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는 무려 1970년대에 그간의 진화론을 대중적으로 집대성하여 이기적 유전자를 펴냈다. 여기서 처음으로 밈의 개념을 등장시켰고, 무엇보다도 진화를 유전자의 측면에서 쉽게 풀어 설명한 것이 화두였다. 이기적 유전자는 유전자가 자신의 번성(지속적 복제)을 위하여 그것을 담아내는 유기체를 만들어내었고, 그 유기체가 유전자를 번성시키는 방법은 자신이 번식할 때까지 충분히 생존하고, 이후 성공적으로 번식하는데 성공하여 자신안에 갇혀있는 유전자를 다음세대로 존속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진화란 이런 이기적 의도를 가진 유전자가 성공적으로 번성하도록 유기체가 적합도가 높은 방향으로 변화해나가는 것이었다.
이처럼 진화에서 유전자는 자신의 번성만을 당연히 생각하기 무척이나 이기적으로만 느껴지며 다른 유전자 및 그것을 담아내는 개체들과 경쟁만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세계는 복잡하며 오로지 자신에게만 속하는 이득은 존재하기 어렵다. 때론 아니 상당히 많은 경우에 다른 유전자 및 개체와의 협력은 나 자신만의 번성이라는 유전자의 이기적 의도를 보다 경쟁할 때보다 더욱 성공적으로 이끌어주게 된다. 때문에 유전자 및 세포, 개체들은 경쟁만큼이나 오랫동안 협력을 해왔다. 그렇기에 애초에 인간은 협력적인 존재이며 타고난 선한 존재라는게 책 '휴먼 카인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인간만이 갖고 있는 도덕이라는 도구는 인간사회의 성공적 협력도를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협력을 위한 내적기제들이 사회문화와 복잡하게 얽히며 진화 및 문화의 발달과정에서 얻게 된 발명품으로 보인다.
이처럼 인간은 진화로 얻은 적응기제로 협력과 경쟁이라는 심리 요소 및 육체적 특질,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고 있으며, 이는 환경 및 문화와 타고난 조건에 따라 상당한 변주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조지 레이코프는 진보와 보수로 갈리는 지금의 사회에서 보수는 세상을 경쟁의 장이자 선과 악의 이분법적으로 보며, 승자와 패자를 평등하게 보지 않는 성향의 부모 밑에서 자라는 사람들이 갖는 성향이며, 진보는 세상을 평등과 모험의 장으로 보고, 세계를 유연하고 답이 없는 곳으로 보는 개방적 부모밑에서 자라나는 사람들에게 많이 생겨남을 주장했다. 이는 경쟁적 성향과 협력적 성향의 부모로 대응될 수 있으며 결국 인간의 진보적 성향과 보수적 성향도 진화과정에서 얻게 된 협력과 경쟁에 대해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느냐로 파악할 수 있는 문제로 보인다. 최근 인간사회는 자본주의 및 여러 세계적 위기의 심화로 협력보다는 경쟁으로 치닫고 있으며 소득의 감소로 인한 실존적 위기로 인해 서로 간에 장벽을 쳐가는 종족주의의 편협한 시대로 치닫고 있는데 이를 지적한 것이 팀 마샬의 장벽의 시대다.
이번에 읽은 책 협력의 시대는 어떻게 보면 이런 내용들의 집대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책은 인간이 어떻게 다른 종과는 질적으로 다른 협력을 하게 되었고, 최근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위기가 우리의 협력을 저해하기에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협력을 고안해야한다는 주장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책으로 들어가보자.
