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산장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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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정 살인사건을 뛰어넘는 재미, 히가시노 게이고 추리소설의 진수"

읽던 책이 어려워 순전히 머리를 식힐 목적으로 <백마산장 살인사건>을 읽었다. 다 읽고 나니 괜히 읽었다 싶다. 이 책으로 인해 히가시노 게이고가 결정적으로 싫어져 버렸으니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히가시노 최고의 소설은 <용의자 X의 헌신>, 공교롭게도 그의 작품 중 가장 먼저 접한 작품이 바로 그거라, 그의 다른 작품들을 읽을수록 "내 타입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다. 책 아래 선전문구에 등장하는 <회랑정> 역시 그럭저럭의 평가는 줄 수 있을지언정 대단한 정도는 아니었는데, <백마산장>은 좀 심하게 재미없었다.


이 책은 아가사 크리스티가 썼던 <쥐덫>의 설정과 비슷하다. 자살로 위장한 살인사건, 한정된 공간에 모인 사람들, 그 안에 숨어있는 범인. 이런 설정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사건이 일어날 때 있었던 사람들이 1년 후 같은 장소에서 다시 모인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것 같고, 사건의 단서라고 나온 영국 전래동요 '머더구스'도 뭐가 뭔지 어지럽게만 만드는데다 등장인물의 이름을 외우는 것도 머리가 아팠다. 이런 것들을 그냥 넘어가준다 하더라도 단서들을 조합해 '머더구스'의 암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해독하는 과정은 좀 심했다. "캬, 정말 대단하다"는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머리 좀 썼구나,는 반응은 보일 수 있기를 기대했건만, 암호를 푸는 과정도 영 어지럽고 범인도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느낌이다.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범인은 당신이야!"라고 한 사람을 지목하니, 감탄이 나오기는커녕 기가 탁 막혔다.


그의 책을 도대체 몇권이나 읽었다고 히가시노를 폄하하냐고 다그친다면 별로 할 말은 없다. 이번에 읽은 게 다섯 번 째인가 그렇고, 이게 그의 초기작이라고 하니, 내가 안읽은 것들 중에 숨겨진 보석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책이 너무도 재미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책을 쓰는 작가라면 다른 책들은 안봐도 뻔하지 않아?"란 생각이 들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유명해진 작가의 검증안된 초기작을 책으로 내면서 "히가시노 추리소설의 진수"라는 홍보문구를 쓰는 건, 책 판매에 당장 도움은 된다 하더라도 해당 작가에 대한 안티 팬을 만드는 좋지 않은 효과를 나타낸다. 유덕화가 유명해지고 난 뒤, 그가 웨이터로 나와 대사 한마디 하고 죽는 영화를 "유덕화 주연!"으로 속여 홍보한 포스터에 낚인 적이 있다. 지금 기분이 딱 그때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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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5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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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전날, 난 적막한 학교를 저벅저벅 걸어나왔다. 가방 안에 참고문헌을 가득 넣고서. 가정이 생겼는지라 명절이 더 이상 나만의 것은 아니지만, 짬이 나는대로 논문을 써야겠다는 게 내 굳은 각오였다. 출발도 좋았다. 첫날은 너무 피곤해 일찍 자고 말았지만, 다음날 본가에선 아내가 음식을 만드는 동안 짬짬이 논문을 썼으니까. 서론과 방법을 다 쓰고 나자 기분이 좋아진 난, 집에서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낙원>을 펼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달구어진 머리를 식히는 용도였고, 잠깐 보고 말 참이었지만, 그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추석연휴 동안 내 논문은 그렇게 나랑 작별했다. 난 짬이 있을 때마다 <낙원>을 펼쳤고, 운전을 하는 동안에는 아내더러 책을 읽어달라고 했다. 그때 내 마음은 “책을 빨리 다 읽고 논문을 쓰자”였는데, 아무리 흥미진진하다 해도 1권이 500여쪽, 2권이 400쪽이나 되는 분량을 해치우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연휴 마지막날 열한시, 난 드디어 <낙원>의 종지부를 찍었고, 그 다음날 출근해 담당자에게 “죄송한데요, 시간을 조금만 더...”라고 말해야 했다.




