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TV가 나옵니까?”

내가 사내한테 던진 물음 중 하나다. 워낙 교통도 불편하고 산() 첩첩한 곳이라서 말이다. 사내가 웃으며 답했다.

그럼요. TV는 물론이고 인터넷도 잘됩니다.”

사내 방에 따라 가 보았다. 정말 대형 led 화면이 있었고 그 화면에 영상이 떠 있었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비록 산 첩첩한 곳이지만 남쪽 방향으로는 훤히 트여 있어서 각종 전파가 편히 날아올 수 있다는 것을. 남쪽 방향에 푸른 소양호가 있지 않은가.

검푸른 호수 위로 비둘기들처럼 훨훨 날아오는 전파들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대형 led 화면을 중심으로 책상이 놓여 있었는데 현재 작업 중인 금속공예 재료와, 얼마 전 내가 보내 준 창작집 두 권까지 나란히 놓여 있었다사내가 작업에 임할 때마다 즐겨듣는지 첼로 곡리스트도 led 화면 한쪽에 있었다.

하긴 금속 공예 작업은, 잠시 쉴 때마다 잔잔한 첼로 곡이 흘러나와야 할 것 같았다. 금속을 다루는 일은 분명 고막을 얼얼하게 만드는 소란스런 작업일 것이므로.

 

사내의 아내가 텃밭에서 딴 딸기와, 공들여 만든 오미자차를 우리 내외한테 대접하였다. 가게에서 사 먹는 비닐하우스 생산 딸기가 아닌 노지(露地)에서 햇빛을 온전히 받은 딸기라 그 맛이 아주 달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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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의 지인(知人) 봉명산인이 나서서 ‘산막골과 삼막골’ 지명 논란에 쐐기를 박는 귀한 댓글을 달아 올렸다. 결론은 ‘산막골이라 하는 게 옳으나 삼막골로 써도 그리 틀린 게 아니다’였다.
봉명산인.
나는 봉명산인만큼 인문사회 분야에 해박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와의 인연은 1977년 겨울 어느 날 동해안의 어느 소읍에서 시작된다. 나중에 별도로 수필을 써서 봉명산인 그를 소개할 것이다.
‘삼막골 과 산막골’지명 논란에 대한 그의 댓글을 소개한다.
『 옛 춘성군.춘천시 공편 '춘천지(1984년 간)'와 이를 모본으로 춘천문화원이 1995년 펴낸 '춘천의 지명유래'에는 2,500여 개의 옛 소지명과 그 유래가 간략 서술돼 있음. *그 중에 '삼막골' 지명은 동산면과 사북면에 각 1개씩 나오고, '산막골'은 북산면에 한곳 있음. *'삼막골'은 옛날 산삼을 캐러 다니던 사람들(심마니)이 산중에 막을 치고 모여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일종의 고유명사임. 전국에 이런 동일유래-동일지명 여럿. *'산막골'은 산골짜기에 막을 치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통칭해서 붙는 일반명사형 지명임. 그런데, 깊은 골짜기에 움막치고 머무는 사람이 심마니 아니면 약초꾼밖에 더 있겠는가? 해서 흔히 '산막골'='삼막골'..같은 의미로 고유명사화 지명 혼용함. 지도 찾기에 삼막골로 표기되는 연유임. *따라서 위 삼막골이 북산면 소재라면 본래 지명으론 '산막골'이 맞으며, 삼막골도 꼭 틀린 말은 아님. *우안 선생이 소양댐 물길건너 동네에 살며 그림 그리는 걸로 아는 바 (옛날 그 자제를 풍물지도. '소나무 화가'에 걸맞게 자제 이름에도 '솔' 있음. 부인께서 뒷바라지 고생 많으셨는데 좀 나아지셨는지 궁금), 무심 내외분이 방문하신 삼막골이 그 분의 우안과 인연으로 보나 험한 산세지형으로 보나 북산면 그 '산막골'로 추론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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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NS의 힘은 놀라웠다. 사내(정재식 씨)와 나는 얼굴 마주보기는 처음이지만 이미 아는 사이였다.

