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높은 나무 위의 까마귀들, 산길에 떨어진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들, 청설모들이 K를 볼 때마다 떠들기 시작한 것이다.

저 사람, 오늘도 왔네.”“그러게 말이야.”“저 사람은 해코지 할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까 아무 걱정할 것 없어.”“맞아 맞아.”“웃기고 자빠졌네. 저러다가도 갑자기 해코지할지 모른다고!”“무슨 쓸 데 없는 소리!”

K는 어이없어 발길을 멈추었다. 산짐승들은 이내 숨죽이고 K의 눈치를 살폈다. 긴장된 침묵의 공간을 K는 지팡이로 가볍게 저은 뒤 다시 산길을 걸었다. 산짐승들이 등 뒤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깊어가는 가을 산을 K는 말없이 다녔다.

주로 비탈길 산을 다녔다.

비탈길 산 등산은 봉우리 아래 넓적한 바위에 앉아 쉬며, 먼 풍경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지팡이의 뾰족한 끝이 닳아 무뎌질 무렵 밤새 찬 서리가 내렸다.

오늘, 웬 일로 이른 아침부터 비탈길 산을 오르는 K였다. 워낙 된서리라 부근 풍경은 뿌옇기만 했다. 서리에 산길 바닥의 낙엽이 축축하게 젖어, 미끄럽기까지 했다.

 

 

산길 위로 뻗은 잣나무 가지 위에 청설모 한 놈이 앞발을 모으고 앉아, K를 지켜보았다. 된서리로 뭉개진 주위 풍경 속에서 놈은 마치 연극무대에 혼자 등장한 주인공 같았다.

조심성이 있는 놈이라면 K를 본 순간 다른 높은 가지로 이동해야 했었는데…… 가까이 다가오는 K를 미동도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K는 놈의 검정콩 같은 두 눈알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짚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놈을 때려잡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래도 놈은 겁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늘 말없이 지나다니기만 하는 K를 믿은 것일까?.

서로 눈길이 마주치자 놈이 말했다.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어요?”

K는 가슴이 아팠다. 맞는 말이었다. 오전 열한 시는 넘어서 오르던 산길을, 오늘은 여덟 시도 되기 전부터 올랐으니. 된서리에 해가 보이지 않을 뿐 이른 아침이었다.

딸애가 이상해져서 집에 있지 못하겠더라고……

라는 말을 털어놓으려다 창피하단 생각에 K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없이 청설모가 앉아 있는 그 나뭇가지 아래를 지나갔다.

지나간 뒤 생각했다. ‘내가 그 말을 청설모 놈한테 털어놓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랬다가는, 놈이 놀라 다른 나뭇가지 위로 부리나케 달아났겠지. 그 사연에 놀란 게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내 말소리 때문에. 워낙 조용한 산길이니까.’

초여름 비탈길에서부터 듣게 된 산짐승들의 말은 실제가 아니라 이심전심의 현상이었음을, K는 깨달았다.

맞닥뜨린 상황에서나 이루어지는 이심전심의 의사전달. 게다가 항상 일방적인 의사전달이 오늘 꼭두새벽에 K의 아파트에서 있었다.

노화의 한 증상인지, 오줌이 마려워 잠에서 깨니 새벽 두 시쯤이었다. 화장실로 가려고 방에서 나오던 K는 마침 현관문을 열고 귀가하는 딸애와 맞닥뜨렸다. 빛 감지 센서기능으로 잠시 켜진 현관의 전등불빛에 딸애의 얼굴이 환히 드러났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잠겼다. 잔상으로 남은, 난한 눈 화장에다가 새빨갛게 칠한 입술.

한 집에 있어도 오랜만에 대면한 부녀간이었다.

어둠 속이지만 소주 냄새도 났다. K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잊었는데 그 때 딸애가 말했다.

아빠. 저를 뭐라고 나무라지 마세요.”

사실, 딸애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딸애는 어둠 속에 잠시 서 있다가 말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갔을 뿐이다.

, 도대체 이 시간에 어떻게 된 건지, 얘기 좀 들어보자.”

하는 말을, 딸애한테 하고 싶었으나 그만 두었다. 부모 자식 간 대화를 잊은 지 너무 오래 되었기 때문에.

가족들 모두 대화를 잊었다.

몇 달에 한 번씩 휴가를 나오는 아들애도 밖에서 술친구들을 만나다가 귀대한다. 그럴 때만 K는 안방에서 아내와 잔다. 아들애 방을 비워줘야 하니까.

아내와 K만 같이 잔다.

K는 심란한 생각들에 더 이상 잠을 이을 수가 없었다. 결국은 이른 아침부터 배낭을 메고 집을 나와 버린 것이다.

지금은 낡은 주공 아파트이지만, 삼십 년 전 K가 육백만원을 주택은행에 납입하고남은 융자금 육백만원을 이십 년에 걸쳐 갚는 조건으로 장만했을 때만 해도 이 도시에서 알아주는 명품 아파트였다. 노총각이지만 성실한 K를 믿고 맞선본 아내가 결혼에 응했다. 신혼살림을 차린 뒤 애들도 낳았다. 첫째가 딸이고 둘째가 아들이었다. 그렇게 낳으면 백 점 만 점이라며 직장 동료들이 축하주를 내라 해서, 십팔 평 아파트 안 가득히 아내가 술상을 차려놓고 대접도 했었다.

그런 때가 있었는데…… 아들딸이 귀여워 주말에는 항상 데리고 놀러 다녔었는데 어쩌다 이리 된 걸까?’

K는 배낭에서 건빵을 꺼내어, 아침식사로 우물우물 씹어 먹으며 비탈길 어귀에 다다랐다.

듬성듬성 선 나무그루들을 마치 타잔처럼, 건너뛰어 잡으며 비탈길을 올라가야 한다. 실수하면 비탈길 아래로 굴러 몸을 심하게 다칠 것이다. 여자들이 이 산을 등반할 엄두를 못내는 까닭이 바로 이 험한 비탈길 때문이다.

딸애는 굴러 떨어지는, 험한 세상살이에 들어선 것일까.

보름 전 일이다. K는 거실에 있는 쓰레기통을 비우려다, 캡슐 형 알약 몇 알을 발견했다. 소화제나 아스피린은 아니었다. 이상한 생각에, 나중에 그 알약을 약국에 알아봤더니 피임약이라 했다.

아들애가 휴가 나올 때 여친과 잠잘 생각으로 마련했다가 흘린 거겠지. 휴가를 나와도 집에서 잘 때가 많지 않았으니 말이야. 착한 내 딸애가 흘렸을 리 없어…….’

늘 오르던 비탈길이라, K는 습관적으로 나무그루들 사이를 건너뛰며 이런저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순간, 나무그루를 놓친 K는 아래로 구르다 바위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까마득해지는 의식 속에서 떠오른 장면이 하나 있었다. 일 년 전 이맘때였다. K가 예전의 직장 동료를 만나 저녁 식사 겸 술 한 잔을 나누려고 식당가를 함께 돌아다니다가 아내를 본 것이다. 아내는 어느 식당 앞에 서 있었다. 동료 종업원으로 보이는 여자 둘과 서쪽에 있는 건물들 사이로 비치는 한 줄기 저녁 햇볕을 쬐려는지 식당 문 앞 가에 서 있었다. 갑자기 추워진 저녁 날씨였다.

