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최종남 선배를 알게 되기는 1972년경이다. 석사동 어느 막걸리 집에서 외수 형을 알게 된 후 동기인 최 선배까지 자연스레 알게 된 거다. ( ‘이외수 작가이외수 선배라고 불러야 옳지만 나는 그게 안 된다. 외수 형과 그 추운 1973년 겨울을 함께 나면서 그리 된 거다. , 73년 춘천의 겨울. 형과 나는 망한 연탄직매소의 남은 연탄들을 팔려고 수레도 끌고 다녔다. 그 춥고 고생스럽던 겨울 얘기도 한 번은 소설로 써야 하는데) 최 선배는 이후 춘천의 모 사립고에 국어교사로 근무하게 되면서 춘천지역의 소설가로서 외수 형과 함께 확실한 자리를 잡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강원도 내 시골 학교들을 4,5년 주기로 전근 다니면서 국어교사를 했다. 공립학교 교사이기 때문이다.

최 선배가 거주지를 옮기지 않고 안정되게 근무하는 사립학교 교사였던 때문일까, 부단히 소설들을 써서 발표했다. 그 결과 소설 한 편 쓰지 못하고 교직생활을 한 나와 위상이 달랐다. 지역에서 소설가 최종남을 모르는 이가 없었던 까닭이다. 내가 2004년 명퇴 후 12년만인 2016, 첫 작품집을 내면서 최 선배와 정식으로 같은 소설가로서의 교류가 시작됐지만 친분(親分)까지는 못 되다가뒤늦게 친분을 쌓는가 싶더니 그렇게 병석에 누운 것이다.

최 선배를 함께 문병하고서 이 선배는 다른 바쁜 일로 나와 별 얘기도 나누지 못하고 황황히 수원으로 돌아갔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17일이다. 최 선배의 부음을, 이 선배가 가톡으로 내게 알렸다. 조영남의 옛 생각노래와 함께.

 

이도행 선배 : 평생의 글벗이자 동기인 소설가 최종남이 어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노래는 친구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으며 저와 듀엣으로 자주 부른 노래라 돌아올 수 없는 먼 길 떠난 친구 영전에 바칩니다. 전 잠시 후 춘천 고은리 ''장례식장으로 출발합니다.

: 참 안타깝습니다. 저도 오전 중에 효 장례식장에 문상 가겠습니다.

이도행 선배 : 내가 오후 110분에 춘천역 도착하니 같이 문상 가면 어떻겠는지?

: , 그리하겠습니다. 그런데 자가용차가 아닌 전철로 오는 겁니까?

이도행 선배 : 동기 희곡작가 안성희군이랑 전철로 갑니다. 집사람은 중요한 선약이 있어서 나만 가는 거죠.

: 그럼 그 시간에 제가 춘천역 앞에서, 차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내가 쓰는 장편이 구성단계 중 위기에 들어갈 참이다. ‘주인공을 돕는 박쥐나방동충하초 회사의 사장이 행방불명되고, 사장의 빈자리를 노리는 자들의 갈등이 본격화되는 중이다. 예전 같았으면 이 선배가 어떤 내용의 카톡을 보내도 나도 모르게 신경질을 냈거나 아예 카톡을 받지 않았거나 했을 게다. 하지만 지난 7월의 사건 이후 나는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두 번 세 번 혼자서 다짐한 터!


https://youtu.be/zSnwe_O94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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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성각 후배(소설가. 현재는 환경운동에 매진하고 있다.)를 한 번은 만날 거라 생각했다. 다른 데도 아닌 춘천의서면 어느 마을에 와 살고 있다니(박기동 시인이 전한 소식이다.) 머지않아 만나게 되겠지 한 것이다. 그러면서 삼사 년이 그냥 흘렀다.

 

나는 티베트 불교의 김규현 법사를 한 번은 만나고 싶었다. 2016년에 첫 작품집을 낼 때 티베트 천장사를 주인공으로 한 라싸로 가는 길을 쓰면서부터다. 티베트 관련 서적들을 구해 그 지역의 문화(특히 천장 풍습)를 공부한 뒤 썼지만 아무래도 미진한 마음이었다. ‘룽다타르쵸는 어떻게 다른지, ‘티베트 불교를 밀교라고도 하는데 왜 그런지등등 김규현 거사를 직접 만나 봬야 해소될 물음들이었다. 하지만 김 거사는 무슨 일인지 저 먼 네팔에 가 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나는 2018년에 두 번째 작품집을 내면서 먼동이라는 티베트 천장사의 행로를 썼다. 티베트에 가보지도 않고 관련서적의 지식에다가 상상력을 보탠 그 먼동에 지인들이 두 번째 작품집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재미있는 작품이었다!’고 좋아하는 데 나는 놀랐다. 하긴 첫 번째 작품집의 라싸로 가는 길역시 반응이 좋았다. 그 때문에 2년 지나 먼동을 쓴 것이지만.

