들어가 보면 애매하고 모호한 영역이 잔뜩 나타난다. 그건 물리학에서 양자라는 별종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과정인 것 같다. 덕분에 책을 읽어나가는 게 쉽지는 않다. 특히나 제목 탓(?)도 좀 있는 것 같은데, 제목만 보고서는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짐작도 안 갈 뿐더러, 책의 구성 자체도 각 장의 내용은 이해가 되는데 장별로 어떤 연계를 지니고 있는지가 눈에 잘 안 들어온다. 다 읽고 나면 이게 규칙의 역사에 관한, 하지만 크게 보면 연대기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일종의 장별 옴니버스식 구성이라는 걸 알게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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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서 중요한 점은 결정 사안들이나 후보들이

어떤 선택 절차를 거쳐 투표에 회부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시민들 모두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경우에는

평범한 시민들이 투표로 부칠 사안들에 대해 전혀 발언권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민주주의 도시국가라고 보기 힘들었다.

반면 아테네에서는 그와 같은 사안들에 대해

시민들이 직접 발언권을 가졌다.

폴 우드러프, 『최초의 민주주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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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버포스 믿음의 글들 395
윤영휘 지음 / 홍성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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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 이후 대한민국의 정치와 사회, 문화 전반에는 엄청난 혼란이 시작되었다. 평생 책임이라는 걸 제대로 져본 적 없는 덜 떨어진 정치 지도자가 시도한 친위 쿠데타는 곧 헌법(의 규정에 따라 계엄해제 요구안을 통과시킨 야당 주도의 국회)의 요구에 따라 진압되었지만, 거의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탄핵된 대통령은 여전히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기 위한 궤변을 남발하고 있고, 심지어 국회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여당마저 쿠데타를 옹호하며 온갖 뻘소리의 저급한 수준을 날마다 갱신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맘 때면 늘 등장하는 양비론자들은 대통령과 여당은 물론 야당도 공동 책임이 있다는 식의 물타기를 시전하는데, 자칭 중립을 가장하는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그냥 내란수괴와 그 옹호세력의 책임을 은근슬쩍 희석시키려는 교묘한 정치적 선동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런 식의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는 모두까기 평론들이 남발되면서 자연히 정치라는 영역 자체에 대한 회의감, 불신, 적대감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스며들고 있다는 점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정치란 그렇게 그냥 버리면 그만인 영역에 불과할까? 물론 그렇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수많은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의 영역도 늘 우리의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기도 하고, 때로 흑과 백의 경계가 모호한 그런 문제들도 있다. 합의라는 기초 위에 진행되는 민주적 정치구조 안에서는 혼자만의 돌출행동으로 무언가를 해내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에, 다른 사람들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양보는 상시적으로 요구된다.


이 모든 특징들이 우리가 정치라는 영역을 이해하는(수용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때문에 너무나도 쉽게 사람들은 극단적인 입장에 줄을 서곤 한다. 선명해 보이고, 무엇보다 과격한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목적한 바를 이뤄주겠다는 달콤한 폭력의 맛에 취하는 거다. 과연 정치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새해 홍성사에서 처음으로 낸 이 책은 제목에 실려 있는 유명한 영국의 한 정치인의 생애를 정리한 전기다. 18세기 후반 시작된 노예무역폐지 운동의 기수였던 윌리엄 윌버포스의 이야기다. 부유한 상인 가문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살던 그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인생의 항로를 결정적으로 수정하기로 마음먹는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 기관인 의회에서 일하기로 결심한 그는 하원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어 의원직을 시작한다. 그의 의원직 수행 방식은 매우 독특했는데, 휘그당과 토리당이 맞서는 의회 구도 가운데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파로서 직무를 수행했고, 심지어 대학 동기이자 절친인 피트가 수상이 되었을 시절에도 내각에 들어가지 않은 채 때로는 정부를 견제하기도 하고, 필요한 경우 협력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했다.


윌버포스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업적인 노예무역금지법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의 주도로 제출한 열한 번의 법안이 상원 또는 하원에서 부결되었고, 개인적인 음해와 물리적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 기간이 거의 20년이었으니, 하나의 선을 이루기 위한 한 사람의 열정에 자연히 경의를 표하게 된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수없는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윌버포스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앙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따라간다고 여겼기에, 그 과정에서 겪는 방해와 공격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는 단순히 기독교인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국가의 도덕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해 왔던 인물이고, 이 과정에서 사용한 수단도 그 이상에 부합하는 방식을 취하려고 애써왔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정치인이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싶지만 현실은...


물론 윌버포스가 살았던 시대와 오늘은 분명 다르고, 당시의 정치적 제도나 관행, 의회의 운영 방식 또한 오늘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시대의 방식을 그대로 가져와야 한다는 건 무리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참된 정치인의 모습은, 정치에 대한 환멸이 선을 넘을 것 같은 이 즈음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게 한 권씩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물론 태반은 읽어보지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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