미미여사의 책이 대충 다 그렇지만, <낙원> 역시 특정 사건을 조명하는 와중에 일본 사회의 여러 면을 건드린다. 저자는 청소년의 탈선이 부모의 올바른 지도가 부족해서 생긴다는 견해를 갖고 있는 듯하며, 이는 여사의 전작인 <모방범>의 주범이 소위 말하는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지 못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글쎄다. 부모가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가르친다고 해서 괴물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고, 그냥 막 자랐는데도 훌륭한 사람이 되는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모방범>에 이어 올해 읽은 가장 재미있는 책 2위에 올랐는데, 다음 장을 궁금하게 하는 미미 여사의 솜씨는 정말이지 최고다. 그러니, 할 일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선뜻 집어들어선 안될 것이다. 달구어진 머리를 식히려 잠깐 읽다가는 본업을 망치게 되고,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읽었다간 회사 가서도 내내 이 책만 몰래 읽게 될 테니까.




책동네에서 노는 게 좋은 점은 좋은 작가를 많이 알게 된다는 거다. “난 이제 내가 읽을 책은 스스로 고를 거야”라는 태도도 나쁠 게 없지만, 남들이 권해 주는 책도 가끔은 읽어 줘야 한다. 새초롬너구리님이 내게 미미여사의 책 세권을 선물해주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세권 중에 <이유>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면, 내 어찌 <모방범>과 <낙원>을 읽는 영광이 있겠는가? 내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지만, 내 잘못으로 연락이 끊어진 그분께 늦게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참, 미미여사께도 한마디.

“여사님, 너무하셨어요. 이렇게 재미있게 쓰시면 일을 어떻게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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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8-09-17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보다 먼저 읽었다...만세!

다락방 2008-09-17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분하다. 2권 읽고있는 중이란 말예욧!!

물만두 2008-09-17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소설을 열독하시와요^^=3=3=3

순오기 2008-09-18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 낚여서 이 책 볼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요.ㅎㅎ

최상의발명품 2008-09-18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추리소설은 잘 안 읽는데
제가 읽어도 재밌을까요?
마태님이 말씀하시는 거 들을 때 진짜 너무 재밌어 보여서 솔깃해요.

달빛푸른고개 2008-09-18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글 읽고 갑니다.^^

달빛푸른고개 2008-09-18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낙원>은 사놓고 아직 읽지 않았지만, 그 전에 읽었던 <모방범>의 공력은, 물론 지적할 부분이 없진 않지만 비교할 꺼리가 없는 수작으로 읽었습니다. 시간 되면 책꽂이에 놓인 책을 보고 여기에 소감 남길 수 있겠죠? 서툴다해도...

락스 2008-09-18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연휴내내 이책을 읽었어요.추리안읽는데 미미여사의 얘기에 끌려 끝까지 읽게 되더군요.

마태우스 2008-09-19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락스님/어 이럴 땐 꽈배기라고 말해야 하나요^^ 미미여사의 책은 추리라고 보기엔 너무 방대하지요..
달빛푸른고개님/엇 재밌다고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말 모방범은 제가 알던 추리의 개념을 다 부숴버린 명작이라고 생각해요. 글구 소감은 얼마든지 남기셔도 됩니다 제가 요즘 어렵거든요 호홋.
발명품님/음, 님이 읽으셔도 재미있을 겁니다. 이게 범인 잡고 그런 책은 아니거든요.... 제가 장담할 수 있는 책은 몇권 안된다는....^^
순오기님/헤헤 낚아 보려고 노력했는데 잘 될까요^^
물만두님/저 원래 추리 좋아해요 책 안읽던 시절에 추리만 읽었잖습니까. 제가 만두님한테 많이 배웠지요, 앞으로도 그럴 거구요.
다락방님/호홋. 간발의 차이였군요!! 다행이다.

파란 2008-09-25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소설의 팬이었는데 아이를 낳고부터 조금 변하더라구요. 꿈에 책에서 보았던 '무언가'에 쫓기던 밤 이후로. 무섬증이 드네요. 모방범을 정말 재미있게 보다가 마지막 3편에 들어서서 등뒤가 오싹하는 기분에 잡혀 그냥 덮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약해지다니 하면서 제일 마지막으로 휙 넘겨 결말을 그냥 읽고 멀리 두었습니다. 아직까지도 멀리 있네요

마태우스 2008-10-08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님/어...댓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 3편을 쉴새없이 읽어내려갔는데, 님은 그냥 덮으셨다니 얼마나 무서웠는지 짐작할 만 합니다... 원래 어머니가 되면 강해지는 줄 알았는데 아닌 분도 계시군요! 힘내시고 다시 도전해 보심이 어떨런지요.
 