이래저래 나는 김규현 거사를 한 번은 만나봐야 했다. 하지만 네팔이란 먼 나라를 그 용건 하나로 찾아가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편하게 결론 내렸다. ‘연이 닿으면 만나겠지.’

 

나는 마임이스트 유진규씨를 한 번은 만나보고 싶었다. 물론 그를 TV에서 자주 봤고 내가 사는 춘천 어느 동네에 살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지만실제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나의 이런 말에 누군가가 질문할 수 있다.

아니, 춘천에 살면서 유진규씨 마임공연 한 번 못 봤단 말이오?”

그렇게 됐습니다.”

 

202076일 밤이다. 나는 아내와 함께 서면에 있는 나비야 게스트 하우스에 갔다가 그 세 사람을 한꺼번에 만났다. 40여 년 전 강릉 단오제가 열리는 남대천 어느 카페에 마주앉아 대작하던 추억이 여태 생생한 최성각 씨. 티베트 천장사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을 쓰게 되면서 한 번 만나 뵀으면 한 김규현 거사. 마임이스트 유진규 씨. 그리고 다른 좋은 분들.

모두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숲이 가까이 있어 모기들이 성가시긴 했지만 즐거운 밤이었다. ()들이 모인 기념비적인 밤.

그 밤의 장면들을 내 아내가 사진으로 담았다.

 

 

덧붙임: 내 평생 게스트 하우스라는 데를 가보기는 처음이었다. 게스트 하우스는 우리말로 나그네들이 묵는 집이 아닐까?

그 날 밤 나그네들이 연을 따라 그 집에서 만났다. 나그네. 우리는 사실 이 세상에 온 나그네다. 세상 뜰 때 아무 것도 갖고 가지 못한다. 하긴 세상에 태어날 때도 아무 것도 지니지 않았던 것을.

공수래공수거.

그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202076일 나비야 게스트하우스의 밤이 추억으로 깊게 남을 거라 여기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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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어쩐다?’고 난감해지기는 오후 1시가 막 지나서다. 그 때까지 장편소설을(임시제목 박쥐나방동충하초’) 쓰느라 아무 생각이 없었다. 지난 2월말, 200자 원고지로 1000매쯤 되는 장편 완성을 목표로 시작한 집필이 500매쯤 됐다. ‘티베트의 오지 마을에서 친구 따라 먼 여행길에 나선 주인공이, 친구가 자기 목숨을 노리고 여행 동반을 제의했음을 깨닫고 탈출하면서 빚어지는 갖가지 사건들을 한창 써나가는 참이었다. 내가 아는 원로 문인께서 사실 문학하는 사람은 정신이 어딘가 이상한 사람이다고 말씀한 적이 있는데 정말 나는 며칠째 밤잠을 설쳐가며 정신이 어딘가 이상한 사람의 짓을 한창 하는 중이었다

어쨌든 겸사해서 춘천에 온 김에 얼굴이라도 보려고 전화한 이 선배한테 나는 잘못을 해도 수준 낮은 잘못을 했다. 지난번 카톡으로 이 선배가 나중에 만나면 듣고픈 얘기가 많네.’ 했던 대목까지 뒤늦게 떠올랐다. 몰랐던 우리 아버지에 얽힌 얘기들을 제대로 편하게 듣고 싶어서 전화한 것을 그렇게 퉁명스레 대했으니.

이를 어쩐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고자 했다. 급히 전화했다.

선배님, 접니다. 지금 어디 계세요? 제가 점심을 대접하고 싶거든요.”

그러자 이 선배가 먼저 작은 목소리로 아내 분한테 거 봐. 당신이 오해하는 거야.’ 말하곤 이내 서둘러서 내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차 안에 있네. 수원으로 돌아가는 중일세. 춘천 일을 대부분 봤거든.”

이 선배는 차 운전을 하지 않는다. 아내 분이 운전한다. 차를 구입할 때만 해도 이 선배가 술을 즐겼던 게 아닐까. 그래서 차 운전을 아내 분이 맡는 거로 정해진 게 아닐까.

점심도 대접하지 못하고 선배님! 죄송해서 어쩌지요?”

, 다음에 또 볼 텐데.”

그렇게 모처럼 춘천 온 이 선배 내외분한테 나는 점심 대접도 못하고 황황히 보내드리고 말았다.

