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범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일요일인 어제는 매우 슬픈 날이었다. 올림픽이 끝나서 그런 건 아니다. 물론 올림픽, 특히 야구가 내게 2주간의 즐거움을 주긴 했지만, 내 슬픔의 원인은 다른 데 있다.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모방범>을 다 읽어버렸기 때문. 시작 무렵부터 난 그 책에 빠져들어 허우적댔는데, 읽는 내내 스토리에 대한 궁금증과 '다 읽으면 어쩌나'는 허무함 사이에서 갈등을 했었다. 승리하는 건 언제나 전자였음에도 내가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던 건 그 책이 3권으로 되어 있고, 한 권이 500쪽에 달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제 저녁을 먹을 무렵, 3권이 거의 끝나가는 걸 본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거의 다 읽었네? 이제 무슨 재미로 살려구?"


정말 그렇다. 세권을 다 읽은 지금의 심정은 허무 그 자체다. 다음에 읽을 책을 선정하려 책장에 갔지만, 이것도 아닌 것 같고 저것도 아닌 것 같다. 지나치게 재미있는 책은 이런 지대한 후유증을 준다. 아내는 "3권째 되니까 지루하더라"라고 했다. 나도 그랬다면, 이 책과의 이별이 이렇게까지 아쉽지 않았을텐데, 어찌된 게 난 3권으로 갈수록 더 흥미진진해지는지! 이 책에서 가장 모골이 송연하던 장면은 범인으로 지목된 다카와의 여동생 유리코가 한 남자의 차에 탔을 때였는데, 그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네 오빠나 친구들은 나를 '피스'라고 불렀어."


미미여사의 추리소설을 대체로 좋아하지만, 이번 책은 거의 혁명에 가깝다. 어떻게 이런 파격적인 추리소설이 다 있는지, 그리고 어쩜 그렇게 몸서리칠 정도의 재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난 정말 궁금하다. 이렇다할 추리도 없이, 범인을 식당에서 마주쳐 검거하는 류의 추리소설을 썼던 과거가 무지하게 부끄러워지는데, 앞으로 바르게 살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가끔씩 "네 책 샀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 삶의 평화가 깨진다. 이러니, 나중에 바르게 살 생각을 하는 대신, 처음부터 나쁜 길에 빠져들지 않는 게 좋다. 철없던 그 시절, 난 왜 그랬을까 열심히 후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와, 이 책 정말 재미있다"는 리뷰를 많이 쓰게 된다. 내 기준이 낮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는 매혹될 만한 책들이 끝도 없이 많다. 그런 책을 써준 글쓴이들에게 감사할 일이고, 또한 그 책들이 내 눈앞에 오게끔 해준 사람들에게도 감사드릴 일이다. 죽어라고 책만 읽어도 그 아름다운 책들 중 몇%나 읽을 수 있을지 모르는 판에, 요즘 너무 책읽기를 게을리했다. <모방범>은 그런 내 나태함을 일거에 날려버리는 계기가 될 듯하다. 미미여사님, 고마워요. 전 당신 팬이어요.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웽스북스 2008-08-25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장면에서 저도 등골이 오싹! 이제 낙원 보셔야지요 ㅎㅎㅎ

바람돌이 2008-08-25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팬이에요. ㅎㅎ 저는 2권이 약간 지루하고 3권은 오히려 더 흥미진진... ^^
후속편으로 나온 낙원은 어떨지 기대돼요. ^^

비로그인 2008-08-25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이 심하게 지루할 때 이 책을 볼까 봐요. 이런 책을 저는, 비상 상비약 두듯 아껴놓곤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다락방 2008-08-25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께서 낙원을 읽으시기 전에 제가 읽어야 할텐데요. 그래야 마태우스님의 리뷰를 보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훗.

모방범은 정말 매우 재미있었어요!

마냐 2008-08-25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와 이 책 정말 재미있다"는 리뷰를 많이 씁니다. 저도 제 기준 탓을 간혹 하는데...그래도 재미있는 건 재미있다고 눈치안보고 떠드는게 좋을 거 같습니다. 서로 리뷰를 참고하면서 어느 시점엔 눈높이와 취향이 보이면 되죠. ^^ 여튼, 이 슬픔에 대해서 만큼은 "마태님, 낙원이 있잖아요~"라고 말할 수 있어 좋네요. ^^

sweetmagic 2008-08-25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넘 재미있게 읽었어요. 책장이 어떻게 넘어가는 지 모르겠더라구요 !

최상의발명품 2008-08-26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태님의 추리소설 인터넷 검색으로 본 적 있어요.
아마 주인공이 식당에서 쫄면을 먹었었지요?
너무 재밌었는데!
다 읽은 게 슬플 정도로 재밌는 책이라......
추리소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마구 호기심이 생기네요.

비로그인 2008-08-26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이미 읽은 책에 대한 리뷰를 볼 때는 여유가 생기지요.
그래서 리뷰를 쓰기가 더 까다로운건지도요.
저도 님께서 이야기하신 그 장면에서 가장 오싹했어요.
그래서 숨도 못 쉬고 다음을 찾아봤던 기억이 나네요.

마태우스 2008-08-27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연님/님은 제가 읽은 책은 다 보신 듯... 글구 저랑 같은 곳에서 오싹함을 느꼈군요 반갑습니다
최상의발명품님/헤헤 제 책은 모방범과의 비교하면 너무도 부끄럽죠 자꾸 그러심 아니되옵니다^^ 모방범은 정말 캡이어요
스윗매직님/오랜만이어요 다음 장면이 너무도 궁금해 책장을 마구마구 넘겼던 며칠이었지요. 반갑습니다!
마냐님/호호 기준과 소신이 비슷하니 반갑네요 글구 저 어제 낙원 주문해 버렸습니다. 이제부터 두달간 무지 바쁠 거 같은데, 그래도 책은 거르지 말고 읽으려 합니다!
다락방님/제 아내가 지금 읽고 있는데요 다 읽으면 제가 이어서 읽으려구요. 제가 먼저 읽을 확률 73%^^
주드님/다 읽고보니 아직 안읽으신 주드님이 부럽습니다... 전 황금달걀을 꺼내려 암닭을 죽였나봐요 ㅠㅠ
바람돌이님/그죠?저도 2권보다 3권이 더 좋았어요 낙원은 제가 금방 가르쳐드릴께요
웬디양님/그럼요 낙원은 벌써 저희집에 있습니다. 시케고가 또 나오더군요 기대만빵!

sheris 2008-09-01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같은 느낌을 받으셨네요... 저도 모방범의 3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너무나 아쉬운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이런 재미있는 책이 어디 또 없나 열심히 찾아보고
미미여사의 대부분 책을 봤지만 모방범만한 작품을 찾기는 너무 어렵네요 ㅡㅡ
너무 좋은 작품을 읽어서 다른게 눈에 안들어오는건지 에휴...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X의 헌신도 꽤 괜찮은 작품이었지만 뭔가 머리를 때리는 파격적인 맛은 없더라구요...

낙원은 이미 몇개월전에 예약해서 사놨는데 일+밀린 책들이 너무 많아 아직 못읽구 있습니다.
모방범같은 느낌을 다시 받을 수 있을지... 어서 빨리 봐야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