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신학 - 역사와 정치와 구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지음, 성염 옮김 / 분도출판사 / 197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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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이란 남미를 중심으로 정립된 일종의 과감한 사회참여의 신학이다. 20세기 중반 남미는 극심한 부패에 시달리고 있었고(오늘날에도 크게 개선되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 결과 엄청난 빈부의 격차가 발생하고 사회 정의가 무너지면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 과연 교회의 신앙에 적합한가를 두고 많은 도전들이 있었고,(사실 정확히 말하면 교회는 기득권층과 결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문제를 그냥 지나치지 않기로 결심한 이들이 나섰고, 당연히 이들의 활동에는 강한 정치적 행동이 포함되어 있었다.


해방신학은 그렇게 처음부터 실천적인 차원이 먼저였다. 하지만 어떤 운동이 계속 유지되려면 이론적 근거가 마련되어야 하는 법, 1973년에 처음 나온 이 책(우리나라엔 1977년에 첫 번역본이 나왔다)은 당시 남미 가톨릭교회 주도의 해방신학의 창시자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즈가 이 새로운 운동의 신학적 근거를 정립하기 위해 쓴 책이다.





책의 1부에서는 신학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해방과 개발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정립한다. 흥미로운 건 흔히 신학에서 주요 주제로 다뤄지지 않는 ‘개발’이라는 것이 일찌감치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 시절 개발 중심의 사회정책이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지적하면서, 그에 대한 좀 더 확장된 개념인 ‘해방’을 신학의 주요한 주제로 제기한다.


2부에서는 성과 속에 대한 전통적인 구분과 분리가 어떻게 교회의 바른 신학적 행동에 문제를 가져왔는지를 지적하면서 이원론을 극복해야 함을 호소하고, 3부에서는 라틴아메리카의 상황에 대한 분석이 이어진다.


4부는 전통적인 신학적 용어로 해방신학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구원론, 종말론, 역사신학 등의 분과에서 해방신학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내용상으로는 이 부분이 가장 길다.





교회의 사회 참여는 어느 정도, 어느 강도로 가능할까. 오늘날 대부분의 세속국가에서는 정교분리를 기본적인 원칙으로 삼고 있지만, 이 말이 교회가 사회의 다양한 논의와 문제 해결과정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규정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교회가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는 듯하다.


물론 그 이유를 전혀 추측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복잡한 사회문제는 필연적으로 어느 한 쪽이 무조건 옳고 다른 쪽은 틀리는 식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이 과정에서 어느 편에 서느냐는 (좁은 의미의) 정치적인 문제로 비워질 가능성이 높다. 이는 교회를 정쟁의 한 가운데로 끌고 들어가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 결과 교회는 매우 누그러진, 그래서 누구에게도 별 도전이 되지 않는 좋은 이야기만 하는, 그래서 아무도 귀 기울일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과연 교회는 충돌이나 비난이 두려워서, 정쟁에 끌려들어가기 싫어서 이 문제를 지금처럼 둬도 괜찮을까?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가톨릭에서 시작된, 그리고 지나치게 “좌파적인” 이 신학에 대해 심한 경계를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수십, 수백 억짜리 건물을 화려하게 꾸며놓은 강당을 채우는 게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인지는 곱씹어 볼 일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의 가장 기초적인 필요를 모른 체 하지 않으셨다. 당시 성전을 누구보다 화려하게 꾸미려고 했던 인물은 헤롯이었고, 대제사장들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흥미로운 부분이다. 자신의 성전을 세우려는 이들은 하나님의 성전이신 그분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전반적인 신학적 전개에는 크게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다만 만인구원론을 주장하는 부분은 견해를 달리 하는데, 이 주장이 저자가 세워가고 있는 해방신학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벽돌인지는 조금 의심스럽다.


