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청년은 지팡이를, 둘째 청년은 검은 선그라스를, 셋째 청년은 짧은 턱수염을 컨셉으로 한 차림으로 몸을 흔들거리면서 노래 불렀다. ‘우우우’ 하며 시작되는 이상한 멜로디의 노래였다.

나는, 1994년 어느 늦은 밤 모 TV의 음악프로그램에서‘솔리드’란 이름의 낯선 청년 셋이 노래 부르던 그 장면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노래가‘이 밤의 끝을 잡고’였다.‘솔리드’는 재미동포 2세들로써 구성됐으며 우리나라에 R&B(알앤비)를 최초로 대중화시켰다고 어느 음악평론가가 평했다.

 

한 편, R&B(알앤비)란 낯선 용어를 위키백과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R&B(Rhythm and Blues; 'R&B')는 흑인의 생활양식에 맞도록 녹음 된 블루스 보컬이나 밴드 연주의 대중음악을 총칭한다. 나른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며 가성을 많이 섞어 부르기도 한다. 1940년대 말 ~ 1950년 대 초, 블루스가 스윙 같은 댄스풍 재즈와 섞여 태어난 흑인음악이다. 블루스보다 댄스비트가 강하고 리듬멜로디도 대중적이다. 가사도 고단한 삶을 노래하던 블루스와 달리 쾌락적으로 흘렀다.”

 

우우우 하면서 시작되는 ‘이 밤의 끝을 잡고’ 노랫말은 이렇다.

 

우- 예- 다신 널 볼 수 없겠지

나의 입술이 너의 하얀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렇게 우린 이 밤의 끝을 잡고 사랑했지만

마지막 입맞춤이 아쉬움에 떨려도

빈손으로 온 내게 세상이 준 선물은

너란 걸 알기에 참아야겠지

 

내 맘 아프지 않게 그 누구보다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해 모든 걸 잊고

이 밤의 끝을 잡고 있는 나의 사랑이

더 이상 초라하지 않게

나를 위해 울지 마 난 괜찮아

 

<후략>

 

 

연인들이 타인들로 바뀌는 마지막 밤을 노래한 대중가요가 심심치 않게 있다. 이 노래 또한 그런 내용의 노랫말이다. 그 중 ‘나의 입술이 너의 하얀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렇게 우린 이 밤의 끝을 잡고 사랑했지만’이란 부분이 고혹적이다.

우선‘나의 입술이 너의 하얀 어깨를 감싸 안으며’란 부분이다. 마지막 밤을 보내는, 새벽을 맞는 연인들이 나체로 깨어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연인의 하얀 어깨가 드러나 있는데 그 어깨를 화자가 입술로 애무하는 장면이다. 아무래도 20대나 30대 초반의 한창 젊은이들의 사랑 장면으로 봐야 옳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알몸으로 (노랫말의 분위기로 보아 연인들은 지금 이불도 덮지 않고 있다.)그러다가는 감기 몸살에 걸리기 십상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아무리 헤어지는 마지막 밤이라도 이불도 안 덮고 그러는 무리를 저지르지 않는다. 왜냐고?‘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건강은 챙겨야 한다’는 삶의 지혜가 축적돼 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이 밤의 끝을 잡고 사랑했지만’란 부분이 나는 이 노래에서 절구(絶句)라고 여긴다. 마지막 밤이 새며 훤하게 동터가는 시간대임을 잘 나타내기도 했지만, ‘밤’이란 추상적 개념인 시간을 구체적인 사물인 양 ‘잡-’아서라도 그대와 더 있고 싶다는 고도의 수사법이 사용됐기 때문이다.

이런, 고도의 수사법은 조선 중종 때 송도 명기 황진이의 시조에서도 쓰였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여기서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란 구절이 그것이다. ‘밤’이란 추상적 개념인 시간을 구체적인 사물인 양 표현하여 님을 기다리는 안타까운 심정을 절실하게 표현했다.

좋은 표현은 시공에 구애받지 않는다.