마지막 강의
랜디 포시.제프리 재슬로 지음, 심은우 옮김 / 살림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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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을 보면 랜디 포시가 생각나요.”

나랑 친한 선생님 한분이 내게 해준 말이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낙천적이고, 강의를 재매있게 해서란다. 난 별로 낙천적이지 않고, 강의를 재미있게 하고는 싶지만 잘 안된다고 대답했는데, 내가 <마지막 강의>를 읽은 건 랜디 포시가 과연 어떤 사람인가가 궁금해서였다. 그러니까 내가 인생을 살면서 몇 번 만나기 힘든 감동적인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건, 그가 그런 말을 내게 해준 덕분이었다.




마지막 장을 넘길 때 난 기차에 앉아 있었다. 272쪽에 나오는 아내의 생일축하 장면부터 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책을 다 덮고 난 뒤에도 눈물은 그쳐지지 않았다. 그가 췌장암을 앓지 않았다면 그는 ‘마지막 강의’를 하지 않았을테고, 그럼 난 그를 영영 몰랐겠지만, 세상에 이렇게나 멋진 사람이 얼마 안있어 죽어야 한다는 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이 책은 어찌어찌 해야 잘 살 수 있다는, 일종의 자기계발서다. 그리고 난 그런 종류의 책은 잘 읽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을 흔해빠진 자기계발서와 차별화시켜주는 건, 책 곳곳에 드러난 랜디 포시의 놀라운 낙천성이었다. 예컨대 랜디의 대학동료 로비가 퇴근을 하는데 너무나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운전을 하는 남자를 발견했다. 로비는 그 남자의 얼굴을 가까이 보려고 다가갔고, 잠시 후 이렇게 외쳤다.

“세상에! 랜디 포시잖아!”

췌장암 말기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의 미소, 그게 바로 랜디 포시다. 췌장암 말기여서 과속딱지를 안뗐다고 즐겁게 웃었다는 그, 인터넷에 떠있는 ‘마지막 강의’ 동영상을 보다보면 도대체 그가 암에 걸린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늘 “난 안돼”를 외치는 내 모습과 얼마나 다른지, 내 친구는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봤다.




그는 자신의 비결을 이렇게 말한다.

“낙관론자로 살 수 있게 해주는 한가지 전제조건은 어떤 혼란이 닥쳐도 해결이 가능한 긴급 대비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거기에 따른 적절한 대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걱정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220쪽).”

그랬다. 그러고보면 난 아무 준비도 안한 채 “난 못한다”만 외쳤다. 오랜 습관이 갑자기 고쳐질 리는 없지만, 앞으로는 못한다고 할 시간에 뭐라도 해볼 생각이다. 이 책을 읽고 내가 조금이라도 변한다면, 저 세상에 있는 랜디 포시가 더 환하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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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9-05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랜디 포시~ 멋진 사람이었군요. 멋진 사람은 왜 빨리 데려가는지...ㅜㅜ

sweetmagic 2008-09-06 0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책도 쓰셨군요, 도서관에 가봐야겠어요~ 빌리러 ^^

paviana 2008-09-06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인과 아이들 사진을 봤는데 너무나 행복해보이고 사랑스러워보이는 가족들이었어요.
부인도 너무 미인이고 아이들도 너무 잘 생기고, 그런 가족들을 남기고 어떻게 떠날까 그사람 참 너무 억울하겠다라고 생각햇더랍니다..

2008-09-06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상의발명품 2008-09-07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태님 덕에 좋은 분을 알게 되네요.
저도 꼭 책 한 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가시장미 2008-09-09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 결혼식에 와주셔서 정말 감사! ^^ 근데 식사는 하고 가신거죠? 인사드리러 내려갔었는데.. 안 계신 것 같던데.. 설마 식사도 안 하고 가신건아니죠?

