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주의자 마리아 - 그때는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시작된다
안정혜 지음 / IVP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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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잘못된 처우들을 엮어 이야기로 만들어 낸 책이다. 교제하던 전도사가 그루밍 성범죄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파혼하고 비혼주의를 결심한 마리아가 중심에 있긴 하지만, 마리아가 동생과 함께 참여하게 된 독서모임 안에서도, 상대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고 함부로 말을 내뱉는 사람들로 인한 모욕감과 성범죄 미수건들의 사례들이 보고된다. 그리고 이와 함께 독서모임이라는 틀을 이용해 바울서신 속 여성에 대한 신학의 정당성을 묻는 작업도 진행된다. 제법 묵직한 내용.

 

 

     작화를 하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겪은 문제를 적은 인물들 사이에 온전히 몰아넣은 느낌이 있다. 이는 일종의 착시효과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나쁜 것은 더욱 나쁘게, 좋은 것은 실제보다 훨씬 더 좋게 보이도록 만드는 식이다.(물론 이 경우에는 전자 쪽에 가깝다

 

     ​예를 들면, 말을 함부로 내뱉는 사람은 상대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가리지 않고 멋대로 지껄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인지라(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내뱉은 말이 성희롱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가 특별히 여성비하하는 사람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 각 교단의 헌법에는 단지 성범죄만이 아니라 절도니 강도니 하는 다양한 종류의 범죄를 저지른 이에 대한 구체적인 처벌규정도 없다. 어차피 교단법이란 행정적 조치에 관한 규정이 대부분이고, 사회법과는 달리 일일이 세부실행규정을 정하지 않고 그 때 그 때 처리하는 형식을 취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들을 한 데 모아 놓으면 모든 문제가 교회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비취게 된다. 오해하지 말 것은, 이 말이, 작가가 묘사하고 있는 일들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도, 그것이 가볍다는 뜻도 아니라는 점이다. 분명 여기에서 고발되고 있는 문제들은 시급히 처리해야 하는 악이 분명하다. 그러나 악을 지적하는 것과 그 악을 모아 어떤 이들을 괴물로 만드는 것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존재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고발하는 목소리를 막으면 안 된다.

 

 

     ​사실 보다 근본적으로 아쉬운 건, 교회 안 남자들을 괴물로 만들지 않고서는 교회 안 여성에 대한 신학적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을까 하는 부분이다. 처음부터 이쪽으로 초점을 맞췄다면 내용이 훨씬 더 건조해졌겠다 싶기는 하지만. 사실 이 부분에 관한 논의는 좀 더 활발하게 이루어졌어야 했다. 눈치를 보면서 한 없이 결론을 미루는 사이에, 우리는 여성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요구해야 하는 상황까지 떨어져 버렸다.

 

     ​교회 안까지 이어지고 있는 뿌리 깊은 여성차별적 용어들과 남녀의 직분 사이에 그어져 있는 선들, 그리고 성경 속 특정한 구절에 관한 비역사적, 비문법적 해설과 그로 인한 차별의 가중 등등, 교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사뭇 많아 보인다. 물론 그 이전에 이 작품이 지적하는 것과 같은 범죄들부터 제대로 처리해야하겠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의 논의가 고작 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한탄스럽다. 1세기 혁명적인 공동체였던 교회가, 이제는 고리타분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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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온유 2019-09-03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회 남자들을 괴물로 만든 부분은 없던 것 같고, 오히려 책에서 가해자가 교회에서 당당하게 다니는 것은 아닌것같다는 생각으로 성별 상관없이 힘을 모았습니다. 가해자가 남성이었기에 그렇게 생각하신 것 아닌가요? 대부분의 교회성범죄가 남성이라고 ‘여성‘이 남성을 괴물화했다는것은 똑같은 가해자위주 생각이신것 같은데요... 여성이 괴물화를 만든 것이 아닌데 오히려 그것도 고려하셔야할 것 같네요.

노란가방 2019-09-03 15:30   좋아요 0 | URL
네 김온유님은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본문에 책에 나오는 사건들과 관련해서 분명한 지적과 처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썼음에도
어떤 부분에서 제가 ‘가해자 위주의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저는 ‘여성이 남성을 괴물화했다‘고 쓴 적도 없는걸요.
작가가 그렇게 보이도록 구성을 했다는 의미죠.
(작가가 여성이라는 점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제가 어느 부분에서 가해자 위주의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끼셨을까요.
오히려 여성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요구하는 일이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이런 부분은 진작에 해결, 정리하고 더 나은 논의의 장으로 나아가야 했던)
교회의 논의 부족을 비판했는데 말이죠.

