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알았지만 내가 가수 윤시내의 노래를 처음 듣기는별들의 고향영화가 상영된 1974년이었다. 그 영화 주제곡으로난 열아홉 살이에요.’라는 소녀 노래가 있었는데 바로 윤시내의 가수 데뷔곡이란다. 얼마나 애절하게 부르는지, 부는 바람 앞에 꺼질 듯 말 듯 한 가닥 촛불이 흔들리는 걸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가수들은 대개 노래 장르를 하나 택해 부르는데 윤 시내는 그렇지 않다. 장르 불문이다. 발라드도 부르고 락도 부른다. 그뿐 아니다. 정해진 음정에 개의치 않는 아주 자유분방한 창법이다.

독특한 면모는 그녀의 무대의상에도 있다. 언제나, 흰색이거나 검은색 옷차림이다. 또는 흑백이 섞인 차림이다. 결코 빨갛거나 파랗거니 노랗거나 한 유채색 옷차림인 적이 없다. 사실 옷차림에 있어서, 무채색만한 고급색도 없다. 예를 들어 검은색 하나만 보자. 언뜻 검은색 옷이 입고 다니기 편한 듯싶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먼지 하나 티끌 하나 묻는 것을 허용치 않는 게 검은색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만일 검은색 옷차림으로 먼지나 티끌 따위를 묻히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칠칠치 못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까다로운 무채색 옷차림을 고수(固守)하는 가수 윤시내야말로 무대의상에 관한 한 최고의 멋쟁이다.

 

윤시내의 노래 중 제일 내 마음에 드는 게‘DJ에게이다. 이 노래는 다방 많던 7,80년대가 시대배경이다. 그 시절에는 음악다방도 많았고 그런 다방에는 반드시 전문 DJ가 있었다. 윤 시내의 이 노래는 시작부터가 도발적이다.

그 음악은 제발 틀지 마세요 DJ"

잊었던 그 사람을 생각나게 하니까 절대 그 음악을 틀어서는 안 된다는 절규가 계속 이어진다. 이 노래의 절규는 노래 중간과 끝에 터져 나오는 비명 닮은 외마디 기성(奇聲)에서 절정을 이룬다. “끼야오!”라고 표현해야 할까, 무심의 필력으로는 정확하게 그 기성을 표현하기 어렵다. 이 기성은 노래 속 주인공이 평범한 말로는 더 이상 가슴 아픔을 표현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내지르는 비명이라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청중들이 그 순간 격하게 호응한다는 게 그 증거다.

더 놀라운 것은 락 가수 이상의 그런 기성을 지른 뒤의 윤 시내 모습이다. KBS콘서트 7080’에서 명 MC 배철수가 그녀를 자리에 앉히고 대화를 나누자, 뜻밖에 그녀는 수줍어서 말도 잘 못하는 열아홉 소녀로 돌아와 있었다. 놀라운 그 변신에서 나는 가수 윤시내가 프로페셔널한 존재임을 실감했다. 윤시내. 그녀는 한국 대중가요 무대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DJ에게가사를 음미해 본다.

그 음악은 제발 틀지 마세요 DJ / 잊었던 그 사람 생각나요 DJ / 언제나 우리가 만나던 찻집에서 다정한 밀어처럼 들려오던 그 노래 /그 음악은 제발 틀지 마세요 DJ /잊었던 그 거리가 생각나요 DJ / 네온에 쌓여진 온화한 밤거리 행복한 입술처럼 향기롭던 그 노래 /그 음악은 제발 틀지 마세요 DJ/ 마지막 그 순간이 생각나요 DJ /커다란 눈 속에 말없이 떨어지던 당신의 눈물처럼 젖어들던 그 노래 

 

https://youtu.be/D4dxcyUpEp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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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었다. 200434일이다. 춘천에 때늦은 폭설이 내렸다. 그 날 일을 당시 일기에서 찾아냈다.  