이 사람 얼마나 멋지기에 이렇게 극찬을 해주셨어요. (아! 형은 원래 극찬하는게 특기시지..) 형이 이런 리뷰쓰면 확인하고 싶어서라도 책을 사게된다니깐요 ㅋㅋ 근데 아줌마가 된 탓에 절약해야 하는 관계로 서점에서 살짝쿵 확인한 다음에 사야겠네요. -_-a

형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서 마지막 수업하는 날이 안 오시길 바래요. 흑..

마태우스 2008-09-17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님/식사는 안했구요, 끝나자마자 혼자 영화봤답니다^^ 글구..제가 극찬하는 게 특기긴 해요. 가정 이루셨으니 당분간 가정에 올인하느라 바쁘시겠지요? 화이팅 아줌마.
촤상님/훗훗 다 그렇게이렇게 알게 되는 거죠 뭐. 호홋.
속삭님/어, 그게 아니구요..... 억울해요!!!
파비님/부인이 그다지 미인은 아닌 듯...제가 너무 미녀분과 결혼을 했더니 호홋.
속삭님/안녕하세요? 혹시 원서로 보시는 건가요?
순오기님/글게 말입니다... 그런 논리라면 전 오래 살겄군요 호홋.

섣달보름 2008-09-17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리뷰 보고, 어제 '마지막 강의' 봤습니다.
역시.. 역시..
당분간 '멋진 티거' 흉내내며 사는 제 모습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감솨~~
 
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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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지도 않고 아는 체를 하다간 실수하기 십상이다. <달과 6펜스>에 대해 어디서 주워들은 게 있어서 "어, 그거? 고호 얘기지"라고 잘난 체를 했다가 한동안 그 사람을 피해다닌 쓰라린 경험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서머싯 몸을 이제라도 읽어서 아는 체를 할 수 있게 된 스스로가 대견해 보인다. '6펜스'보다 달의 가치를 더 높게 생각할 나이에 읽었다면 훨씬 좋았겠지만 말이다.




난 이 책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실존했던 인물을 대상으로 했고, 내가 원래 천재나 영웅의 이야기를 좋아하는지라 더더욱 재미있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만 해도 난 고갱에 대해 안좋은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언젠가 고호에 관한 책을 읽었을 때, 고갱이 ‘이기적’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왔었던 탓이다. 게다가 고호의 그림들이 “아, 과연 천재구나!”라는 느낌을 주는 반면 고갱의 그림은,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의 반응이 그랬던 것처럼, 대체 그게 왜 명화인지 의아했었다. 그래서 난 “고갱이 고호와 동시대 인물이고 같은 성씨라 같이 뜬 게 아닐까?”라는 바보같은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나란 놈이 원래 아는 게 별로 없고, 남의 한 마디에 생각이 왔다 갔다 하는지라, 이 책을 읽고 난 뒤엔 고갱에 대해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책이 고갱의 실제 모습과 다르다 해도,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미술계로 투신하는 그의 용기와 생활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림을 그린 인내심은 정말 존경할만하다.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

생을 망치는 일일까? 연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가 되는 것이 성공인 것일까?(259쪽)’

예쁜 아내에 대해서는 좀 생각이 다르지만, 주인공의 이 말은 이 책이 주장하는 바를 함축하고 있다. 돈이 있다는 게 곧 훌륭함과 동일시되는 요즘 같은 시대일수록 이런 책이 더 읽혀야 할 것 같지만, 같은 이유로 부모들은 아이들이 <달과 6펜스>를 읽는 걸 싫어하지 않을까 싶다. 자기 자식이 “영혼이 날 부른다”며 미술을 하겠다고 할 때, 그걸 허락하는 부모가 우리나라에 얼마나 있을까? 그러고보면 과거와 달리 요즘 유명한 화가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색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에 도달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심화된 탓이 아닐까? 자본주의, 미술의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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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보름 2008-09-05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워요. 진정 내가 원하는 일이 뭔지도 사실 모르겠는데,
안다고 한들,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지...
그리고 끊임없이 경쟁하게 만드는 사회 분위기. 낙오되면 안된다는 조바심, 열등감...
그래서 맘 편히 살기는 참 어려운 사회인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읽고 싶어지네요.

paviana 2008-09-06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예전에 분명히 읽은 책인데 도무지 좋은 책이었다는 거 빼놓고는 기억이 별로 안나네요.흑흑흑 좋아하던 샘이 읽으라고 해서 열심히 읽었던 무지 두꺼운 책이었는데...
늙었나봐요.