늦가을은 초겨울의 문턱이다. 아내는 흰색의 얇은 종업원 옷차림으로 쭈그리고 서서 두 손을 비비고 있다가 K와 눈길이 마주쳤다.

K는 고개를 돌려 다른 식당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순간 아내가 내뱉는 말이 K의 귀에 들렸다. 아니, 귀에 들렸다고 K는 생각했다.

무능한 작자!”

그 날부터 K의 별난 이심전심 현상이 시작된 게 아니었을까?

식당 앞에 춥게 서 있던 아내 모습이 잠깐 떠오른 뒤 K는 아득한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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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다. 사촌형님과 마주 앉아 술잔을 주고받기 시작하면 그 노래가 떠오르니.

헤어지기 섭섭해서 망설이는 나에게, 굿바이 하며 내미는 손, 검은 장갑 낀 손…….’간단한 리듬에 잔잔한 남자가수의 음성. 이제는 KBS가요무대프로그램에서나 나오는검은 장갑이란 노래다. 형님과 나는 지금 식당에서 삼겹살을 안주로 술잔을 나누고 있다. 삼겹살이 골고루 구워지는지 살펴가며, 간간이 숯불에서 튀는 불티들을 피해가며, 구워진 삼겹살을 젓가락으로 집어 상추 잎에 싸 먹으며, 술잔을 부딪친 뒤 술을 들이마시며, 그러면서 지난날을 얘기 나누는 복잡다단한 행동 중에도 그 노래는 내 머릿속 한편에서 맴돌고 있다.‘할 말은 많아도 아무 말 못하고, 돌아서는 내 모양을 저 달은 웃으리…….’

아무래도 노랫말이 잘 나가다가 끝에서 실패했다. ‘저 달은 웃으리가 무언가? 근사한 품격이 동요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육십 년대 유행가의 한계가 아닐까. 이 노래가 맴돌면서 서울 미아리 허허벌판에 서서 눈을 맞고 있던 어린 내가 떠오른다.

형님, 그 겨울 있잖아요, 제가 미아리 집에 가 있던 겨울 말입니다. 그 때 눈이 자주 내리던 걸 저는 지금도 기억한다니까요.”

그랬냐? 너는 참 기억력도 좋다. 나는 그저 너와 함께 그 겨울에 만화책 보던 일만 기억하는데 어떻게 너는 날씨까지 기억하니?”

형님은 그러면서 맥주병을 잡아, 비워진 내 술잔에 맥주를 따른다. 나도 형님의 비워진 소주잔에 소주를 따른다. 우리는 이렇게 각기 상대편이 선택한 술을 따라준 뒤 크기가 다른 두 술잔을 맞부딪치고서 마신다. 뱃속에서 퍼져나가는 이 취기. 훤한 낮에 마시는 낮술의 여유 혹은 질펀함. ‘헤어지기 섭섭하여 망설이는 나에게, 굿바이 하며 내미는 손, 검은 장갑 낀 손…….’

며칠 전의 일처럼 오십 년 전 겨울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겨울 나는 미아리의 큰아버지 댁에 맡겨져있었다. 난생처음 만난 사촌형님은 중학교 입학을 기다리는 육학년 이학기의 마지막 겨울방학이었고 나는 사학년 이학기가 끝나가는 겨울방학이었다. 지금이야 서울 한복판 동네이지만 그 겨울의 미아리 일대는 허허벌판에 뜨문뜨문 주택들이 있는 시골 풍경이었다. 어느 날 나 혼자 그 허허벌판에 서 있었다. 근처에 부도난 공장이라도 있는지 집채만 한 녹슨 쇠 통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인 허허벌판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맞으며 그 노래를 듣고 있었다. ‘굿바이 하며 내미는 손…….’함박눈이 내리는 가운데 남녀가 이별한다. 여자가 남자한테 내미는 검은 장갑 낀 손. 가늘고 흰 손가락들이 들어 있는 검은 장갑.

나는 남녀의 이별의 장면을 눈앞에 떠올리며 그 노래를 듣고 있었다. 청승도 맞지, 어떻게 초등학교 사학년 어린이가 그런 감상에 젖어서 눈을 맞고 서 있었나? 지금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다. 혼자 큰아버지 집 밖 근처에 있는 허허벌판에 나와 서서, 어떤 남녀의 이별 장면을 떠올리며 옷이 젖도록 눈 맞으며 서 있었다니……. 당시 고향 춘천이 너무 멀리 있다는 생각에 아예 그리워할 생각도 못한 걸까?

지금 형님한테 이 얘기를 꺼내볼까? 아니다, 그건 쓸데없는 짓이다. 왠지 어두운 방향으로 화제가 번질 느낌이다. 다른 얘기를 꺼내야 한다. 나는 짧은 순간이지만 그렇게 생각들을 정리하고는 예의텔레비전 사 오는 날얘기를 꺼낸다. 이 얘기는 밝은 방향으로 화제를 이끌 것이다.

형님, 저는 말입니다, 텔레비전을 처음 보던 날 저녁도 여태 생생하거든요?”

그래그래, 그 겨울에 우리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사 오셨지. 아마 그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생산된 흑백텔레비전일 거야. 맞아 맞아, 너는 참 기억력도 좋아.”

그 날, 겨울이라 이내 어둑해진 저녁이었다. 큰아버지가 인부들과 함께 귀가했다. 인부 둘이서 커다란 종이박스를 조심스레 들어다가 안방의 윗목에 갖다 놓았다. 종이박스를 뜯자 전축을 닮은, 다리가 네 개나 달린 텔레비전이 나타났다. 인부 하나가 지붕 위로 올라가 잠자리를 닮은 안테나를 세우고, 다른 인부 하나는 텔레비전 뒤에서 나온 선을 그 안테나에 잇는 작업을 하더니 마침내 찰칵전원을 켰다. 잠시 후 직사각형의 붕긋한 유리판에 노래하는 어린이들 모습이 나타나던 놀라움이란! 흑백인 데다가 수시로 흔들리는 화면이었지만 형님과 나는 넋을 잃고 지켜보았다. 어린이들이 성탄절 노래를 부르는 영상이었으니 196112월 말의 어느 저녁쯤 되지 않았을까. 박 정희 장군의 혁명 정부가 들어섰다는 그 해 겨울에 큰아버지는 텔레비전을 사 온 것이다.

그 때 기억을 중단하고 나는 형님한테 묻는다.

큰아버님이 국회에 다니셨지요, 그 때?”

그래, 요즈음으로 치면 국회 사무처의 계장이셨지. 계속 다니셨더라면 나중에 무슨 장관이거나 아니면 하다못해 차관이라도 하셨겠지.”

그렇게 되셨을 텐데…… 일제 때 경성제대 법과를 나오셨다 했으니, 당시만 해도 그런 고학력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었잖아요?”

그럼, 그럼.”