‘태원이한테 전화해서 저녁 630분에 후평동 투다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6시가 넘자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최종걸이가 강촌에 있는 작업실에서 일을 마치고 귀가할 때 우리 집 앞에 차를 세우기로 한 약속을 지켰다. 그의 차에 동승해 후평동 향군회관 동네로 갔다. 차를 동네 뒷골목에 주차시켜 놓고 투다리에 들어가 태원이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 셋은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2차로, 부안시장 부근의 막걸리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생태찌개를 안주로 술을 더 마셨다. 술자리를 끝내고 헤어졌는데 초저녁부터 시작된 눈이 어느 새 폭설로 변해 있었다.(하략)

최종걸은 조각가다. 1969년 예비고사가 끝난 뒤 모여서 소주 파티를 벌일 때 함께했던 미술반 친구다. 종걸이는 대학에 강의 나가는 신분이고 태원이는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에 전념하는 처지고 나는 막 사흘 전에 명퇴한 입장. 오랜 인연의 미술반 친구들과 부안시장의 막걸리집 앞에서 헤어진 뒤 애막골 고개 너머로 귀가하려할 때 그 엄청난 폭설. 평소라면 껌껌했을 밤하늘이 눈발로 희뿌옇게 보일 정도였다.

후평동이 춘천에서 지대가 낮은 ‘뒤뚜루임’을 깨달았다. 가파른 애막골 고개를 피해 8호 광장 쪽의 덜 가파른 고개로 가는 귀갓길을 생각해 봤지만 그만큼 거리(距離)가 마냥 길어지는 데 따른 위험이 있었다. 그렇다면 두 고개를 그만 두고 강변도로로 가는 귀가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봉의산의 그늘진 뒤편인 데다가 소양강에 밀접한 도로라 빙판길로 변했을지 몰랐다. 결국 처음 생각대로 가파른 애막골 고개 쪽으로  귀가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내리는 폭설은 습설(濕雪)이었다. 내 머리고 상의고 이내 눈에 젖어갔다. 천운처럼 그 방향으로 가는 빈 택시 하나를 잡았다. 차 문을 후닥 열고 타며 말했다.

“남춘천역 부근 동네까지 갑시다.

운전기사가 운전대를 잡고서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이거 참! 영업을 포기하고 그냥 돌아갈 참이었는데.

이럴 때 내가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손수건으로 눈에 젖은 내 몰골을 훔치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길바닥에 얼어붙는 눈은 아니니까, 가죠. 저 고개만 넘으면 될 것 같은데요. 나오는 요금보다 더 드리겠습니다.

“요금이 문제가 아니라… 좋습니다. 다만, 가다가 길이 더 안 좋으면 손님이 중간에 내리실 수도 있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는 모습을 기사가 룸미러로 보았다. 출발했다. 신호등이 점멸등으로 바뀐 채 위에 얹히는 눈발로 왠지 위태로워 보였다. 어느 곳에선가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가 울렸고 시내버스와 자가용차가 접촉사고를 낸 채 도로변에 있었다. 버스에 탔던 손님들이 다시 내리면서 흰 눈을 뒤집어쓴 듯한 모습들로 우왕좌왕했다. 인공폭포 부근 사거리를 지나 애막골 고개 밑에 다다르자, 바퀴가 눈길에 묻혀 헛도는 차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내가 탄 택시가 아직은 별 일 없으나 과연 저 가파른 고개를 올라갈 수나 있을지.

이제 돌이켜보면 폭설 내리던 200434일 밤의 막막함이 내 명퇴 후 방황의 암시 같았다.


 

*알립니다. 지난 20167월에 첫 번째 소설집으로 ‘숨죽이는 갈대밭’을 발간한 바 있습니다. 올해 말경에 두 번째 소설집 ‘K의 고개(가칭)’를 발간할 예정입니다. 강원문화재단의 전문예술창작지원 사업으로 선정된 일입니다. 기한이 두 달여 남았습니다. 그에 따라 당분간 관련 원고 정리 차 ‘친구 전태원 화백’ 수필 연재를 멈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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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불빛아래/마주앉은 당신은/언젠가 어디선가/본 듯한 얼굴인데

고향을 물어보고/이름을 물어봐도/잃어버린 이야긴가/대답하지 않네요

바라보는 눈길이/젖어있구나/너도나도 모르게/흘러간 세월아

어디서 무엇을 하며/어떻게 살았는지/물어도 대답 없이/고개 숙인 옥경이 

 

무명가수였던 태진아를 우리나라 톱 가수로 만들어준 노래가 바로 위의 노래 옥경이.

경쾌한 리듬으로 돼 있지만 사실 내용은 슬프다. 슬픈 기미는 첫 부분부터 보인다. ‘희미한 불빛아래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밝지 않은 희미한 불빛 아래라는 공간 설정은 밤의 유흥업소 불빛을 떠올리게 한다.

