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주와 환경에 대한 책 모두에 관심이 많다. 우주에 대한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한 없이 나를 작게하며 이 좁은 창백한 점에서 분투하는 모든 노력이 허사 같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워낙 스케일이 크서 압도적이고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우주의 시작과 끝, 그리고 허무한 질문인 '우주가 대체 왜 생겼고 그 전엔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인간이 알수 없는 부분이다. 너무나도 크긴 하지만 우리 은하도 태양계도 지구도 우주의 법칙을 적용받는 우주의 일부이기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환경 분야는 실존의 문제다. 2022년 4월 초는 무척 더웠다. 우리가 뿜어낸 열에너지 덕분인데 이 지경에도 에너지 위기로 서구를 포함한 선진사회는 다시금 온실가스 배출 정지에 합의에 실패했다. 다시 원전을 돌리고 가스 사용을 허가하는 쪽으로 회귀하는 분위기다. 

 하여튼 둘은 접점이 별로 없어보였는데 이번에 읽은 책 제러미 러프킨의 '엔트로피'는 나에게 양자를 연결시켜줬다. 책 내용을 간단히 언급하면 엔트로피라는 우주의 법칙 아래 인간이 생존을 위해 발달시켜온 자연 활용 및 분석능력인 과학과 기술이 결국 환경을 파괴하여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행위라는 설명이다. 우리가 이용가능한 지구의 유용한 환경은 엔트로피가 매우 낮은 상태이고 그것의 이용 후 나타나는 환경파괴는 무질서를 높이는 상황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한 상태다. 

 그리고 이것과 관련된 책 3권이 떠올랐다. 엔드 오브 타임은 우주의 역사를 엔트로피로 본 책이다. 우주가 에너지 덩어리인 매우 작은 점에서 끝없이 팽창하며 이 에너지와 그것으로 이뤄진 물질이 퍼져나가는 과정인 만큼 그 끝엔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책은 엔트로피를 자세히 서술하고 인간의 역사도 다루며 우주의 끝엔 사고조차 남지 않을 것임을 말한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은 최근에 읽은 책으로 엔트로피와 시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시간은 엔트로피와 매우 관련하는데 우주의 시작과 끝이 엔트로피가 매우 낮은 상태에서 매우 높은 상태로 향하는 것이라면 시간은 그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엔트로피가 없는 우주의 시작 전과 끝은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값싼 음식의 실제 가격'은 우리가 먹는 음식이 그 구매가격은 매우 싸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임을 알려준 책이다. 음식의 가격이 싼 이유는 이것이 가격이 저렴한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대량생산된 것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그 효용은 매우 낮다. 화석연료 기반으로 재배된 농산물이나 축산물을 내가 소비하여 얻는 칼로리는 그것을 키우는 과정, 그리고 추수, 도축, 수송과 유통, 판매되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칼로리에 비해 현저히 적다. 거기에 이들은 생산과정에서 경제학에서 잘 측정하지 않는 상당한 환경오염 비용도 만들어낸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가격 경쟁력 유지를 위해 소비자가 내는 세금으로 구성된 정부의 보조금으로 낮은 가격을 유지한다. 결국 싸다고 생각한 식품이 사실은 매우 비싸다는 점을 지적한 것인데 책 엔트로피도 비슷한 점을 지적한다.

 본격적으로 책 '엔트로피'에 대해 언급하면 이 책은 우선 유명한 제레미 리프킨이 썼고 상당하긴 하지만 논의된지는 좀 오래된 저자라는 점이다. 그는 20년 정도 전에 상당히 유명했는데 책 엔트로피도 알고보니 그가 무려 1980년 초반에 저술한 책이었다. 그래서 책 뒷 부분에 경제와 인구, 식량, 에너지등의 문제를 지적하는 부분에서 참고한 자료들이 대개 1960-70년대의 것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부분에 엔트로피의 증가와 인간 과학 기술의 발전에 대해 연결지어 서술한 부분은 시대를 관통하여 인류가 역사내내 새겨야할 부분을 관통했다는 느낌이다.