1990년대 솔리드와 조선 중종 때의 황진이는 시간상으로나 공간상으로나 절대 만날 수 없다. 하지만‘밤’이란 추상적 개념인 시간을 구체적인 사물인 양 표현하는 마음의 공감대에서 양쪽은 완전히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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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차는 홍천 외곽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쌀쌀한 바깥 날씨임에도 차 안은 덥다. 늦가을, 따가운 햇살 때문이다. 그는 버튼을 눌러 조수석 쪽 창을 반쯤 내렸다. 싸늘한 바깥바람이 차 안으로 밀려들면서 덥던 실내가 얼마 안 가 완화되었다.

 

춘천 집의 좁은 뒤란에서 당수를 수련하기는 편치 않았다. 특히 2단 옆차기처럼 일정 거리를 날아야 할 때는 담벼락과 집채 사이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동작해야 했다.

외갓집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뒷동산에, 큰 나무들 사이로 제법 널찍한 풀밭이 있어서 그곳을 도장 삼아 마음 놓고 활개 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듯하게 자란 굵은 소나무를 하나 택해 새끼줄로 둘둘 감아놓으니 정권 치기나 손바닥을 날 세운 수도 치기를 연습하기도 제격이었다. 물론 싸움 상대의 머리 부분쯤이라 여기고서 발차기 하기도 좋았다.

시간을 늘려, 하루에 한 시간씩 뒷동산에서 당수 수련도 하고, ‘이번 방학 동안에 나머지 반을 다 떼자’는 결심으로 챙겨온 두꺼운 ‘AW메들리’영어 참고서도 다섯 페이지씩 진도를 나가고, 정말, 오랜만에 알차게 보내는 여름방학 같았다.

만일 춘천 집에 있었더라면 5남매가 함께 쓰던 그 좁은 방에서 누나나 동생들에 부대껴 영어 공부는커녕 뒤란에서 하는 당수 수련도 여의치 않았을 게다. 바로 밑에 동생 녀석이 형을 따라 자기도 당수 하겠다며 한참 성가시게 굴던 참이었으니까. 춘천 집의 형편을 생각한다면 방학 한 달간이라도 외가로 놀러오기는 아주 잘한 일이었다.

 

작은 동산이지만 제법 많은 나무들에다가, 수풀도 우거져 그의 당수 독학 광경은 웬만해서는 사람들 눈에 뜨일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일주일쯤 지났을 때 동네 아이 눈에 뜨이고 말았는데 결국 ‘그날 밤 사건’의 태동(胎動)이라 할 만하다.

그 아이는 소 먹일 꼴 베러 산에 올랐다가 난데없는 당수 수련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같은 또래라 동네 길에서 마주치면 눈짓인사는 나누던 사이였다.

“야아, 대단하구나야!”

그 아이는 감탄하며 서 있었다. 앞발차기 동작을 하던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계속했는데, 언젠가는 동네 사람들 눈에 띌 거라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이다. 서너 번 더, 소나무에 새끼줄을 감아놓은 눈높이 위치를 겨냥해 앞발차기를 연습한 뒤 그는 비로소 그 아이를 제대로 보며 말했다.

“왔어?”

그런 뒤 다시 몸을 움직여 2단 옆차기를 실시했다. 그가 할 수 있는 당수 동작 중 가장 멋진 동작에, 그 아이는 입을 떡하니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같은 동작을 네 번이나 하자 금세 온몸이 땀에 젖었다. 그가 소맷자락으로 목덜미의 땀부터 닦을 때 그 아이가 감탄의 표정이 여전한 채 물었다.

“니가 지금 한 게, 그 뭐야, 당수? 그런 기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그는 자기도 모르게 허구까지 술술 지어내고 말았다.

“내가 도장에서 당수 배운 지 1년이 넘었어. 1단이지. 뭐, 여기 시골에서는 잘 모를 테지만 춘천 바닥에는 깡패새끼들이 득실거리거든. 그래서 그 새끼들이 돈을 달라고 까불면, 까짓 거, 내가 당수로 콱 조지는 거지. 몇 놈 잘 조졌지, 지금까지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방학 때도 늘 당수를 연마해 두어야 해.”