솔직히 나 같으면 두 번 다시 그런 후배와는 만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선배는 이해하고 넘어갔다. 세 달 후인 10 11, 이 선배가 다시 춘천 오면서 내게 전화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딱부리(이 선배가 즐기는 최종남 작가의 별명이다.) 최종남이가 강대 병원에 입원했다 거든. 기흉이 악화된 거지. 이번에 안 보면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문병 가려는데 바쁘지 않으면 동행해도 좋소.”

바빠도 동행해야죠.”

최종남 선배와 나는 지난 5월에 후평동의 연당막국수 집에서 점심을 같이한 데 이어 9월 중순에 김유정 문학촌에서 중고등학생 대상 글짓기 심사를 함께 맡게 되면서 알게 모르게 가까워진 사이. 바로 열흘 전인 10 2일에 문학촌 행사장에서 앉을 자리를 찾아 서성이는 나를 보고 최 선배가 손수 빈 의자를 마련해 주면서 하던 말이 여태 생생하다. 창백한 안색에 숨도 편히 못 쉬는 채로 말이다.

 앉아.”

 

그런지 열흘도 안 돼 강대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이다.

산소호흡기 줄과 링거 줄은 기본이고 그 외도 여러 생명 유지 장치에 매여 병상 침대에 누인 최 선배. 이 선배를 먼저 만나고는 다음으로 내게 손짓해 가까이 다가오도록 했다. 너무나 딱한 모습에 할 말을 잃은 내게 안경도 쓰지 않은 창백한 얼굴로 겨우 말했다.

우리는 너무 늦게 만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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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차 이 선배가 살아온 삶의 여정을 알게 됐다. 이 선배는 한 때 벽산그릅 홍보실에서 직장생활을 한 적 외에는 오로지 소설만 쓰는 생활이었다.

전업 작가.

극소수 인기작가 이외에는 절대로 생업이 될 수 없는 처지. 그래서일까 이 선배는 페북의 프로필에 이런 소개를 짤막하게 적어놓았다.

‘1969년 이후 극빈의 소설가

가족까지 거느린 가장으로서 얼마나 고달픈 삶일까. 숱하게 원고지 앞에서 고뇌하며 보냈을 불면의 밤. 이런 짐작은 내 지난 시절 아버지의 삶을 절절이 겪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결과 아버지는 내게 반면교사가 되었다.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 나는 학창시절의 유일한 낭만인 문학을 접고서 직장(교직)에 나갈 태세에 들어갔다.

 

7 2일에 서울 다녀온 뒤 한동안 이 선배와 나 사이에는 우리 아버지 얘기가 카톡으로 오갔다. 다음은 그 중 일부다.

 

 : 1992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실 무렵에 종중관련 문제로 장남인 저의 도장을 받으려고 시골의 제 직장(○○고등학교)으로 서류를 우편으로 보냈었지요. 그런데 우편봉투의 발송인과 수신인을 잘못 적어 다시 고쳐 적었더라고요. 아버지가 영락한 처지이지만 대학을 나온 고학력자인데 이럴 수가 있나?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미 그 즈음부터 뇌졸중의 기미가 시작됐던 것 같습니다

이도행 선배 :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높은 도수의 알코올도 한 원인이라네.

 : 돌아가신 날이 제헌절 날인 717일입니다. 전 날 친구 분들과 막걸리 모임이 있었는데 그 날 거북한 속을 푸느라 그러셨는지 땡볕 아래 시내 거리를 열심히 걷다가 하필 ○○병원(할아버지가 납북되기 전의 집 터) 앞에서 쓰러지신 거죠. 평소에 혈압약을 드셨어요. 현재 저도 혈압약을 복용하는 신세라 술을 끊고 건강에 유의합니다.

이도행 선배 : 내 선친도 1970 717일 심근경색으로 운명하셨다네. 당시 난 임진강과 감악산에 주둔했던 25사단 71연대 근무중대 병기과 탄약계 사수였지. 연대장 인수인계 문제로 관보를 받고도 본인에게 통보하지 않다가 삼우재 전날에야 휴가증을 내주는 바람에 수류탄 연병장에 두 발 터뜨리고 열흘 휴가 뒤 귀대해서 입창 조치됐다고.

 : 그것도 참!

이도행 선배: 선친한테서 물려받은 것은?

 : 제가 결혼할 때, 가지고 계셨던 어느 화백의 한국화 한 점을 선물하셨지요. 그 외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도행 선배: 나중에 만나면 듣고픈 얘기가 많네.

 

이 선배 내외분이 다시 춘천에 오기는 7 12일이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 선배는 춘고 100년사 편찬 일로 모교(春高)에 몇 달에 한 번씩은 다녀가야 하는 입장이었다.