인간은 사실 그 존재자체만으로 매우 협력적인 존재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무려 37조개의 세포로 이뤄져 있으며 그 세포들이 모두 협력을 하고 있고, 그 내부의 유전자들도 모두 협력하며 생명을 이뤄가고 있기 때문이다. 다세포 생물의 역사가 무척이나 오래되었기에 이런 협력은 매우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이렇게 여러 부분이 복잡하게 모여 하나의 개체로 결합하려면 사실 모든 부분의 이해관계가 들어맞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이해관계는 바로 근연성이며 최고로 근연성을 높이는 방법은 복제다. 때문에 다세포 생물의 모든 세포는 유전자가 같다. 하지만 조금더 안으로 들어가 유전자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유성생식을 하는 다세포 생물은 생식세포가 감수분열을 한다. 즉, 자신이 다음세대로 이어지는 생식세포에 들어갈 확률이 50%라는 것이다. 때문에 몇몇 유전자는 자신만의 번성을 위해 이기적 행동을 한다. 미토콘드리아의 유전자는 모계로만 전승되는데 따라서 이 유전자에게 인간 남성을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미토콘드리아의 유전자는 모계에는 유리하지만 남성에게는 불리한 증상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레비 유전 시신경 병증이 그것이다. 이는 유전자 변이로 시력을 읽는 증상으로 남성에게만 발현된다.
어떤 유전자는 감수분열 전 자신을 미리 복제하여 모든 염색체에 숨어드는 꼼수를 쓰며, 다른 유전자는 조용한 암살자가 되어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 생식세포를 제거해보린다. 이는 정자와 난자의 수를 줄여 난임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유전자들은 결집하여 이런 부정행위를 감시하고 막는다. 한 몸의 개체안에서도 협력과 이를 방해하는 경쟁이 상존하는 것이다.
개체들간의 협력은 집단수준에서 이뤄진다. 실험에서 단세포 조류가 있는 곳에 단세포 포식자를 넣으면 단세포 조류들끼리 뭉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는 포식을 피하기 위한 행동으로 먹이감들이 뭉치게 되면 포식될 확륙이 뭉친 수만큼 줄어들게된다. 때문에 아마도 최초의 다세포의 결집은 포식을 피하기 위함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여튼 가장 손쉬운 개체간의 협력은 높은 근연도를 자랑하는 가족간의 협력이다. 인간의 짝짓기는 남여의 신체구조차이와 고환의 크기를 미뤄볼때 일부일처를 오랜기간 고수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완전한 일부일처는 아니며 사별이나 여러 이유등으로 새로운 만남이 허용되는 순차일부일처제이다. 이 경우 필연적으로 남여의 적합도가 완전 일치하지 않아 양육에 있어 불협화음이 발생한다. 때문에 인간 남여는 양육에 있어 헌신도에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자신의 자식임을 확신할 수 있는 모계는 양육에 헌신적인 반면 부계를 그렇지 않다. 다만 이런 경향은 문화적인 차이를 보이기도 하며 환경에 의해 달라지기 한다. 성비가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여성이 많은 경우 남성은 육아에 거의 헌신하지 않으며 새로운 짝짓기 기회를 노린다. 반면 남성이 많은 경우 여성을 지켜 후세를 확실히 하기 위해 육아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를 조절하는 호르몬은 테스토스테론인데 이것이 높으면 육아에 집중하지 않고 낮음녀 집중한다.
남여갈등은 태아의 몸속에서도 일어난다. 태아는 모체에게서 얼마나 많은 영양분을 쥐어 짜내는지에 대해 모계 유전자와 부계 유전자가 갈등한다. 동물의 태반은 두 종류로 상피융모막 태반과 혈융모태반이 있다. 상피융모막 태반은 태반 조직이 자궁상피와 분명한 경계를 이루는 반면 혈 융모태반은 태반세포가 자궁벽을 지나 모체의 혈관에 파고든다. 그래서 인간은 태반이 영양공급에 주도권이 지닌다. 태반에서 만들어지는 태반성 락도겐은 인슐린의 작용을 방해한다. 그 결과 임산부의 혈당이 올라가고 혈당흡수능력이 떨어지며 그 결과 태아는 더 많은 혈당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다른 호르몬은 모체의 혈압으로 높여 태아의 영양흡수를 높인다. 즉, 모체는 태반으로 인해 심각한 임신증후군은 고혈압과 당뇨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 여기에 태반세포에 대해 침투를 허용하는 쪽으로 인간의 신체가 진화하면서 전이암에도 취약해졌다. 실제로 태반의 침투성이 적은 종일 수록 전이암이 낮게 나타났다. 반면 인간은 한 장기에 암이 발생하면 다른 부위로 암이 쉽게 전이된다.