웃으며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웬만하면, 몰고 간 내 차를 길가에 두고 싶었지만 워낙 길이 좁아 그럴 수 없었다. 사내가 자기 집 마당 초입에 주차하기를 권했다. 대문 없이 그대로 길에 이어진 마당 초입에 이미 사내의 차가 주차해 있어, 우리 차까지 주차시키는 일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여태 비좁고 꾸불꾸불한 길을 겨우 지나왔는데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비좁은 곳에 주차시켜 놓아야 한다는 사실. 오지 마을에 왔다는 실감 속에 간신히 주차에 성공했다.

  

사내 집 아래로 폐교 지붕이 보였다. ‘폐교라 단정한 건 녹슨 채로 있는 긴 함석지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내 내외가 머무는 거처는 폐교의 관사일 듯싶었다. 관사 마당 끄트머리에 웬 원두막이 있었다. 다가가 봤더니 원두막 기둥에 이런 한자 목판이 걸려있었다.

仙雲停

원두막이 아니라 정자였다. 비록 모양은 참외 원두막 같았지만 앞이 훤히 트이고 바람 맞는 위치에 자리 잡아서 정자라 할 만 했다. 사내가 말했다.

 

 

우안 최영식 화백이 여기를 소개해 줘서, 저희가 들어와 살게 됐습니다. 저 정자도 우안이 지은 겁니다.”

우안, 그는 한국화를 그리는 분이다. 아직 만나보지 못했지만 나는 그를 알고 있다. 어느 책에서 그가 쓴 글을 읽었는데 의외로 잘 쓴 글이었다. ‘의외라는 것은 전공이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글을 잘 썼기 때문이다.

우안을 어느 장소에서 우연히 본 적 있는데 왜 호를 우안(牛眼)이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소의 눈처럼 눈이 컸다.

 

사내 집 마당에는 흰 개도 있었다. 우리 내외가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임에도 한 번도 짖지 않고 어슬렁거리던 모습이라니. 개만 봐도 사내 내외가 사는 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알 수 있었다. 평생 도둑이나 강도 같은 나쁜 놈들이 침입할 일 없는, 무사태평의 청정 공간이었다.

 

 

긴 그 좁고 꼬불꼬불한 벼랑 위 찻길로 차를 몰고 오다보면, 나쁜 짓 할 처음의 생각마저 다 잊고 그저 안전운전에만 몰두하다가사람이 순화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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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그림의 김춘배 화백이 SNS삼막골이 아니라 산막골이라고 해야 옳다는 의견을 보내주었다. 하지만 사내가 문자로 보내온 주소에삼막골로 돼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 표기된 지도도 있어 일단 삼막골지명을 그대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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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원주민이 쓰는 모자를 즐겨 쓰는 사내. 흔치 않은, 쇠붙이 갖고서 작품을 만드는 사내. 그뿐 아니다. 뒤늦게 안 사실인데 누구나 부러워하는 명문대학교 국어국문과 출신이었다.

 

 

서울 강남의 어느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을 법한데 현재삼막골이란 산골마을에서 쇠붙이와 씨름하며 살고 있다니 내 호기심은 더 이상 가만있기 어려워졌다. 그 이전에 SNS로 간간이 대화를 주고받았던 데다가 내 작품집 'K의 고개''숨죽이는 갈대밭'을 선사하였으므로 전화 한 번 걸어도 실례가 될 것 같지는 않은 터.

 

 

안녕하십니까? 저는 하는데 사내는 이미 나를 알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이미 지인을 대하듯 반가움이 묻어났다.

사내의 거처를 방문하고 싶다는 내 제의는 쉽게 이뤄졌다. 심지어 사내는 이런 말까지 덧붙였다.

먼 길 마다하고 찾아오신다니 저야 고맙죠 뭐.”

 

 

아내를 차에 태우고 출발할 때만 해도 나는 사내가 사는 삼막골로 가는 길이 그리도 험한지 몰랐다. 구절양장은 기본이고 맞은편에서 다른 차가 올까 겁나는 비좁은 벼랑 도로라니. 간신히 한 시간 남짓 걸려 사내의 거처에 도달했다.

 

 

(같은 춘천에 이렇게, 차로 한 시간 남짓 걸려 닿는 데가 어디 또 있을까?) 가는 도중에 오리무중의 갈림길에서 어느 쪽 길을 가야 하느냐?’고 전화를 한 번 해서 그런지 사내는 자기 집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기다리고 말고도 없었다. 집이 길가에 있어서 집 밖으로 나서면 길이었으니까.