물론 저자가 이 책을 쓴 197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상황과 오늘 우리의 상황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가 기득권과 한 패가 되어 있다는 비판이 존재하는 우리의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게 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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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 이들에게 - 지혜, 안녕, 경이의 탐구와 신학의 쓸모에 관하여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이은진 옮김 / 포이에마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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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신학’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비판적 시각이 있다. 하나는 원래 기독교는 단순하고 순수한 신앙이었는데 신학이 이를 괜히 복잡하고 어렵게만 만들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런 신학 작업이 정작 하는 일이란 실제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그들만의 학문이나 토론주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이 중 두 번째 비판은 중세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스콜라 철학/신학(당시에는 철학과 신학이 크게 구분되지 않았다)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바늘 끝 위에 천사가 몇 명이나 올라갈 수 있을 지를 두고 벌어진 의미 없는 논쟁이 그 대표적인데(사실 이 논쟁은 겉보기와 달리 중요한 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확실히 신학계 일부에서 벌어지는 다툼은 더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기도 하니, 여전히 이 비판은 유효한 면이 있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이 비판은 신학 자체가 쓸모없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신학이 잘못된 방식으로 그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봐야 한다. 보다 근본적인 신학 자체에 대한 비판은 첫 번째 쪽일 텐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이 책의 저자인 맥그라스는 신학이 (신앙생활에, 또는 오늘날 사람들의 삶에) 무슨 소용이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책은 크게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반부는 좀 더 큰 그림을, 후반부는 좀 더 구체적인 이유들을 제시하는 데 사용된다.





저자는 신학을, 성경 본문에 관한 연구와 해석들이 모여 만들어진 오래된 기독교 전통으로 본다. 신학에는 교회가 보존해 온 풍성하고 귀중한 유산이 담겨 있다. 그걸 무시하는 사람은 바로 이 유산을 버리고 새 집을 지으려는 사람과 같다. 신학은 과거와 오늘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복음이 변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울타리이기도 하다.


사실 초기 기독교의 역사는 신학 발전의 역사이기도 했으니 저자의 이 말은 크게 틀리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는 바로 그 신학(정통 신학)을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했는지를 생각해 보면(뭐든 뒤집어엎는 걸 좋아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그 시절 이단들에게만 피해자 서사를 입히기를 즐겨하지만, 실제 역사와는 좀 다르다), 오늘날의 상황이 살짝 민망할 정도다.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 바로 튀어나온 게 아니라, 2천 년을 버텨온(여기에는 바른 신학이 그 뼈대가 되었다) 동안의 신앙 공동체의 유산을 받아 일어난 후계자들이다. 내가 누구인지는, 그냥 내가 선언하기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유산과 역사를 이어 받았는지로 결정되는 법이다.


저자는 또한 신학이 온통 흩어지고 조각나 있는 세상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신학은 성경을 좀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창을 제공하기도 하고, 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지도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린 후, 책의 2부에서는 지혜와 안녕, 경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바탕으로, 신학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어떤 유익을 주는지를 아름답게 서술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중에서도 세 번째 주제인 ‘경이’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신학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우리가 공부해 가는 그분이 얼마나 크신지를 깨닫게 함으로써, 더 멀리까지 바라보도록 우리를 이끈다. 인생의 목표를 제시해주는 것이다!






책 말미에서 저자는, 그러므로 모두가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대신, 한 발 더 나아가 이미 우리 모두가 신학자라고 선언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한 신학의 필요성, 신앙생활에서의 신학의 가치 등을 두루 고려해 보면, 이미 우리는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어떤 식으로든 신학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미다.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신학과 만나야 한다. 신학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나아가 적용을 한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신학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뿐이 아닌데, 우선 실천적 차원에서는 교회에서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제대로 신학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이나 자리가 부족하다.(개별 교회가 그런 교육을 할 수 있는 역량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다) 또, 학문적 차원에서는 너무나 분산되어 있는 현대 신학계에서 도대체 무엇을 어디서부터 공부해야 하는지 엄두가 나지 않기도 하다.


또, 신학이 교리와 동일시되는 오해도 조심해야 할 부분이지 않나 싶다. 물론 어떤 교리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결사적으로 지켜야 하지만, 또 다른 교리들 중에는 견해의 차이, 또는 현재 상황에서는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것들도 있으니까.


이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 이미 좋은 개론서나 입문서들이 많이 나와 있으니 그것부터 시작해 볼 일이다. 부디 그 안에서 경이로움을 발견하고, 더 깊은 신앙생활로 나아가는 이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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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산다는 것 - 예수님의 길을 걷는 지혜로운 삶
유진 피터슨 지음, 홍종락 옮김 / 복있는사람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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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유진 피터슨의 미출간 원고들을 모아 새로운 책이 나왔다. 그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예상되는 행보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속 영적 흔적을 탁월하게 발굴하고 그걸 명료한 문장으로 보여주었던 영적 탐정이자 문장가였던 유진 피터슨이기에, 그의 글을 읽는 건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자극을 준다.