인간의 협력은 가족을 넘어서도 이뤄진다. 사실 그렇기에 인간은 지금 수준의 문명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인간의 협력은 단순한 상호호례를 넘어선다. 자신이 가까운 시일내에 보답을 받을 수 없는 경우에도 인간은 협력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성향을 지닌다. 이런 인간의 협력 경향을 상호의존이라 한다. 상호의존은 개체의 이익이 동료의 건강에 달려있어 설사 도움을 보답받지 못하더라도 동료에 투자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즉, 나의 소속 집단의 구성원이라면 그의 안녕이 소식집단의 안녕에 기여하고 그것이 나의 적합도 상승으로 이어지기에 이런 수준의 협력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협력 이외에도 당연히 자신만의 안녕이라는 이기적 동기도 갖고 있기에 추가적 도구가 필요한데 이것이 처벌과 평판이다. 실제로 상호의존에 협력하지 않는 규칙 위반자를 처벌할 수 있게 되면 매우 높은 수준의 협력이 이뤄진다. 규칙 위반에 대해 처벌이 없는 경우와 있는 경우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처벌은 그 집행이 쉽지 않다. 처벌은 기본적으로 그걸 당하는 규칙 위반자를 해롭게 하는 행위기에게 쉽지 않다. 때문에 처벌하는 사람은 시간과 비용을 많이 들이기되고 규칙위반자에게 보복당할 우려도 생긴다. 그럼에도 처벌은 집단의 안녕에 기여하기에 제2의 공공재라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처벌의 방관자는 제2의 무임승차자로 불린다. 이처럼 처벌은 어렵지만 인간은 처벌을 즐기는 쪽으로 심리기제가 진화했다. 인간은 친사회적 행동 및 봉사등의 활동을 할 때 보상영역이 활성화된다. 그런데 처벌할때도 같은 부위가 활성화된다. 실제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회내 다른 개인이 악영향을 끼친 악당이 처벌받으면 강한 카타르시스와 즐거움을 느낀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항상 높은 인기를 누리는 이유다. 이처럼 처벌은 협력을 위하여 필요하지만 부담스러우며 인간은 처벌을 즐기기에 제3자 차벌이 생겨났다. 이는 피해자가 아닌 제3자가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으로 오늘날 인간사회가 거의 실행하고 있다. 경찰이나 검찰, 교도소를 생각하면 되는데 제3자 처벌로 인해 인간은 대규모 초협력 사회를 실현할 수 있었다.
평판은 상대에 대한 정보다. 대부분의 거래는 비동기적으로 이뤄지며 때문에 집단에서는 신뢰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 신뢰를 나타내는 지표가 개개인이 가진 평판이다. 때문에 인간은 집단에서의 협력을 위해 평판이라는 심리기제 역시 진화시켰다. 원시부족에서의 사냥에서도 평판의 중요성은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의 사냥하는 이유는 사실 평판때문이다. 원시부족의 사냥 성공률은 3%정도로 매우 낮다. 때문에 사냥은 열량의 획득때문이 아니다. 인간은 사냥물을 나누어 먹는데 사냥기술이 뛰어난 자가 주로 사냥물을 나누어 주게 되므로 그사람만 수혜를 보게 된다. 하지만 사냥엔 사냥기술이 부족한 자도 참여가 이뤄지느데 이는 이 협력을 통해 사냥을 못하는 자도 위신과 존경을 얻게 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사냥을 못하고 열량에도 도움이 안되며 나눔도 일부에게만 유리함에도 사냥이 이뤄지는 것은 이 행위에 적극 참여하는 모두의 협력도가 평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평판 획득은 복잡한 면도 있다. 사람들은 대개 선행은 대놓고 떠벌리는 사람보다는 몰래 실천하는 사람을 선호하며 실제로 사람은 자신의 선행을 남들이 알아주기를 원하면서도 몰래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평판을 얻으면 인간 사회에서 지위를 얻게 되어 적합도가 매우 높아지므로 당연히 그것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 질시당하고 공격 받게 된다. 때문에 인간은 남몰래 선행을 하여 공격을 회피하려는 성향을 갖는다.