큰아버지. 텔레비전을 인부들에게 들리어 오던능력 있어 보이는 어른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눈 주위가 퀭한 모습으로 안방 아랫목에 누워 있기를 잘 했다. 국회 사무처라는 직장을 다녔으니 휴일에나 그랬을 모습인데 이상하게 그런 병약한 모습의 큰아버지로 더 선하게 내 기억에 남아 있다. 형님이 이제 당신의 아버지에 대한 회한을 말한다. 작년의 술자리에서도 말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그냥 국회 사무처에 계속 계시기만 했어도 우리 집 고생이 없었을 텐데 일 년여 만에 사표를 내면서……

그러니까 그게 집안 운이란 거겠지요. 큰아버님이 계속 직장을 잘 다니셨더라면 우리 집까지 그 덕을 보면서 함께 잘 살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게 말이다. 아버님이 그 때 뭐라고 식구들한테 말씀하며 사표 낸 줄 아니?”

작년에 얘기 들어서 알고 있지만 나는 또 한 번 듣고 싶어 말없이 고기를 젓가락으로 뒤집어 굽는다.

“‘군인들의 반란이 오래 갈 리가 없다. 분명히 곧 뒤집혀 바로잡힌다. 그런 줄 알아라.’말씀하시더라고. 나 참 아버님도, 그렇게 확신하시면서 그 좋은 직장을 그만 두셨는데 군인들 정권이 십팔 년이나 갈 줄이야!”

와하하! 우리는 웃는다. 이백 평은 될 넓은 식당에 우리 웃음이 퍼져나갔다. 이른 점심시간이라 손님은 우리밖에 없다. 서울에서 기차 타고 열한 시경에 춘천 역에 도착한 형님을 나는 이 삼겹살구이 식당으로 모셨다. 식당도 그렇지만, 일찌감치 점심식사 겸 술판을 벌이는 것까지 작년과 똑같다. 우리는 이렇듯 삼 년째, 일 년에 한 번 만나 종일 낮술을 마신다.

우리 아버지가 그 겨울방학에 어린 나를 느닷없이 큰집에 맡긴 것은 바로 그런 큰아버지의 출세에 기대보려는 뜻이었을까? 큰아버지가혁명 세력에 합세한 경성제대 동기 덕분으로국회에 특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이런 좋은 기회에 우리 집도 서울로 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겠지. 우선은 당신의 장남인 나부터 서울 큰집에 맡겨놓고 전학시키는 일부터 할 계획이었나 보다. 그렇게 놓고 두 달을 지냈어도 큰아버지한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아버지는 실망 끝에 다시 나를 춘천으로 데려간 게 아닐까? 솔직히 말한다면 끌고 간 듯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나는 그 겨울 그렇게 잘못 배달된 물건처럼 먼 거리를 끌려 다녔다.

맞다, 그런 전후사정이다. 오십 년이 돼 가는 오늘 술자리에서야 그 겨울의 전후사정이 명의의 진맥처럼 제대로 짚인다. 겨울방학에 들어가자마자 , 옷 제대로 입어라. 오늘 버스 타고 서울 간다.”하는 아버지 말에 황황히 옷을 입고 나섰다가 그 옷차림 그대로 큰집에서 두 달을 보내고는 다시 황황히 춘천 집으로 버스 타고 내려온 나였다. 지금이야 서울 춘천 간 버스가 한 시간 남짓 달리면 됐지만, 당시에는 두 시간은 걸린 데다가 굽이 많은 도로여서 여간한 고역이 아니었다. 나는 얼마 되지 않아 웩웩 멀미를 시작했는데 아버지는 그런 나를 버스 맨 뒷좌석으로 옮겨 앉게 한 뒤 차창을 열고 밖에다 토하면서 가게 했다.

이튿날 등교했더니 담임선생님이 매우 화가 나 있었다. 전날의 고된 버스 여행 탓에 아직도 어질어질한 나한테 그분은 이런 말을 하며 화를 내었다.

아니, 개학을 하고도 일주일은 지나서 학교 오는 놈이 어디 있냐? 그것도 반장이란 녀석이!”

당시의 나는 요즈음 말로 개념 없는어린이였나? 중고교를 다니던 사촌누나들은 물론 사촌형까지 겨울방학이 끝나자 모두 등교했을 텐데 그런 모습들을 보고서도 아무런 생각 없이 큰집에서 지내고 있었단 말인가? 낮에는 텔레비전도 방영되지 않던 때라 혼자 무척 심심했을 텐데 왜 그랬을까? 눈이 펑펑 쏟아지는 벌판에 서서 검은 장갑노래에 빠져있기도 하던, 조숙한 면도 있어 보인 내가 왜 그리 뭐라고 자기의사 표시도 못하고 무력하게 있었던 걸까? 큰아버지나 큰어머니한테 저는 학교를 안 가나요?’라든가,‘저는 이제 춘천 가고 싶은데요.’ 라든가, 혹은 우리 아버지는 언제 오나요?’라든가 하는 의사 표시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검은 장갑 노랫말처럼 나는 아무 말 못하고큰집에 방치된 물건처럼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때만 해도 어려서 삶의 주체의식을 갖지 못했던 걸까? 사촌형마저 등교한 뒤 나는, 날씨가 풀려 진창 밭으로 변한 그 벌판을 혼자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 먹을 때가 되었다고 여겨지면 집으로 들어와 밥을 먹고 그랬다. 당시 큰어머니의 눈길이라니. 반갑지도 않고 그렇다고 싫다는 내색도 못하고 그냥 물건 보듯이온도 없는 눈길로 나를 보며 밥상을 가리키던 큰어머니.‘개념 없는나였지만 그런 온도 없는 눈길은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이해한다, 큰어머니를. 큰어머니에게 나는 얼마나 짜증스런 존재였을까! 아이들도 많은 좁은 집에 느닷없이 얹힌 작은집 아이. 그나마 가장이 특채로 국회를 다니게 된 직후라 아무 말 않고 지낸 것이지, 그렇지 못해 여전히 무직자로 있었더라면 나를 놓고 부부싸움부터 벌이지 않았을까? 물론 그런 상황이었다면 우리 아버지가 나를 떠맡길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반기지도 않은 친척집에 아들을 맡겨놓고서, 겨울방학이 끝나고도 일주일은 지나서 나타나 다시 황황히 끌고 춘천으로 내려오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나는 아직도 이해하기 어렵다. 아버지에게 나는 당신의 아들이기에 앞서서 서울로 가려는 교두보로 보였거나 큰집의 반응을 떠보는 리트머스 시험지였던 것일까?

정말, 너는 말이야 작은아버지를 많이 닮았어! 보면 볼수록 말이야!”

형님의 감탄에 내 상념이 깨어진다.

그래요? 할 말이 없네요, 나 참.”

화답하며 형님과 함께 와하하 웃는다. 사춘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주위의 어르신들이 바로 저런 말을 할 적마다 나는 무척 곤혹스러웠다. 집에서 내가 철저히 아버지를 외면하며 지내는 줄도 모르고 저렇게 닮았다고 감탄하는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침묵하며 지나갔다. 이제는 아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어언 십칠 년, 나는 형님의 그런 말을 듣고 같이 웃는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삼겹살구이 집 바깥으로 떨어지는 시월의 화창한 햇살들처럼 하염없는 세월이 흘러갔다. 형님이 이런 말을 덧붙인다.

그런데 성격은 정반대야. 작은아버님은 뭐라 그럴까, 그렇지 낭만파지. 너는 현실적인 성격이고.”