2008-09-06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단이였던 돈이 목적이되버린.. 슬픈 우리시대의 자화상..

최상의발명품 2008-09-07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루할 것 같다는 편견으로 안 읽었는데
재밌게 읽으셨다니 신뢰하고 읽어봐야겠어요^^
좋은 주말 되세요~

마태우스 2008-09-17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상의 발명품님/어...재미없어도 너무 많이 원망하심 안되요 좋은 추석 보내셨나요?^^
오델로님/글게 말입니다. 근데 처음 뵙는 듯...앞으로 잘 부탁해요
파비님/그다지 두껍진 않지만, 세계명작은 이상하게 두꺼운 책으로 각인되어 있어요 모방범은 안그런데^^
섣달보름님/정말 그렇습니다 맘 편히 살기 어려운 세상이죠. 어딜 가나 남을 이겨야 한다는 경쟁심만 가득한 듯 싶어요. 책동네에 오면 좀 덜하지만, 하여간 세상이 무서워요.
 
모방범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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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인 어제는 매우 슬픈 날이었다. 올림픽이 끝나서 그런 건 아니다. 물론 올림픽, 특히 야구가 내게 2주간의 즐거움을 주긴 했지만, 내 슬픔의 원인은 다른 데 있다.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모방범>을 다 읽어버렸기 때문. 시작 무렵부터 난 그 책에 빠져들어 허우적댔는데, 읽는 내내 스토리에 대한 궁금증과 '다 읽으면 어쩌나'는 허무함 사이에서 갈등을 했었다. 승리하는 건 언제나 전자였음에도 내가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던 건 그 책이 3권으로 되어 있고, 한 권이 500쪽에 달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제 저녁을 먹을 무렵, 3권이 거의 끝나가는 걸 본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거의 다 읽었네? 이제 무슨 재미로 살려구?"


정말 그렇다. 세권을 다 읽은 지금의 심정은 허무 그 자체다. 다음에 읽을 책을 선정하려 책장에 갔지만, 이것도 아닌 것 같고 저것도 아닌 것 같다. 지나치게 재미있는 책은 이런 지대한 후유증을 준다. 아내는 "3권째 되니까 지루하더라"라고 했다. 나도 그랬다면, 이 책과의 이별이 이렇게까지 아쉽지 않았을텐데, 어찌된 게 난 3권으로 갈수록 더 흥미진진해지는지! 이 책에서 가장 모골이 송연하던 장면은 범인으로 지목된 다카와의 여동생 유리코가 한 남자의 차에 탔을 때였는데, 그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네 오빠나 친구들은 나를 '피스'라고 불렀어."


미미여사의 추리소설을 대체로 좋아하지만, 이번 책은 거의 혁명에 가깝다. 어떻게 이런 파격적인 추리소설이 다 있는지, 그리고 어쩜 그렇게 몸서리칠 정도의 재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난 정말 궁금하다. 이렇다할 추리도 없이, 범인을 식당에서 마주쳐 검거하는 류의 추리소설을 썼던 과거가 무지하게 부끄러워지는데, 앞으로 바르게 살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가끔씩 "네 책 샀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 삶의 평화가 깨진다. 이러니, 나중에 바르게 살 생각을 하는 대신, 처음부터 나쁜 길에 빠져들지 않는 게 좋다. 철없던 그 시절, 난 왜 그랬을까 열심히 후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와, 이 책 정말 재미있다"는 리뷰를 많이 쓰게 된다. 내 기준이 낮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는 매혹될 만한 책들이 끝도 없이 많다. 그런 책을 써준 글쓴이들에게 감사할 일이고, 또한 그 책들이 내 눈앞에 오게끔 해준 사람들에게도 감사드릴 일이다. 죽어라고 책만 읽어도 그 아름다운 책들 중 몇%나 읽을 수 있을지 모르는 판에, 요즘 너무 책읽기를 게을리했다. <모방범>은 그런 내 나태함을 일거에 날려버리는 계기가 될 듯하다. 미미여사님, 고마워요. 전 당신 팬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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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8-25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장면에서 저도 등골이 오싹! 이제 낙원 보셔야지요 ㅎㅎㅎ