 

돌이켜보면 그는 당시에 이미 소설가 기질을 보였던 게 아닐까? 환갑 가까운 나이에 모 문학지에 소설 두 편을 발표하는 둥, 뒤늦게 소설가의 면모를 갖춰 가고 있다.

아내가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구한다는 전도차원에서 성당에 데려가려고 할 때마다 그는 ‘당신, 내가 그리도 한가해 보여? 나, 요즈음 작품을 구상하느라 머릿속이 여간 바쁜 게 아냐!’하는 말로써 사절한다. 그런 뒤 속으로 ‘정말, 내가 소설가로 등단하지 않았더라면 애먹을 뻔했다.’고 안심한다. 성당이 싫은 게 아니라 특정 공간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앉아 있어야 할 것 같은 게, 생각만 해도 못 견디겠는 거다. 교직에 재직할 때에도 그는 강습이라든지 교장의 특별 훈화같이 꼼짝달싹 못하고 앉아 있어야 하는 시간을 아주 못 견뎌했다. 그 때문일까, 승진과는 거리가 먼 평교사로 퇴직하고 말았다. 그의 잠재의식 속에, 한창 자랄 때 그 좁은 방 한 칸에서 누나나 형제들과 함께 지내느라 몹시 힘들었던 경험이 역력하게 남아서 빚어진 일들이 아닐까?

지금 차는 홍천과 횡성 사이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삼마치재 터널이다.

 

산에서 당수를 연습하다가 동네 아이한테 목격된 다음 날 밤이다.

달빛 한 점 없이 어두운 그 밤에 동네의 또래 애들 대여섯이 그를 찾아 왔다. 늘 열려 있는 사립문이니 그냥 마당 한복판으로 들어와, 방안에서 만화책을 보고 있는 그를 부른 것이다.

“보옹길아! 보옹길아!”

봉길(鳳吉)이란 다소 촌스런 이름은 그의 아명인데 춘천 집과 여기 충청도 외가에서 쓰이고 있다. 물론 친척 어른들도 그리 부른다. 족보의 항렬을 따라 점잖게 지은 ‘준연(俊淵)’이란 호적상의 이름은 학교를 중심으로 한 공식적인 공간에서 쓰인다.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보던 만화책을 놓고 일어나려는데 외할머니가 먼저 방문 열고 내다보며 말했다.

“우리 봉길이는 왜 찾냐?”

집단으로 위해하려는가 싶어 카랑카랑하게 묻는 말이다. 그러자 동네 애들 중 어제 낮의 그 아이가 방에서 새나오는 백열등 불빛에 제 모습을 드러내며 공손한 어조로 답했다.

“물고기 잡으러 같이 가려구야.”

“우리 봉길이는…… 공부해야 되는데?”

그런 할머니가 민망스럽게도 그가 실마루로 나서며 말했다.

“할머니. 공부는 낮에 다 했어. 쟤네들을 따라가서 물고기 잡는 것 좀 구경하다가 올게.”

그러잖아도 그는 외삼촌의 헌 만화책이나 들척이며 밤 시간을 보내느라 따분했다.

개구리들이 사방에서 와글와글 시끄런 논두렁길.

한 아이가 ‘막대 끝에 낡은 천을 감아 만든 횃불’을 쳐들어 앞길을 밝히는 가운데 동네 애들과 그는 행렬을 이루어 강으로 향했다. 어제 낮의 그 아이가 ‘이제 강가에 가면 봉길이가 당수를 보여줄 테니까 잘들 보라구야!’ 연실 떠들었다.

몇 년째 여름방학 때마다 보는 얼굴들이지만 함께 어울리기는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이 날 밤은 ‘신고식’이 치러지는 순간이었다. ‘당수 한 번 제대로 보여주자’는 생각에 그의 손아귀에 땀이 배었다.

강물이 강바닥의 자갈들에 부딪히며 흐르는 ‘절절절’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더니 강가에 도착했다.