 엔트로피는 두 가지 법칙을 갖고 있다. 제 1법칙은 우주 안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불변한다는 것이다. 빅뱅 이후 팽창하고 있는 우주의 모든 에너지 물질은 그 형태와 밀도를 달리할 뿐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우주가 계속 무한히 팽창해나가면 모든 에너지와 물질의 밀도가 거의 제로에 가깝게 흩어져 버릴 것을 암시한다. 물질이 퍼져나갈 공간은 거의 무한히 팽창하는데 반해 물질과 에너지를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제 2법칙은 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것이다. 이 방향은 안타깝게도 유용한 상태에서 무용, 획득 가능한 상태에서 획득이 불가능한 상태로의 방향이다. 이는 어쩌면 우주가 계속 팽창하기에 매우 당연한 현상이다. 물질과 에너지는 모여 있어야 유용하지 공간의 팽창으로 흩어지면 유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마 우주가 쪼그라든다면 엔트로피는 그 방향이 바뀔 것이다. 이 법칙이 의미하는 것은 무서운데 결국 우주에 모든 생명체나 그들이 거주하고 진화하는 별들이 모두 사라져 흩어져 버릴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엔트로피란 어떤 시스템 안에 존재하는 유용한 에너지가 무용한 형태로 바뀌는 정도를 재는 척도를 의미한다. 이 법칙이 온 우주에 적용된다면 사실 인간 같은 생명의 탄생이나 별이나 은하의 탄생 같은 고도의 질서는 엔트로피 법칙을 위배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국소적 질서의 탄생은 역으로 다른 바깥 부분의 엔트로피를 더욱 크게 증가시키기에 전체적으로는 법칙을 위배하지 않는다. 이게 책의 핵심인데 하나의 작은 질서인 인간이 과학 기술문명을 발전시켜 그 질서를 인간 생존을 위해 정교하게 하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큰 엔트로피 증가를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다는 역설적인 논리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생존을 위해 발전해나갈수록 인간 자신 및 우주의 멸망을 앞당긴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명백한 엔트로피 법칙에도 인간은 우주가 무한할 것이고 인간이 영원히 제약 없이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역설적인 근대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인간이 이런 세계관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다. 과거 서구는 근대적 세계관 이전에 그리스 세계관 및 기독교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두 세계관은 엔트로피 법칙에 부합한다. 

 그리스인은 역사를 지속적인 쇠락의 과정으로 보았는데 총 다섯단계로 역사를 나누었다. 황금 - 은- 청동 -영웅 - 철의 시대로 뒤로 갈수록 살기가 힘들어지고 쇄락한다. 이 후퇴는 마지막 단계를 지나면 신에의해 다시 반복되는데 이에 따르면 역사는 발전이 아닌 질서와 혼돈을 반복하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삶은 다음 생을 향해가는 중간과정으로 본다. 그리스와 다른 것은 인간 역사가 순환이 아닌 일직선으로 향한다고 파악한 것인데 이 과정은 발전이 아닌 힘의 충동과 해체의 씨앗을 지상에 뿌리는 것으로 인식된다. 때문에 사회에서 어떤 개인적 목표나 진보의지, 열망을 갖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 되며 그저 인간과 사회는 신이 이끄는 일종의 도덕적 생물체로 그 안에서 신에 의해 주어진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 양 세계관은 지금 듣기엔 터무니 없는 면이 많지만 적어도 인간 사회의 발전이 쇠락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엔트로피 법칙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전통적 세계관은 1750년 튀르고가 역사의 순환과 지속적인 쇠락을 부정하며 바뀌기 시작한다. 튀르고는 역사는 일직선으로 진행하는 것이며 각 단계는 앞선 단계보다 진보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며 근대적 세계관의 문을 열었다. 이후 등장한 기계론적 세계관은 베이컨, 데카르트, 뉴턴 세명의 공동작품이다. 이들은 우주에는 정밀한 수학적 질서가 있고 이 질서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도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구상에 대부분의 것들은 원시 상태에 있고 그래서 충돌과 혼란이 생겨났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잘 배열하여 우주에서 우리가 볼수 있는 것과 같은 질서를 지구상에 도입할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자연의 것들을 잘 배열하여 우주의 질서와 같은 질서를 창출하느냐였는데 그 답은 역학의 자연적 법칙을 이용하여 인간의 물질적 자기 이득이 증대되도록 가장 적합하게 자연을 배열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물질적 부가 축적될 수 있도록 세계는 더욱 질서화하며 진보는 물질적 풍요를 더욱 증대시키는 것이며 이 물질적 풍요는 결국 질서 있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인간의 과학과 기술은 바로 이를 실현하는 도구가 된다. 

