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골학교에 전학 간 첫 날, 담임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그래, 어느 특활반에 가고 싶냐?”
“미술반입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뜻밖의 말씀을 하였다.
“미술반은 이미 인원이 꽉 차서 안 되니까…… 독서 3반에 가는 게 어떠냐?”
내가 ○○시의 그 유명한, 교대부속초등학교 미술반에서 활동한 어린이라는 걸 모르시는 걸까? 돌이켜보면 그럴 만했다. 담임선생님이 받아든 내 생활기록부에는 ‘특활부서: 미술반’이란 정도로 극히 간략하게 쓰여 있었을 테니까. 어쨌든 어린 나는 뭐라 해명할 엄두도 못 내고 풀죽은 목소리로 ‘네에.’하고 답했다.
독서 3반은, 금요일 6교시 특활시간에 모여서 아무 책이나 한 시간 동안 묵독하는 반이었다. 원래 한 반이었는데 희망 인원이 넘쳐나 ‘독서 1,2,3반’으로 나뉘었다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하나뿐이라는 ‘미술반’ 역시 각자 알아서 아무 그림이나 그리다가 종치면 끝나는 반이라 했다. 그런 식으로 특별활동에 관심 없는 학교라면 나의 특출한 그림 솜씨는 드러날 수가 없었다.
학급에서 교과학습으로 하는 미술시간마저 담임선생님이 미술교과서를 읽고 풀이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이 시골학교에서 내 그림 솜씨는 영 빛을 못 볼 것 같았다.
한 달쯤 지났다.
담임선생님이 미술시간에, 처음으로 국화 몇 송이가 담긴 꽃병을 교탁 위에 올려놓더니‘한 장씩 그려 내거라.’ 하였다. 나는 ‘그림 솜씨를 보여줄 좋은 기회다!’라는 생각에 아주 열심히 그려 제출했다. 담임선생님은 놀랐다. 어린이의 그림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햇볕 드는 창가 자리에 앉아 무슨 사무를 보느라고, 내가 그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주변의 애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구경하느라 바빴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내 그림이 교실 뒤의‘우리 솜씨’란에 게시됐다. 다른 애들 그림도 게시됐지만 내 그림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내 그림은 꽃병의 명암까지 살려 다채롭게 색을 쓴 데 비해 다른 애들의 그림은 단색으로 꽃병 모양이나 가까스로 그려낸 정도였다.
그 날부터 나는 ‘아주 그림 잘 그리는, 전학 온 아이’가 되었다. 미술시간이 교과서 수업 대신 실제로 그림 그리는 시간으로 바뀌면서, 내 그림들 중 두 점이 교실 옆 복도 벽에까지 붙여졌다. 담임선생님은 내 그림 솜씨에 늘 감탄했지만 정작 그리기를 잘하는 분은 아니었다. 칠판에 백묵으로 어떤 물건을 그리며 설명할 때 보면 원근법에도 맞지 않고 명암도 엉망이었다. 그리기에 관한 한 내가 담임선생님보다도 낫다고 속으로 자부하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가? 저 유명한 교대부속초등학교 미술반에서 활동한 어린이가 아닌가? 이런 사실을 한 번쯤은 드러내놓고 자랑하고 싶었다. 그런 기회는 담임선생님이 마련해주어야 하는데 그런 데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는 분이 못 되었다. 단지‘그림을 잘 그리는 어린이가, 내가 맡은 학급으로 전학 왔구나.’하는 정도로 아는 듯했다.
4학년이 끝났다. 5학년이 시작되는 삼월 초 어느 날 ‘그분’이 나타났다.
연세가 오십 돼 보이는 담임선생님과 달리 그분은 삼십도 안 되어 보이는 아주 젊은 분이었다. 그분이 나타난 때는 쉬는 시간이었다. 여자애들은 교실 뒤쪽 빈자리에서 노래 부르며 공기놀이를 하고, 남자애들은 책걸상 사이로 뛰어다니며 장난 싸움을 하는데 낭랑한 어른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순식간에 그런 소란을 제압한 것이다.
애들이, 자리에 앉아 만화책을 보는 나와 앞쪽 출입문 가에 서 있는 그분을 번갈아보고 있었다. 깨끗한 옷차림에, 포마드를 발라넘긴 머리라서 선생님인 듯했는데 처음 보는 분이었다. 그분이 내 이름을 다시 불렀다.
“네에…….”
뒤늦게 대답을 하며 나는 앞쪽으로 나아갔다. 그분은 허연 얼굴에 빛나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냐?…… 나 따라 와라.”
다시 소란해지는 교실을 뒤로 하고 나는 그분을 따라갔다. 복도에서 쿵쾅쾅 뛰어다니던 애들이 그분 몸에 부딪쳤다가 놀라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가기도 했고, 어떤 애들은 낯선 선생님한테 끌려가는 듯한 나를 의아한 눈길로 보며 얼핏 내 손이나 옷을 잡았다가 놓기도 했다.
