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사연이다.
본래 우리 집은 춘천 시내에서 사십 리쯤 떨어진 시골에서 살았다. 그곳의 조그만 초등학교에서 나는 항상 반장이었는데 그럴 만했다. 많지 않은 학우들 중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기 때문이다. 시골학교에서 공부 잘하면 반장을 맡기 마련이라, 나는 장장 육 년 간이나 반장을 맡았다. 그러니 얼마나 숱하게 칠판 앞으로 나가서 학우들을 향해 뭘 발표하고 그랬을까? 의기양양해서 말이다.
그런데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의기양양하게 발표하는 위치’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아버지가 ‘오남매나 되는 자식들의 장래를 위한’ 결단으로 시내로 이사를 강행하면서 시내의 중학교를 다니게 된 나는 발표는커녕 아무 말도 못하고 조용히 지내는 아이가 되고 만 것이다. 시내 학교에서는 나 정도로 공부하는 애들이 널렸을 뿐만 아니라 나보다 더 잘하는 애들도 많아서 나는 그만 기가 콱 죽었다. 더는 칠판 앞에 나가서 발표할 일 없는, 반장이 아닌 극히 평범한 아이로 추락한 것이다.
그런 공부 차원의 이유 이외에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어렵게 된 가정형편이 그것이다. 시내로 이사 온 뒤 아버지가 차린 연탄직매소가 망하면서 어머니가 어느 식당의 주방보조 일로 집안의 생계를 맡게 되었다. 가정형편이 안 좋게 되자 나는 그 영향으로 하루 종일 학교에서 말이 없는 내성적인 아이가 되고 말았다.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처지에 툭하면 말다툼이던 부모님, 교복이라고는 외삼촌의 낡은 교복 한 벌을 얻어 입고서 등교하던 나, 학기 초마다 장남인 내 등록금은 마련되었지만 누나나 여동생은 계집애라는 이유로 그렇지 못해 자매가 집 앞 골목에서 동네 창피하게 울고불고 난리치던 일……. 정말,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단 하나도 추억하고 싶은 게 없다. 돌이켜보면 그런 열악한 가정형편에서, 학비가 저렴한 사범대학일망정 어떻게 진학할 수 있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부모님이 ‘어떻게 해서든지 장남 하나만은 대학교에 보내자’고 뜻을 모은 것일까? 그 순간만은 부부싸움을 멈추고?
여하튼 그런 사연을 지닌 채 대학에 들어왔는데, 그 날, 최봉석 녀석이‘미소’를 지어가며 공자 왈 맹자 왈 떠들어대는 것을 목격하고는 ‘저깟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충동에 휩싸이면서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발표에 나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