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저... 연회장으로 가실 시간입니다”
밤색 밍크코트를 입고 거울을 보던 털짱은 하얀마녀의 말에 놀라 시계를 보았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하얀마녀가 모는 차에 탄 털짱은 몸을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옛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전국시대
십년 전, 알라딘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지족초5년박예진이 황제가 되자 ‘마립간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영의정이 된 파란여우가 실권을 장악, 사실상 왕 노릇을 했다. 밥도 제때 주지 않는 등 탄압이 계속되자 지족초5년박예진은 마태우스에게 밀서를 보내 자신을 구해달라고 요청을 하고, 마태우스는 ‘호밀밭 대첩’에서 파란여우를 물리치며 사실상 알라딘을 평정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마태우스는 지족초5년박예진을 책울타리에 가두고 스프 대신 소굼을 친 라면을 먹이는 등 한층 더 잔인한 탄압을 가했고, 스스로 ‘서재의 달인’을 자처하는 등 오만이 하늘을 찔렀다. 이에 알라딘의 정통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세력들이 곳곳에서 들고 일어나 알라딘엔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었다. 그중 한명이 털짱이었다.
-털짱
검은비는 고기집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갈비살을 먹고 있었다. 서른점째를 먹는 순간 입에 뭔가 물컹한 게 씹혔다. 뱉어보니 털이 한웅큼 나온다. 검은비는 고기집 사장 호랑녀를 불렀다.
“아니 이봐! 고기에 털이 있잖아!”
미안하다고 하기는커녕 호랑녀는 검은비의 멱살을 쥐었다.
“털이 몸에 얼마나 좋은데 그래?”
이 말과 동시에 호랑녀는 주머니에서 털을 왕창 꺼낸 뒤 검은비에게 먹였다.
“으...안돼! 안돼!” 입안 가득히 털을 씹으며 검은비는 비명을 질러댔다.
“여보, 정신차려!”
남편의 말에 검은비는 눈을 떴다. ‘꿈이었구나!’
하지만 꿈은 현실처럼 생생했고, 아직도 입에 털이 있는 듯했다.
“카악!” 목이 컬컬해 침을 뱉어보니 털이 한가닥 나왔다. 그로부터 열달 후, 검은비는 아이를 낳았다. 온몸에 털로 가득 덮힌 아이를. 검은비는 그의 이름을 ‘털짱’이라 불렀다.
-마태우스에게
털짱은 어려서부터 야망이 컸다.
“도탄에 빠진 알라딘을 구할 사람은 나 털짱밖에 없다구!”
하지만 큰 야망에 비해 털짱의 세력은 미미하기 짝이 없어, 스타리와 쥴, 폭스바겐만이 그를 따랐다. 아영엄마에게 패해 오갈데가 없어졌을 때, 털짱은 알라딘을 탈퇴할 생각까지 했었다. 스타리가 그를 말렸다.
“매너리스트는 코멘트가 하나도 안달리는 외로운 세월을 3개월이나 견뎠고, 복돌이 또한 한달에 글을 두편씩 쓰면서 버틴 시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공께서 겨우 이런 시련에 알라딘 서재질을 접으신다면 후세 사람들이 비웃을까 두렵습니다”
쥴도 거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일단 마태우스에게 가서 몸을 의탁하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털짱은 결국 마태우스를 찾아 하례하니, 마태우스는 서재 밖 20리까지 나와 털짱을 맞았다.
“님의 털을 늘 부러워했는데, 이렇게 뵙게 되니 영광이오. 하하하”
“미천한 이몸을 서재의 달인께서 거두어 주신다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천둥칠 때
털짱은 마태우스 몰래 자신의 즐겨찾기 숫자를 늘려 나갔다. 리뷰와 페이퍼는 밤에만 썼고, 그걸 위장하기 위해 낮에는 글은 안쓰고 코멘트만 달았다. 그러던 어느날, 마태우스가 부른다는 전갈이 왔다. 털짱은 겁이 났지만 하는 수 없이 참이슬이 있는 서재로 갔다. 소주 두병과 참치캔이 차려진 상에 둘은 마주앉았다.