복도를 지나 본관 끝에 있는 미술실로 나는 따라 들어갔다. 그 때 수업 시작종이 울었다. 내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는지 그분은 예의 낭랑한 음성으로 안심시켰다.
“걱정 마라. 네 반 담임선생님께 말해 두었다.”
겨우내 방치한 미술실로 알고 있는데 (연료를 아끼느라 그랬는지 겨울로 들어서면 교실 아닌 특별실들은 그냥 문 잠가버리던 시절이었다.) 작은 석유곤로 하나가 따듯하게 피워져 선생님 책상 가까이 놓여있었다. 그 책상 위에는 내가 지난 학기 미술시간마다 담임선생님께 제출했던 그림들 중 세 장이 놓여 있었다. 그분은 의자에 앉더니 그 중 하나를 들면서 내게 물었다.
“네 그림, 맞지?”
“네.”
“전학 왔다며? 그래, 먼저 학교를 다닐 적에 그림 그리기를 많이 했나 보지?”
나도 모르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시에 있는 교대부속초등학교에서 미술반을 했거든요. 거기서 매일, 수업이 끝난 뒤 따로 남아 한 시간씩 그림 그렸습니다. 그런데 작년 구월에 아버지가 여기 군청으로 전근 오면서 모두 이사 오게 되어, 전학 온 겁니다.”
그분은 ‘그럼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너, 특활반을 정할 때 미술반에 들 거지?”
아직 새 학년도의 특활반을 정하지 않은 때였다. 다음 주에 정할 듯싶었다. 나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네에.”
“내가 미술반을 맡아 가르칠 거니까, 다음 주 금요일에 보자.”
그분은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이제 그만 가 봐도 된다는 손짓을 했다. 나는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리고 미술실을 나왔다. 나올 때 미닫이문이 겨우내 안 쓰인 탓인지 잘 닫히지 않았다. 나는 한 손으로 문을 밀다가 잘 안 되어 두 손으로 잡고 힘껏 밀어야 했다. 그럴 때 그분이 내 쪽을 바라다보았다. 창가의 햇빛을 뒤로한 모습이라 웃는 표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그 날, 그분이‘미술반에 들 거지?’하고 물었을 때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겠다고 응답한 것은 얼떨결에 이루어진 느낌이 컸다. 소란한 교실을 일시에 제압하던 낭랑한 목소리, 깔끔한 포마드머리의 젊은 모습, 허연 얼굴빛과 간간이 빛나던 눈빛 등의 분위기가 나를 다른 대답할 겨를이 없도록 만든 게 아니었을까?
만약 후줄근한 옷차림의 노인 선생님이 우리 학급을 찾아와서, 소란스런 애들을 제압하느라 내 이름을 고래고래 불러서 데리고 갔더라면 나는 미술반에 들지 않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미술실이라니. 작은 석유곤로 하나가 교탁 부근에 불피워있긴 했지만 겨우내 방치된 탓에 아무래도 춥고 을씨년스러웠다. 노인 선생님이 그런 미술실에 있었더라면 더욱 춥고 더 을씨년스레 보였을 텐데……다행히도‘그분’이었기에 덜 춥고 덜 을씨년스레 보인 거라고 나는 회상한다.
전학 온 처음에는, 방과 후 미술반 활동 같은 것도 없는 시골학교라서 나는‘뭐, 이런 학교가 다 있나?’하며 허탈했었다. 한 학기가 지나자, 만화책도 마음껏 보고 애들과 늦도록 놀기도 하며 방과 후 시간을 편하고 즐겁게 보내는 평범한 생활에 젖어서…… 그분이‘미술반 활동을 제대로 해 보겠다’는 어조였을 때 ‘저는 독서반을 할 건데요’하며 응하지 않았을 법했다. 그러기는커녕 교대부속초등학교 미술반 출신이라는 사실까지 상세히 말씀드렸으니, 고생 많았던 방과 후 미술반 활동을 그 순간 나는 깜박 잊었던 걸까? 전형적인 미술선생님의 풍모를 갖춘 그분과 맞닥뜨린 순간에 별 망설임 없이‘네에’하고 미술반 활동에 참가하겠다고 답한 건 그 까닭일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날의 내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금요일 6교시 특활시간이 다가왔다. 특활반을 정하는 시간이었다. 그분한테서 미리 당부 받은 듯, 담임선생님이‘올 해 미술반은 금요일뿐만 아니라 토요일에도 따로 남아 할 거라니까, 잘 생각해서들 희망해라’했으므로 우리 학급에서 미술반 희망자는 나 하나뿐이었다. 학급 애들이‘역시 그림 잘 그리는 애는 다르다.’며 쑤군거리거나 ‘이제 너는 고생길에 들어섰다!’며 걱정하는 표정들인 가운데 나는 담임선생님한테서‘미술반 희망자 명단’ 쪽지를 받아들고 교실을 나섰다.
