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가 논픽션 영화의 진수를 보여주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나는 다른 좋은 점을 찾아 봤다.
이 영화는 ‘다 함께 하는 예술’의 의미를 곱씹게 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우리가 아는 예술은 대개 예술가가 혼자 이룬 뒤 나중에 대중들이 국외자로서 향유하는 형태였다. 대중들은 하나의 그림 앞에 거리를 두고 서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니면 다른 그림으로 발길을 돌리거나 하는 피동적인 객체였다. 하지만 ‘웨이스트랜드’ 는 예술가가 대중들과 함께 예술 행위를 함으로써 결국은 벅찬 공감대까지 이루는, 공동예술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관객들의 눈시울까지 뜨겁게 적셨으니, 이 영화의 공감대는 스크린 밖에까지 펼쳐진 게 아니었을까!
특히 ‘티앙’이란 인물이 자신을 소재로 한 빅 무니즈의 작품이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인정받는 순간 하염없이 흘리는 눈물이라니. 그 장면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지 않을 관객이 있을까?
허구(픽션)는 실제를 바탕으로 한다. 실제의 갖가지 현상들에서 허구로 엮을 재료를 구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허구는 실제의 현상들보다 더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지루하거나 하찮아 보이는 실제의 재료들은 일단 제외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잘 된 허구라도 실제를 못 따른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왜냐면 허구는 실제의 부분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논픽션 영화는 실제와 픽션 사이에 서 있는 아주 모호한 영화다. 어쨌든 실제의 현상들에서 필요한 것들만 간추려 엮은 영화라는 점에서 픽션 영화와 다를 바가 없으니까.
‘웨이스트랜드’ 는 논픽션 영화가 갖는 자기모순을 충분히 극복한 수작이었다. 이 작품을 기획하고 연출한 빅 무니즈의 탁월한 능력에 찬사의 박수를 아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