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날 화학수업 시간이다. ‘판서한 내용을 공책에 옮겨 적으라’고 담당 선생이 우리에게 지시해 놓고 교실을 한 바퀴 돌 적에, 걔가 아무 것도 적지 않고 앉아 있다가 적발되었다. 작으나 매섭게 생긴 선생은 걔를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한 뒤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넌 뭐냐? 뭔데 필기도 안 하고 멀뚱멀뚱 앉아만 있냐?”
우리는 긴장했다.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면서도 두려운 가슴들로, 필기를 멈춘 채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걔가 말했다.
“제가 시력이 매우 안 좋거든요. 칠판 글씨가 안 보이니까, 나중에 다른 애들 공책을 빌려다가 베껴 쓸려고요.”
그제야 우리는 걔가 늘 가느다란 눈매로 ‘노려보는’ 이유를 알았다. 걔는 시력이 안 좋아서 눈을 찌푸리며 보는 것인데 전체적으로 풍기는 험상궂은 분위기 탓에 그조차 노려보는 것으로 오해했었다. 선생이 다시 물었다.
“그럼 앞자리로 나와 앉아 필기하든지 해야지, 왜 뒤에 앉았냐?”
“제가 앞에 앉으면 뒤의 애들이 제 몸에 가려 칠판이 안 보인다고 그럴 텐데요?”
우리는 와악! 웃었다. 선생은 할 말을 잃었다. 걔는 ‘이제 그만 앉아도 되지요?’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자기보다 키 작은 선생을 내려다보았다. 선생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걔를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 후 다시 화학시간이 되었을 때에도 걔는 여전히 텅 빈 공책을 펴놓았다.
사실, 걔는 모든 수업시간마다 그 공책 한 권으로 수업을 받고 있었다.‘나중에 공책을 빌려다가 베껴 쓰겠다’는 말은 허언이라는 게 드러난 셈인데 화학선생은 그냥 묵과했다. 아마도 그분은 자기 경험에 비추어 이런 판단을 내린 게 아니었을까?
‘만일, 먼저 시간의 판서 내용이 왜 하나도 적혀 있지 않느냐고 캐묻는다면 저 녀석은 분명 다른 불가피한 사정을 핑계대면서 다음 시간에는 반드시 해 오겠다고 또다시 둘러댈 게다. 그런 식으로, 어차피 공부하기는 틀린 놈이니까 그냥 내버려두고 교과진도를 나가는 게 옳다.’
하긴 걔는 ‘불가피한 사정’을 핑계로 댈 만한 게 있었다. 그 즈음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유도 2단이라는 체육특기자로 입학한 애였다. 그제야 걔가 큰 키에 걸맞은 체구까지 갖춘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었다. 스스로는 시력이 안 좋아서 눈을 찌푸리며 지낸다지만, 맞대결 연습을 주로 하는 유도부 생활에서 그런 낯으로 굳어졌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걔는 순식간에 우리 반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걔를 위한 학급 내 불문율까지 만들어졌는데 정리한다면 이렇다.
첫째; 걔가 낮잠을 자는 점심시간이면 우리는 조용히 교실에 있든지, 그게 싫으면 밖으로 나가 놀아야 한다.
둘째; 걔는, 실장이 중요한 학급 일을 결정할 때에 반드시 그 의견을 들어보아야 하는 원로 같은 존재이다.
셋째; 걔가 수업시간에 지적받는 일이 생기면 우리는 “선생님, 그 학생은 운동부 학생입니다.”라고 일러주어 선생이 사정을 봐 주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마지막 7교시 수업 전에 모두 함께하는 청소시간에도 걔는 참여하지 않았다. 청소구역을 배정하는 실장이 걔한테도 ‘복도 유리창 닦기’일을 맡겼지만 부질없었다. 그 시간에 걔는 ‘강당에 가서 유도 연습을 해야 한다’고 둘러대고는 빈둥대며 놀다가 들어오기 일쑤였다. 사실, 운동부 연습은 방과 후 시간에나 하도록 학교에서 정해놓은 방침이 있었다.
그렇기에 4월초의 어느 날 걔가 교실청소에 합류한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둘이 함께 날라야 하는 무거운 2인조책걸상들을 걔는 혼자서, 그것도 들어 메치듯이 공중으로 번쩍 들어 날랐다. 책걸상들을 나르면서 바닥을 쓸고 닦아야 하는 교실청소는 청소구역 중 가장 고되고 힘든 곳인데 웬일로 걔는 두 팔을 걷어붙이며 도왔다. 그러자 교실청소 하는 애들이 아연 긴장했다. 빗자루와 막대걸레로 칼싸움장난도 하면서 어수선하게 이루어지던 난장판 교실청소가, 새마을 청소년들이 하듯 아주 성실하게 잘 되기 시작했다.
복도 쪽 청소 담당 애들까지 달라진 어떤 분위기에 놀라 성실하게 청소에 임했다.
우리는 입학 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청소를 하고 있었다.
걔가 청소에 나선 이유가 한 달 넘게 밖에서 빈둥대며 시간을 보내는 일에 싫증난 때문인지, 아니면 담임선생한테 뭐라 지적이라도 받아 개과천선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한 달이 넘은 그 때까지도 자신이 담임한 애들을 제대로 파악 못하고 지내는 담임선생을 보아서는 후자보다는 전자의 경우가 맞지 않을까? (이런 일이 내게 있었다. 학비 감면 신청 문제로 교무실의 담임선생을 찾아갔는데 나를 다른 학생과 혼동해서 무척 당황했었다.) 그렇다. 20분간의 청소시간마다 밖으로 나가 빈둥거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한 달 넘게 그러다 보니 걔는 싫증이 났던 게다. 말하자면 재미삼아 청소에 나선 것이다.
걔가 교실청소에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선 지 이틀 만에 ‘사건’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