횃불이 짙은 어둠을 간신히 밀어내며 만들어낸 일정 부분의 모래밭 공간. 한복판에 그가 대련 자세로 서고, 동네 애들은 넉넉한 거리로 삥 둘러앉았다. 그는 마침내 ‘야압!’ 기합소리를 내며 2단 옆차기를 시연했다. 발이 빠지는 모래밭이라 동작하기가 불편했지만 혼신을 다 해 멋지게 해냈다.

“와하!”

동네 애들이 탄성을 질렀다. 우쭐해진 그는 한 번 더 2단 옆차기를 해 보이곤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다른 동작들도 있지만, 이쯤 할게. 다음에 기회가, 다시 있을 때, 그 때 보여줄게.”

한 아이가 말했다.

“우리한테 당수 좀 가르쳐 주면 안 되겠냐?”

생각지도 못한 부담스런 요청이다. 그의 당수라는 게 너덧 가지 동작에 불과할 뿐더러 그조차도 창 너머로 익힌 독학이다. 그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도 다른 아이가 그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이런 새끼 같으니라고. 당수 같은 무술은 훤한 낮에 배워야 할 텐데 우리가 낮에 언제 그럴 시간이 있냐? 밭의 김도 매고 논의 피도 뽑고 소 먹일 꼴도 베고 돼지거름도 치고…… 종일 일하다 보면 금방 어두운데 언제 당수를 배워?”

또 다른 아이가 상황을 정리했다.

“아니 강에 와서 뭐하는 기야? 빨리 물고기나 잡자고야.”

강이라고는 하나 깊어야 무릎까지 물이 닿는 정도다. 춘천의 소양강에 비하면 강이 아니라 하천이라 불러야 했다. 어쨌든 그는 동네 아이들을 따라 무릎 위까지 바지를 걷어 올리고 강물로 들어갔다. 물고기 잡기가 시작된 거다. 횃불을 든 아이가 천천히 나아가는 뒤로 따라들 가면서, 눈에 뜨이는 물고기를 손으로 잡는 방식이다. 미꾸라지 꺽지 퉁가리가 느닷없이 어둠 속에 등장한 환한 불빛에 놀라, 마치 강바닥에 얼어붙은 듯 그대로 있었다. 흐르는 물살 아래 그러고 있는 물고기를 손으로 조용히 접근해 움켜쥐면 되었다. 잡는 대로, 한 아이가 든 주전자에 담으며 강바닥을 누볐다.

횃불이 사그라질 즈음에 물고기 잡기를 마치고 강가로 나왔다. 모닥불에 삥 둘러앉아 먹고 마시며 노는 일이 이어졌다. 주전자에 든 물고기들을 한 마리씩 꺼내 밸을 따 날로 먹고는 소주를 마시는 거다. 그는, 불에 구운 것도 아니고 날로 먹는 물고기라 망설였지만 결국은 입안에 넣어 억지로 ‘으직으직’ 씹어 먹고 말았다. 혼자 예외가 되기 어려운, 전체 분위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고소한 물고기 맛이라니! 그 다음, 옆의 아이가 건네는 술병을 받아 ‘병나발’을 한 모금 정도 불었더니 이내 취기가 올랐다. 애들이 준비해 온 소주가 댓병으로 다섯 개나 되었다. 취해서, 한 사람씩 돌아가며 부르는 유행가.

‘사아나이 가아슴에도 눈무울은 있다아. 이이렇게 정을 주우우고 떠어나……’ ‘다앙신과 나아 사이에에 즈어 바다가 읎었다아면 쓰으라린 이벼얼은……’ ‘삼각찌이 로오타리에 궂은비는 오오느은데……’

나중에는 합창으로 바뀌었다. 누군가가 내놓은 담뱃갑에서 한 개비씩 꺼내 피워 물자 밤하늘로 어지럽게 흩어지는 허연 담배연기들.