  

 

 

*이상은 지난 529일에 쓴 것이다. 우선은 여기까지 쓰고 기회가 되는 대로 더 써서 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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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심의 지인(知人) 봉명산인이 나서서 ‘산막골과 삼막골’ 지명 논란에 쐐기를 박는 귀한 댓글을 달아 올렸다. 결론은 ‘산막골이라 하는 게 옳으나 삼막골로 써도 그리 틀린 게 아니다’였다.
봉명산인.
나는 봉명산인만큼 인문사회 분야에 해박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와의 인연은 1977년 겨울 어느 날 동해안의 어느 소읍에서 시작된다. 나중에 별도로 수필을 써서 봉명산인 그를 소개할 것이다.
‘삼막골 과 산막골’지명 논란에 대한 그의 댓글을 소개한다.
『 옛 춘성군.춘천시 공편 '춘천지(1984년 간)'와 이를 모본으로 춘천문화원이 1995년 펴낸 '춘천의 지명유래'에는 2,500여 개의 옛 소지명과 그 유래가 간략 서술돼 있음. *그 중에 '삼막골' 지명은 동산면과 사북면에 각 1개씩 나오고, '산막골'은 북산면에 한곳 있음. *'삼막골'은 옛날 산삼을 캐러 다니던 사람들(심마니)이 산중에 막을 치고 모여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일종의 고유명사임. 전국에 이런 동일유래-동일지명 여럿. *'산막골'은 산골짜기에 막을 치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통칭해서 붙는 일반명사형 지명임. 그런데, 깊은 골짜기에 움막치고 머무는 사람이 심마니 아니면 약초꾼밖에 더 있겠는가? 해서 흔히 '산막골'='삼막골'..같은 의미로 고유명사화 지명 혼용함. 지도 찾기에 삼막골로 표기되는 연유임. *따라서 위 삼막골이 북산면 소재라면 본래 지명으론 '산막골'이 맞으며, 삼막골도 꼭 틀린 말은 아님. *우안 선생이 소양댐 물길건너 동네에 살며 그림 그리는 걸로 아는 바 (옛날 그 자제를 풍물지도. '소나무 화가'에 걸맞게 자제 이름에도 '솔' 있음. 부인께서 뒷바라지 고생 많으셨는데 좀 나아지셨는지 궁금), 무심 내외분이 방문하신 삼막골이 그 분의 우안과 인연으로 보나 험한 산세지형으로 보나 북산면 그 '산막골'로 추론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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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작품집 ‘K의 고개를 발간하기 직전의 일이다. 250여 페이지의 게재 작품 원고가 마무리돼 출판사로 보낼 시점인데, 문제는 외수 형의 추천사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내는 책이므로 마냥 출판사로의 원고 송부를 늦출 수도 없었다. ‘이거 어떡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사실 그 며칠 전에 에둘러 형한테 추천사 송부를 독촉했지만감감무소식인 거다. 그럴 만했다. 내가 작년 늦봄부터 두어 번 감성마을에 가 봤으므로 형의 생활이 얼마나 바쁜지, 알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손님들에, 모 관청과의 송사(訟事), 남예종전문학교 학장 일에, 그 외 초대받은 강연 문제에도대체 쉴 시간이 없어 보였다.

 

 

나는경우에 따라서는 추천사 없이 두 번째 작품집을 낼 수도 있다는 각오를 했다. 그 순간 형의 추천사가 이메일로 왔다. 새벽시간이었다.

밤을 지새우고 아침 해가 훤히 뜬 뒤에 잠자리에 드는 형의 습성을 잘 알기에, 형이 밤새 내 추천사를 쓰느라 꽤나 고생했을 게 뻔했다.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써 주는 추천사가 아니었다. ‘저는 습작기 시절부터 작가 이병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로 시작되는 형의 추천사는 무려 2페이지나 되었다.

 

 

내 아내가 그런 형의 고마움을 잘 알기에 한 번 감성마을을 방문해서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벼르기를 몇 달째.

지난 57일 남편() 차에 동승하여 화천 감성마을에 가게 된 연유다.

 

 

 

그 날은 감성마을이 쉬는 날이었다. 개그맨이자 가수인 김철민 님과 문하생 이시유 님이, 형과 함께 우리 부부를 반가이 맞아 주었다.