인간은 협력하는 경향을 진화시킨 덕에 부작용도 얻었다. 바로 피해망상증이다. 피해망상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를 입히려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다.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피해망상 경향을 지니고 있는데 사회 생활을 하며 해로운 타인을 피하거나 무력화하는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과도한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인간이 어두운 곳이나 잘 보이지 않는 곳에 포식자나 위험한 타인이 있다고 과도하게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부정적 과다함으로 인한 착오는 약간의 피해를 입지만 이것이 실제인 경우 대가는 목숨이다. 피해망상도 이와 비슷하다. 해로운 사람에 대한 잘못된 판단은 실제로 큰 피해로 이어지기에 이에 대해 과도하게 판단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피해망상은 소외된 종교나 인종,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거나 사회관계망이 좁은 사람들에게 더욱 잘 나타난다.
협력의 또 다른 부정적 대가는 비합리적 믿음이다. 사실 정당한 믿음과 그렇지 않은 믿음간의 구분은 애매하다. 기준은 과학성, 합리성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평가다. 그리고 이런 특정 믿음은 어떤 집단에 소속할 자격으로 작용한다. 때문에 인간은 집단에 소속되어 자신의 적합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의 집단 혹은 소속 되고 싶은 집단이 고수하는 믿음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고 쉽게 받아들인다.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뻔한 증거가 있음에도 그러하다. 때문에 이런 믿음에 대해 인간은 확증편향, 의도적 합리화, 선택적 기억등으로 이를 비호한다. 문제는 한 집단이 갖고 있는 이런 잘못된 믿음은 결국 그 집단의 쇠퇴를 불러와 소속 개인의 적응도를 결과적으로 낮추게 된다는 점이다. 백신이 자폐증을 불러온다는 믿음, 지구가 네모난 판이라는 믿음, 코로나에 대한 여러 잘못된 믿음 등이 그러한 예다.
이런 잘못된 믿음에 대한 맹신과 확증편향은 최근 더욱 강화되고 있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세계화로 인한 서구 및 아시아의 부유한 민주국가들의 물질적 환경의 악화와 연결되는 부분이다. 물질적 안전은 인간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회의 모양과 크기를 근본적으로 바꾼다. 물질적 안전이 부실하면 인간의 사회관계망이 좁아지고 반대의 경우에는 넓어지게 된다.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서구 및 아시아의 부유한 국가들의 중산층은 붕괴되거나 경제적 기반을 많이 상실하게 되었는데 민주주의의 위기 및 양극화의 심화가 이것과 같이 일어났다. 즉, 물질적 기반의 상실은 자신의 집단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갖게 만들었고, 다른 집단을 공격하고 자신의 집단의 잘못된 믿음을 맹신해 여러 선진국가에서 좀처럼 등장하기 어려운 잘못된 지도자가 선출되거나 잘못된 정치적 판단을 일으키는 결과로 작용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지구온난화나 민주주의의 위기등 세계적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지구 공공재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결국 지구적으로 생각하되 지역적으로 해결하자를 제시한다. 인간의 협력은 자신의 집단, 즉, 지역 수준에세 가장 효과적이니 그런 지역 수준에서 세계적 위기의 문제를 다루자는 것이다. 미국의 트럼프가 파리협약을 탈퇴했음에도 미국의 많은 시나 주들이 지자체 수준에서 이를 거부하고 그 문제를 지역 수준에서 해결해나간 것이 그런 좋은 예이다.
언젠가 인간의 협력 수준은 지역과, 국가를 넘어서 지구로 향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협력에 대해 인간이 현재 갖고 있는 도구 만으로 그것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