사실, 그는 지난 봄 학교 소풍 때 반 친구가 가방에 숨겨 갖고 온 미제 캔 맥주를 하나 마셔 본 게 음주 경험의 전부였다. 그런데 이렇게 드러내놓고 독한 소주를 연실 마시고 취하기까지 하다니. 어디 그뿐인가, 담배를 피워 보기도 처음이었다. 들이켜 본 담배연기가 매캐해서 눈물 콧물이 다 났지만 그렇다고 모두들 담배 한 대씩 피워 물고 노는 질펀한 자리에서 혼자만 예외일 수는 없었다.

더구나 자신을 스스로 ‘깡패들 많은 춘천에서, 당수 1단을 딴 무술 유단자’로 포장해 놓았으니, 시골 아이들이 다 하는 술 담배 따위에 쩔쩔 매는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터.

술자리가 파할 즈음에 그는 몸을 가누기 힘들게 만취했다. 전 날 산에서 만난 아이의 부축을 받으며 외갓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간신히 떼었다. 물론 아이들에게 변명하기를 잊지 않았다.

“아 씨발, 몇 달 만에 술 좀 마셨더니 감당이 안 되네. 씨발.”

춘천이라면 통금 사이렌이 늑대처럼 으허어헝 하고 울었을 늦은 밤인데 충청도 시골에서는 그저 논 개구리들 울음소리만 성할 뿐이었다.

“아이고, 이 놈이 꼭 용석이가 방학 때마다 하던 짓을 고대로 하네!”

집 마당까지 부축해 준 아이는 슬그머니 달아났고 그가 혼자 비틀비틀 토단에 올라설 때, 방문 열고 지켜보던 외할머니가 속상해 내뱉은 말씀이다.

‘용석’이란 그의 하나뿐인 외삼촌이다. 서울에서 회사를 다닌다는데, 학창 시절에 방학만 되면 집에 내려와서 외할머니 속깨나 썩혔다던가 했다. 100여 리 떨어진 충주 시내에서 자취하며 고등학교를 다녔다니, 용석이 외삼촌도 고향 마을의 또래들 중에서는 유일한 고등학생이 아니었을까? 춘천에서 온 봉길이 조카처럼 말이다. 그가 희망리 마을 애들의 두목처럼 행세하게 된 것은 ‘춘천에서 당수 1단을 땄다’는 위세도 한몫했겠지만 당시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고등학생 신분이었다는 게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시골 애들은 집에서 일꾼처럼 지내는 자신과 다르게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 신분의 또래를 선망했다. 드러내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이래저래 그는 ‘그 날 밤 사건’의 주인공으로 유도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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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연 선생은 ‘그날 밤 사건’의 현장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부지런히, 얇은 스웨터를 걸친 뒤 주방에 있는 아내한테 갔다.

“여보. 오늘 내가 차를 쓸 일이 있어.”

“당신도 참, 오늘 수요일은 내가 성당 교우 분들을 차로 모시고 봉사활동 가는 날이잖아요.”

“차가 있는 다른 신자 분을 찾든지 아니면 택시 타고 다니든지 그래.”

김 선생이 교직을 퇴직한 지 3년여, ‘웬만하면 걸어 다니며 노년의 건강을 지키기’로 하면서 그동안 차는 성당 다니는 아내의 독차지였다. 다시 반격에 나선 아내.

“당신이야말로 택시를 타면 되잖아요.”

“몇 백 리, 장거리를 가야 하는데?”

“그럼, 버스 타고 가면 되잖아요?”

“아니야. 이번에는 반드시 자가용차를 몰고 가야 해. 자세한 것은 저녁 때 돌아와서 말해줄게.”

“대체, 어디를 가는 거에요?”

“갔다 와서 말한다니까!”

김 선생은 부리나케 현관문을 여닫고 밖으로 나섰다. 솔직히, 중요하거나 시급한 일로 자가용차를 몰고 가는 게 아니라서 계속 대화를 이었다가는 책잡힐 우려가 컸다.

“충청북도 음성군 운포면 희망리.”