나는 아니에요, 저도 본래는 낭만파였어요!’라고 해명하고 싶은 것을 그만 둔다. 내가 대학시절에 캠퍼스 내에서는 문명을 날리며 대작가를 꿈꾸기도 했다는 사실을 이제 말하여 뭣하나. 내가 지금 삼층 건물이라도 갖고 사는 넉넉한 삶이 된 것은, 역설적으로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저런 무능한 가장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다짐을 숱하게 하면서 나는 공무원으로 장장 삼십 년을 봉직하고 나왔다. 아내는 꽃가게를 하면서 나를 도왔고.

나는 그런 긴 해명 대신 술잔을 들어 단숨에 쭉 들이마신다. 형님은 빈 내 술잔에 맥주를 다시 따라주며 말한다.

작은아버님은 술도 잘 하셨어. 나하고도 소주 두 병을 앉은 자리에서 비운 적이 있었지. 그 때 내가 대학 다닐 때였지, 아마.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너는 네 아비보다 훨씬 낫다! 네 아비는 술 한 잔 못하니 내가 어디 형제간이라도 말 한 마디 나눌 수 있냐?’그러시더라고.”

나는 형님의 소주잔이 빈 것을 뒤늦게 보고 소주병을 들어 그 잔을 채우면서 말한다.

형님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아버지가 큰아버지와 술 한 잔 못 나눈다고 한탄하셨다지만 정작 아버지는 당신의 장남과도 술 한 잔은커녕 간단한 대화도 나누지 못했거든요. 물론…… 제 잘못이 크지요. 그 즈음에는 아버지가 너무 싫어서 한집에 있으면서도 대면조차 꺼려하며 살았으니까요. 돌이켜보면…… 제가 불효했지요.”

형님은 소주잔을 놓고 손사래를 치며 말한다.

정도 차이일 뿐이지, 나도 우리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네. , 너처럼 말도 안 하고 지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이야. 생각을 해 보라고. 아버지가 무작정 국회 사무처에 사표를 내고는 방구석에 틀어박혀 지내니 집안 꼴이 뭐가 되었겠어? 우리 어머니가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고생 많았지. 참으로 그처럼 똑같이 무능한 형제분들이 이 세상 어디 있었겠니?”

형님과 나는 함께 와하하! 웃는다. 거나한 술기운에 웃음소리가 더욱 과장되어 나온다. 일 분 정도면 충분할 웃음을 삼 분 가까이 웃는 것 같다. 형님은 웃음 끝에 이런 소회를 덧붙였다.

작은어머니도 고생 많으셨고…… 우리 어머니도 고생 많으셨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잔을 들어 형님의 소주잔과 부딪친 뒤 쭉 들이켠다. 아무래도 술이 부족할 듯싶다. 주방의 아주머니를 불러 병맥주 세 병과 소주 한 병을 추가 주문했다. 아주머니가 술병들을 가지러 간 사이에 숯불을 맡은 사내가 와 불판을 새로 갈았다.

큰어머니.

솔직히 나는 아직도 큰어머니 얘기는 더 듣거나 꺼내고 싶지도 않은 심정이다. 그건 아까눈 내리는 날 검은 장갑 노래를 들으며 처량하게 서 있던 어린 나의 얘기를 꺼내려다 술자리가 어두워질까 봐 화제를 돌린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겨울 내게 단 한 번도 따듯한 눈길을 주지 않던 큰어머니. 그 이후로 한 번도 만나 뵌 적이 없는 분이다. 큰어머니 모습은 오십 년 전 그 겨울의 차가운 표정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지금은 미국에서 아흔을 눈앞에 둔 할머니가 되어 당신의 손자들 생일날을 챙기는 낙으로 지내신다니…… 대단한 분이다.

그런 분이니까 우리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자식 많은 집의 실제적인 가장이 되었을 테지. 나야 그런 기억의 수준이지만 철저한 악감정으로 한평생을 보낸 사람이 우리 아버지다. 아버지는 얼마나 당신의 형수가 증오스러운지, 그 배우자인 형까지 증오하다가 삶을 마쳤다. 물론 나는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아버지와 등지고 사는 불효 아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적의 적은 동지다는 식의 논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도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큰어머니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제 나는 우리 어머니 얘기를 꺼내어 화제의 주도권을 잡고자 한다. 형님 입에서 큰어머니 얘기가 더 나오려는 것을 막고 싶어서다.

우리 어머니는 참, 고생 많으셨어요. 어머니가 서른이라는 늦은 나이에 적십자사 직원으로 취직되지 못했더라면 아마 우리 식구들은 다 굶어죽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시내 다방에서 종일 죽치고 앉았다가 집에 들어오는 게 전부였거든요. 어머니가 직장을 다니면서, 오남매나 되는 자식들을 끌고 셋방을 전전하며 모두 키워내신 것을 생각하면…… 눈물겹고 불가사의하지요.”

그래그래, 작은어머니는 정말 고생도 많았고 아까우신 분이야. 일제 때 여고를 나온 분이 몇 분이나 되겠냐? 그렇게 똑똑한 분이니까 가장 역할을 해 낸 거지.”

우리 어머니가 고학력이란 이력으로 가장 역을 맡았다면 큰어머니는 오직 윗대의 남겨진 유산을 찾아서 처분하는 일로 가장 역을 수행한 경우이리라. 큰어머니는 큰아버지가 일 년여 만에 다시 실직자로 전락하자, 당신이 손수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춘천 일대에 미등기로 남은 논, , 야산 등 할아버지의 유산들을 하나하나 찾아 팔아치워 버렸다. 우리 집에서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야 알게 된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요즈음 같았으면 어림도 없었을 일을, 큰어머니는우리 집이 장자집이니까 당연하다는 위세로 다른 친척 분들의 인감을 받아가며 그 일을 처리했단다. 훗날 어머니한테서 얘기 들은 사실이다.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덧붙였었다.“나는 속상하긴 하지만 그런 큰어머니를 이해한다. 오죽 남편이 반편이면 그랬겠냐? 그래야 사남매나 되는 자식들의 학비까지 대며 먹고 살 수 있지 않았겠니?”

그렇게, 6.25동란으로 할아버지가 납북되면서 남겨진 막대한 유산들이 일방적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시절에는 부동산 값들이 요즘 같지 않아 대부분 헐값으로 팔아 버렸다는데, 그 중 하나만이라도 우리 집에 남겨주었더라면 훗날에라도 우리 집이 고생을 면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나는 여러 번 했었다. 부동산 값이 폭등하던 때 얘기이다.

큰어머니의 유산 처분 사실을 뒤늦게 안 아버지는 당신이 무언가 해 볼 수 있는 마지막 기반이 날아갔다는 통한에 빠졌고 그 후 큰어머니는 평생의 원수가 되고 말았다.

자아, 이제 술자리의 화제는 우리의할아버지얘기로 들어갈 때가 되었다. 역시 형님이 할아버지 얘기를 꺼낸다.

너나 나나 할아버지가 6.25때 납북되지 않았더라면 고생 한 번 하는 일 없이 순탄한 인생을 살았을 텐데 말이다.”

그렇죠. 술자리도 이런 값싼 삼겹살집에서 하겠습니까?”

와하하! 터진 웃음이 잦아들자 나는 이어서 말한다.