희망한 특활반을 찾아가는 전교생들로 복도는 붐볐다. 나는 애들 틈을 비집고 가며 간신히 본관 끝 미술실에 다다랐는데 그 앞 복도에는 애들이 하나도 없었다.
‘미술실 명패가 달려 있는 것을 보면 내가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닐 텐데?’
조심스레 뒤의 미닫이문을 열었더니 애들 여남은 명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조용히 앉아 있었다. 지난 학기만 해도 희망자가 넘쳐 더 못 받는다던 미술반이 인원부터 확 줄어들어 있었다. 한 교실이라면 보통 육십 명이 정원인데 여남은 명의 애들만 앉아 있으니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그분이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다가, 교단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말했다.
“여기 앉아 있는 어린이들은 미술반을 희망해서 온 게 맞지요?”
“네에.”
“내가 이 자리에서 말할 게 있어요. 담임선생님한테 말씀 들었겠지만 올해 미술반은 금요일 특활시간만 하는 게 아니라 토요일 오후도 할 겁니다. 그리고 봐서, 일요일도 할 것이고 어쩌면 여름방학 때도 할지 모릅니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애들이 있었다. 그분은 애써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어요. 아무래도 미술반 활동을 따라가기 힘들겠구나 싶은 어린이는 지금 이곳에서 나가도 좋습니다. 다시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다른 특활반을 찾아가도록 하세요. 자아, 그럼?”
안색이 하얗게 질린 애들 대여섯 명이 주섬주섬 일어나 뒤쪽 미닫이문을 열고 나갔다. 최종적으로 확정된 미술반 인원이 일곱 명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순전히 자발적으로 희망해서 온 애들이 세 명, 나처럼 사전에 그림 솜씨로 인정을 받고 참가약속이 되어 있던 애들이 네 명이었다. 대부분 3,4학년생이었고 6학년은 한 명도 없었다. 유일한 5학년인 내가 미술반 반장으로 정해졌다. 그분은 모두 교탁 앞으로 모여 앉도록 한 뒤 말했다.
“내일, 토요일 오후부터 그리기 활동에 들어갑니다. 알겠죠?”
이어서, 그에 따른 ‘지시사항들’도 말했다.
“첫째, 자기 학급에서 수업이 끝난 뒤 오후 두 시까지 성당 마당으로 와야 합니다. 지각하는 어린이에게는 그리기 활동이 끝난 뒤 주변 청소를 맡길 것입니다. 둘째, 화구를 빠짐없이 갖춰 와야 합니다. 갖출 화구는, 천천히 말할 테니까 연필로 적으세요. 화판, 스케치북, 스무 가지 색 이상의 크레파스, 4B연필 한 자루와 보통 연필 한 자루, 연필깎이 칼, 고무지우개입니다. 내가 화구를 검사해서 한 가지라도 빠졌으면 역시 청소를 맡길 것입니다. 셋째, 만일 비가 오면 말입니다, 그냥 이 미술실에서 활동하겠습니다. 자아, 내가 할 얘기는 다 한 것 같네요. 그럼, 혹시 무슨 질문이 있습니까?”
요즈음 어린이들이었다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선생님은 언제 저희 학교에 오셨나요? 어느 대학을 나오셨고 결혼은 하셨나요?’. 당시의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분을 올려다봤을 뿐이다.
“그럼 이만 귀가해도 좋습니다.”
나중에 들은 소문으로는, 그분은 임시로 와 있는 선생님이라 했다. 서울에 있는 어느 미대를 졸업하고 군대를 갈 참이었는데 여의치 않은 사정으로 쉬던 중에 우리 학교 미술반을 맡게 된 거라던가. ‘여의치 않은 사정’이란 건강이 안 좋은 사정인 듯싶었다. 그분의 마른 몸매에다가 허연 얼굴빛을 보고 나온 추측이 아니었을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었다.
이튿날 오후 두 시에 우리 미술반원은 성당 마당에 모였다. 지각하는 사람은 청소를 시킨다고 한 엄포 때문인지, 지각은커녕 이십 분 전에 모두 모였다. 성당은 남향한 석조 건물로써 그리 높지 않은 동산에 위치했음에도 읍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소였다. 오래된 큰 밤나무들이 울타리처럼 성당 마당을 에워싸고 있어서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울 것 같았다.