이 책에 실린 글의 대부분은 그가 매주 자신이 사역하던 교회 공동체를 위해 썼던 목회서신에서 뽑았다고 한다(몇몇 글은 목사안수식 설교라든지 하는 다른 자리를 위한 글이었다). 때문에 전반적으로 교인들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매주 그의 설교와 그가 보낸 편지를 받는 기분은 어떤 것이었을까.



크게 다섯 개의 주제―시작, 단순함, 기도와 찬양, 자비, 영광―로 구성해 피터슨의 글을 비슷한 주제별로 모아두었다. 애초에 한 권의 책으로 만들 생각이 아니었기에 일부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문장과 주제들이(오랜 시간 매주 한 편씩 쓴 것이라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보인다. 또, 독자는 일정했지만 그 상황은 다양했을 텐데 그 정확한 배경이 대개 적혀있지 않아서 추정해야만 하는 어려움도 있다. 차라리 발췌한 원래 글의 날짜라도 적어줬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피터슨의 다른 글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지만, 이 책에 실린 글에서 매우 자주 반복되고 있는 주제라면, 역시 ‘일상’의 중요성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주시는 곳은 무슨 특별한 시공간이 아니라 바로 이곳, 여기이다. 일상의 평범해 보이는 일들은 실은 영원과 만나는 특별한 문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볼 수 있는 건 아니고, 특별히 눈을 뜬 사람들에게 보이긴 하지만.



자신의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애정을 담아 꼭꼭 눌러쓴 피터슨의 자취가 짙게 느껴지는 글들이다. 신앙생활 속 평범하면서 특별한 진리를 날카롭게 찾아내는 솜씨에는 늘 감탄하게 되고, 그걸 멋진 표현으로 풀어낼 수 있는 능력도 부럽기만 하다. 새해를 맞아 신앙생활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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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 하나님의 사람 4
에버하르트 베트게 지음, 김순현 옮김 / 복있는사람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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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 뉴스 화면 속에서 본회퍼의 문장이 가장 극악한 방식으로 모욕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ㅈ이라는 (자칭)목사가 자신의 정치집회에 본회퍼의 그 문장을 커다랗게 인쇄한 현수막을 걸어놓은 것이었다. 어떻게 ㅈ같은 인사가 감히 자신을 본회퍼의 후예인 양 ‘참칭’(이 어려운 단어를 최근 누가 다시 뉴스의 한복판으로 들고 나왔다)할 수 있는지 어이가 없으면서도 화가 나서, 서둘러 본회퍼의 글로 눈을 씻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마침 집에는 예전에 중고서점에서 구입해서 책장 한쪽에 숨어있던 이 책이 있었다.(읽지 않은 책들이 잔뜩 꽂혀 있는 책장은 부끄러운 모습이다. 환경적으로도, 지적인 허영심이라는 차원에서도) 만들어진지 오래되어서(벌써 절판된 책이다) 종이가 누렇게 바래있었지만 읽기엔 별 문제가 없었다. 양장본임에도 가벼운 종이를 사용해서 들고 다니기도 좋다. 출판사에게 잠시 박수를.



이 책은 본회퍼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전기의 축약본이라고 한다. 원래는 좀 더 두툼했을 책을 나 같은 보통사람들을 위해 작게 편집한 것. 덕분에 전기이지만 아주 세세한 내용들을 길게 나열하는 대신, 그의 삶 주요 지점들을 꽤 속도감 있게 걸으면서 살핀다. 확실히 지루함은 좀 덜하고, 리듬을 잃지 않으면서 본회퍼의 삶을 전체적으로 돌아볼 수 있었다.


이 책의 장점 가운데 하나라면, 역시 저자가 본회퍼의 누이의 딸과 결혼을 해 그의 일가에 속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덕분에 다른 데서 얻을 수 없는 좀 더 내밀하고 개인적인 자료들을 접할 수 있었고, 이런 점은 인물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치열하게 살다 간 인물이다. 나치가 독일 내에서 점점 세력을 얻어가고, 그를 추앙하는 대중들이 아리아인 민족주의니, 반유대주의니 하는 혐오 주문을 되뇌고 있을 때, 독일의 교회들도(심지어 고백교회의 일부도) 이런 흐름에 동참했었다. 본회퍼는 이런 상황에서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고 깊게 고민했고, 결국 히틀러를 제거하는 계획의 일원이 되었다가 거사가 실패한 후 사형에 처해진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의 글에는 진득한 땀과 피가 느껴진다. 그는 자신이 뭔가 한 자리를 하거나 이름을 알려보겠다는 잡스러운 욕망과는 거리가 멀었고, 어떻게 하는 게 제대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전념했던 인물이다. 어디 감히 ㅈ같은 인물이 갖다 댈 수준이 아닌 거다.