차를 몰고 아파트 구내를 벗어나면서 김 선생은 잊지 못할 그 주소를 뇌까려 보았다. 그날 밤 사건이 벌어진 외갓집 동네의 주소다.

교통 정체가 심한 춘천 시가지를 벗어나자 바로 널찍한 중앙고속도로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만 하다. 시원하게 달릴 수 있는 지금과 달리, 40여 년 전 외갓집 가는 길은 힘겨운 고생길이었다. 시외버스니, 완행버스니 하는 대중교통수단을 세 번씩이나 갈아타고 가야 하는 데다가 하루 종일 걸렸다. 시가지 같은 경우에는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이었지만 시가지를 벗어나면 흙먼지가 뿌옇게 날리는 비포장 ‘신작로’일 뿐이었다. 신작로 길은 왕복 2차선으로 좁을 뿐만 아니라 굽이마저 잦아서 어린 학생이던 그는 차멀미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버스 안 바닥에 토할 위기를 모면한 것은, 그나마 버스가 자주 정차한 덕분이었다. ‘공용 터미널’이나 ‘종합교통 영업소’란 데에 정차할 때마다 급히 구내 화장실을 찾아 ‘와아악!’ 토해 버리던 추억, 아니 기억이 그에게 있다.

지금은 얼마나 좋은 찻길인가.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로 가다가 제천쯤에서부터 국도로 가는 건데 이제는 왕복 2차선 국도조차 굽이도 거의 없을뿐더러 아스팔트로 다 포장돼 있을 게다. 혹 멀미라도 나면 도로 변 휴게소를 찾으면 되고, 걸리는 시간도 하루 종일이 아니라 두어 시간이면 충분할 듯싶다. 자가용차가 아니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렇다. 이런 맛을 보려고 오늘 자가용을 고집한 것이다. 아무렴, 40여 년 간 발길을 끊었던 그날 밤 사건 현장을 찾아가는데 최소한 자가용차는 몰고 가야 되지 않겠나.

40여 년, 정확히는 45년이다. 오래도 발길을 끊었다.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궁금한 숙제 하나를 남겨놓고 눈 감게 될지도 모른다.

내비게이션 화면에 ‘충청북도 음성군 운포면 희망리’ 지도가 선하게 떠올랐다. 45 년 전의 공간이 확인된 셈인데 그렇다면 ‘그 날 밤 사건의 공간은 그대로 남고 시간만 엄청 흐른 거’라 말할 수 있을까?

 

그 해 1968년은, 나중에 알았지만, 거국적인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2년 전이었다.

그 해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그는 ‘혼자’ 충청북도 외갓집으로 떠난 것이다. 당시 부모님은 여름방학만 되면 오남매의 장남인 그와 장녀인 누나 중 한 사람을 반드시 충청북도 외갓집에 보냈다. 방학 중 시골 외갓집에서 자연과 어우러지며 무언가 배우고 오라는, 고상한 교육 차원의 배려가 아니었다. 두 달 터울인 그와 누나가 툭하면 비좁은 방구석에서 말다툼을 벌이니 그게 지겨워 ‘하나라도 딴 데로 보내자’는 격리 차원이었다.

그 시절 춘천 지방은 겨울에는 춥기로, 여름에는 무덥기로 전국에서 악명이 높았다. 그러잖아도 비좁은 집에서 일곱 식구가 그 무더운 여름을 조금이라도 덜 짜증나게 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을 게다. 방이 둘 뿐인 그 집조차 독채 전세로 얻은 남의 집이었으니 돌이켜보면 기가 막힌다.

비만 오면 진창바닥인 춘천 교통 여객 영업소에서 우선, 원주로 가는 시외버스표를 끊으며 그의 외갓집 여행은 시작되었다. 짐이라고 해야 책가방에 챙긴 ‘AW메들리 영어 참고서’ , 영어사전, 그리고 양치도구 정도였다. 갈아입을 속옷 같은 것은 외삼촌 것을 입으면 되니 별 걱정이 없었다.