이른 봄이라, 그 그늘에 들어가면 추웠다. 우리는 그늘이 없는, 나무들 사이의 양지에 모여 있었다. 각자 커다란 화판의 끈을 어깨에 건 채 스케치 북, 크레파스 등을 손에 쥐고 있으니 화구들 틈에 우리가 끼어있는 모습 같았다. 두 시가 되기 오 분 전에 그분은 성당 마당 입구에 나타났다. 햇빛에 포마드 바른 머리를 빛내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자아, 여기서 그리기 좋은 풍경을 각자 선택해서 그리는 겁니다. 연필로 스케치를 한 뒤에 크레파스로 칠한다는 거는, 더 말 안 해도 잘 알겠지요?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그 안에 다 그렸으면 내게 갖고 올 것. 그럼, 각자 그림 그리기 좋은 자리를 찾아서 이동 실시!”
미술반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토요일 오후 두 시는 물론 금요일 6교시 특활시간에도 우리는 으레 성당 마당에 모여 한 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성당은 학교와 멀지 않아, 금요일에는 5교시가 끝나는 대로 화구들을 챙겨들고 부지런히 가면 모임 시간에 늦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 그리기 편한 곳에 화판, 스케치북 순으로 내려놓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읍내 풍경을 열심히 그렸다. 다 그리고 나면 근처 벤치에서 쉬는 그분한테 갖다 보였고, 그러면 그분은 구도 원근법 명암 색칠 순으로 꼼꼼하게 살펴 미흡한 부분은 직접 고쳐 보이며 지도했다.
날씨가 무더워지자, 밤나무 그늘은 그림 그리고 지도 받기에 괜찮은 시원한 장소로 바뀌었다.
한낮의 읍내 풍경은 투명한 햇빛 속에 잠겨 있었다. 자동차 경적이 간간이 들릴 때에는, 햇빛 한두 가닥이 튕겨져 날아오는 것 같았다. 자동차도 별로 없던 육십 년대 초의 시골 읍은 그 자체가 소리 없는 풍경화였다. 그림의 구도를 깨뜨릴 만한 큰 건물도 없고 대부분 아기자기한 규모의 가옥들이 가느다란 도로들을 끼고 장난감 마을처럼 우리 눈앞에 펼쳐 있었다.
그분이 낭랑한 음성으로 우리 그림을 낱낱이 지적하며 지도할 때 그 가늘고 흰 손가락이란. 그림의 미흡한 부분을 직접 고쳐 보이느라 혼합 색 크레파스처럼 변하기 일쑤였다. 나는 미술반 반장이기도 했지만 그리기 솜씨로도 모범이었다. 수 년 간 교대부속초등학교 미술반에서 닦아온 기량에 그분의 섬세한 지도가 덧입혀지자 사실상 더 배울 게 없는 나의 그리기 솜씨였다.
어쩌면, 나는 그 때 그분한테 지도를 받지 않는 게 더 좋았을는지 모른다. 오랜 세월이 지난 이제 생각이다…….
여름방학에도 미술반 활동은 계속됐다. 방학 전의 활동 흐름을 이으려는지, ‘금요일과 토요일 오후 두 시’에는 성당 마당으로 모여야 했다. 한여름의 읍내 풍경은 따가운 햇볕 때문에 조금씩 흔들리는 듯 보였다. 나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눈가에 힘을 줘 그 흔들리는 풍경을 붙잡아 그렸다.
어느 날 나는 눈앞에 있는 밤나무를 그리기 시작했다. 읍내 풍경만 그리기가 싫증이 났기 때문이다. 밤나무 잎들만 해도 여러 색이었다. 그 시기나 햇빛을 받는 정도에 따라 흰빛이 도는 연두색부터 온전한 연두색, 조금은 짙은 초록색, 초록색에 흙색을 더한 올리브그린 색…… 숱한 녹색 계통들의 어우러짐이 밤나무 잎사귀들이었다. 그런 잎들을, 암갈색 나무그루와 가지가 적절한 균형으로 떠받쳐주는 게 밤나무 전경이었다.
“모두 이리로 모여라!”
내가 그 그림을 제출했을 때 그분은 떨리는 목소리로 미술반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분이 그림 그리고 있는 우리를 도중에 불러 모으기는 처음이었다. 그분은 내 그림을 벤치에 펴 놓고 말했다.
“과연 미술반 반장이다. 자, 이 그림을 잘 보고 어떻게 나뭇잎들의 색깔을 칠했는지, 어떻게 줄기나 가지 모양을 그렸는지, 잘 보라고!”
그분이 내 앞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니, 나는 쑥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고개를 숙이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날이 여름방학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분은 처음으로 눈앞에 놓인 그림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 정도의 그림이라면 더는 손댈 수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그분은, 고개 숙이고 선 내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이런 말을 하였다.
“이 정도 그림이면 전국 그리기 대회에 나가도 단연 특상이야. 아암 그렇고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