다만 이런 부분 때문에 본회퍼의 신학을 총체적으로 정리하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특정한 문제에 대한 깊은 사고를 담은 단편들로만은 그 생각들 사이의 틈을 완전히 메우는 건 쉽지 않으니까. 이 책에서도 그런 면이 좀 느껴진다. 뭔가 종합을 시도하려고는 하지만, 썩 괜찮은 결과물이 보이지는 않는달까. 하지만 꼭 종합을 해야 뭔가 배울 게 있는 건 아니니까.



아직 본회퍼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면, 그리고 알고 싶다면, 한 번쯤 손에 들어봐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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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김근주 지음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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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대부분의 종교인들에게 그들의 경전이 중요하겠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그 중에서도 더 특별하다. 기독교와, 그 앞선 시기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의 삶에 있어서도 성경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흔히 볼 수 있었던 신상과 거대한 신전 같은, 시각적인 것들을 배제한 채 철저하게 말씀 중심의 신앙을 강조해 온 전통이기 때문이다(물론 실제 역사에서는 이 길에서 벗어난 적이 수없이 많지만).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성경을 제대로 읽어내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쓰인 원어에 대한 장벽이나 좋은 번역들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지만, 문제는 읽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성경은 우리 자신이 처한 상황과 배경의 영향이 지나치게 강한 경향이 있다. 쉽게 말해 성경의 내용을 내 멋대로 읽어낸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성경을 운세뽑기집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다. 본문에도 나오지만, 내가 읽는 부분에 ‘가라’는 말이 있으면 당장 지금 하고 있는(혹은 하려고 하는) 일을 계속 진행하라는 뜻으로 읽어내는 식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어도 괜찮은 걸까?



이 책의 제목에서 사실 책에서 하려고 하는 주제를 읽어낼 수 있다.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나 중심, 내가 원하는 걸 찾아내기 위한 성경 읽기가 아니라, 성경이 원래 하고 있는 말이 무엇인지에 집중하면서 읽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책에는 이를 위한 다양한 조언들이 담겨 있다.


우선은 잘못된 성경 읽기에 관한 다양한 예들이 눈에 들어온다. 앞서 언급한 운세뽑기식 읽기만이 아니라, 공동체를 잊어버린 채 개인적 차원(나아가 개인윤리 차원)에서만 성경의 내용을 읽어가거나, 잘못된 ‘영적 해석’들이 난무하는 현상들, 그리고 무엇보다 근시안적인 문자적 해석 같은 것들이 그 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런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들이 제안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성경을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경이 원래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것이 쓰일 당시의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배경 위에서 본문의 내적 논리를 충실하게 밝히는 읽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저자의 주장에 전반적으로 동의한다. 오늘날 교회가 영향력을 잃어버린 것은, 그 영향력의 원천인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런 불완전한 삶은 역시 불완전한 읽기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게 맞다.


다만 본문에 대한 비판적인 읽기 또한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고려한 읽기를 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지 지금 내가 서 있는 상황의 영향도 들어갈 수밖에 없을 테니까.


책에서 저자는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입각한 노예제 옹호를 대표적인 오류의 예로 지목하고 있지만, 노예제가 문제가 있다는 사고 자체가 현대적인 관점이지 않느냐는 비판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 본문의 원래 의미가 무엇인지를 확정해 나가는 과정에서도 어차피 우리는 지금의 시대와 문화 속에서 정상, 혹은 옳은 것이라는 전제로 본문을 바라보게 될 것도 같고.


물론 그렇다고 이런 작업이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완전하지는 않아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포함된 해석학적 공동체를 꼽을 수 있다. 이건 특정한 사회나 조직의 관점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인데, 문제는 신학의 경우 “자기들만의 해석학적 공동체”가 강해서 그 안에서만 대화가 이루어진다는 점..(아.. 너무 비관적인가)



성경을 읽기 전, 어떤 마음으로 읽어야 할지를 정리해 볼 수 있는 책. 그리 두껍지도 않고, 내용도 편안하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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