그분이 별 탈 없이 더 살아계셨더라면 큰아버님도 어디 기업체 사장이라도 하셨을 테고…… 우리 아버지는 당신의 평생소원인 영화감독으로 멋있게 자리를 잡으셨을 거예요.”

그럼, 그럼. 작은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돈을 대주어 영화를 만들다가 6.25가 터지면서 망해 버렸다 했지?”

그래요. 정말, 우리 집안에게 6.25동란은 저주받을 전쟁입니다. 그 놈의 6.25만 없었어도, 나 참!”

자자, 술 한 잔 마시고.”

내 목소리가 격하게 컸던 걸까, 형님은 당신의 소주잔을 내 맥주잔에 부딪쳐 술 마시기를 권한다. 쭉 들이켰는데도 느닷없이 솟구친 분노가 가라앉지 않아 나는 내 손으로 맥주잔을 다시 채워 연거푸 마신다. 그런 모습이 어처구니없는지 형님이 허허 웃더니 말한다.

우리 할아버지는 이를 테면강원도의 정 주영씨 같은 분이었다고 그래. 타고난 사업가적 기질로 대기업가가 되었던 게지. 사업에는 냉정했지만 자식들에게는 마냥 부드러운 분이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큰아버지나 우리 아버지나 고생을 모르고 자라나셨기 때문에식솔들이 고생깨나 한 거겠죠?”

그럼, 그럼.”

, 그거 알고 계세요? 할아버지가 납북되던 때 일을?”

글쎄, 아버지가 생전에 한 번 말씀 해주신 것 같기도 한데

.”

제가 어머니한테 들은 얘기를 말씀드리지요. 그러니까 6.25가 터져 인민군들이 물밀 듯이 내려오는데도 당시 정부에서는국민들은 안심하라. 우리 국군이 적들을 38선 이북으로 몰아내고 있다는 거짓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대요. 대부분 그런가 보다 하고 남아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역시 사회지도층 인사라 벌써 심상치 않다는 정보를 따로 듣고는 곧바로 백 여 리 떨어진 경기도 금곡으로 피신했다는 게 아닙니까? 금곡의 경치 좋은 동네에 별장처럼 사 둔 집이 있었다내요. 그 집에 숨어서 지내는데 문제는 우리 아버지가 아무런 개념 없이춘천 집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들한테 잡혔다는 게 아닙니까? 벌써 그들이 춘천지역의 유지 급 인사들 명단을 갖고 내려왔는데, 그 명단에 있는 할아버지가 안 보이자 자손인 우리 아버지를 잡아간 것이죠. 아마 그 때도 큰아버지는 서울 쪽에 계시다가 피난을 가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저는. 그들이 우리 아버지를 잡아놓고는 어떻게 나온 줄 아세요? ‘열흘 이내로 당사자가 자진해서 나타나지 않으면, 인질로 잡아놓은 아들을 처형시키겠다고 했단 말입니다. 그런 협박이 할아버지 귀에까지 전해지도록 흘려놓고는 그들이 기다렸다내요. 그러자 그걸 전해들은 할아버지가 잠을 못 이루고 고민하시다가 결국은 내 자식을 살려야지, 별 수가 없다며 금곡에서부터 백 여 리를 걸어와 춘천의 인민군들 앞에 나타나셨다는 게 아닙니까? 어머니가 이 대목을 말씀하실 때에는 꼭 이런 말을 덧붙이신다고요. ‘그 때 네 할아버지가 금곡에서 오시지 않고 그냥 계셨어야 하는데 나타나시는 바람에 내가 네 아비와 그 후로도 살면서 평생 이 고생이다!’라고. 나 참, 어머니도! (웃음)…… 그래도 인민군들이 약속은 지켜 할아버지가 나타나자 곧바로 아버지를 풀어주었고 아버지는 그길로 죽어라고 제주도까지 피난 가서 살았다는 게 아닙니까? 그래서 저도 태어났고…….”

할아버지 납북에 얽힌 전후사정을 자세히 얘기해 보기는 처음인데, 듣는 형님이 아주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다. 형님은 큰아버지나 큰어머니한테서 이런 얘기를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던 걸까? 당시 할아버지가 춘천으로 돌아가면 당신의 목숨을 내놓는 거나 다름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한 가슴 아픈 내력까지 말해 줄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큰아버지와 관계되는 내력이기 때문이다. 이 내력을 말하게 되면 술자리가 어두워질 수 있다. 모처럼 일 년 만에 갖는 사촌형제간 술자리에서 어두운 얘기를 꺼낼 필요가 있나?

식당의 아주머니가 다급하게 와 불판의 삼겹살들을 부지런히 집어 접시에 옮기며 말한다.

이런, 많이 탔네요.”

얼마나 할아버지 얘기에 몰두했던지 우리는 삼겹살들이 탄 줄도 몰랐다. 내가 형님한테 의견을 물었다.

형님, 고기를 새로 시킬까요? 이번에는 잘 타지 않는 생 삼겹살로?”

그럼, 그럼.”

아주머니한테 추가주문을 하고서 형님과 나는 상대방의 술잔을 채운 뒤 부딪치고 마신다. 어머니가 생전의 어느 날 내게 옛날이야기 해주듯 전해 준 할아버지 납북 사연. 오늘 따라 생생하게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차마 형님 면전에서 말하지 못하는 그가슴 아픈 내력은 이랬다.

할아버지가 대기업가로 자리 잡은 시대는 일정치하였다. 대동아전쟁이 종반으로 접어들면서 궁지에 몰린 일본 놈들은 조선반도의 유지 급 인사들에게 당신의 아들 하나씩을 가미가제 특공대로 자원토록 명했다. 비행기를 몰고 날아가 미군 함정에 그대로 부딪치면서 임무를 완수케 된다는 그 끔찍한 가미가제 특공대. 만일 당신이 그 명을 듣지 않았다가는 보복으로 평생 일군 모든 사업이 순식간에 망하게 될 것임은 불문가지였다. 할아버지는 며칠을 두고 고민하다가 차남을 자원시키기로 결정했다. 둘 다 소중한 아들이지만 장남은 집안을 이어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열여덟 살 나이에 일본으로 끌려가 가미가제 특공대의 일원으로 맹훈련을 받고 출격을 기다리다가, 느닷없이 종전되자 살아 귀환하게 된 것이다. 그런 내력이 있었기에, 6.25동란 때 금곡의 안전한 집으로 피신했던 할아버지는 인민군들 앞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일정 때 사지로 보냈던 당신의 차남을 또다시 사지에 놓아둘 수는 없었으니까.’

부성애도 그런 부성애만큼 극적인 게 어디 있을까? 격한 정변들이 파도처럼 쉴 새 없이 밀려왔던 이 땅에서나 가능한 내력이다. 아주머니가 생 삼겹살들을 불판 위에 올려놓을 때 문득 내가 형님한테 주려는 내 수필집이 생각났다. 직장생활을 할 때 틈틈이 썼던 수필들을 모아, 지난달 삼백 부 한정판으로 자비 출간한 것이다. 젊은 날 작가가 되려던 꿈도 포기하고 봉급생활로 보낸 삼십 년 세월이 너무 허망하게 여겨져 나는 그렇게 기증 받는 사람이나 읽어 볼수필집을 펴냈다. 아내와 자식들한테 한 부씩 주고, 학교 동창들과 예전의 직장 동료들한테까지 한 부씩 우편으로 부쳐주었으나 아직도 백여 부 남았다.

