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레이커스

기생충학 실습이 있는 날.

내가 학생 때, 선생님은 슬라이드를 주고 학생들에게 이거저거를 찾으라고 했다.

학생들은 잘 찾지 못했고, 그래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교수가 된 뒤 난 원하는 부위를 미리 찾아서 현미경을 고정해 놨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제가 다 찾아 놨으니까 학생들은 그냥 투어 하듯이 정해진 순서로 현미경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미리 품을 팔아야 하지만,

학생들은 무지 좋아했고-시간이 덜 걸렸으니까-봐야 할 것을 못본 학생은 이제 없었다.

그래서인지 전국 시험을 보면 우리 학교가 다른 과목은 좀 후진데

기생충은 성적을 잘 받는다.


그런데 지난번 실습 때, 일이 터졌다.

워낙 완벽하게 준비한 탓에 학생들이 질문조차 하지 않아-안보여요 같은 질문-

스마트폰으로 NBA 농구 레이커스 경기를 켰고, 슬쩍슬쩍 보기 시작했다.

문제는 작전타임 때 치어걸들이 나와서 춤을 췄다는 것.

그들의 복장은 당연히, 헐벗은 상태였다.

난 치어걸에 그다지 조애가 없는지라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렸다.

"뭐 보시는 건가요?"

한 여학생이 내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난 무지 당황했고, 그때부터 변명을 시작했다.

"그, 그게요, 원래는 농구를 보고 있었는데 이건 작전타임이고 어쩌고..."

여학생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살색만 보이기에 전 또 씨름 보시는 줄 알았어요."

그녀의 태도로 보건데 완전히 납득한 것 같진 않았다.

어쩌면 소문이 날 수도 있을 텐데, 난 진짜 억울하다!!


2. 사재기

결혼식 때문에 영등포에 갔다.

다음 약속까지 시간이 남아서 근처 타임스퀘어에서 평소 벼르던 미스백을 보기로 했다.

다행히 미스백은 시간대가 맞았지만, 그래도 40분 가량을 기다려야 했다.

극장 아래층에 교보문고가 있기에 거길 들렀고,

새로 나온 내 책이 잘 전시되어 있는지 확인했다.

내 자식같은 책이 외면받고 있는 게 안타까워 책을 한 권 사려는데,

갑자기 다음과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교수님 아니세요?"

놀라서 보니 교보 직원이었다.

"늘 책으로만 만나다가 직접 뵈니 반가워요!"

난 특유의 어색한 표정으로 '오기로 낸다' '될 때까지 쓸 거다' 같은 소리를 지껄이다 그와 헤어졌다.

가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니 그는 여전히 날 보고 있다.

이런 와중에 내가 내 책을 사면 뭐가 되겠는가?

외로움에 지친 내 책을 하나도 구해주지 못한 채 교보문고를 나섰다.


3. 비탄의 문

미야베 미유키를 좋아하기 잘 한 것이, 책을 자주 내는데다 내는 책마다 재미가 쏠쏠하다.

신작인 <비탄의 문>은 초반에는 이게 뭔가 싶게 진도가 느렸지만,

곧 탄력이 붙어버렸다.

다음 장면이 궁금해 짬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고

심지어 걸어다닐 때도 책에서 눈을 뗴지 않았는데

손에 땀을 쥐게 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다.

내가 읽은 대목은 전혀 관계없이 살던 A와 B가 같은 사건을 조사하다가 결국 한 자리에서 만나는 장면까지다.

A는 수상쩍은 건물 옥상에 잠복해 있고 그걸 모르는 B는 1층부터 올라가며 수색을 한다.

하지만 B는 옥상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옥상으로 올라간다.

천안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탄 뒤 그 둘이 만나서 어떻게 될지 읽으려는데 다음과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교수님, 어쩐 일이세요?"

내가 좋아하는, 울 학교 교수가 날 발견한 것.

천안까지 가는 동안 그와 이야기를 하느라 책을 읽지 못했고,

그래서 난 여전히 A와 B가 어떻게 만나는지 모른다.

