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세인 우리 할머니는 그래도 무척이나 젊어 보인다. 같이 다니면 어머니냐고 묻는 사람이 많을 정도다. 청계천을 같이 갔을 때 찍은 사진인데, 사실 청계천이 뭐 대단한 곳도 아니고, 산책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갈 곳이건만, 할머니는 무슨 결혼식에 가시는 것처럼 한껏 멋을 내셨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할머니는 많이 늙으셨다. 옛날보다 고집도 세졌고, 사소한 한마디에 삐지신다.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할머니가 평생 자신을 사랑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 생선이 있으면 살은 다 나한테 발라주고 당신은 머리만 드신다. "머리가 맛있다."는 그런 거짓말을, 옛날과 달리 난 믿지 않는다. 내가, 혹은 엄마가 드리는 용돈도 그대로 모아뒀다가 내 생일 때 주시거나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긴다. 할머니가 지금이라도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자신을 위해서 돈을 쓰시면 좋겠다. 물론 그건 불가능한 바램이겠지만.

 





 

요즘 할머니는 무척 심심해하신다. TV는 통 안보시고 책만 맨날 보시는데, 할머니 구미에 맞는 재미있는 책이 별로 없고, 눈도 침침하니 책만 볼 수도 없다. 그렇다고 바쁜 엄마가 할머니 곁에만 있어줄 수도 없고, 직장이 있고 밤에는 술만 마시는 나는 주말에나 겨우 할머니와 놀아드릴 뿐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끊임없이 실버타운을 말씀하시지만, 내가 알기에 실버타운에 가시기엔 할머니가 너무 연세가 많으신 것 같다.


지난 토요일, 할머니를 모시고 월드컵공원에 다녀왔다. 커다란 호수도 보고, 바닥에 떨어진 은행잎을 밟으면서 행복해하시는 할머님, "고맙다. 니가 아니면 누가 이런 데 구경시켜 주겠냐."고 하신다. 26년 전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일 때, 일본에 사시던 할머니는 우리를 초청해 일본 곳곳을 구경시켜 주셨다. 맛있는 것을 사주셨고, 진기한 장난감을 내 손에 쥐어 주셨다. 그 전에는 물론이고 그 후에도, 할머니는 이것저것 좋은 물건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고, 그래서 갖게 된 멋진 볼펜과 필통, 그리고 옷과 장난감 때문에 난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신 할머니, 이젠 좀 되돌려 받아도 되건만, 내가 어깨를 주무른 지 1분도 안지나서 "너 피곤항께 그만 해라."고 손사래를 치신다.

 



 

화요일과 목요일을 빼곤 할머니는 늘 혼자 낮 시간을 보내야 한다. 아까 전화를 드려서 뭐하시냐고 했더니, “뭐하긴. 그냥 논다.”고 하신다. 오늘 일찍 갈테니 같이 저녁 먹자고 했더니만 “너희들한테 부담이나 주고, 일찍 죽어버리련다.”고 말한다.

“아유, 할머니.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라고 언성을 높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짠하다. 할머니를 안심심하게 하려고 아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아이가 그렇게 도구적 수단으로 전락하는 게 과연 바람직한 걸까.

“할머니 모실 사람 하나 쓰면 어떨까요?”는 말을 전에 한 적이 있다.

“뭐하러 돈을 들여?”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그보다 훨씬 비싼 실버타운 얘기를 끊임없이 하시는 할머니, 엄마와 삼촌에게 돈을 다 퍼주지 않았다면 할머니의 노년은 훨씬 풍요로웠을텐데.


사진을 찍으려고 휴대폰을 들이대자 "늙은이를 뭐하러 찍냐. 너나 찍어라."고 나를 말리시는 할머니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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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5-11-16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애틋한 마태우스님의 할머니 사랑입니다.
할머니도 마태님도 참 아름다우세요.

비로그인 2005-11-16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 미인이시네요~ ^^

마태우스님 할머니 이야기는 항상 짠해요.
그 이야기 오래 읽을 수 있도록 계속 건강하셨음 좋겠어요.

stella.K 2005-11-16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젊어 보이시네요. 마태님 언능 장가가셔서 증손자 안겨드리세요. 흐흐.

chika 2005-11-16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599700  할머니 얘긴 언제나 좋군요. ^^

Joule 2005-11-16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애들은 그런 용도로 쓰려고 낳는 거 아니었던가요. :)

드팀전 2005-11-16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한겨레 신문에 글쓰셨데요.패밀리 레스토랑과 삽겹살.... ㅎㅎ

커피우유 2005-11-16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할머니 옷차림새를 뵈니 넘 멋장이시네요..소맷단과 스카프를 같은 톤으로 맞추신 저 센스~ ! (마태님은 그건 안닮으신듯 ㅡ,.ㅡ ㅋㅋ)

moonnight 2005-11-16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으시는 모습에서 손주분 눈웃음이 약간 보이는 듯 ^^ 할머님을 생각하시는 마음이 참 애틋합니다. 내리사랑. 왠지 짠해지네요.

