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신학 - 하나님의 사업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성경적 지침
폴 스티븐스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크리스천 창업가들과 교제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 스타트업 대표들과 함께 독서모임도 시작했는데, 그 모임에서 읽을 책을 찾던 중에 전부터 눈여겨보던 폴 스티븐슨이라는 저자를 선택했다. 사실 잘은 알지 못했었고, 어느 인터뷰에서 그가 했던 말 한 구절을 적어둔 게 있었는데, 그걸 기회로 이 책을 만나게 됐다.


일터 신학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크게 보면 일과 직업의 영역에서 어떻게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에 관한 내용이지만, 좀 더 좁게 들어가면 사업가들에게 주는 조언으로 채워져 있다. 그야말로 이번 모임에 딱 맞는 책이었던 것.





책은 크게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반부인 1부에는 “의미”라는 제목이 붙어있는데, 비즈니스라는 영역에 담긴 기독교적 의미에 집중하고 있다. 저자는 여전히 교계에 남아있는 성속 이원론적 관점을 비판하면서, 오히려 “사업이야말로 가난한 자에게 다음 끼니를 제공할뿐더러 새로운 부를 창출하게 함으로써 가난을 극복하게 돕는 최상의 장기 전략”이라고 말한다(25).


저자는 사업은 더 거룩한 어떤 일을 지원하기 위핸 도구적 가치만 지니는 것이 아니라, 사업 그 자체가(일을 만들고, 고객을 상대하고, 직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등의 그 모든 제반 업무가) 하나의 거룩한 일, 나아가 소명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점에서 저자는 모든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는 오래된 기독교 전통에 맞닿아 있다.


후반부에는 “동기”라는 제목이 붙어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하면 이제 사업이라는 영역을 기독교적으로 해 낼 수 있는지, 여기에 필요한 영적 조언들이 담겨 있는 부분으로 느껴졌다. 때문에 신학적인(또 성경적인) 접근이 자주 보인다.


저자는 사업이라는 영역이 워낙 바쁘게 돌아가기에 정기적으로 잠시 뒤로 물러나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또, 진실함과 창조성, 거룩함을 드러내는 사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제안한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이라면, 책에서 하는 말이 그리 어렵지 않게 다가올 것 같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온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보고, 타락으로 인해 훼손된 원래의 창조 목적을 회복하는 것을 주요 과업으로 삼는다. 이 과정에서 특정한 종류의 신성한 일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다시 사람들에게 일깨워주었고.


물론 최근에는 목사와 선교사가 하는 일이 가장 거룩하고, 교회의 제단에서 하는 일만이 신성하고 하는 식의 극단적인 이원론을 고수하는 신자들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바른 신학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오히려 거룩의 영역을 지워버리는 세속주의자들이 득세하면서 나타난 결과인 경우가 좀 더 흔하다. 결과는 비슷해 보이지만 둘은 전혀 다른 매커니즘이다.


맨 처음 말했던 모임에서 함께 교제할 기회를 누리면서, “사업의 영역에서 신앙으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있구나, 그것도 나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팔팔한(?) 분들이” 하는 놀라움이 컸다. 그들이 신앙과 일터를 통합하는 관점에 얼마나 갈급해 있는지도 와 닿았고. 이 책은 바로 그런 독자들에게 꽤나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좋은 신학적 바탕 위에 비즈니스라는 영역을 훌륭히 녹여냈다. 무엇보다 저자 자신이 일터의 영역에서 오랫동안 일해 왔다는 경험도 여기에 한 몫을 했을 것 같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다의 문들 - 상처입은 세계와 하느님의 구원 비아 제안들 시리즈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지음, 차보람 옮김 / 비아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에 가득한 악과 고통이라는 문제는 신앙에 도움이 될까, 아니면 신앙을 부정하는 동기가 될까. 이에 관해 세속주의자들은 모순되는 두 가지 입장을 보통 주장하곤 한다. 그들은 (한 번도 확인된 적이 없지만) 고대의 원시인들이 천둥이나 번개 같은 두려운 자연현상을 보고 신앙심이 생겨 종교를 만들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오늘날 일어나는 같은 현상들을 보면 세상을 다스리는 (선한) 신이라는 개념은 유지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정확히 같은 현상이 정 반대의 두 가지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이 모순적 입장에서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는 태도는 종교(와 신)은 아무 것도 아니며, 우연히 만들어졌지만 이제는 더 이상 쓸모없는 개념이라는 논지다. 이 입장의 가장 큰 약점은 종교의 기원에 관한 그들의 설명이 증명되지 않은 신화적 설명이라는 점이고, 또 다른 약점은 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현대에도 여전히 신앙을 갖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악과 고통이라는 문제는 선하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나아가 실천적 차원에서의 질문을 제기해 온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는 팔레스타인의 한 구석에서 시작되었을 때부터 다양한 박해에 노출되어 있었고, 당연히 이런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일관된 논리적 구조가 필요했을 것이다. 또, 기독교회에 대한 외부의 비방과 논리적 공격에 맞서 자신들의 신앙의 정당성을 설명하고자 했던 그리스도인들도 있었고.