이 글을 올리고 나면 바로 책을 펴들어야지.

미야베 미유키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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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8-11-04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저도 야구 시즌 이후 농구로 적적함을 달래는데 ‘살색‘에 웃습니다^^ 미국 치어리딩은 그냥 씩씩한 운동 느낌이던데 당황하지 않으셔도^^
학생 때 현미경 수업이 너무 어려웠는데(도대체 그렇게 생긴 게 어디 있단 말인가ㅠㅠ) 서민 교수님 같은 분께 배우지 못 해서 그랬던 거군요!(라고 합리화-_-)

2.알라딘 서재분들만 해도 마태우스님 새 책은 외로울 틈이 없을 듯. 저도 오늘 주문 예정임을 살며시 밝힙니다.

3. 미미여사 신작 재미있나봐요. 저는 어느 순간부터 이별을 고하게 되었어요ㅠㅠ;;;

마태우스 2018-11-04 19:45   좋아요 0 | URL
1. 제겐 야구가 너무 소중해서요. 농구는 그냥 후식 같은 겁니다^^ 근데 단순한 후식이라기엔 르브론 제임스를 너무 좋아해서, 플레이오프 땐 야구를 접어두고 농구를 보기도 한다는... 살색이란 게 좋은 표현은 좋은 게 아닌데요, 그냥 그 학생의 육성을 살렸습니다. 글구 제 수업이 효율성은 좋지만 애들한테 스스로 찾는 능력을 기르는 게 사실은 더 좋은 수업입니다. 따라서 달밤님은 좋은 교육을 받은 거 맞습니다
2. 아유, 그러지 마세요 부끄럽게...ㅠㅠ
3. 아니 미미여사와 이별하셨다니, 그럴 수도 있군요! 전 미미여사 광팬이라 이별은 상상도 못해봤어요. 물론 레드삭스와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근 미미여사와의 이별을 택하겠지만, 그런 선택에 놓이는 일은 없잖아요..-.- 암튼 나중에 다시 화해하심 좋겠네요. 댓글 감사드립니다

2018-11-04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8-11-05 17: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격려해주셔서 사실 저도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책이면 좋겠다 이런 마음으로 책을 내고 있어요 물론 저에게도 의미가 있어야겠지요 님의 책도 기다립니다 책 쓰실 자격이 차고넘치시자나요 홧팅하시길

감은빛 2018-11-05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일터 후배에게 일을 시켜놓고 잠시 SNS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한참 후에 후배가 뭔가 질문이 있어서 내 자리로 왔고 나는 의자를 돌려 질문에 답을 해줬는데, 후배 시선이 자꾸 내 모니터를 향하길래 봤더니 하필 뭔가 살짝 야한 장면이 포함된 게임 광고가 돌아가고 있더라구요. 뭐야! 난 저런 걸 보고 있던 게 아니라구. 비록 SNS를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업무 관련 정보 수집을 하고 있었다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이미 후배는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어요. ㅠㅠ

2.
마태우스님 신간 저도 구매해보겠습니다. ^^

3.
미미여사 천재 인정!

마태우스 2018-11-15 00:03   좋아요 0 | URL
올만입니다 답이 늦어서 죄송해요ㅠㅠ
1. 감은빛님도 그런 적이 있었군요!@ 반갑습니다. 평소에 잘하는 게 중요한 듯요. 저는 잘 된 것 같습니다 ^^ 저 이상한 놈이란 소문이 떠돌지 않는 걸 보면요
2. 아유 어쩌나...ㅠㅠ 부끄럽습니다
3. 그죠 정말 천재라니까요.