“요즈음 큰일을 하신다고요?”
마태우스의 말에 놀라서, 먹던 참치가 기도로 들어갔다. 열심히 기침을 하고 있는데 마태우스가 덧붙였다.
“코멘트 쓰는 데 재미를 붙이셨더군요”
그제야 털짱은 긴장을 풀며 대답한다.
“전 글을 쓰는 것보다 댓글 다는 게 좋습니다”
마태우스는 껄껄 웃으며 말한다. “하하, 그렇게 서재 마실만 다녀서야 어찌 알라딘을 평정하겠소?”
‘평정’ 소리에 털짱은 가슴이 뜨끔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소재는 이미 바닥이 났고, 글재주도 없어 제 서재를 즐겨찾기에 등록할 사람이 있기나 한지 의문스럽습니다”
한참 술을 마시는데 갑자기 마태우스가 묻는다.
“털짱님도 서재질을 한지 두달이 다 되어 가니, 알라딘의 영웅들을 잘 아실 것이오. 어디 한번 말씀 좀 해 보시오”
털짱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글쎄요, ‘평범한 여대생’은 다스리는 서재가 450개가 넘고, 최근에는 괴기스러운 사진도 올리는 등 가히 영웅이라 할 수 있겠지요”
마태우스가 웃는다. “평범한 여대생은 이름처럼 ‘평범’하고, 올해 졸업을 했으니 이미 여대생도 아니오”
털짱이 말한다. “400개에 가까운 서재를 거느린 플라시보는 ‘cool함’을 무기로 세력을 넓혀 나가고 있으니 영웅이라 할만하지 않습니까?”
“플라시보는 ‘헐렁한 인간’이며 책도 헐렁하게 읽소. 게다가 집에 인터넷이 안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 어찌 영웅이라 하겠소?”
“리뷰로 입신양명한 마냐는 어떻습니까?”
“흥, 마냐에게 남은 거라곤 책밖에 없소이다. 그런 그가 어찌 영웅일 수 있겠소?”
“추리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물만두는 영웅이지 않을까요?”
“물만두는 요즘 이벤트를 쫓아다니느라 페이퍼를 쓰지 않고 있소”
“글을 기가 막히게 쓰는 바람구두는 어떻습니까?”
“바람구두는 가장 중요한 주말에 글을 쓰지 않아요. 그래서야 어찌 영웅일 수 있겠소?”
“요즘 무섭게 세력을 넓혀 나가는 멍든사과는 어떻습니까?”
마태우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멍든사과는 ‘멍든’ 사과일 뿐이오. 최근 들어서는 난초와 대화를 하고, 문장부호를 글 제목으로 쓰는 등 제정신이 아니오”
“그렇다면 진우맘은 어떻습니까?”
마태우스는 손뼉을 치고 껄껄 웃는다.
“진우맘은 이미 소재가 고갈됐소. <나무2>를 두번이나 우려먹는 걸 보면 모르겠소?”
“<서재질이 가장 쉬웠어요>를 쓴 스위트 매직은 어떻습니까?”
“쳇, 그는 주말에만 강할 뿐, 주중에는 거의 글을 쓰지 않소”
“스텔라, 연보라빛우주, 타스타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미모 때문에 인기가 많을 뿐이오”
“그들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름지기 서재영웅이란 새벽별을 보며 서재질을 해야 하고,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알라딘에 접속, 코멘트를 남길 정도라야 되오”
털짱이 물었다. “알라딘에 그런 사람이 대체 누구란 말씀입니까?”
마태우스가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으로 털짱을 가리키고, 다시 자신을 가리킨다.
“지금 서재영웅은 당신과 이 마태우스 뿐이외다!”
털짱은 그 말에 소스라치듯이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때 마침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며 우레 소리가 크게 울렸다. 털짱은 포크를 집으며 혼잣말처럼 되뇌인다.