형님, 잠깐 기다리세요. 제가 펴낸 수필집이 있거든요. 뭐 대단한 것은 아니고 살면서 느낀 생각들을 글로 적어놓은 것이지요. 차 트렁크에 두었으니까 지금 갖다 드릴게요. 이따가 드릴 수도 있지만 왠지 깜박 잊고 그냥 헤어질 것 같아서요.”

책을 썼다고? 너 대단하다야! 그럼, 그럼.”

나는 식당의 바깥 주차장으로 가다가 우선 화장실에 들러 마려운 오줌부터 눈다. 오늘 나는 술을 많이 마셨다. 고혈압이라 과음을 피해야 하는데 사촌형님을 만나는 날 하루는 어쩔 수 없다. 수필집 한 권을 차 트렁크에서 꺼내어 들고 식당 안으로 들어오는데 형님이 창가로 비껴드는 햇빛들을 얼굴 한 쪽으로 받으며 무슨 생각에 잠겨 있다. 어디서 본 낯익은 얼굴 모습이다. 오래 전 서울 미아리 집 안방에 퀭한 눈으로 누워 있던 큰아버지 얼굴이 아닌가. 형님 얼굴은 큰어머니 얼굴과 큰아버지 얼굴을 합친 제 삼의 얼굴생김인데…… 저렇게 햇빛을 비껴 맞으니까 이마 부분의 윤곽이 두드러지며 눈 주위가 퀭해 보이는 게 큰아버지 얼굴이다.

형님은 수필집을 받자, 표지에 박힌 내 이름을 보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말한다.

그럼, 그럼. …… 너도 작은아버지 피를 이어받은 게지. 작은아버지야말로 불우한 예술인이 아닌가? 집안이 몰락하면서…… 쓸쓸하게 인생을 보내고 마신 거지. 나도 말이야, 원래 인문계이거든. 그래서 법학이라든가 이런 쪽으로 나갔어야 하는데 우리 어머니가 이러시는 거야. ‘너는 절대로 그런 방향으로 나가지 마라. 네 아비가 법대를 나왔다지만 집안 꼴이 이게 뭐냐? 너는 공대를 가라.’그래서 내가 공대를 나왔다는 게 아니냐? 내가 미국에서 되돌아온 뒤에 벌인 사업이 컴퓨터 관련인 게, 그런 내력이었다고.”

형님이 컴퓨터 부품 관련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내력까지 얘기 듣는 것은 오늘 술자리가 처음이다.

제가 지루하게 글 쓰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 수필집을 꼭 읽어 보세요. 아마 재미있을 겁니다.”

그럼, 그럼. 내가 이따가 서울로 갈 때 기차 안에서 읽어 봐야지. 참 그리고 너 말이야, 절대 그 차를 몰고 가면 안 돼. 음주운전은 정말 조심해야 돼.”

그럼요, 차를 여기 주차장에 그냥 두고 갈 겁니다. 걱정 마세요. 자 그럼…… .”

중단했던 사업을 재개하는 양 우리는 자세를 가다듬고는 술잔을 들어 부딪친 뒤 마시기 시작한다.

형님을 뒤늦게나마 만나게 된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자칫 더 늦었더라면 사촌 간인데도 우리는 영영 만나지 못하고만나지 않고라고 해야 맞는 말이 아닐까?그냥 살다가 세상을 각기 떴을 수도 있었다. 뒤늦게나마 이런 만남을 잇게 된 것은 할아버지의 유일한 유산 때문이다.

큰어머니가 춘천 일대의 유산들을 남김없이 팔아치웠음에도 작은 산 하나가 살아남은 것은 할아버지가 선산으로 조성해 놓은 때문이었다. 내게 증조부모가 되는 분들의 봉분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후손들도 그런 용도로만 쓰도록 했다. 선대의 유산들을 팔아치우는 일에 날고 기던 당신의 큰며느리라 할지라도 그 선산만은 어쩔 수 없이 남겨둘 수밖에. 춘천 중심부에서 삼십 리 떨어진 변두리 선산이…… 오랜 세월이 흘러 중심부에 근접하게 되자 수억 대 지가의 부동산으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공시지가로 몇 억이 넘는, 춘천의 친척들이 종중소유로 쓰는 산. 삼십 년 가까이 소식 없이 지내던 사촌형님이 뒤늦게 내 앞에 나타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당신도 종중 임원으로 들어오겠다며, 종중 대표로 되어 있는 나를 찾았다.

물론 춘천의 친척들과 왕래를 끊고 지낸 것을 형님의 잘못이라고 몰아 부칠 수도 없는 집안 내력이었다. 할아버지의 유산 처분을 두고 불편한 가족사가 전개되던 중에 둘째 사촌누나가 미군장교와 결혼하게 되자, 그것을 기화로 큰집 식구들 모두가 미국으로 이민 가 버리면서…… 우리 어머니나 아버지, 큰아버지의 죽음이 있었음에도 서로 간 그 사실도 모르고 지냈을 정도로 영영 남이 되어 버린 사촌 간이었다. 그런데 뒤늦게 종중 선산의 소문을 듣고 초로의 모습으로 나타난 사촌형님.

알고 봤더니 형님은 미국에서의 생활에 적응이 안 되자 당신의 가족만 끌고 한국으로 되돌아온 경우였다. 그 사실도 모르고 지냈으니 얼마나 정 없는 사촌형제간 집안이던가. 솔직히, 처음 상면하게 되었을 때에는 반갑지도 않고 심지어는 적개심마저 느꼈던 나였다. 상면 전에 법적 대응부터 알아본 결과 이십 년 이상 소식이 없었다면 종중 원으로서 제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 그 자격을 부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자문까지 얻어 놓은 터였다. 막상 형님을 만나 바로 이 식당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지난날의 얘기들을 나눈 나는, 그런 부질없는 법적 대응 따위를 잊기로 했다. 몇 십 년 만에 만나는 형님한테 반갑다는 말은 못할지언정 그건 할 짓이 아니었다. 다 술잔에 담아 비워 버리기로 했다.

집안 간의 편치 않은 갈등으로 오랜 세월 지내왔기에, 솔직히 형님과 나는 공감할 지난날의 얘깃거리도 마땅한 게 없었다. 그 겨울 두 달을 함께 보낸 추억마저 없었더라면 우리의 술자리는 어떡할 뻔했는가! 오십 년 세월 뒤에 이렇게 사촌 간 화기애애한 술자리 만남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유일한 단초를, 우리 아버지가 마련해 주었다는 그 기막힌 사실.