방학 한 달을 외갓집에서 보낸다 해도 달라질 게 없는 그의 생활이었다. 집에서 하던 영어 공부를 외갓집에서도 변함없이 잇는 것이다. 특히 ‘당수 수련’도 계속했다. 태권도를 그 시절에는 ‘당수’라 했다. 그가 당수를 독학하게 되면서 결국 그날 밤 사건의 원인(遠因)이 되었다. 그는 당수를 독학 하던 45 년 전 추억에 잠기며 운전한다.

 

그 시절 그가 사는 집은 춘천 봉의산 바로 아래 달동네였다.

어느 날 달동네에 당수 도장이 문을 열었다. 방치된 폐건물을 활용한 도장에서 30대 중반 나이로 보이는 사범이 저녁마다 당수를 가르쳤다. 수련생은 열 명이 채 안 됐는데 홍보 효과를 노렸는지 도장 창문을 모두 열어놓아, 외부 사람들이 당수 수련 모습을 밖에서도 볼 수 있게 했다.

그런 외부 사람들 틈에 그가 있었다. 사범이 하늘을 날 것처럼 ‘공중으로 겅중 뜀과 동시에 몸을 옆으로 돌려 발차기하는’ 2단 옆차기라든가, 정권 치기라 하여 주먹을 단단히 쥐고서 온 힘을 다하여 두꺼운 송판을 격파하는 동작은 언제나 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 정말 그는 당수를 배우고 싶었다. 그러려면 입회비를 마련해야 했다.

간판도 달지 못한 데다가, 벽의 흙이 드러나도 회칠 하나 못한 당수 도장이니 입회비가 비쌀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그는 입회비 얘기를 부모님한테 꺼낼 수가 없었다. 실직자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가 시내의 식당 두 군데를 다니면서 가족들 생계를 해결하는 우울한 집안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그는 당수를 독학하기로 했다. 도장 창 밖에서 눈여겨본 당수 동작들을 집에 와 복습하는 형태다. 늦은 밤 시간에 집 뒤란으로 혼자 나와 30여 분씩 당수 동작들을 재연하는 것이다. 어두운 데에서 남몰래 하는 짓이었지만 식구들 눈에 안 뜨일 리가 없었다. 시내 다방에 죽치고 앉아 하루 종일 사업을 구상하다가 귀가한 아버지 눈에 뜨인 게 그 첫 번째였다.

“너 지금 뭐하냐?”

어둠 속에서 겅중겅중 뛰는 웬 사람에 기겁했다가, 조심스레 살피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의 아들이라는 게 확인되자 안심하면서 던지는 첫 질문이다.

사실, 아버지보다 더 놀란 그였다. 2단 옆차기를 하려다가 아버지의 등장에 놀라 발목을 접질리고 만 것이다. 그는 몹시 아픈 발목을 참고서,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답했다.

“학교 오갈 때, 깡패새끼들이 많아서, 그래서 혼자, 당수 연습하고 있어요.”

그러자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헛 참, 녀석도!’ 하는 표정으로 돌아서는 아버지. 돌이켜보면 참 가난한 부자지간이었다.

그는 지금 운전 중인데도 가슴이 먹먹해져서 액셀러레이터 밟는 것을 잠시 잊었다. 차가 제 속도를 잃고 느려지자 뒤따르던 차들이 빠바방! 경적을 요란하게 내며 추월해 간다.

‘참, 내가 운전하고 있었지’

그는 기겁해 액셀러레이터를 다시 밟으며 제 속도를 찾았다.

 

얼결에 한 대답이지만 그 무렵의 춘천에는 정말 ‘깡패새끼들’이 많았다. 시내 지역을 반 가까이 점한 거대한 넓이의 미군부대를 위시해 공병부대니 군단사령부니, 한국군의 여러 부대들까지 포진한 ‘군사도시’라서 그럴까? 미군들을 상대하는 양공주 촌에다가 일반인들 상대의 사창가까지 시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가운데 그에 빌붙어 먹고 사는 기둥서방이라 할, 눈매 사나운 깡패들이 많았다.