이동국 2018-11-13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서민적 글쓰기를 읽고 이렇게 서재를 찾아뵙게 된 고3 학생입니다. 저도 책읽기와 글쓰기를 쓰는 것이 참 즐겁습니다. 책읽기는 마치 아무 생각 없이 게임을 하는 이유처럼 빠지게 되고, 글쓰기는 현학적인 문체로, 아는 척 하기에 너무나 유용한 도구입니다. 친구들은 책을 읽지 않고, 글도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의 현학적인 요소만 가미된 제 글에, 잘 썼다, 너 정말 글을 잘 쓴다. 라고 말하더군요. 사실은 사족이 모여서 길어진 문장, 글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사실 이 서재에 와서도 약간의 허탈감을 느꼈습니다. 기생충학에 있어서 가장 대중적이고, 유명 베스트셀러 작가, 그리고 모든 학생들이 꿈꾸는 의과대학의 교수. 이런 유혹적인 요소들이 가미된 작가님의 서재임에도 찾아뵙는 분들은 마치 옆집의 이웃처럼 고정적인 분들만 가득하다는 것 말입니다. ㅠㅠ 대한민국엔 과연 언젠가 책의 문화가 팽배해질 수 있을까요. 책이 있어야 토론을 할 수 있고, 좋은 글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대도 말입니다.
대학 입시를 거의 마치고 책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은 찾아보았습니다. 그나마 볼 수 있는 것은 작가와의 만남일 뿐이지, 취미로서 책을 소통하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비슷한 연령층의 친구들과 말이죠. 제 생각으론 비주류가 되어가는 책에 대한 너무나 아쉬움이 담긴 댓글을 작가님께 쏟아내고 갑니다ㅋㅋ...

마태우스 2018-11-15 00:0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일단 이동국님 수능 잘 보십시오! 글구 님의 말씀에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이곳은 책에 관해 토론하는 곳이 아니라, 책을 빌미로 사람들이 우정을 나누는 곳이어요. 마을공동체 비슷한 곳이랄까요. 그래서 옆집 이웃님들이 주로 오시죠. 그러다 가끔 파이어가 나서 댓글이 많아지기도 하고 그러는데요, 님께 말씀을 드리자면 독서클럽이 인터넷엔 많이 있어요. 거기 가보면 사람들이 책 많이 읽는구나, 라고 생각하실걸요. 거기서 활발한 소통도 이루어지고요. 21세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책을 가지고 소통하는 사람은 계속 있을 거예요. 그러니 미리 좌절하지 마세요. 님 주위 사람들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니까요. 참고로 알라딘 공간도 좋은 곳입니다. 서재 만들어서 글 쓰시면 어떨지요
 
알아두면 돈 되는 1인기업 세무과외 - 1인기업가와 개인사업자에게 최적화된 절세 노하우
박순웅 지음 / 베가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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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료를 기타소득으로 처리할까요, 사업소득으로 할까요?”
외부강의를 의뢰한 분의 질문에 난 뭐라고 해야 할지 난감했다.
기타소득이 뭐고, 사업소득은 또 뭔지 당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차이가 있냐고 물었더니 뭐라고 대답을 해 주는데,
그게 내겐 큰 도움이 안됐다.
몰라도 너무 몰랐으니까.
<1인기업 세무과외> (이하 세무과외)를 읽은 지금은 안다.
답은 ‘사업소득’이다.
기타소득은 사업소득보다 세율이 낮아 강사에게 유리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사업소득으로 해선 안된다.
강사료가 1회성이라면, 혹은 강의료의 연간 총합이 얼마 되지 않는다면
기타소득으로 해도 괜찮지만,
나처럼 상습적으로 외부강의를 하고 다니는 인간은 당.연.히. 사업소득으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탈세’의 땅에 발을 디디는 것이다.

이것 말고도 난 기장이 뭔지, 복식부기는 또 무엇인지, 소득세는 어떻게 산출되는지 등등
평소 담을 쌓고 살았던 용어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게 됐으니,
<세무과외>야말로 희대의 거간꾼이다.