싸이런스 2005-11-16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상상하는 여든 아홉되신 할머니와는 너무 다른 축복 받으신 분 같아요. 아직 거동에 불편함이 없으실 정도로 정정하신 듯하고 웃음과 표정도 생기가 넘치시는걸요. 거기다 마음씨 고운 손자 마모군까지!

mong 2005-11-16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아부지와 열한살 터울이십니다
^^

비로그인 2005-11-16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사레치시는 모습이 소녀같으십니다. 빈말이 아니라, 저 표정과 손짓이 정말 고우세요.

야클 2005-11-16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깥은 추운데 이 페이퍼는 너무 훈훈하군요. ^^

이리스 2005-11-16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 멋지세요! ^^

날개 2005-11-16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근사해 보이세요..^^*

로드무비 2005-11-16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가 굉장히 세련되고 지적으로 보이세요.
마태우스님 이야기를 듣고 막연히 상상했던 인상과는 다르네요.
아무튼 좋다는 말씀이고 추천!!

이네파벨 2005-11-16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대 89세라고 믿을 수 없음!!!
정말 젊고 정정하시고 고우시네요...
게다가 이리 착하고 정많은 손주까지 두시다니...정말 복 많으신 할머니세요.
마태2세를 선물하시면 더더더더더욱 큰 효도가 되시겠죠?
(나중에 마태님 어머님께서도 지금 마태님 할머니께서 누리시는 기쁨 누리셔야죠~)

모1 2005-11-16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척 정정하시네요. 저희 외할머니보다도 더욱 젊어 보이세요. 나이는 외할머니가 더 어린데....거동만 불편하지 않으시면 동네 노인들과 어울리는 방법도 좋을 듯 한데요..저희 옆집 할머니는 아파트 노인정 열심히 다니신다는..

페일레스 2005-11-16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페이퍼네요. 할머님께서도 오래 오래 사셨으면...

비로그인 2005-11-16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럽습니다. 이렇게 멋진 분이 마태우스님의 할머님이시라니요. 안타깝게도 전 제가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할머니,할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답니다. 저희 집안이 수명이 좀 심히 짧거든요;;; 외가도 그렇고 친가도, 60세를 넘긴 사람이 아무도 없는.. 지난 번에 돌아가신 외삼촌의 연세도 58세셨다더군요. 60도 안 된 저희 아버지께서 외가 친가 통털어서 제일 연장자시랍니다.

세벌식자판 2005-11-16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ㅜ)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이 나네요....
울컥......

manheng 2005-11-17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할머님이 아주 정정하시네요. 저희 외 증조 할아버지는 올해 95세 시라는... 아직도 정정하세요 ㅎㅎ

마태우스 2005-11-17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헹님/히익 95세...대단하십니다. 나이드신 분 계실때는 식구가 많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요..
세벌식자판님/나중에 후회 않도록 살아생전 잘하겠습니다!
여대생님/저는 친가쪽은 이미 돌아가셨었구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만 있어서 외할머니=할머니였어요. 외가쪽은 두분 다 장수하셨지요... 하여간 저희 할머니 멋지죠?
페일레스님/제가 잘 해야죠. 이번 주말에도 같이 놀러갈 예정... ^^
모1님/저희 동네가 노인정이 그다지 활성화되어있지 않아서요... 가끔 여고 동창회에 나가시긴 합니다...
이네파벨님/마태 2세라...지금부터 준비하면 최소한 12달은 걸리는데...^^
로드무비님/추천 감사합니다. 할머니를 이용해서 추천을 받는 나쁜 손자 드림.
날개님/아 네... 부끄럽습니다.
별님/조용히 추천했는데 남들 다 아는 것 같던데요?
낡은구두님/헤헤헤. 한 멋짐 하죠
야클님/아 네...부끄럽습니다. 제가 사실은 휴대폰 사진을 올릴 수 있는 케이블을 어제 샀답니다. 하핫.
주드님/그렇죠? 사실 할머니 모시고 다니면 굉장히 뿌듯했어요. 다들 어머니냐고 묻고, 전 "할머니랍니다"라고 말해 그들을 놀래켰죠^^
몽님/앗 그렇다면...님과 아버님의 연배차이가 좀 나시나봐요?
싸이런스님/사실 할머니가 정정하신 게 커다란 행복이긴 하죠...^^
문나이트님/할머니가 저희를 생각하는 마음은 제가 할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의 몇천배는 될 거예요.....
커피우유님/맞습니다 할머니 멋쟁이시죠. 근데 제가 패션감각이 없다는 모함을 하시다니...제 줄무늬 티셔츠, 멋지지 않습니까?
드, 드팀전님/그, 그건 잊어 주세요. 앞으론 잘쓰겠습니다. 부담이 너무 컸구요, 이말 쓰자니 쟤네들이 걸리고 저말 쓰면 얘네들이 걸리고 아주 고생이 많았어요
쥴님/아 네.... 안낳아봐서 몰랐어요
치카님/치카님의 캡쳐는 언제나 반갑습니다
스텔라님/하핫... 글쎄요... 꼭 장가를 가야 증손자가 생기나요?^^
고양이님/열심히 하겠습니다 !
깍두기님/할머니에 비한다면 전.... 아무것도 아니죠...


인터라겐 2005-11-17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마태님이 할머니를 닮으신것 같은데요... 너무 정정하세요.. 효도하시고.. 오래 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