그런 시내 분위기에 편승해, 학교를 다니다 중퇴한 애들이 잭나이프 같은 흉기를 갖고 다니며 골목 같은 후미진 장소에서 또래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품 갈취하는 일도 잦았다.

그는 그런 범죄의 피해를 본 적은 없었다. 등하교를 할 때 항상 주의해서 큰 길로 다녔기 때문이다. 막 되먹은 깡패들이라 해도 큰 길에서까지 못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 정도의 치안은 최소한 유지되던 춘천이라 할까.

여하튼 그 날 밤 얼결에 아버지한테 그런 대답을 한 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정말, 깡패새끼들을 만나면 멋지게 해치우고 말겠다’는 의지까지 난데없이 생겨나 더욱 열심히 매일 밤 당수를 독학했다. 그러던 중에 1968년 여름방학을 맞아, 순박한 시골 사람들이 사는 충청도 외갓집으로 혼자 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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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논픽션 영화의 진수를 보여주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나는 다른 좋은 점을 찾아 봤다.

 

 

 

 

 

이 영화는 ‘다 함께 하는 예술’의 의미를 곱씹게 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우리가 아는 예술은 대개 예술가가 혼자 이룬 뒤 나중에 대중들이 국외자로서 향유하는 형태였다. 대중들은 하나의 그림 앞에 거리를 두고 서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니면 다른 그림으로 발길을 돌리거나 하는 피동적인 객체였다. 하지만 ‘웨이스트랜드’ 는 예술가가 대중들과 함께 예술 행위를 함으로써 결국은 벅찬 공감대까지 이루는, 공동예술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관객들의 눈시울까지 뜨겁게 적셨으니, 이 영화의 공감대는 스크린 밖에까지 펼쳐진 게 아니었을까!

 

 

 

특히 ‘티앙’이란 인물이 자신을 소재로 한 빅 무니즈의 작품이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인정받는 순간 하염없이 흘리는 눈물이라니. 그 장면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지 않을 관객이 있을까?

 

 

 

 허구(픽션)는 실제를 바탕으로 한다. 실제의 갖가지 현상들에서 허구로 엮을 재료를 구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허구는 실제의 현상들보다 더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지루하거나 하찮아 보이는 실제의 재료들은 일단 제외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잘 된 허구라도 실제를 못 따른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왜냐면 허구는 실제의 부분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논픽션 영화는 실제와 픽션 사이에 서 있는 아주 모호한 영화다. 어쨌든 실제의 현상들에서 필요한 것들만 간추려 엮은 영화라는 점에서 픽션 영화와 다를 바가 없으니까.

‘웨이스트랜드’ 는 논픽션 영화가 갖는 자기모순을 충분히 극복한 수작이었다. 이 작품을 기획하고 연출한 빅 무니즈의 탁월한 능력에 찬사의 박수를 아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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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의 남쪽에 구곡폭포가 있다. 춘천의 명소로써 더운 여름철에는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줄기로, 한겨울에는 산악등반 훈련지로 명성이 드높다. 그런데 그 구곡폭포가 문배 마을의 조촐한 시냇물이 벼랑을 만나 떨어지는 물줄기라는 사실을 당신은 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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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삶에는 절대적이라는 게 없다. 한 마을의 조촐한 시냇물이 거창한 폭포와 한 줄기로 이어져 있는데 어떻게 한쪽은 작고 다른 한쪽은 크다고 분리해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자 열심히 노력할 때, 같은 순간 다른 존재들이 그만큼의 고통을 받으며 죽어갈 수 있음을. 우리의 생존 조건과 다른 것의 멸실 조건이 이어져 있음을.

우리는 절대적으로 상대적인 관계다.

춘천의 남쪽에 구곡폭포가 있다. 춘천의 명소로써 더운 여름철에는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줄기로, 한겨울에는 산악등반 훈련지로 명성이 드높다. 그런데 그 구곡폭포가 문배 마을의 조촐한 시냇물이 벼랑을 만나 떨어지는 물줄기라는 사실을 당신은 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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