책의 어떤 부분을(예컨대 구성 같은) 비판한다고 해서,
그 책 전체를 비판하거나, 그 책의 핵심 주장을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작가가 지적한 문제들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과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작가가 남성을 괴물화했느냐는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요.
제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본문에 적어두었고,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본문의 주장이 왜 논리적으로 부족했는지를 밝혀주시고,
본인의 주장을(느낌이 아니고) 해주시면 보다 건강한 토론이 될 것 같습니다.
 
덕과 성품
스탠리 하우워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IVP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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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우리에게는 좀 익숙하지 않은 관례를 바탕으로 쓰기 시작했다. 바로 대부, 대자 제도이다. 서구권에서는 어린 아이가 유아세례를 받을 때 가까운 지인에게 대부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하는 관습이 있다. 이름처럼 이들은 부모처럼 아이들이 신앙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보호하고 이끌어주는 책임이 부여된다. 이런 관계는 아이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아니 평생 동안 이어지는(보통은 대부를 맡은 이가 세상을 떠나면서 종료된다)

 

     물론 이런 책임을 끝까지, 제대로 수행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그저 관례 중 하나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고. 하지만 그 대부가 스탠리 하우어워스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이 책은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동료인 새뮤얼 웰스의 아들인 로리의 대부가 되면서 매년 세례 기념일마다 아이가 갖추기를 바라는 덕에 관한 편지를 한 통씩 보내면서 시작된다

 

     사실 그 내용은 어린 아이가 읽기에 (어쩌면 성인들이 읽기에도) 한참은 어렵지만, 언젠가 아이가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때를 기대하며, 2002년부터 2016년까지, 열다섯 통의 편지(2017년에 쓴 내용은 이를 묶어 낼 책에 붙이는 후기 성격)를 매년 같은 날을 기해 보낸다. 이 꾸준함이란...

 

 

     책에서 다루고 있는 덕은 다양하다. 진실함과 인내, 소망, 정의, 한결같음처럼 충분히 예상되는 내용도 있지만, 기쁨(누가 기쁨을 덕이라고 생각했을까), 우정, 단순함 같은 조금은 이색적인(?) 덕들의 내용도 존재한다. 물론 이것들은 사실 오래 전부터 덕으로 여겨졌지만, 오늘날에는 잊혀진 것들이다.

 

     저자는 이들 덕에 대한 단순한 정의내리기와 강조에 그치지 않는다. C. S. 루이스가 자주 보여주듯,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오래된 덕의 목록을 현대의 말과 표현으로 풀어내는 데 익숙해 보인다. 예컨대 저자는 로마화 된 미국이 강한 힘으로 다른 나라들에게 제멋대로 행하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자비에 관한 설명으로 넘어간다. 전쟁의 대용으로서의 야구의 유용성을 통해 인내의 중요성을 풀어내는 기술은 꽤나 흥미롭다.

 

      물론 이 책의 장점은 단순히 현대적인 풀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각각의 덕에 관한 깊은 묵상을 통해, 이 덕들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도록 만든다. ‘거짓말을 하지 않기가 어려운 이유는 우리 삶이 알아보기 어려운 거짓말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고, ‘솔직함과 진실함을 혼동하는 관행에 대한 경고나 무기 없이 살기 위해서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조언은 관련된 내용을 오랫동안 묵상하고 삶으로 실천하기 위해 애쓴 사람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귀한 내용들이다.

 

 

     전반적으로 C. S. 루이스의 글을 읽을 때 느껴지던 분위기가 많이 묻어난다. 덕과 관련해서는 번역서 기준으로 C. S. 루이스를 통해 본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악과 도덕이나 C. S. 루이스를 통해 본 거룩한 삶정도가 떠오르고, 무엇보다 순전한 기독교3부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풀어낸 덕에 관한 내용들이 그렇다

 

     덕에 관한 기독교적 의미, 혹은 기독교적 덕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면 참고해 볼만한 책. 믿고 보는 또 한 명의 저자가 생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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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 선 하나님 - 그리스도인, 어떻게 권력을 향해 진리를 외칠 것인가
톰 라이트 지음, 안시열 옮김 / IVP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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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세기 세속주의자들은 종교라는 것이 곧 사라져서, 공룡처럼 화석으로나 남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 흔적을 박물관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들은 이런 예측을 정당화하기 위해 모든 공적인 영역에서 종교와 그 비슷한 것들이 앉을 자리를 치워버리기 시작했다. 종교는 공적인 자리에서 언급해서는 안 되는 것이 되어버렸고, 어떤 현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영역, 신념의 문제이니, 공적인 문제를 다루는 데에는 감추라는 명시적, 암묵적 지시가 내려졌다.