당신의 자식들에게 무능하기 이를 데 없었던 아버지. 그 겨울방학에는 당신의 일방적인 생각 하나로 아들을 편치 않은 큰집에 두 달이나 짐짝처럼 맡겨두었었다. 내가 자의식이 팽창하던 사춘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아버지를 경멸하거나 외면하기로 일관한 것은, 그 겨울방학에 눈 내리는 허허벌판을 보며 가지게 된 감정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나를 짐짝처럼 내던져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겨울에.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할아버지의 당부로 가미가제 특공대에 갈 수밖에 없었다는데…… 감히 그런 사건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 겨울 서울의 미아리 큰집에 잘못 배달된 물건처럼 혼자 가 있던 아들의 심정을 어쩜 그리도 당신은 헤아리질 못했을까?‘헤어지기 섭섭해서 망설이는 나에게, 굿바이 하며 내미는 손, 검은 장갑 낀 손…….’눈 내리는 허허벌판에 서 있을 때 들려오던 그 노래. 다시 생각해 보면 부근에 전축가게 따위가 있을 데가 아니었으니까 내 마음 속으로 떠올려 보던 노래일 가능성이 높다. ‘할 말은 많아도 아무 말 못하고, 돌아서는 내 모양을…….’

아니, 너 웬 눈물이냐?”

형님이 묻는 말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숯불이 매워서…….”

내 말에 형님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 둔다. 그런 형님의 얼굴이, 옆의 창으로 깊이 비껴드는 햇살에 이마 부분 윤곽이 짙어지면서 그 옛날의 큰아버지 얼굴 모습과 더욱 닮았다. 이런 이상한 생각이 든다. 큰아버지와 우리 아버지 둘이 햇살 따듯한 창가에 다정히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는. 나는 다시 눈물을 글썽거리고 형님은 난감한 낯으로 그런 나를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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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우 2017-03-01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고 갑니다.
마음에 잔잔한 정서가 밀려오는군요.
누구에게나 비슷한 경험이 있기 마련이어서 일까요?
건강하시길~~

ilovehills 2017-03-02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 집안의 어떤 내력이 적지 않이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ilovehills 2017-03-02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 후로 여러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건 나중에 ‘제 2편‘으로 쓰려고 합니다. 언제가 될지, 기다려주기 바랍니다.
 

  

꿩 가족들을 본 지 두 달이 돼가도록, 산짐승들과 맞닥뜨리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럴 만했다. 초가을로 접어들며 날씨가 쌀쌀해지자, 뱀들이 지난여름처럼무더위에 지쳐 아무 데서 오수를 즐기거나 길을 잘못 들어 비탈길로 들어서는 등의 허점을 보일 리가 없었다. 머지않은 겨울을 대비해 겨울잠에 필요한 영양분을 축적하려고 먹이 사냥에 바쁠 참이었다.

그래서일까, K는 평탄한 산길을 가다가뭘 물고 부리나케 가로질러가는뱀을 보게 되었다. 몸 무늬가 아름다운 작은 화사였다. 놈은 작은 아가리 넘치게 송장메뚜기 한 마리를 물고 있었다. 모처럼 잡은 먹이를 남한테 뺏기지나 않을까, 꿈틀거리며 달아나느라 아주 바빠 보였다.

K는 어처구니없어 피식 웃었다. ‘그래, 내가 그깟 송장메뚜기를 탐한단 말이냐?’

놈이 이런 말을 하며 수풀 속으로 달아난 듯도 싶었다.

이거, 내 꺼야!”

급히 스치는 풀잎들 소리에 뱀이 하는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마치 길 가는 행인이 K에게 뭐라고 떠들며 급히 지나간 경우처럼.

다시 며칠이 지났다.

K는 비탈길 산에 올랐다가 이번에는 깃털 화려한 장끼를 만났다.

먼 산부터 가까운 산까지, 밀려오는 파도들처럼 보이는 벼랑 위 넓적한 바위에 잠시 앉아 쉴 때였다. 이 바위는 봉우리에서 비탈길로 내려가기 직전에 있다.

K가 먼 풍경을 바라보다가 어떤 느낌에 뒤돌아봤더니 장끼 한 마리가 삼사 미터, 싸리나무와 철쭉나무가 우거진 곳에 있었다.

K와 장끼는 서로를 보았다. 장끼는 눈이 대가리 전면이 아닌 측면에 있으니,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K를 보았다. 뱀이었다면 기겁했겠지만 꿩이니까 K는 편안한 마음으로 대면했다.

잠시 후 장끼가 고개는 그대로 두고 몸통만 뒤로 천천히 돌리며 말했다.

가 보겠습니다.”

마침내 고개까지 뒤로 돌린 장끼가 철쭉나무 아래로 사라져갔다.

K도 고개를 돌렸다. 다시, 밀려오는 파도 같은 산들을 바라보다가 바위에서 일어났다.

조심스레 비탈길을 내려왔다. 지난여름, 동행하던 뱀이 어줍게 숨던 작은 푸른 수풀더미도 이제는 누런 건초뭉치로 변해 있었다.

나무마다 단풍든 잎들을 점묘화의 점들처럼 조용히 떨어트렸다.

K는 낙엽 지는 가을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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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높은 나무 위의 까마귀들, 산길에 떨어진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들, 청설모들이 K를 볼 때마다 떠들기 시작한 것이다.

저 사람, 오늘도 왔네.”“그러게 말이야.”“저 사람은 해코지 할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까 아무 걱정할 것 없어.”“맞아 맞아.”“웃기고 자빠졌네. 저러다가도 갑자기 해코지할지 모른다고!”“무슨 쓸 데 없는 소리!”

K는 어이없어 발길을 멈추었다. 산짐승들은 이내 숨죽이고 K의 눈치를 살폈다. 긴장된 침묵의 공간을 K는 지팡이로 가볍게 저은 뒤 다시 산길을 걸었다. 산짐승들이 등 뒤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깊어가는 가을 산을 K는 말없이 다녔다.

주로 비탈길 산을 다녔다.

비탈길 산 등산은 봉우리 아래 넓적한 바위에 앉아 쉬며, 먼 풍경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지팡이의 뾰족한 끝이 닳아 무뎌질 무렵 밤새 찬 서리가 내렸다.

오늘, 웬 일로 이른 아침부터 비탈길 산을 오르는 K였다. 워낙 된서리라 부근 풍경은 뿌옇기만 했다. 서리에 산길 바닥의 낙엽이 축축하게 젖어, 미끄럽기까지 했다.

산길 위로 뻗은 잣나무 가지 위에 청설모 한 놈이 앞발을 모으고 앉아, K를 지켜보았다. 된서리로 뭉개진 주위 풍경 속에서 놈은 마치 연극무대에 혼자 등장한 주인공 같았다.

조심성이 있는 놈이라면 K를 본 순간 다른 높은 가지로 이동해야 했었는데…… 가까이 다가오는 K를 미동도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K는 놈의 검정콩 같은 두 눈알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짚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놈을 때려잡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래도 놈은 겁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늘 말없이 지나다니기만 하는 K를 믿은 것일까?.

서로 눈길이 마주치자 놈이 말했다.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어요?”

K는 가슴이 아팠다. 맞는 말이었다. 오전 열한 시는 넘어서 오르던 산길을, 오늘은 여덟 시도 되기 전부터 올랐으니. 된서리에 해가 보이지 않을 뿐 이른 아침이었다.

딸애가 이상해져서 집에 있지 못하겠더라고……

라는 말을 털어놓으려다 창피하단 생각에 K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없이 청설모가 앉아 있는 그 나뭇가지 아래를 지나갔다.