그 이전에 세무에 관한 책이 없었던 것은 아닐 테지만,
<세무과외>가 빛나는 점은 최대한 재미있게 설명하려 했다는 데 있다.
예컨대 ‘법인’을 설명하는 챕터는 이렇게 시작된다.
“서른다섯 노총각 백수 나혼밥은 고민에 빠졌다.”(104쪽)
이게 법인하고 무슨 상관이냐 의아하겠지만, 곧 나혼밥이 여자를 사귀고,
또 기업에 입사하는 얘기가 나오면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법인’이란 무엇인지로 흘러간다.
그 다음에 법인세가 나오고, 부가가치세가 나온다.
매 페이지마다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노력한 흔적이 역력해서
나처럼 머리가 굳은 이도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으면 세무사의 힘을 빌지 않아도 강사료 처리를 할 수 있을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질문맨: 그렇다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요?
저자: 세무 업무를 전문가에게 맡기더라도 세금의 기본개념 정도는 이해하고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경우에 세금 문제가 발생하는지, 전문가 상담은 언제 필요한지 알 수 있기 때문이죠. 사고가 나면 전문가는 책임져 줄까요? 아닙니다. (27쪽)
전체 기업 중 1인기업이 80%에 달하는 시대,
창업을 꿈꾼다면 이 책 정도는 읽고 시작하길 권한다. 

이 책이 마음에 드는 또 다른 이유는, 이 책이 절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절세 얘기가 간략히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차원일 뿐,
부정한 방법의 절세에 대해 단호히 선을 긋는다.
개인사업자에게 마법의 절세 비법은 없습니다....높은 누진세율이 고민이라면 그만큼 소득이 높다는 사실에 먼저 감사합시다.” (206쪽)
이 책을 통해 이런 생각이 널리 공유된다면, 우리나라가 더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세무과외>를 널리 추천하는 이유다. 

 

* 책 말미에 내 이름이 나와서 화들짝 놀랐다.

책의 저자 박순웅은 <서민적 글쓰기>를 보고 책을 쓸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내가 쓴 그 책이 <세무과외>라는 좋은 책이 나오는 데 도움을 준 셈이니, 이쯤되면 책을 쓴 보람이 충분하지 않은가?

<세무과외>도 저자의 의도대로 세금에 대해 잘 알게 해줄 것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영감을 줘서 자기 분야에 대한 책을 내게 해줄 것이다.

이렇듯 책은 다른 이에게 징검다리가 되어 준다.

이 맛에, 책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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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10-25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축하합니다..
그것처럼 뿌듯할 때가 없죠.

참 그러고 보니 겸손하신 마태님께서
<서민 독서> 보내주실 때
저의 책 읽으시고 책 내셨다고 써 주신 게 왜 그리도 고맙던지.
정말 좋은 책 써야겠구나 다시 한 번 다짐하게 되더군요.
물론 지금은 그 다짐이 지나쳐 자신감이 다소 떨어졌지만.ㅠㅠㅋ
역시 말 한마디가 큰 힘이 될 때가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감사요!^^

마태우스 2018-10-26 12:48   좋아요 0 | URL
우리끼리 서로 감사하는 모습이 아름답네요^^ 자신감 회복하시고 마음에 드는 책 쓰시길 빕니다
 
책혐시대의 책읽기
김욱 지음 / 개마고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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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 교수가 쓴 <책혐 시대의 책읽기>를 받았을 때,
“이 책은 또 뭐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거의 마지막으로 낸 책이 <서민독서>고,
그 책은 ‘독서’를 권하는, 아니 강요하는 책이다.
처음엔 <책은 도끼다>와 쌍벽을 이루는 책이 될 것으로 믿었건만,
판매고는 내 예상치의 100분의 1도 안될 지경이다.
게다가 시중에는 독서를 권하는 책이 계속 나온다.
가뜩이나 어려운 이 때, 김욱교수처럼 지명도가 있으신 분이
‘권독서’를 한 권 냈으니 내가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는가?