신정론이란 이 과정에서 생산된 다양한 신학적 논리들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종류의 신정론들이 있었는데, 그 핵심은 악과 고통의 문제와 선하신 하나님의 통치(섭리)라는 주제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대 로마제국의 쇠퇴기, 기독교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비난자들에 대항해 최초의 역사신학적 논리를 정립한 아우구스티누스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신정론을 다룬다. 책의 볼륨 자체가 작기도 하고, 읽다 보면 곧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애초에 책의 배경이 되는 글은 저자가 한 신문에 기고했던 칼럼이기도 해서(이 칼럼을 확대하고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 게 이 책이다), 전반적인 논지가 복잡하지는 않다.


저자는 이 책에 두 가지 전선을 설정한다. 첫 번째 전선은 세속주의자들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그어진다. 그들의 공격은 앞에서 언급한 내용과 같은데, 이 세상에 이렇게 악과 고통이 가득하다면 전능하면서도 선한 신은 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는 식이다. 신이 선하다면 세상이 악과 고통에 시달리도록 내버려둘 리가 없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걸 보면, 그런 능력이 없거나, 애초에 그럴 의사가 없다는 식.


하지만 저자는 이런 식의 사고를 신인동형론적 발상에 근거한 허수아비 때리기에 불과하다고 답한다. 신을 인간적 차원에서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과 잣대로 그의 선택과 행동을 평가할 수 있다는 가정과,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보고 있는 물리적 우주에 국한되는 것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그들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 딱 자기들 수준의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공격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저자는 “유물론자는 누군가가 부당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일종의 주술적 사고에 사로잡혀, 현실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도덕적 질서가 없으니 물질의 인과 관계를 초월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즉각적으로 결론짓는다”고 말한다.


또 하나의 전선은 흥미롭게도 동료 그리스도인과의 사이에 그어진다. 이들은 악과 고통의 문제에 관해 하나님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지나치게 성급하고, 많은 말을 내뱉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이들이 악과 고통이 어떤 식으로는 하나님의 더 큰 선을 이루는 데 필요한 일이라고 말할 때 커진다. 이렇게 될 때 악과 고통은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가 되어 버리고, 그렇게 되면 애초의 목적과 다르게 하나님을 악의 원인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저자의 이 두 번째 전선의 하위 전선이 이른바 칼뱅주의와의 사이에 그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중예정(구원받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모두가 예정되어 있다는 주장)과 제한 속죄(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을 받을 사람들을 위해서만 죽으셨다는 주장)라는 교리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 위한 논리적인 결론으로 나온 것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위와 같은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


저자는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 죄와 죽음의 역사,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영원히 의지하신다는 말과, 하느님은 영원부터 피조물을 선하게 청조하셨으며 악조차 은총이 작용하는 계기가 될 정도로 만물이 선을 향하도록 질서를 잡으심으로써 피조물들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선을 이루신다는 말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진정한 섭리란 후자 쪽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답한다.