7 12일은 하필 초복 날이었다. 나는 그 사실도 모를 정도로 장편소설을 쓰느라 여념이 없었다. 2004 2월 교직을 명퇴한 이유를 더 늦기 전에 소설 쓰고 싶어서라고 주위에 공언까지 한 만큼 일단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아내조차 말붙이지 못한다. 신경이 칼처럼 곤두서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상황을 알 리 없는 이 선배가 그 날 오전 10시쯤 내게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했다.

방금 상춘했네. 그래, 어디서 만날까?”

그러자 나는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제가 지금 장편 쓰느라 바쁘거든요! 나중에 만나면 안 될까요?”

 그러지.”

정말 돼먹지 못한 후배로 오해 받을 짓이었다. 하필 복날이었으니 마치 보신탕 한 그릇 대접하기 귀찮아 저지른 짓 같았다. 우리 선친과의 인연까지 더해져 절대 이 선배한테 그래서는 안 될 언동이었다.

이를 어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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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춘고동창회 사무실에서 나는, 전 날 이 선배가 당부한 대로 갖고 간 책 두 권(‘숨죽이는 갈대밭‘K의 고개’)을 증정했다. 임원 분들이 차를 대접하며 다음 번 재경동창회보에 실을, 춘천을 소재로 한 수필을 한 편 써 보내 달라부탁했다. 용무를 떠나 우리 모두는 春高 선후배 간이다. 동문은 고향보다 객지에서 더 정겹다. 30여 분 환담을 나누고는 이 선배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울처럼 사람 많고 건물 많고 차들 많은 데가 또 어디 있던가. 나는 탁한 공기에 힘들었다. 어서 공기 맑은 춘천으로 내려가고 싶어졌다. 수시로 지하로 내려가 타야 하는 전철의 번잡함이란.

이 선배와 헤어져 청량리역으로 갔다. 여기서부터는 지상이다. 춘천 가는 전철에 올랐다.

건물과 차들 대신 짙푸른 녹음이 늘어가는, 춘천행 전철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김유정 문인비

1968년경 아버지는 예총 강원도도지부 사무국장이었다. 인구 10만의 지방도시 춘천을 널리 알리기 위한 방법을 찾다가 소설 동백꽃으로 유명한 30년대 작가 김유정을 떠올렸다. 향토 언론사 강원일보사의 협조를 얻어 김유정이 실레마을을 떠나 상경하기 전 날 마을 청년들과 함께 물고기를 잡았다는 강가(지금의 의암호 호숫가)’에 김유정 문인비를 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그에 따른, 춘천 홍보 효과를 겨냥한 것이다. 문제는 비 건립에 드는 자금이었다. 강원일보사는 약속한 자금을 댔지만 예총 쪽은 잘되지 않았다. 고민 끝에 아버지가 총대를 멨다. 거두리에 있는 야산 (625 전란 때 납북된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헐값에 판 것이다. 그 돈으로 김유정 문인비 건립 기금을 충당함과 동시에 현대문학사 발간으로 김유정 전집까지 냈고 남은 돈 몇 푼으로는 집에 전화기 한 대를 놓았다.

60년대 말만 해도 춘천에 전화기 있는 집은 얼마 안 됐다. 아버지는 다른 건 몰라도 예총 사무국장 집에 전화기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걸까? 당시 남들은 ‘30평 단독주택에 전화까지 놓은 집이라며 우리 집을 부러워했지만 실상은 전세 든 집이었으며 매 끼니를 걱정하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요즈음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 예총 일은 무보수 봉사활동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김유정 문인비는 세워졌다. 예총 사무국장으로서 아버지는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고 여겼다. 문제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어려운 생활형편.

김유정 전집이 잘 팔리면 도움이 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전집은 팔리지 않았다. ‘선대가 남긴 소중한 야산까지 팔았는데도 집에 생활비 한 푼 가져오지 못하는 한심한 가장이 우리 아버지였다. 가족들로부터 원망의 대상이 되면서, 통금 사이렌이 불 즈음에야 술에 취해 혼자 대문(그 낡은 철문이 한밤중에 내던 음산한 소리라니.)을 열고 귀가하던 아버지. 5남매나 되는 자식들과 어머니까지 6명 누구 하나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모두들 잠든 체 했다.

 

 

아버지는 되는 일도 없고 가족들로부터 소외되는 외로움을, 한참 후배(이도행 선배)와 막걸리를 마시며 달랬던 걸까? 1970년 여름에 내가 강대 1학년 생으로 동급생 박○○ 양과 조양인쇄소에서 교지 편집 일을 할 때, ‘이도행이란 독특한 이름을 들었는데도 금시초문이었던 까닭이 드러났다. 당시 아버지와 나(장남이다)는 부자지간이지만 몇 년째 일체 대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지나 김유정 추모제가 열리는 문학촌에서 처음 만난 사이일 수밖에.

 

https://blog.naver.com/ilovehills/221481803029

http://www.kimyouje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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