 

이 노래의 화자는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회사를 다니며 사는 3,40대 사내라 보면 무난하다. 사내는 어느 날, 봉급쟁이의 고달픔을 잠시라도 잊고자 퇴근 후 맥주나 양주를 파는 술집에 갔다. 희미한 조명불빛 아래 손님을 대우하겠다며 여 종업원이 마주 앉았는데 분명 언젠가 어디선가 본 듯싶은 얼굴이다. 그녀에게 고향을 물어보고 이름을 물어봤지만 잃어버린 이야기인 듯 대답하지 않는다.

 

여기서 그녀의 잃어버린 이야기를 짐작해본다.

그녀는, 어릴 적 시골고향에서 함께 자란 초등학교 동창이다. 자식을 일찍부터 도시로 유학을 보낼 만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내의 집안형편과 달리, 그녀의 집안형편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몇 년 안 돼, 서울로 올라와 처음에는 영등포의 옷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얼마 안 되는 봉급이지만 시골에 있는 동생들 학비도 대고 그랬는데…… 열악한 환경의 근무라 몸이 병들면서 결국 사표를 내고 공장을 떠나야 했다.”

 

그렇게 꼬인 그녀의 도시 생활은 이제 유흥업소에서 손님을 맞아, 마주앉아 술을 따르는 종업원 신세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에서 같은 초등학교를 다닌 남자 동창이 손님으로 온 것이다. 남자 동창사내가 분명 어디서 본 듯하다고 고향을 물어보고 이름을 물어보지만 아무 답을 할 수 없이 억장이 무너지는 그녀. 결국은 바라보는 눈길이 젖어 있을 뿐이다.

 

여기서 바라보는 눈길이 젖어 있구나란 표현이 정말 문학적이다. 바라본다는 시각적인 표현과 젖어 있다는 촉각적인 표현이 어우러진 공감각적 표현의 절구(絶句)가 아닌가. 일시적으로 유행하다가 사라질 운명에 처한 노래라고 유행가라 일컫지만, 나는 옥경이란 유행가가 오래도록 살아남는다면 바로 바라보는 눈길이 젖어 있구나란 기막힌 표현 덕분일 거라 믿는다.

 

사내는 마침내 너도 나도 모르게 흘러간 세월아라고 속으로 절규한다. 그녀보다는 나은 삶이지만 그러나 처음 서울로 올라와 유학생활을 시작할 때의 희망찬 포부를 떠올린다면 초라한 봉급쟁이에 불과한 자신의 처지다. 그래서 가수 태진아는 이 부분에서 절규하듯 목소리를 높인다. 소설의 구성단계로 친다면 절정에 속한다.

 

옥경이 노래에는 대한민국 민초들의 애환이 담겨 있다. 도시화 산업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전통적인 농촌이 붕괴하는 데 따른, 가슴 아픈 모습들이 역력하다. 이런 슬픈 이야기를 슬픈 리듬으로 이끌지 않고 오히려 경쾌한 리듬으로 이끎으로써 옥경이 노래는 대중들에게 부담 없이 전달돼 절묘한 성공을 이루었다.

경쾌한 리듬의 슬픈 사연’. 이것이 옥경이 노래에 대한 내 정의(定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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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인네가 춘심산촌에  또 오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전과 달리 당뇨악화로 거동이 더 편치 않게 된 노인네가 평평치 못한 산촌 길에서 발걸음을 떼다가 넘어지는 사고라도 날까 걱정돼, 침묵함으로써 짐짓 모른 체했다.

그런데 오늘 노인네가, 내가 다른 일로 경황이 없는 새 춘심산촌을 다녀갔다는 게 아닌가. 아내가 나서서 차에 노인네를 태우고 20여리 되는 그곳까지 운전하는 노고를 아끼지 않은 모양이었다. 외출했다 밤늦게 귀가한 내게 아내가 말했다.

“꽃들을 보며 몹시 좋아하시더라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그랬다가는 넘어져서 골절사고가 날지도 몰라, 그냥 제자리에서 화초들에 물이나 주라고 고무호스를 건넸지. 그랬더니 시키는 대로 호스로 물을 주면서 내게 지난번처럼 또 그러대.‘네가 내 소원을 이뤘구나!’”

노인네는 본래 꽃들을 돌보는 게 낙이었다. 병석에 눕게 되면서 그 소박한 낙조차 제약 받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오랜만에 수많은 화초들을 다시 보며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말했을‘네가 내 소원을 이뤘구나!