두 개의 전선에 걸쳐 저자가 하는 비판은 곱씹어 들을 만하다. 유물론자들이 감정적 논증에 빠져있다는 주장과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나머지 영역을 희생시키고 있다는 주장은 모두 일리가 있다. 둘 모두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한 효과적인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책에는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최근에는 과정신학이라는 도구로 이 문제를 접근하려는 사람들도 보인다. 그러나 이쪽은 하나님의 주권을 희생시켜 악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또 다른 문제를 갖고 있다.


그러면 저자의 대답은 무엇일까? 저자는 악과 고통에 어떤 종류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신학적 이론에 단호하게 반대한다. 여기에는 악은 선의 결핍이라는 전통적인 신학진술이 배경에 있다. 나아가 성경에서 죄와 악이 어떤 식으로는 선을 이루는 필수 조건이라는 뉘앙스조차 없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오히려 복음은 악과 그 결과인 죽음의 극복, 아니 전복임을 강조한다.


물론 이 대답은 앞서 제기된 문제에 대한 완벽하고 매끄러운 논리적 논증은 아니다. 다만 저자는 하나님을 제1원리로 인정하되,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분의 적극적인 결정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제안을 한다. 이와 관련해서 (아마도) C. S. 루이스 역시, 하나님이 매순간 우주의 원자들을 가지고 저글링을 하신다고 믿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던 게 떠오른다.


여기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매듭들이 보인다. 저자 역시 이게 “누군가의 눈에는 궤변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인간이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에 관한 고찰이라는 점에서, 신학에는 “신비”의 영역이 있는 법이고,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는 부분이 분명 존재하지 않을. 또, 여기에는 저자의 신학적 배경인 정교회의 분위기도 살짝 묻어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저자가 좀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건 두 번째 전선이다.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당혹스러운 발언들이 우리를 늘 더 힘들게 만드는 것처럼. 그리고 악과 고통, 큰 재앙 앞에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저자의 진짜 대답은 어쩌면 입을 좀 다물고, 주제넘게 설명하려고 하지 말자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아는 척을 하려다 스스로 실책을 하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님의 수수께끼가 사람의 해답보다 더 만족스럽다
G. K. 체스터턴 지음, 이은진 옮김 / 비아토르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몇 번인가 고백(?)했던 것처럼, 체스터턴의 글을 본격적으로 읽고자 했던 건, 그의 글이 C. S. 루이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걸 알고 나서였다. 물론 어린 시절 브라운 신부가 등장하는 추리소설 작가로 알고는 있었지만, 최근 아바서원에서 나온 두 권의 책을 보면서 확실히 내공이 상당한 작가라는 걸 깨닫고는 어서 또 다른 책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은 체스터턴이 다양한 자리에서 썼던 글 중 인상적인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책 표지에도 아포리즘이라고 적혀 있는데, 물론 그 말처럼 아주 짧은 한두 문장만 실려 있는 페이지도 있지만, 한 페이지 가득한 글들도 있어서 정확히 아포리즘이라고만 부르기엔 살짝 어색하다. 하지만 그런 이름표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책에 실려 있는 내용만 좋으면 그만이지.


페이지를 몇 장 넘기지 않았을 때부터 확실히 보통이 아니라는 느낌이 온다. 연신 손에 들고 있는 포스트잇을 붙여대다 보니 금세 떨어져 버렸다. 세상에 관한 탁월한 분석과 적당한 비판적 거리감, 그리고 깊은 신앙적 통찰까지, 체스터턴의 다양한 매력을 경험할 수 있는 책이다.


사실 앞서도 언급했던 체스터턴의 두 권의 책(“정통”, “영원한 사람”)이 어느 정도 그의 글쓰기 방식의 특징들(짙은 반어적 유머 같은)을 이해하고 나서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는 진입장벽 비슷한 게 있다면, 이 책은 그런 것 없이 체스터턴이라는 인물의 생각을 즐겁게 읽어나갈 수 있도록 안내해 준다.