내가 우려했던대로 이 책은 매우 논리적이고 분석적으로 책읽기를 권하고 있었다.
게다가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독서의 장점까지 나열했는지라 배우는 바가 많았다.
책이 나온 건 4월,
이 책을 읽어버린 건 5월,
그럼에도 내가 오래도록 리뷰를 쓰지 않은 건
이 책이 나와서 승승장구할 때 날개를 달아주지 말아야겠다는 치졸한 마음 때문이었다.
더 얍삽한 것은 책에서 본 문구를 내 강의 때 써먹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책 25쪽부터 34쪽에 나온,
책 추천을 부탁하는 분들에 대한 저자의 한탄을 잽싸게 가져다 이렇게 정리했다.
[독서에 관한 강의 때마다 책 추천 좀 해주세요, 라고 묻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어떤 마음으로 그러는 걸까요?
첫째, 난 책 안읽고도 잘 살고 있다
둘째,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셋째, 하지만 네가 그렇게 독서를 권하니, 추천하는 책 한 권 정도는 읽어주겠다.
넷째, 만약 그 책이 재미없으면, 난 다시는 책을 읽지 않겠다]


그것 말고도 이 책에서 감명받고 또 강의에서 우려먹는 부분이 한두곳이 아닌데,
반년이 지난 지금 갑자기 이 책의 리뷰를 쓰는 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일말의 양심
첫째, 이 책을 견제한다고 서민독서가 잘 팔릴 것 같지 않아서.
셋째, 조금 있으면 다른 내용의 책이 나오니 거기에 집중하려고, 등등이다.
한 마디로 마음을 비웠다는 뜻인데,
마음을 비운 이 리뷰가 <책혐시대의 책읽기>로 인도하는 안내판이 됐으면 한다.
원래 좋은 책은 반년쯤 묵혀뒀다 읽으면 더 재미있는 법이니 말이다.


여기에 넘어가지 않는 분들을 위해 떡밥을 하나 더 던진다.
저자는 책을 읽지 않고 좋은 말들, 즉 명구만 수록된 소위 ‘명구집’만 읽는 행태를 비판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우리가 명구의 역사적 사연을 이해하고 그 명구가 품은 뜻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책읽기라는 번잡한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의미도 모르는 명구 찾기를 책읽기라고 생각하며 즐기는 것이야말로 시간낭비라고 생각한다.(121쪽)]
장담컨대 이 책에는 이런 주옥같은 말들이 가득하다.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를 들어는 봤지만 뜻은 모른다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읽으시라.
원래 책을 안읽던 분들은 맹렬히, 원래 읽던 분들은 더 맹렬히 책을 읽게 될 테니까.


● 리뷰를 쓰면서 꺼림직했던 점이 하나 있다. 김욱교수는 후반부에 각 분야별로 읽어야 할 책을 추천해 놨는데,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자연과학 책에 내가 쓴 책들을 하나도 집어넣지 않았다! 특히 <기생충열전>을 빠뜨리다니, 너무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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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10-15 0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마태우스님~~
언제 읽어도 유쾌한 마태우스님 페이퍼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추천책 목록에 <기생충열전>이 빠졌는데도 이 책의 장점을 잘 정리해주신 글을 읽으면서, 역시 마태우스님은 진정한 대인배이시구나, 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마태우스 2018-10-15 23:4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단발머리님 사실 제가 대인배는 아닌데요, 그냥 솔직한 겁니다^^ 속으심 안됩니다

stella.K 2018-10-15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이 책 검색하면서 보긴 했는데
저자는 처음 접해봤습니다.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가요?
하지만 저는 마태우스님이 더 익숙합니다.

