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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1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5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추석 연휴 전날, 난 적막한 학교를 저벅저벅 걸어나왔다. 가방 안에 참고문헌을 가득 넣고서. 가정이 생겼는지라 명절이 더 이상 나만의 것은 아니지만, 짬이 나는대로 논문을 써야겠다는 게 내 굳은 각오였다. 출발도 좋았다. 첫날은 너무 피곤해 일찍 자고 말았지만, 다음날 본가에선 아내가 음식을 만드는 동안 짬짬이 논문을 썼으니까. 서론과 방법을 다 쓰고 나자 기분이 좋아진 난, 집에서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낙원>을 펼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달구어진 머리를 식히는 용도였고, 잠깐 보고 말 참이었지만, 그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추석연휴 동안 내 논문은 그렇게 나랑 작별했다. 난 짬이 있을 때마다 <낙원>을 펼쳤고, 운전을 하는 동안에는 아내더러 책을 읽어달라고 했다. 그때 내 마음은 “책을 빨리 다 읽고 논문을 쓰자”였는데, 아무리 흥미진진하다 해도 1권이 500여쪽, 2권이 400쪽이나 되는 분량을 해치우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연휴 마지막날 열한시, 난 드디어 <낙원>의 종지부를 찍었고, 그 다음날 출근해 담당자에게 “죄송한데요, 시간을 조금만 더...”라고 말해야 했다.
미미여사의 책이 대충 다 그렇지만, <낙원> 역시 특정 사건을 조명하는 와중에 일본 사회의 여러 면을 건드린다. 저자는 청소년의 탈선이 부모의 올바른 지도가 부족해서 생긴다는 견해를 갖고 있는 듯하며, 이는 여사의 전작인 <모방범>의 주범이 소위 말하는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지 못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글쎄다. 부모가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가르친다고 해서 괴물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고, 그냥 막 자랐는데도 훌륭한 사람이 되는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모방범>에 이어 올해 읽은 가장 재미있는 책 2위에 올랐는데, 다음 장을 궁금하게 하는 미미 여사의 솜씨는 정말이지 최고다. 그러니, 할 일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선뜻 집어들어선 안될 것이다. 달구어진 머리를 식히려 잠깐 읽다가는 본업을 망치게 되고,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읽었다간 회사 가서도 내내 이 책만 몰래 읽게 될 테니까.
책동네에서 노는 게 좋은 점은 좋은 작가를 많이 알게 된다는 거다. “난 이제 내가 읽을 책은 스스로 고를 거야”라는 태도도 나쁠 게 없지만, 남들이 권해 주는 책도 가끔은 읽어 줘야 한다. 새초롬너구리님이 내게 미미여사의 책 세권을 선물해주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세권 중에 <이유>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면, 내 어찌 <모방범>과 <낙원>을 읽는 영광이 있겠는가? 내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지만, 내 잘못으로 연락이 끊어진 그분께 늦게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참, 미미여사께도 한마디.
“여사님, 너무하셨어요. 이렇게 재미있게 쓰시면 일을 어떻게 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