책의 긴 제목은 여기에 인용해 놓은 한 글 속에 등장하는 문구이다. 일단 확실히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포인트를 잘 잡아냈다 싶긴 하지만, 너무 길긴 하다. 그래도 또 생각해 보면 은근 책 전체를 엮어낼 만한 부분도 없지 않아 느껴지기도 하고.


책을 읽고 나면 자연히 체스터턴의 다른 책들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다만 아쉽게도 국내에는 추리소설류를 제외하면 겨우 세 권쯤만 보인다. 루이스의 책을 모두 읽고, 반복 읽기를 계획하고 있는 이즈음, 괜찮은 광맥을 발견한 광부가 된 느낌이라 살짝 설레기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 이름이 무엇이냐 - 사탄, 그 존재에 관하여
전원희 지음 / 이레서원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사탄’이라는 이름을 한 번쯤 듣게 된다. 공동체의 성격에 따라 좀 더 자주 듣거나, 가끔 듣거나 하는 차이는 있겠지만. 소위 순복음 계열의 교회들에선 우리의 일상의 세세한 부분에도 사탄이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여길 수도 있고, 반대로 현대주의적 사고에 익숙한 계열이라면 성경 본문에 나오는 사탄이라는 용어를 상징적으로 읽으려고 애쓸 것이다.


사실 성경 본문에서 사탄의 존재는 생각만큼 선명하지 않다. 그 기원에 관한 설명으로 자주 사용되는 에스겔서의 문학성 짙은 구절들처럼(의외로 이 책에서 그 부분은 다루지 않는다), 본문들은 사탄의 정체에 대해서는 별 단서를 주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애초에 그 언급도 그다지 잦은 편이 아니다.


상황이 이러니 이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것부터가 왠지 곤란해진다. 아는 게 부족하니 그 부족한 자리를 다양한 상상력이 채우곤 한다. 사탄의 능력과 영향력에 대한 온갖 소설들이 난무하게 된다. 당연히 이런 것들은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이 책은 신구약 성경 본문과 중간기 문헌 속 사탄에 대한 언급들을 뽑아 종합해 놓은 작업물이다. 저자에 따르면 사탄에 관한 초기 언급인 스가랴서에서 사탄은 제한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하나님은 사탄이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못살게 구는 것을 강한 어조로 책망하신다.


하지만 욥기에 이르면 사탄은 좀 더 적극적으로 세상의 문제에 개입한다. 물론 이 때도 하나님의 제한 아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런 경향은 역대기에 이르면 좀 더 강해져서 사탄은 거의 독립적으로 다윗을 충동해 인구조사를 하게 만드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니까 구약 성경 안에서 사탄이라는 이미지가 점점 독립성을 갖는 존재로 발전되어 왔다는 주장이다.


교회에서도 구약의 이런 이미지는 대체로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사탄은 하나님의 제한을 받는 존재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로 묘사된다. 때로 사탄은 세상을 다스리는 자로, 그리고 성도를 악으로 꾀어내는 존재로 여겨지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에 의해 제압되고 만다.





언젠가 말했듯이 내 기준에 좋은 책은 어떤 내용을 아주 잘 정리해 놓거나, 생각지 못했던 통찰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굳이 따지자면 전자 쪽에 속할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면도 몇 가지 보이는데, 우선 저자가 구약 성경 속 사탄 개념의 발전으로 언급한 구절이 겨우 세 구절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 세 구절로 정말 구약 시대 유대인들의 사탄에 대한 관점이 발전해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중간기 여러 문헌들에 나오는 사탄과 그것을 가리키는 다양한 이름들을 정리, 소개한 부분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다만 그런 나열식 소개가 책의 전반적인 논지를 강화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약간 회의적이다.


사실 책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지는데, 1부에서는 사탄 개념의 이해를 시간적 순서대로 설명하는 부분이고, 2부는 갑자기 축귀사역, 즉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으로 넘어간다. 그리고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실제로 경험하긴 했으나, 자선을 베풀고 섬기는 것으로 예수의 삶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알았을 것이라면서, 오늘날에도 그들을 따라 제대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론을 짓는다.