바람돌이 2008-08-25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팬이에요. ㅎㅎ 저는 2권이 약간 지루하고 3권은 오히려 더 흥미진진... ^^
후속편으로 나온 낙원은 어떨지 기대돼요. ^^

비로그인 2008-08-25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이 심하게 지루할 때 이 책을 볼까 봐요. 이런 책을 저는, 비상 상비약 두듯 아껴놓곤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다락방 2008-08-25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께서 낙원을 읽으시기 전에 제가 읽어야 할텐데요. 그래야 마태우스님의 리뷰를 보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훗.

모방범은 정말 매우 재미있었어요!

마냐 2008-08-25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와 이 책 정말 재미있다"는 리뷰를 많이 씁니다. 저도 제 기준 탓을 간혹 하는데...그래도 재미있는 건 재미있다고 눈치안보고 떠드는게 좋을 거 같습니다. 서로 리뷰를 참고하면서 어느 시점엔 눈높이와 취향이 보이면 되죠. ^^ 여튼, 이 슬픔에 대해서 만큼은 "마태님, 낙원이 있잖아요~"라고 말할 수 있어 좋네요. ^^

sweetmagic 2008-08-25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넘 재미있게 읽었어요. 책장이 어떻게 넘어가는 지 모르겠더라구요 !

최상의발명품 2008-08-26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태님의 추리소설 인터넷 검색으로 본 적 있어요.
아마 주인공이 식당에서 쫄면을 먹었었지요?
너무 재밌었는데!
다 읽은 게 슬플 정도로 재밌는 책이라......
추리소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마구 호기심이 생기네요.

비로그인 2008-08-26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이미 읽은 책에 대한 리뷰를 볼 때는 여유가 생기지요.
그래서 리뷰를 쓰기가 더 까다로운건지도요.
저도 님께서 이야기하신 그 장면에서 가장 오싹했어요.
그래서 숨도 못 쉬고 다음을 찾아봤던 기억이 나네요.

마태우스 2008-08-27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연님/님은 제가 읽은 책은 다 보신 듯... 글구 저랑 같은 곳에서 오싹함을 느꼈군요 반갑습니다
최상의발명품님/헤헤 제 책은 모방범과의 비교하면 너무도 부끄럽죠 자꾸 그러심 아니되옵니다^^ 모방범은 정말 캡이어요
스윗매직님/오랜만이어요 다음 장면이 너무도 궁금해 책장을 마구마구 넘겼던 며칠이었지요. 반갑습니다!
마냐님/호호 기준과 소신이 비슷하니 반갑네요 글구 저 어제 낙원 주문해 버렸습니다. 이제부터 두달간 무지 바쁠 거 같은데, 그래도 책은 거르지 말고 읽으려 합니다!
다락방님/제 아내가 지금 읽고 있는데요 다 읽으면 제가 이어서 읽으려구요. 제가 먼저 읽을 확률 73%^^
주드님/다 읽고보니 아직 안읽으신 주드님이 부럽습니다... 전 황금달걀을 꺼내려 암닭을 죽였나봐요 ㅠㅠ
바람돌이님/그죠?저도 2권보다 3권이 더 좋았어요 낙원은 제가 금방 가르쳐드릴께요
웬디양님/그럼요 낙원은 벌써 저희집에 있습니다. 시케고가 또 나오더군요 기대만빵!

sheris 2008-09-01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같은 느낌을 받으셨네요... 저도 모방범의 3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너무나 아쉬운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이런 재미있는 책이 어디 또 없나 열심히 찾아보고
미미여사의 대부분 책을 봤지만 모방범만한 작품을 찾기는 너무 어렵네요 ㅡㅡ
너무 좋은 작품을 읽어서 다른게 눈에 안들어오는건지 에휴...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X의 헌신도 꽤 괜찮은 작품이었지만 뭔가 머리를 때리는 파격적인 맛은 없더라구요...

낙원은 이미 몇개월전에 예약해서 사놨는데 일+밀린 책들이 너무 많아 아직 못읽구 있습니다.
모방범같은 느낌을 다시 받을 수 있을지... 어서 빨리 봐야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