지나간 뒤 생각했다. ‘내가 그 말을 청설모 놈한테 털어놓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랬다가는, 놈이 놀라 다른 나뭇가지 위로 부리나케 달아났겠지. 그 사연에 놀란 게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내 말소리 때문에. 워낙 조용한 산길이니까.’ 

 

 

< 무심 이병욱의 단편소설 '가섭 별전'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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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이 지났다.

소나무 등걸에 부딪쳐 멍들었던 어깨도 좋아지자, 답답한 아파트에 있을 수가 없었다. 아내가 출근하고 삼십 분 뒤인, 열시 반에아들애 방에서 나온 K는 혼자 아침밥을 차려먹고 등산 갈 채비를 하였다.

아들애가 자원입대하며 비워진 방에서 K는 혼자 지내는 것이다. 거실에 있던 텔레비전도 그 방에 갖다 놓고 지낸다. 텔레비전을 볼 여유도 없어 보이는 다른 가족들이었다. 안방은 본의 아니게 아내의 독차지가 되었고 딸애는 제 방이 있었다. 남은 가족 세 사람이 방 하나씩 쓰는 셈이었다.

K의 배낭 속에는 냉수를 담은 수통과 건빵 한 봉지가 들어 있다.

오늘은 발코니를 뒤져, 예전에 장만했던 등산용 알루미늄 지팡이도 찾아 들었다. 뱀들과 잇달아 맞닥뜨리자, 호신용으로 챙긴 것이다.

시내버스를 탔다.

더욱 푸르러진 비탈길 산, 아래 정류장에서 내린 뒤 지팡이를 쥐고 등산을 시작했다.

해발 오백이십 미터 봉우리까지 올랐다 하산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청설모 다람쥐 까치들이 눈에 띄고, 고라니 같은 게 숲속에서 후다닥 달아나기도 했지만 별 일은 없었다.

그럴 만했다. 산짐승들과 사람이 맞닥뜨리는 일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 보름 간격으로 뱀들과 맞닥뜨린 사실은 어떻게 된 것일까? K는 세 가지 원인으로 분석해 보았다.

첫째, 뱀이란 존재는 다른 산짐승들에 비해 움직임이 느린 짐승이었다. 다른 산짐승들은 사지가 있어 사람과 맞닥뜨릴 것 같은 순간 잽싸게 달아날 수 있지만 뱀은 그렇지 못했다. 몸통을 구부렸다 폈다 하며 이동할 뿐이니, K와 본의 아니게 맞닥뜨리기도 했다는 형태적 시각의 분석이다.

둘째, 뱀과 맞닥뜨릴 때마다 몹시 무더운 날씨였다. 그런 날씨에는 산새들도 지저귀지 않고 나무그늘에서 조용히 쉬었다. K가 이 년째 산을 다니며 깨달은 사실들 중 하나다. 장끼 정도가 까투리들한테 존재감을 과시하듯 꿔엉!’ 하고 울 뿐, 대다수의 산새들은 나무그늘을 찾아 조용히 쉬고 있었다. 새라고 해서, 쉬지 말고 종일 지저귀라는 법이 있는가?

무더운 날씨일 때 변온동물인 뱀은 오죽 힘들까.

먹이구하기도 멈추고 시원한 그늘을 찾아 오수를 즐기거나, 너무 무더운 탓에 제 정신을 잃고 가파른 비탈길로 잘못 들어서거나, 했다가 K와 맞닥뜨린 것이다. 기후변화에 원인을 둔 분석이다.

셋째, K가 산에 오르는 날들이 하필 평일이었다.

주말마다, 전국의 산에는 검은 등산복들을 단체로 맞춰 입은 것 같은 직장인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명산들은 물론이고 도심 근교의 산들까지 주말에는 일주일 간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려는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와 냄새로 넘쳐났다. 산짐승들이 그런 주말이면 본능적으로 조심해 지내리라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K는 평일에 혼자 조용히 산을 다니니, ‘사람들이 붐비는 날이 아니니까 마음을 놓아도 되겠지.’생각하며 해이해져 있던 뱀들과 맞닥뜨리고 말았다는 분석이다.

이 마지막 분석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K는 스스로 폄하했는데…… 그렇지만도 않았다.

며칠 후, ‘먹구렁이가 오수를 즐기던 산에 오르다가 꿩 가족과 맞닥뜨린 것이다. 물론 평일이었다. 주말이었다면 많은 등산객들이 졸지에 고생했을 것이다. 오후 들어 소나기가 갑자기 쏟아졌기 때문이다. 마침 K는 시내버스에서 내린 직후여서 정류장 건물에서 소나기를 그을 수 있었다.

비가 그치자 K는 등산을 시작했다. 산길이 질퍽거리고 젖은 풀잎들이 발목에 차여, 다른 등산객이었더라면 등산을 단념하고 귀가했을지도 모른다. 귀가해도 딱히 할 일이 없는 K였기에 등산을 강행했다.

지팡이에 의지해 조심스레 산을 오르던 K는 봉우리가 보이는 오솔길에 이르렀을 때 꿩 가족과 맞닥뜨린 것이다.

좁은 오솔길을 어미인 까투리가 막 건넜는데 새끼인 꺼병이들이 미처 뒤따르지 못하고 남아 있었다. K가 갑자기 나타난 탓이었다. 하긴, 소나기까지 내린 평일 오후에 등산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안전한 수풀 속에서 새끼들과 잘 지내던 꿩 가족이 마음 놓고 바깥여행에 나선 것은 그 때문이었다.

갑작스런 사람의 등장에 놀라 좁은 오솔길을 넓은 횡단보도인 양 건너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꺼병이들과, 가슴 졸이며 지켜보는 까투리. 애타는 장면을 얼떨떨하게 지켜보고 선 K에게 까투리가 불쑥 말했다.

좀 봐 주세요. 우리 애들 길 좀 건너게요.”

흉측한 생김의 뱀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K는 난데없는 까투리의 말에 놀라긴 했지만 소름끼치지는 않았다. 아무 동작도 않고 장승처럼 서 있음으로써, 까투리의 간청을 받아들였다. 꺼병이들이 부리나케 오솔길을 건너 어미 곁으로 가더니 함께 숲속으로 사라졌다.

예전의 K였더라면 까투리와 꺼병이들을 잡으려고 난리쳤을지 모른다. 잡아 봐야 제대로 요리해 먹을 수도 없으면서, 피 끓는 수렵본능에 피투성이 참극을 저질렀을 게다. 그러나 이 년째 산을 다니면서 K는 자신도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K는 꿩 가족에게 선행을 베풀었다는 생각에 흐뭇한 마음으로 봉우리에 올랐다. 소나기에 한층 푸르러진 주위 풍경을 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빗물에 젖은 하산 길은 몹시 미끄러웠다. 지팡이를 짚어가며 한 발 한 발 내려오다 결국 젖은 돌에 미끄러져 진창길에 주저앉았다.

과연, 우천 시에 등산하는 게 아니었다.

그나마 뱀들을 만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뱀들은 소나기에 체온이 저하되자, 바위 아래 같은 데 들어가 어서 볕이 쨍쨍 나기만을 바라고 있지 않을까?

K는 진흙 묻은 바지와 등산화를 냇물에 닦으며 뱀들의 처지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참 이상한 K의 변화였다.

 

사진 자료 :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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