내가 이해를 제대로 못한 게 아니라면, 여기엔 제대로 된 논리적 긴밀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냥 저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얼기설기 늘어놓다가 급히 결론을 지은 느낌이랄까. 저자가 결론부에서 주장하는 삶의 중요성을 부정한다는 게 아니라, 그저 이 책 전체의 결론으로 이런 내용이 나오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었던 작업물이었다. 물론 결론의 어색함을 빼더라도 참고자료로서의 기능은 여전히 할 수 있으니까.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원전 속 기록들을 정리해 둔 부분은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현대 저자들(가끔 이 사람이 이 분야의 전문가 맞나 갸우뚱 한 경우가 보인다)의 해석을 늘어놓은 부분보다 좀 더 가치가 있다고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하는 사도 바울의 사회적 배경과 맥락 - 천막짓기와 사도직 신행신학 시리즈
로널드 F. 호크 지음, 이성하 옮김 / 알맹e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기 기독교 시기 가장 유명한 전도자였던 바울은 텐트메이커였다. 천막을 만드는 일로 자신의 사역에 필요한 경비를 스스로 충당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이를 당대 랍비들의 전통 중 하나로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 전통을 따라 텐트를 만드는 기술을 배웠고, 틈틈이 일을 하긴 했지만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한 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좀 더 “고상한 일”이었을 것이라는 생각. 이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조금 깊게 들어가 보면 이상한 부분이 하나둘 나온다. 바울은 얼마나 텐트를 만드는 데 시간을 할애했을까?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복음 전도가 우선이었고 텐트메이킹이 부업이었다면, 그 정도로만 일을 해도 정말 생계유지가 될 정도로 그 일은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었을까?





이 책은 바울의 그 “부업”을 거의 “주업”의 자리로 끌어올린다. 당연히 이 과정은 세밀한 당대의 여러 문헌들에 대한 조사를 통해 구축된다. 우선, 랍비들이 따로 직업을 가지는 전통은 바울 시대 이후에 생겨난 것(아마도 예루살렘 함락과 그로 인한 경제적 곤궁에서 탈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무언가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생계를 위한 직업을 따로 갖는 전통은 오히려 그리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물론 이게 절대적인 모습은 아니지만(수업료를 받거나, 유력자에게 의지하거나 심지어 구걸을 하기도 했었다), 분명 여러 그리스 교사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한 일을 갖곤 했었다.


또, 그렇게 그들이 생계를 위해 일하는 작업장은 철학 강의나 토론을 위한 장소로도 사용될 수 있었다. 특히 텐트를 만드는 일처럼 시끄럽지 않은 공간은 더더욱 이런 강의실로서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밤낮으로 일하고 있다(cf. 살전 2:9)고 말한다. 저자는 이것이 단순히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이른 아침부터 나가 일을 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전도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즉 바울의 “일”은 그의 사역의 중심에 있었다.


단지 실용적 차원에서만 “일”이 중심이었던 것은 아니다. 바울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값없이 주었다(cf. 고후 11:7)"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었다. 그의 “일”은 복음의 본질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는 말이다.





전체적으로 볼륨이 작은 책이었지만, 꽤나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바울은 일을 하는 바울과 같은 인물이었다. 하루 종일 성경책만 파면서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식의 사역은 적어도 성경에 나오는 형태는 아니었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목회자 이중직” 논란도 한심한 잡담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다른 일로부터 분리시켜 무슨 특별한 아우라라도 덧씌우려는 태도는 성경적이라기보다는 중세적 사고에 가까웠다.


여전히 몇몇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웬만한 중견기업 대표 못지않은 풍요로움을 누린다. 반면 절대 다수의 목사들은 말 그대로 생계의 위협을 느끼는 상태고. 이런 상황에서 목회자가 이중직을 해도 되니 마니 하는 소리는 말 그대로 배부른 자들의 훈장질에 가깝다.


바울은 당대의 사회, 문화적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걸 성경을 통해 보는 우리는, 단지 바울의 행동을 따라할 것이 아니라, 바울이 했던 고민을 오늘의 상황에 맞춰 하면서 고민하고 선택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새롭지만 오래된 고민을 하는 데 이론적인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