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란 무엇인가 - 마스크 시대의 정치학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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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사회 시민에겐 권리와 의무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부여된다. 하지만 권리는 주로 나의 생존권과 행복추구와 직접적 관련이 있기에 누구나 환영하고 주장하는 반면 국가와 사회, 이웃을 위해 나의 무언가를 희생해야 하는 의무는 그렇지 못하다. 여기에 의무는 약간의 원죄까지 있다. 시민사회가 성립하기 이전 사람들이 신민이던 시절을 생각해보자. 그들에겐 이렇다할 권리는 없고, 일년 내내 수확한 작물을 절반 가량 지주에게 빼앗기고, 국가에도 바치며, 노역에 시달리는 의무만이 가득했다. 물론 국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어느 정도의 기근이나 흉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지키긴 했다. 하지만 백성 자신은 물론 국가까지 그것을 백성의 권리라고 생각해본적은 감히 없었다.

 그러다 시민사회가 들어서며 신민은 시민이 되고 기본권을 바탕으로 한 권리가 생겨난다. 이 시기가 19세기 무렵이다. 19세기 이후엔 국가에게 시민의 행복을 증진시킬 의무가 생겨난다. 민주주의로 인해 공화정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의 행복 추구는 반드시 충돌하는 지점이 생겨나기에 국가에겐 이 시기부터 인권과 시민권 그리고 이것을 갖고 있는 개인간의 권리와 의무의 조화를 어떻게 실현시키는가가 지상과제가 되었다. 

 생체정치 개념도 등장한다. 생명정치 또는 생명관리 정치라고도 하는데 이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노동력과 소비자로써 중요한 의미를 가지므로 그런 차원에서 국가가 체계적으로 국민의 몸과 건강, 수명, 인구를 관리해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는 과거 국가도 중시했던 것이긴 하다. 국가에게 국민은 국방, 세금의 징수대상이었기 때문이며 호구가 많은 것은 곧 어느정도 국력이란 인식이 있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생체정치는 차원을 달리한다. 우선 국민의 생명과 건강, 최소한의 경제권이 기본권 달성의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의 행복추구권, 인권 등의 기본권은 당연히 육체적 안녕이 보장될때야 의미가 있다. 죽은 사람이나 뇌사자, 혹은 견딜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자에게 교육받을 권리,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권리 따윈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둘째는 국가가 근현대 사회에 이르러 이런 생체정치를 추구할만한 제도적 기술적 과학적 수단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과거 같았으면 돌림병이 번져도 그 근원과 이렇다할 해결방법을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적극적 예방접종과 치료수단, 방역지침을 수행할만한 행정적 권력과 제도를 갖고 있다. 

 때문에 공중위생은 19세기가 지나는 동안 점점 더 중요한 국가의 의무가 되었다. 생체정치는 사회정치의 동력이 되기도 했다. 국가는 두 가지 책임이 있는데 하나는 개인의 행복추구이며 다른 하나는 공공의 이익이다. 양자는 생물학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며 기본권이 국가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의무로 인해 시민은 국가에 의해 보호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민주시민사회에서 국가의 아름다워 보이기만 하는 의무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국가의 생산성과 효율성, 창의성을 높여 국부를 최대로 증진시키기에 국가의 입맛에 딱 맞는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의 기본권과 공공의 이익을 침해한다. 불평등과 환경오염, 시민 개인간의 공공성을 흐트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지배한 20세기 내내 불평등과 경쟁을 옹호하는 것과 평등과 연대의 옹호간의 기나긴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코로나 19사태다. 코로나 19를 맞아 실시한 대부분 민주 국가의 방역 정치는 연대적 생체정치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자유 혹은 기본권 침해 방지를 위해 적극적 방역 정치를 행하지 않는 것은 코로나에 가장 취약한 상대적 약자를 먼저 의도적으로 죽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국가가 코로나 정책을 행하지 않아도 부유층은 소득에 큰 지장이 없고 안전하고 쾌적한 곳에 격리될 수 있으면서 그러면서도 웬만한 생활을 다 누릴수 있다. 하지만 그런것이 모두 없는 빈자층은 죽음과 감염을 피하기 어렵다. 이처럼 국가가 사회의 전체적 효율을 중심으로 의무를 방기해 약자를 의도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사회적 다윈주의로 파시즘정권이 행했던 일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민주국가는 약자 보호의 조치를 통해 시민의 일상적인 삶에 개입하고 기본권을 일시, 부분적으로 제한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팬데믹 상황에서 생명권과 집회의 자유처럼 두 기본권이 충돌을 일으킬 때는 국가는 어느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할지 결정해야 하는데 당연히 생명권이 우선이 된다.  

 이렇게 국가의 방역이 당연하다고 해도 문제가 되는 두 가지 측면이 남아있다. 첫째는 국가의 위생조치가 팬데믹을 막을 만큼 효과적이었는가, 그리고 둘째는 이처럼 국민의 생명권을 지키기 위해 코로나의 경우 방대한 방역을 벌였음에도 그와 유사한 피해는 주는 다른 상황에 대해 국가가 침묵을 지키는 것이 옳은가라는 문제다. 전자에 대해서는 나라마다 상황이 다르므로 언급하기가 어렵지만 한국의 경우가 가장 모범 사례로 꼽힌다. 적당한 개방과 자유를 추구해 시장과 인권을 지키면서도 방역수준을 높게 가져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조건적 방역을 우선한 중국이나 초기 많은 죽음을 불러온 이탈리아나, 미국의 사례는 좋지 못한 사례다. 두번째의 경우 사례로 들만한 것은 흡연이나 음주, 안전사고 같은 것들이다. 이것들이 불어오는 인명의 손실은 코로나 이상이다. 하지만 이들은 타인을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죽음으로 몰고가지 않으며 개인 자신이 스스로에게 가해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자본주의로 인해 흐트러진 공공성의 회복을 위해 그 해결방안으로 은퇴후 2년간 주당15시간의 사회적 봉사활동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존재가 되고 사회의 약자의 생활을 느껴보는게 하나의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독일사회의 반발이 많았는지 변명도 꽤 길게 써놓았다. 저자가 보기에 코로나 상황에서 자신의 안위 혹은 국가에 대한 음모나 권리침해등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방역수칙을 위반하고 반대한 사람들은 결국 의무를 저버린 자들이 된다. 여러 그럴듯한 이유로 사회적 약자이자 타인을 죽음으로 몰고간 직접적인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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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12-15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알라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합니다.
행복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에도 좋은 일들 가득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닷슈 2022-12-15 22: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연말 잘 보내세요. 눈 조심하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