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높은 나무 위의 까마귀들, 산길에 떨어진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들, 청설모들이 K를 볼 때마다 떠들기 시작한 것이다.

저 사람, 오늘도 왔네.”“그러게 말이야.”“저 사람은 해코지 할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까 아무 걱정할 것 없어.”“맞아 맞아.”“웃기고 자빠졌네. 저러다가도 갑자기 해코지할지 모른다고!”“무슨 쓸 데 없는 소리!”

K는 어이없어 발길을 멈추었다. 산짐승들은 이내 숨죽이고 K의 눈치를 살폈다. 긴장된 침묵의 공간을 K는 지팡이로 가볍게 저은 뒤 다시 산길을 걸었다. 산짐승들이 등 뒤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깊어가는 가을 산을 K는 말없이 다녔다.

주로 비탈길 산을 다녔다.

비탈길 산 등산은 봉우리 아래 넓적한 바위에 앉아 쉬며, 먼 풍경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지팡이의 뾰족한 끝이 닳아 무뎌질 무렵 밤새 찬 서리가 내렸다.

오늘, 웬 일로 이른 아침부터 비탈길 산을 오르는 K였다. 워낙 된서리라 부근 풍경은 뿌옇기만 했다. 서리에 산길 바닥의 낙엽이 축축하게 젖어, 미끄럽기까지 했다.

산길 위로 뻗은 잣나무 가지 위에 청설모 한 놈이 앞발을 모으고 앉아, K를 지켜보았다. 된서리로 뭉개진 주위 풍경 속에서 놈은 마치 연극무대에 혼자 등장한 주인공 같았다.

조심성이 있는 놈이라면 K를 본 순간 다른 높은 가지로 이동해야 했었는데…… 가까이 다가오는 K를 미동도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K는 놈의 검정콩 같은 두 눈알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짚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놈을 때려잡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래도 놈은 겁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늘 말없이 지나다니기만 하는 K를 믿은 것일까?.

서로 눈길이 마주치자 놈이 말했다.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어요?”

K는 가슴이 아팠다. 맞는 말이었다. 오전 열한 시는 넘어서 오르던 산길을, 오늘은 여덟 시도 되기 전부터 올랐으니. 된서리에 해가 보이지 않을 뿐 이른 아침이었다.

딸애가 이상해져서 집에 있지 못하겠더라고……

라는 말을 털어놓으려다 창피하단 생각에 K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없이 청설모가 앉아 있는 그 나뭇가지 아래를 지나갔다.

지나간 뒤 생각했다. ‘내가 그 말을 청설모 놈한테 털어놓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랬다가는, 놈이 놀라 다른 나뭇가지 위로 부리나케 달아났겠지. 그 사연에 놀란 게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내 말소리 때문에. 워낙 조용한 산길이니까.’ 

 

 

< 무심 이병욱의 단편소설 '가섭 별전'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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