      물론 채 우리는 반백년이 지나기 전에 그들의 과장된 예측이 실패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종교인구는 줄기는커녕 늘어나고 있다. 출생을 통해 무슬림이 되는 이슬람 인구의 증가 속도는 놀라울 정도이고,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기독교 인구도 증가추세다. 이 책에 따르면 심지어 (기독교는 이제 끝물도 지났다고 여기는) 영국과 같은 곳에서도 크리스마스와 부활절과 같은 주요 절기에 예배당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단순히 숫자의 문제만은 아니다. 오늘날 국지적으로, 또 국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이슈들을 설명하는데 과연 종교를 빼버리는 것이 가능할까? 9.11 테러와 같은 사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재정을 어떤 영역에 써야 할지를 결정하는 문제부터 교육의 내용과 목표, 그리고 방식을 어떤 식으로 정할지 같은 영역은 분명 종교와 철학이 필요한 부분이다. 현대사회는 오랫동안 철학의 부재 상태에 놓여 있었고(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철학에 기초해 있긴 하지만 그건 그 성격 자체가 자기부정적인 철학인지라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결과 오늘날과 각은 혼란은 점점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선 이 공공신학의 성경적 근거를 밝히는 데 힘을 쓴다. 빌라도와 예수 사이에 주고받았던 그분의 나라대화 속에서, 유대인들의 나라 개념에서, 그리고 창조신학에서 하나님은 저 멀리 하늘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왕이시기도 했다. 예수는 그 하나임이 이 세상 깊숙이 들어오셨음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저자는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왕되심을 분명히 선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권력자들과 정부와 같은 권력기관들에게 진리에 관해 말하는 방식으로 실천될 수 있다. 폭력과 공포로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권력과 한 편이 될 것이 아니라 일종의 선지자적 야당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교회는 국가의 시녀가 될 것이 아니라 선지자로 서야 한다는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이 떠올랐다.

 

     ​또 이 선포는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드러나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나라의 일부 기독교인들이 하는 것처럼 특정한 정치세력과 손을 잡고 광장에 나가 막말을 내뱉는 식의 저열한 방식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어디 성경에서 말하는 행동이던가. 책에도 등장하듯 교회는 그것이 처음부터 행해왔던 이들,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고, 병자들을 치료하고, 약자들의 입장을 공감하며 불의한 사회구조에 동참하지 않는 방식의 행동을 해야 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십자가의 신정정치라는 단어를 곱씹어 볼만하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신정정치라는 말에서 느끼는 그로테스크한 권력행위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고통과 불의함을 온몸으로 감당해 냄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방식을 말한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을까?

 

 

     ​다양한 이유로 오랫동안 교회는 공공의 장에서 한 발, 한 발 물러서왔다. 일부는 역할에 대한 자신감의 부족 때문에(여기에는 포스트모더니티를 필두로 한 다양한 지적, 사상적 공격이 한 몫을 했다), 혹은 (내세에만 집중하는) 잘못된 신학 때문에, 또 그저 무관심이나 게으름 때문에 이런 후퇴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물이자 그분의 통치영역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바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이 영역을 그냥 둔다면, 엉뚱한 이들이 교회의 이름을 팔아 그 자지를 차지하려고 나설 것이다.