 이런 기계론적 세계관은 지금도 인간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데 그 가장 큰 특징은 진보다. 덜 질서 있는 자연적 세계가 인간에 의해 이동되어 더 질서 있는 물질적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은 목적은 자연과정의 일부를 더 큰 가치, 더 큰 도구, 더 큰 질서의 형태로 바꾸어 당초의 상태보다 더 나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세계관에 입각한 인간의 과학과 기술에 의한 발전은 결국 재생 재활용 가능한 유용한 에너지 원을 희생하고 전체 환경의 엔트로피 총량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일이 발생한다는 것은 에너지가 높은 수준의 집중도에서 낮은 수준의 집중도로 이동할 때이다. 자연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일정량의 에너지가 무용한 에너지로 전환다는 의미이다. 이 과정을 통해 유용한 에너지는 결국 오염된다. 사람들은 오염이 생산활동의 부산물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오염은 흩어진 무용한 에너지의 증가, 즉 흩어진 에너지의 형태다. 그리고 지구는 하나의 폐쇄계이기에 지구의 엔트로피는 언젠간 극대점에 도달한다. 물론 태양에너지가 꾸준히 공급되긴 하지만 그것이 지구라는 폐쇄계의 엔트로피를 낮춰주는건 일정량이고 한계가 있다. 그리고 이미 인간의 과학기술은 매년 태양에너지가 낮춰주는 마이너스 엔트로피 이상의 플러스 엔트로피를 발생시키고 있다. 곧 한계에 다다를수 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엔트로피는 시간과도 관련한다. 우주가 생긴 이래로 시간은 항상 앞으로만 흘렀는데 이는 엔트로피가 커지는 방향으로 항상 일정하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항상 총량은 일정하지만 우주가 팽창하기에 항상 쓸모있는 상태에서 쓸모없는 상태로만 움직인다. 따라서 엔트로피가 극대화되어 에너지와 물질이 모두 고갈되면 더 이상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즉, 시간이 사라지는 것이다. 즉, 시간은 일을 할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가 남아있을 때만 유용하며 뭔가가 일어난다는 것 역시 같은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생명체는 주변환경에서 자유 에너지를 흡수하여 엔트로피를 흡수하여 엔트로피 과정의 반대방향으로 움직여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지구에서 이런 자유 에너지의 원천은 태양이다. 모든 생물은 주변환경에서 마이너스 엔트로피를 지속적으로 흡수하여 살아간다. 생명체는 개방계로 폐쇄계와는 다르게 주변 환경과 물질 및 에너지를 교환한다. 그리고 주변 세계의 질서를 파괴하여 자기 몸에 흡수하여 살아가게 된다. 생명체가 자신의 엔트로피를 낮춰가며 주변의 엔트로피를 높이는 과정은 놀랍기 그지 없다. 1년에 인간은 생존을 위해 송어 300마리가 필요하다. 송어 300마리는 9만 마리의 개구리를, 9만 마리의 개구리는 2700만 마리의 메뚜기를, 그리고 이 메뚜기들은 1천톤의 풀을 요구한다. 