“무슨 천둥 소리가 이리 대단한고...”
그 모양을 보고 마태우스가 웃으며 묻는다.
“아니 님처럼 털이 많은 사람도 천둥을 무서워합니까?”
“털이 많아봤자 비에 젖으면 오히려 골치만 아프니, 어찌 천둥이 두렵지 않겠소?”
마태우스는 털짱의 소심함에 실소를 머금으며 더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새가 날아가다
변방에 있던 오즈마가 반란을 일으켰다. 좋은 기회다 싶었던 털짱은 마태우스를 찾아가 아뢴다.
“제가 님에게 의탁한 뒤 이렇다할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오즈마의 세력이 그다지 크진 않지만 단비, 밀키웨이 등 명장들이 많고, 평소 님에게 불만이 많았던 이따위와 힘을 합친다면 무시못할 골칫거리가 될 것이오. 제게 글 소재 몇 개만 주시면 당장에 달려가서 평정하겠습니다”
마태우스는 웃으며 쾌히 승낙했다. “좋은 생각이오. 곧 떠나도록 하시오”
털짱이 털을 날리며 달려가는데 폭스바겐이 묻는다.
“주군께서는 이번 출정을 왜 이리 서두르시오?”
“여태까지 내 신세는 우리 속의 판다요 어항에서 물장구치는 금붕어와도 같았다. 이 길이 바로 어항 안 금붕어가 바다로 나아가는 길이며, 우리 속의 판다가 야생으로 돌아가는 기회인데, 어찌 마음이 급하지 않겠느냐”
털짱의 말에 스타리, 쥴, 폭스바겐이 모두 경하해 마지 않았다.
-창업, 그리고...
털짱은 서재의 명칭을 ‘털이 있는 나라’로 고치고 털을 무기로 다른 서재들을 차례로 점령해 나갔다.
“찌리릿님, 제 털 드릴께요, 그만 화 푸세요!”
“가을산님, 상심하지 마세요. 제가 털 몇 개를 뽑아드릴께요”
게다가 사진을 공개해 자신의 미모를 뽐내니, 즐겨찾기 숫자는 무섭게 올라갔다. 마태우스는 그제서야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결국 마태우스와 털짱은 알라딘의 패권을 놓고 갈대가 무성한 수니나라에서 숙명의 일전을 벌인다.
“이봐 털짱! 내가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이게 무슨 짓인가?”
“더벅머리 마태우스놈아, 니가 나한테 털 하나 보태준 것도 없으면서 어찌 키워줬다고 우기는가?”
둘의 승부는 털짱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털짱의 ‘모족외전’은 추천을 무려 7개나 받은 반면, 마태우스가 쓴 ‘마태부리전’은 자신의 분신인 부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추천을 하지 않았던 것. 대패를 한 마태우스는 결국 서재를 빼앗기고 교봉으로 도망갔고, 거기서 칼을 갈며 재기를 노리고 있다.
-에필로그
털짱이 연회장에 나타나자 모두들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연단에 선 털짱은 흐뭇한 눈길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에... 즐겨찾기 2000명 돌파 기념식에 와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2000명은 분명 대단한 숫자지만, 제겐 제가 거쳐갈 하나의 이정표에 불과합니다. 3천명, 4천명이 되었을 때, 또다시 모입시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났다. 박수 소리가 잠잠해질 무렵 털짱이 말을 이었다.
“이 경사스런 날을 기념하기 위해 건배를 합시다. 모두 테이블에 놓인 소주잔을 들어 주세요! 자, 제가 선창하겠습니다. 위하여!”
“위하여!”
군중의 화답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연회장 구석에 밀짚모자를 쓰고 남루한 옷을 입은 사내가 있었다. 그는 연단에 선 털짱을 째려본 뒤 더 열심히 칼을 갈아댔다.
“털짱, 두고보자! 내 꼭 복수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