맨 마지막 문단을 생각하면 저도 할 말은 없습니다.
저의 책에 마태님 책은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았으니...
오히려 제가 마태님께 은혜를 입었지 말입니다.ㅠㅠ

마태우스 2018-10-15 23:43   좋아요 0 | URL
스텔라K님, 안녕하셨어요 우리야 가끔 이리 대화 나누니 서로 아는 거구요 김욱교수님은 책 세상에서 훨씬 유명하실 걸요. 아주 낯선 상식이란 책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고요. 글구 님이 할말이 없다뇨. 그러지 마세용. 김욱님한테 칭얼거린 건 그저 웃자고 한 차원입니다. 뭔가 시비를 걸어야 하니깐요. 님이 그러심 제가...ㅠㅠ뭐가 됩니까. ㅠㅠ
 
현대의학의 거의 모든 역사
제임스 르 파누 지음, 강병철 옮김 / 알마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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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쑥스럽지만, 그간 ‘의학의 역사’라는 책을 쓰느라 바빴다.
제목은 정해진 게 아닌데, 아무튼 신석기시대부터 최근까지
의학의 발전과정을 다루는 내용이다.
첫 삽을 든 것은 3월 초의 일이였으나 글에만 매달리기엔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았기에
짬이 날 때마다 쓰다보니 결국 원고를 다 완성한 게 9월 말이다.
지금은 수정 단계인데, 고칠 부분이 워낙 많다보니 언제쯤 책이 나올지는 아직 모른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시중에 나와있는 ‘의학의 역사’를 거의 다 구입해 읽었다.
그 중 최고의 책을 꼽으라면 단연 제임스 르 파누가 쓴 <현대의학의 거의 모든 역사>다.
워낙 알찬 정보가 많은데다
의학발전에 기여한 결정적인 에피소드들이 재미있게 나열돼 있어서 읽는 내내 즐거웠다.
신장이식에 혁혁한 공을 세운 ‘로이 칸’이란 의사의 에피소드를 보자.
[“당시 과장님이 그 아이가 1-2주 안에 죽을 거라고 말했기 때문에 되도록 편안하게 해주어야 했지요.”라고 칸은 회상했다. “나는...콩팥 같은 장기는 과일 나무나 장미 가지를 이식하는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이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물어보았죠. 신장을 이식할 수는 없나요? 과장님은 대답했어요. 안 돼. 불가능해. 왜요? 안 되니까 안 되지. 옆에 있던 친구가 더 이상 묻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속삭였어요.” (180쪽)]
게다가 번역도 오자나 비문 하나 없이 완벽하다시피해서, 술술 읽힌다.
가격이 3만3천원이라 좀 비싸긴 해도, 598쪽에 이르는 분량을 생각하면 수긍할 만하다.


책을 쓰는 내내 생각했다.
이렇게 훌륭한 책이 있는데 도대체 내가 왜 또 의학의 역사를 쓴단 말인가?
가장 큰 이유는 ‘출판사가 시켜서’지만,
책을 쓰면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 게 ‘의학의 역사를 재미있게 쓴 책은 없잖아?’였다.
하지만 다 쓰고 난 뒤 수정을 위해 내가 쓴 원고들을 다시 읽어보다 보니,
‘재미’ 면에서도 <거의 모든 역사>가 나은 것 같다.
하지만 지금사 확인한 알라딘 세일즈 포인트는 충격 그 자체다.
2016년 1월에 나왔으니 2년 반이 더 지나긴 했지만,
‘429’의 세일즈 포인트는 이 좋은 책이 받아야 할 점수 치고는 너무 적어 보인다.
리뷰는 물론이고 100자평마저 하나 없다는 것 역시 안타깝다.
그러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의학의 발전사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여기서 앞으로 나올 내 책의 운명을 점쳐볼 수 있다.
이렇듯 훌륭한 책이 429라는 결과에 좌초하고 만 걸 보면
그보다 못한 내 책이 잘 될 것 같진 않다. 
이 생각을 하면 그간 책을 쓰느라 고생했던 게 아깝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책 쓰는 것만큼 좋은 공부는 없는 법,
덕분에 내가 의학의 역사에 대해 잘 알게 됐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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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8-10-09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가 시켜서.ㅎㅎ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할게요^^

stella.K 2018-10-09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출판사가 시켜서 쓰는 게 안전하긴 하죠.
새로운 책이 나오는군요.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마태님 책이 훨씬 재밌을 것 같습니다.

