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춘고동창회 사무실에서 나는, 전 날 이 선배가 당부한 대로 갖고 간 책 두 권(‘숨죽이는 갈대밭’과 ‘K의 고개’)을 증정했다. 임원 분들이 차를 대접하며 ‘다음 번 재경동창회보에 실을, 춘천을 소재로 한 수필을 한 편 써 보내 달라’ 부탁했다. 용무를 떠나 우리 모두는 春高 선후배 간이다. 동문은 고향보다 객지에서 더 정겹다. 30여 분 환담을 나누고는 이 선배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울처럼 사람 많고 건물 많고 차들 많은 데가 또 어디 있던가. 나는 탁한 공기에 힘들었다. 어서 공기 맑은 춘천으로 내려가고 싶어졌다. 수시로 지하로 내려가 타야 하는 전철의 번잡함이란.
이 선배와 헤어져 청량리역으로 갔다. 여기서부터는 지상이다. 춘천 가는 전철에 올랐다.
건물과 차들 대신 짙푸른 녹음이 늘어가는, 춘천행 전철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김유정 문인비’
… 1968년경 아버지는 예총 강원도도지부 사무국장이었다. 인구 10만의 지방도시 춘천을 널리 알리기 위한 방법을 찾다가 ‘소설 동백꽃으로 유명한 30년대 작가 김유정’을 떠올렸다. 향토 언론사 강원일보사의 협조를 얻어 ‘김유정이 실레마을을 떠나 상경하기 전 날 마을 청년들과 함께 물고기를 잡았다는 강가(지금의 의암호 호숫가)’에 김유정 문인비를 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그에 따른, 춘천 홍보 효과를 겨냥한 것이다. 문제는 비 건립에 드는 자금이었다. 강원일보사는 약속한 자금을 댔지만 예총 쪽은 잘되지 않았다. 고민 끝에 아버지가 총대를 멨다. 거두리에 있는 야산 (6‧25 전란 때 납북된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헐값에 판 것이다. 그 돈으로 김유정 문인비 건립 기금을 충당함과 동시에 현대문학사 발간으로 ‘김유정 전집’까지 냈고 남은 돈 몇 푼으로는 집에 전화기 한 대를 놓았다.
60년대 말만 해도 춘천에 전화기 있는 집은 얼마 안 됐다. 아버지는 다른 건 몰라도 예총 사무국장 집에 전화기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걸까? 당시 남들은 ‘30평 단독주택에 전화까지 놓은 집’이라며 우리 집을 부러워했지만 실상은 전세 든 집이었으며 매 끼니를 걱정하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요즈음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 예총 일은 무보수 봉사활동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김유정 문인비는 세워졌다. 예총 사무국장으로서 아버지는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고 여겼다. 문제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어려운 생활형편.
‘김유정 전집’이 잘 팔리면 도움이 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전집은 팔리지 않았다. ‘선대가 남긴 소중한 야산까지 팔았는데도 집에 생활비 한 푼 가져오지 못하는 한심한 가장’이 우리 아버지였다. 가족들로부터 원망의 대상이 되면서, 통금 사이렌이 불 즈음에야 술에 취해 혼자 대문(그 낡은 철문이 한밤중에 내던 음산한 소리라니.)을 열고 귀가하던 아버지. 5남매나 되는 자식들과 어머니까지 6명 누구 하나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모두들 잠든 체 했다.
아버지는 되는 일도 없고 가족들로부터 소외되는 외로움을, 한참 후배(이도행 선배)와 막걸리를 마시며 달랬던 걸까? 1970년 여름에 내가 강대 1학년 생으로 동급생 박○○ 양과 조양인쇄소에서 교지 편집 일을 할 때, ‘이도행’이란 독특한 이름을 들었는데도 금시초문이었던 까닭이 드러났다. 당시 아버지와 나(장남이다)는 부자지간이지만 몇 년째 일체 대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지나 김유정 추모제가 열리는 문학촌에서 처음 만난 사이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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