 

     ​특히 정치의 영역은 그리스도인들도 한 명의 시민으로써 당연히 참여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이 임무는 단지 몇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선거일에 투표를 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저자의 지적 또한 기억해야 둘만 하다. 공적인 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제대로 된 역할을 생각해 보게 만드는 좋은 독서시간이었다. 겨우 한 번 가지고는 안 될 것 같고,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

. 책 후반부는 문장들이 좀 난해하다. 번역의 문제도 약간 있었던 것 같고, 어쩌면 원문 자체에 문제가 있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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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함께한 복음서 여행 - 내 깊은 갈망의 답을 찾아서
데이비드 그레고리 지음,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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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와 함께 한시리즈의 최근작이다.(그래도 번역서가 나온 지 2년이 다 되어서야 보게 됐다) 전작인 예수와 함께 한 저녁식사2’가 워낙에 좋은 책이었지만, 그에 앞서 나왔던 세 권의 다른 책들 역시 좋은 주제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기술이 돋보이는 건 마찬가지였으니, 새 책이 나왔다고 하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책이 갖는 전작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역시 장소다. 이전의 책들이 예수가 현대의 어떤 장소에 나타나서 누군가와 만난다면이라는 가정으로 시작했다면, 이 책은 현재에 사는 주인공(엠마)가 문을 열고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의 어떤 장소로 가서 예수를 만난다는 설정으로 진행된다. 주인공은 예수와 함께 갈릴리의 어느 호숫가로, 수가성의 우물곁으로, 예루살렘 인근의 베다니로, 복음서 속 주요 장소들을 방문하고 대화하며 교훈을 얻는다.

 

     장소와 시대의 전환은 어떻게 보면 간단해 보이기도 하지만, 문학적으로 살짝 아쉬운 면도 있다. 2천 년 전 예수가 현대에 나타난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 비틂을 통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데, 그 반대라면, 더구나 일조의 투명인간처럼 당시 사람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존재라면 확실히 설정상의 재미가 떨어진다. 물론 이건 문학적으로 그렇다는 것일 뿐이고, 저자의 좋은 글쓰기 재주를 통해 복음서 속 이야기를 훨씬 더 실감나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은 플러스 요인이다.

 

 

     제목에도 들어 있는 복음서 여행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내용이다. 어려운 신학적 표현이나 설명은 적은 대신, 편하게 옛날이야기를 말하듯 진행된다. 사실 최초의 살아있는 복음서들(사도들)’은 그런 식으로 예수와 함께 했던 일들을 회상하듯 이야기로 전해주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성서를 읽는 일이 좀 부담된다면, 이 정도의 책으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책의 주제는 앞서 봤던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2와 유사하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 경건훈련에 참여하거나 교육을 받고, 봉사에 힘쓰고 하는 것들이 아니라(물론 이런 일들은 도움이 된다), 예수 안에 있는 것이라는 진리의 제시다. 전작에 대해서도 썼지만, 참 중요하면서도 아름다운 교훈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거운 을 지고 그분을 따르려고 하고 있는지...

 

 

     ​주제 면에 있어서 조금 더 발전이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형식면에서 괜찮은 변주도 보이니 좋은 점수를 줄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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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확신 - 세속 세계관의 정체를 밝히는 성경적 원리와 방법
낸시 피어시 지음, 오현미 옮김 / 복있는사람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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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도 더 전에 봤던 책 중에 완전한 진리라는 책이 있었다. 2007년인가였는데, 그 해 봤던 수십 권의 책 중에 가장 훌륭한 책이라는 제목으로 리뷰를 썼던 기억이 있다. 당시 한창 기독교세계관에 관심이 있었던 터라, 마치 달리기를 마친 후에 마시는 시원한 물처럼 여겨졌었다.

     ​다만 그 때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바로 번역된 제목이었다. Total Truth라는 원제를 완전한 진리로 번역하는 게 최선이었을까 하는 질문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보다는 총체적인 진리정도가 더 낫지 않았나 싶었다. 내용 역시 기독교 세계관이 갖는 총체성을 강조하는 것이었으니까.(완전하다는 말과 총체적이라는 말엔 분명 어감의 차이가 있는데다, 우리가 발견한 기독교세계관이 최종적이거나 완전한 건 아닐 수도 있다는 한계를 인정하는 게 낫다)