알라딘의 세일즈 포인트가 낮은 건 이런 책은 일반인이
거의 읽지 않는 책이죠.
이렇게 마태님 같으신 분들이 알려줘야 알려지지 않을까요?
지금쯤 슬슬 입질이 오고 있을 겁니다.
그나저나 저도 분발해야 할 텐데 갑자기 일이 밀려 들어서
지금은 주춤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다시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습니다.^^;;

마태우스 2018-10-10 1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실님 기대에 감사드립니다 님의책도 기대할래요

마태우스 2018-10-10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참좋은책이고 우리가 의료를 알아야하는데 아쉽더군요 더큰목표는 이책으로 파이를 키워서 내책을 판다ㅋㅋ 분발합시다우리 일하며 쓰는게 원래어렵습다
 
메스를 잡다
아르놀트 판 더 라르 지음, 제효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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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를 잡다>는 ‘아르놀트 판 더 라르’ (이하 아르놀트)라는 네덜란드 외과의사가 쓴 책이다.
‘세상을 바꾼 수술, 그 매혹의 역사’라는 제목에서 보듯
이 책은 외과수술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다.
오랜 기간 교황직을 수행한 요한 바오로 2세가 총을 맞고 살아난 이야기.
이란의 왕이었던 팔레비가 수술상의 실수로 죽은 이야기,
이젠 전설이 된 케네디 대통령의 사망 이야기처럼
일반인들이 한번쯤 들어봤을 인물들이 겪었던, 수술과 관련된 사건이 책을 가득 메우고 있다.


수술이란 환자의 몸을 절개하고 들어가 그 안에 있는 병소를 제거하는 것,
몸에 칼을 대는 그 순간부터 외부에 있는 세균들이 침투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
당연히 수술실은 멸균된 상태여야 하고
환자에겐 세균의 침입을 막는 항생제가 투여돼야 하지만,
항생제의 원조인 페니실린이 대량생산된 건 2차대전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다.
심지어 마취제가 쓰이게 된 것도 19세기 중반인 빅토리아 여왕의 분만 때부터였다니,
그 이전에 수술을 받은 환자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그래서 외과의사는 늘 신속하게 움직여야 했다. 통증이 지속되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수술 보조나 다른 도우미들이 환자를 붙들고 있는데
여유롭게 수술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수술은 항상 빠를수록 좋은 것으로 여겨졌다.’ (152-153쪽)
이런 열악한 조건에도 수술을 시도했던 의사들,
그리고 그 수술을 기꺼이 감내했던 환자들 덕분에
지금처럼 심장이식 수술이 가능한 시대가 열렸지 않겠는가, 하는 게
이 책이 집필된 의도이리라.


매우 공들여 쓴 책이라는 걸 읽는 내내 느낄 수 있기도 하지만,
이 책의 최대 장점은 ‘재미’이며, 그 재미는 다음에서 기인한다.
1) 일반인은 접근하기 힘든, 수술과 관련된 과거 사건의 전말을 알려줌.
2) 독자가 흥미를 가질 만한 사건들을 선별하는 저자의 안목.
3) 각 사건을 독자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게 기술하는 저자의 뛰어난 필력.
사정이 있어서 의학의 역사에 관해 시중에 나온 책을 죄다 읽어봤는데
재미 면에서 이 책만큼 뛰어난 책은 단언컨대 없다.
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기쁨을 <메스를 잡다>에서 느껴보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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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8-09-29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배송 예정인 책들 중 하나예요. 마태우스님이 극찬하시니 얼른 읽고 싶네요^^

마태우스 2018-09-29 16:32   좋아요 0 | URL
조금 잔인한 장면들도 나와요. 그걸 워낙 담담하게 서술하니 더 잔인하게 느껴지기도...ㅠㅠ 다리 절단 장면에서 읽다가 잠시 덮었다는...제가 외과 못한 게 그 때문이기도 한데요, 달밤님은 잘 견뎌내실 수 있을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