노인네는 아내의 친정어머니, 내게는 장모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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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춘심산촌에서 농사를 시작할 때 가장자리의 돌밭이 문제였다. 농사 시작 전 경지 정리 차 동원한 포클레인 기사가 이런 말을 할 정도였다.

“이쪽은 포클레인 날이 전혀 먹히지 않습니다. 잘못했다가는 날이 부서질 것 같아요. 그러니 이쪽은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천하의 무적 포클레인 기사가 그런 사정을 하니 어떡하나, 돌밭인 채로 내버려둘 수밖에. 나는 그리 체념하고 말았는데 아내는 달랐다. 여기저기‘돌밭에 심을 수 있는 나무’를 수소문하더니 기어코 어린 드릅 묘목들을 구해다가 돌밭에 심었다. 내 기억으로는 50 그루 정도? 100여 평에 50 그루는 듬성듬성 심은 거나 다름없는 풍경이다.

 

 

7년이 흘렀다. 드릅나무들이 무섭게 번식한 끝에 이제는 100여 평 돌밭 거의를 차지했다. 놀라웠다. 드릅나무는 뿌리로 번식한다는데 어떻게 돌투성이 밭을 연한 뿌리로 헤쳐 나가 자리 잡았는지.

 올봄에는 가지마다 연한 순들이 달려 우리 집 밥상은 한동안 호사를 부렸다.

 

  

그런데 여름 지나 가을이 되자 그러잖아도 돌밭을 점령하다시피 한 드릅나무들이 극성까지 부려 빽빽하기가, 보기만 해도 숨 막힐 것 같았다. 마치 우리나라의 서울을 보듯 인구 과밀화 같은 현상이다.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두릅 밭 전체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아내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는 낫을 들었다. 거미줄처럼 얽힌 드릅나무 가지들을 쳐내며 정리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게 발견됐다. 가느다란 쑥대 두 가닥을 의지해 만들어진 작은 새집이 발견된 거다.

“여보 이리 와 봐요!

하며 나를 불러서 무슨 일인가 두릅 밭으로 가 봤더니 그런 앙증맞은 새집이었다. 땅바닥을 기어 다니며 먹이를 찾는 흉측한 뱀도 피할 수 있을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나무를 타고 올라올 수 있는 들쥐 같은 놈들까지 피할 수 있는 절묘한 새집이었다. 땅 위로 1미터 남짓한 위치의, 가느다란 쑥대 두 가닥만을 활용한 집이니  말이다.

새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메추리알 껍질처럼 작은 껍질이 두어 개 남아 있을 뿐 이었다. 짐작이 갔다. 딱새 같은 작은 새가 여기에 집을 짓고는 알을 낳은 뒤 그 알이 부화하여 결국은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아가자, 미련을 두지 않고 자신도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는 것을.  

 


요즈음 수도권의 부동산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하룻밤 새에 억 단위로 뛰는 서울 쪽 아파트 값 때문에 매스컴들이 요란하다. 우리 부부는 오늘 농사일을 마치고 귀가하면서 차 안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새들이 얼마나 멋있어? 오직 자기가 낳은 알이 부화돼 어딘가로 분가해 나갈  때까지만 집을 유지하니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사람들은 자식들이 분가한 뒤에도 그 집을 계속 소유하고, 나아가서는 집값을 뻥튀기하여 횡재하려고까지 하는데 새들은 전혀 그런 일이 없으니 얼마나 홀가분하게 사는 모습인 거야.

가는 쑥대 두 가닥에 집을 짓고서 새끼들과 얼마간 살다가, 때가 되면  그 집을 내버리고 하늘이나 숲 어딘가로 훌훌 날아가 버리는 새들. 오늘 너희들이 참 부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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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2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심이병욱 2018-10-03 09:10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우리는 본시 그들과 같은 자연에서 살았음을 잊고 있습니다. 우리의 과대한 욕심에 대해 성찰할 때가 왔습니다.

카알벨루치 2018-10-02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연에게서부터 인간이 배워야할 게 많은것 같습니다^^

무심이병욱 2018-10-03 07:20   좋아요 1 | URL
숲 속 밭에서 농사 지은 지 7년. 정말 자연은 우리의 고향입니다. 우리 인간은 고향에서 멀어졌습니다. 살다 보니 그리 됐겠지만 그래도 고향(자연)에 있었을 때의 순수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두릅밭에서 발견한 소박한 새집은 무심한테 많은 깨달음을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