     그런데 이번 책도 한 눈에 봐도 그 책의 후속편임을 짐작할 수 있도록 제목을 뽑았다.(사실 표지 디자인도 비슷하다) “완전한 확신이라, 이건 어떤 내용일까. 개인적으로는 이번에도 전작과의 연계성을 드러내는 데는 성공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책의 내용을 잘 드러내는 데는 실패한 제목인 것 같다. 책의 원제는 내용을 잘 요약하는 Finding Truth이다. 책은 저자가 제시하는 세계관 분석 틀을 가지고 다양한 종류의 세속적 세계관들의 일관성을 검증하면서 기독교가 갖는 총체성을 드러내는 내용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검증의 틀은 다섯 가지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그 세계관에서 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우상을 규명하라’), 그 세계관이 결국 세계를 무엇으로 설명하는지를 밝히고(‘우상의 환원주의를 규명하라’), 그 환원주의가(저자에 따르면 모든 우상은 환원주의에 이르게 된다) 낳는 모순을 지적하고(‘우상을 시험하라: 상충) 그 결과를 드러낸다,(‘우상을 시험하라: 모순’) 마지막은 세속적 세계관이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는 원리들(대표적으로 자유의지가 있다)을 강조함으로써, 그 원리들을 진짜 설명할 수 있는 세계관을 드러내라는 것(우상을 대체하라)이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역시 일관성이라는 부분이다. 저자는 기독교 이외의 세계관이 인간의 경험을 충분히, 그리고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그 이론이 가지고 있는 자체적인 모순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질세계, 감정적 경험, 자유의지와 선택, 책임 등이 실재한다는 것은 순수한 경험론이나 관념론,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가지 사상들으로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운 주제들이다.(심지어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도 실제 생활에서는 자신의 주장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은 저자가 이 모든 과정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단지 저 사상들은 틀렸으니 더 볼 것도 없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저 사상들을 좀 더 제대로 살펴보자, 그것들을 충분히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만한가?’라고 물으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끝까지생각을 해보도록 요구한다. 기독교의 오랜 지적 전통과는 달리, ‘무조건 아멘만을 요청하는 대중적 종교나, 감정적 만족만을 채워주는 감성적 종교가 되어버린 오늘날 교계에, 저자의 이런 태도는 반갑기 그지없다.

 

 

     ​오랜만에 돌아왔지만(물론 그 사이에 나온 세이빙 다빈치도 인상적이었다), 여전히 탄탄한 논리 전개가 인상적이다. 갈수록 복잡해져 가는 갈등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철학과 세계관의 분석틀을 제대로 갖는 일이 필수적이다. 한동안 좀 등한시했던 관련 도서들을 다시 좀 찾아 읽어봐야겠다. 전작을 좋게 보았다면, 그리고 기독교세계관으로 어떻게 지적 영역을 구축해야 할지 궁금하다면 꼭 읽어볼 만한 책.

 

유물론이 인간을 복잡한 생화학적 장치로 환원시킬 때 그 상자에서 무엇이 삐져나오는가? 자유의지가 삐져나온다.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삐져나온다.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삐져나온다. 이런 것들은 환상으로 여겨져 기각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우리는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자유의지는 인간이 부인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체험의 한 부분이며, 이는 곧 이것이 일반계시의 일부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유물론의 입장은 우리가 체험하는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다.- P65

낭만주의자 가운데는 예술가가 많았는데, 이들이 관념론에 매력을 느낀 까닭은 관념론이 인간의 정신 혹은 창조적 상상력을 신격화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이 세상의 질서를 잡는, 곧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하는 권력이라면 예술가는 이제 장인이 아니라 창조자다.- P114

철학의 목적은 무엇보다 경험에 속한 사실들을 설명하는 것이지 그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쟁점을 피하는 것이다. 환원주의의 문제점은, 현상을 설명하지 않고 둘러대려고 한다는 점이다.- P147

실제에서 해체주의자가 제구실을 할 수 있는 길은, 다른 모든 이들에게 적용하는 그 비평을 자기 자신은 은근슬쩍 피해 가는 것뿐이다. 해체주의자들은 자신만은 짐짓 모든 논쟁의 현장을 초월해 있는 양 행동한다. 다른 모든 이들의 진술은 숨어 있는 이해관계와 권력 다툼의 산물로 치부해 해체시키면서 자기의 글은 해체 과정을 면제받은 것으로 여긴다. 그들은 자기들만 인종·계급·성 같은 사회적 힘을 초월할 수 있고, 다른 모든 이들은 이 힘 때문에 허위의식의 피해자가 되는 것처럼 글을 쓴다.- P264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세계관에 잠재된 제국주의의 정체를 벗긴다는 고상한 목표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포스트모더니즘 자체도 제국주의가 되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만 다른 모든 이들의 근원적 관심사와 감춰진 행동 동기를 폭로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자신들에게만 그 관심사와 행동 동기를 해체하고 정체를 밝힐 능력이 있다고 말이다. 이렇게 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실상 다른 모든 관점을 침묵시킨다.-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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