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자의 그림일기
오세영 지음 / 글논그림밭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화 전시회에 간 만화가 박재동은 찜찜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소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 많았지만 엉덩이에 똥이 달라붙은 소는 없었던 것. 소를 키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소는 화장실이 없기 때문에 똥을 눈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하는데, 그 결과 엉덩이에는 항상 새까만 소똥이 달라붙이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다들 깨끗한 소만 그리는 것이 박재동은 불만이었던 거다. 박재동의 꿈은 그로부터 나중에 실현된다.
"그 후 10년이 넘어서야 나는 엉덩이에 똥이 묻은 소 그림을 발견하게 되었다...그게 바로 오세영의 그림이었다"(<만화에 살다>에서 발췌)
난 오세영의 이름을 이렇게 처음 접했다. 그때만 해도 만화에 대해 어느 정도 편견을 갖고 있었던 나는 <만화에 살다>를 읽으면서 만화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을 깰 수 있었는데, 특히 "광주항쟁을 계기로 만화에 무엇을 담아야 하는가를 결정했다"는 오세영의 만화만큼은 꼭 읽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갔던 만화방에는 오세영의 만화가 없었고, 그래서 난 박봉성의 <신이라 불린 사나이>와 허영만의 만화책, <대란> 등을 읽고 집에 왔던 것 같다.
그로부터 2년 후, 알라딘에서 알게 된 연보라빛우주님이 내게 오세영의 만화책을 선물했다. 오세영은 데뷔 후 1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작품집이 나온 과작 작가인데, 96년에 나온 뒤 절판되었다가 요즘은 출판사를 옮겨 다시금 책이 나오고 있단다. 우주님은 "재미는 별로 없을 거예요"라고 말했지만, 난 책을 받은 그날 <부자의 그림일기>를 다 읽어 버렸다. '만화'라서 빨리 읽은 것도 있겠지만, 만화 하나하나가 주는 흡인력이 실로 대단했다. <낡은 쇠가죽 쌈지 속의 비밀>을 비롯한 그의 작품들은 모두 다 내게 커다란 감동을 준다. 하지만 역시 백미는 표제작인 <부자의 그림일기>였다. 가난한 어머니를 둔 아이의 일상사를 일기 형식으로 풀어낸 건데, 읽으면서 가슴이 짠했고, 다 읽고 나서는 분노마저 일었다. 이 사회는 보수로 있어야 할 사람을 사회주의자로 내몬다. 이 만화를 그리게 된 동기에 대한 오세영의 말이다.
[...계기는 딸아이 운동회 때 본 한 아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아이는 운동회 체육복이 없어 선생님께 야단맞고 구석에서 울고 있었는데, 오세영은 이 아이를 통해 '나부자'란 캐릭터를 창조했고, 이때의 일화는 <부자의 그림일기>에 고스란히 소개되어 있다.
9월 22일 금요일 맑음
오늘은 운동회날이었다....우리가 무용할 차례가 돼서 다른 아이들은 다 옷을 갈아 입었는데 나만 못 입었다. 선생님이 "너는 총연습 때도 안입고 오더니 또 안입고 왔어. 너는 빠져"라고 소리쳤다. 나는 혼자서 구석에서 울었다. 그때 엄마가 오셨다...엄마는 어쩐 일인지 울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얼굴이 점점 무섭게 변하더니 내 손을 잡아끌고..운동장으로 뛰기 시작했다. "2학년 10반, 2학년 10반 어디요 우리 애도 2학년 10반이란 말이요"라고 소리치면서. 엄마는 아직까지 울지 않으셨다(<만화에 살다> 89-90쪽)]
이렇게 짠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장르가 또 있을까? 만화란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면, 오세영의 이 책을 읽어볼 일이다. 가격이 9,500원이니 눈 딱 감고 밥 두세끼를 얻어먹으면 충분히 살 수 있다. 혹시 아는가. 주위 사람에게 잘 보이면 나처럼 선물을 받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