형은 제수(弟嫂)씨를 위한 특별공연으로 그 반가움을 표했다. 직접 마이크를 잡고 노래 여러 곡을 부른 것이다.

 

마른 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지난 가을날

당연히 정원의허무한 마음도 불렀다.

 

 

형과 나의 인연이 반세기가 돼 간다.

그 날 형이 감성마을 이곳저곳을 안내해 가며 오랜 인연의 반가움을 누릴 때, 못된 그들이 그런 반가움을 눈치 채기나 했을까?

 

 

 형이 감성마을의 환경조성을 위해 몽요담에 산천어들을 사다 놓을 때마다, 죽어라 하고 달려들어 모조리 잡아먹는다는 못된 수달들 말이다. 하 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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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본래 이름 앞에 호 붙이는 것을 꺼려했다. ‘자기 이름 갖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호까지 붙여?’ 하는 거부감이었다.

대학시절, 문학동인 활동을 할 때 시 쓰는 친구가 어느 날부터 스스로 자기 호를 지어서 작품마다 이름 대신 활용하는 것을 보고는, 나는 속으로 얼마나 경멸했는지 모른다. 이런 경멸이었다.

자식. 그럴 시간에 시나 더 열심히 쓰지.’

이 자리를 빌려 그 친구한테 용서를 빈다. 정작 나 자신도 소설을 열심히 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후에 무심이란 호를 쓰는 문인이 됐기 때문이다.

 

사실 무심이란 호는 친한 후배가 몇 년 전, 같이 만나는 모임자리에서 내게 선사한 것이다. 후배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형님을 그 동안 쭉 지켜봤는데 이 호가 아주 잘 어울릴 듯싶습니다.”

격식을 갖춰 한지(韓紙)에 붓으로 써 선사한 호라 그랬을까? 나도 모르게 무심호를 즉각 받아들인 것이다. 그뿐 아니다. 이런 말까지 했다.

정말 내게 맞는 호일세. 하하하.”

그 날부터 모임자리에서 나는 무심선배 혹은 무심씨로 불리기 시작했다.

 

모임자리에서나 쓰이던 무심이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다.

아내가 남편의 문필생활의 매니저를 자임하고 나면서부터다. 아내는 내 앞에서 컴퓨터를 켜 인터넷 화면을 띄워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SNS로 당신과 책을 많이 알려야 하는데 문제는 당신과 같은 동명이인이 너무 많다는 거야. 국악 하는 이병욱, 의사 이병욱, 장어를 파는 이병욱. 이러니 그냥 이병욱 이름만 갖고는 절대 구분도 안 돼. 천생 필명을 따로 지어야 돼.”

필명까지는 그렇고그러잖아도 모임에서 나한테 무심이라 부르기 시작했거든.”

하면서 그간의 무심이란 호를 받게 된 과정을 털어놓았다. 놀라운 것은 아내의 반응이다. 박장대소하며 이랬다.

어쩜, 당신한테 딱 맞는 호를! 내가 결혼해 30년 넘게 살면서 그 동안 당신한테 느낀 심정을 그리도 잘 표현할 줄이야!”

 

무심(無心).

사실 얼마나 깊은 뜻의 한자어인가. 그 뜻을 제대로 풀이해 나가면 나 같은 범부(凡夫)는 결코 사용할 수 없는 단어다. 그래서 고민 끝에 나는 무심 이병욱의 문학산책블로그에 짤막하나마 변명을 달았다. 다음은 그 중 일부다.

 

지인이 내게 '무심'이란 호를 붙여주었을 때 마음에 썩 들어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말했다.

"정말 내게 맞는 호일세. 그런데 내가 무심한 것은 사실, 워낙 유심하다 보니 그리된 거지."

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후략)

 

이제 돌이켜보니 더 알쏭달쏭한 무심해명을 늘어놓은 것 같다. 따지고 들면 한이 없다. 이 정도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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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5-29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심...너무 좋아요! 사모님께서 강력한 후원자이시네요 ㅎㅎ잘 지내시죠?

무심이병욱 2019-05-30 10:12   좋아요 1 | URL
그저 노후에는 아내 말을 잘 듣고 사는 게 최선입니다. ㅋㅋㅋㅋ

카알벨루치 2019-05-30 12:00   좋아요 0 | URL
ㅎㅎㅎ그것이 평화의 첩경인가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