 생명체는 일종의 에너지 변환자인 셈인데 생물의 눈과 귀, 코, 입, 미뢰, 손등의 감각 기관과 머리, 입 사이의 긴밀한 관걔는 생명체가 에너지의 흡수자이자 변화자임을 보이는 명백한 증거다. 생명체의 생존은 이런 변환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달렸는데 진화 초기 경쟁이 치열해지기전에는 주변의 물질과 에너지 흐름을 극대화, 즉, 마구잡이로 흡수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해지면 에너지 흐름의 극대화보다는 효율화가 유리해진다. 이런 에너지 흐름의 극대화를 저자는 식민화 단계, 그리고 효율을 중시하는 극소화를 절정 단계라 칭한다. 인간은 신체적으로는 당연히 절정 단계이지만 우리의 과학기술 문명은 식민화 단계라 볼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생물과는 다르게 감각 기관 외에 에너지 변환을 위해 신체 외적 도구를 사용한다. 이는 단순한 도구에서 지금은 로봇, 인공지능 같은 걸로도 확장되어 상당히 많은 에너지를 변환한다. 인간의 삶, 문화, 사회는 결국 원재료에서 출발해 이런 외적 도구를 통해 무용한 폐기물을 양산한다. 하지만 인간은 역사상 기술 발전에 의한 잉여로 인해 계속 더 큰 잉여를 낳는 식으로 경제발전을 하고 인구를 증가시키며 발전해 왔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이것을 지구라는 한계를 명확히 갖고 있는 폐쇄계에 있는 마이너스 엔트로피를 소모한 과정에 불과하며 과거 태양에 의해 축적된 마이너스 엔트로피까지 써버리는 방법을 알아낸 것에 불과하다. 즉, 엄밀히 말해 한정된 에너지나 자원을 더 많이 써버리는 도구를 찾은 것인 셈이다.

 인간 사회는 사실 발전이라기 보다는 결핍, 위기, 실험의 과정을 거친다. 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일정한 에너지가 무용화한다. 이런 축적된 엔트로피로 인해 사회가 에너지 원에 대한 질적인 변화를 꾀하는 것이 역사적 분수령이다. 그리고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이동이 일어나고 새로운 방식의 기술이 태어나며 이것이 사회, 경제, 정치 체제 전반으로 퍼져 새로운 체제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는 엔트로피 측면에서 볼 때 새로운 사회가 이전 사회보다 에너지 환경면에서 더 열악해 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이 새로운 분수령을 맞이 했을 때 이전보다 에너지 획득을 위해 더 큰 노력을 해야하는 것을 의미하며 고전적으로는 더 힘든 육체적 노동을 해야함을 말한다. 예를 들어 과거 수렵사회에서 인간은 채취와 사냥으로 주변에서 쉽게 식물,동물자원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인구증가와 역사의 지속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하여 주변 자원이 부족해지자 농경과 축산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 역시 오래 지속되어 한계를 맞이하자 오래전에 축적된 마이너스 엔트로피인 화석 연료의 사용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역시 최근 한계를 향해 치닫고 있다. 각각의 단계는 인류역사상 큰 발전처럼 보이지만 같은 에너지를 획득하기 위해 더 큰 노력을 해야하므로 엔트로피 측면에서 명백한 퇴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일전에 읽은 책 '문명과 식량' 도 인류 역사의 발전 단계를 이와 매우 비슷하게 서술한다. 인간이 발전을 통해 새로운 자원을 얻으면 그 한계에 가깝게 인구가 성장하고 위기가 오면 다시 새로운 자원을 얻는 방법을 개발해 내어 다시 성장하고 위기를 맞는다는 식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의 과학 기술이라는 것은 자연의 창고에서 꺼낸 에너지의 형태를 바꾸는 변환자 역할 이외의 것이 아니게 된다. 기술은 결코 새로운 에너지를 창조하지 못한다. 열역학 1법칙 때문이다. 다만 쉽게 쓸수 있던 유용한 에너지의 고갈로 기존엔 쓸수 없었던 에너지를 사용하는 방법이 기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계를 거칠수록 갈수록 어렵고 고난이도가 될 수 밖에 없다. 즉, 인간 과학기술의 발전은 엔트로피 증가라는 근원적 문제의 해결책은 영원히 될 수 없으다. 그저 엔트로피 증가와 쌍으로 그 난이도와 수준을 꾸준히 높여나갈수 밖에 없으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행위가 계속될 수록 엔트로피의 증가는 지수함수적으로 커진다. 인간이 수렵사회에서 증가시킨 엔트로피와 농경사회의 엔트로피, 그리고 산업사회의 엔트로피의 증가폭은 그 수준이 다르다. 

 인간이 만들어낸 정치, 경제 기구등도 인간의 신체외적도구 기계처럼 에너지 변환자다. 이들의 일은 문명 전체를 통과하는 에너지 흐름을 원활히 하는 것이다. 역사의 분수령에서 새로운 에너지원을 확보하는 기술이 등장하면 초기엔 이 기구들이 매우 융통성이 있다. 초기에는 새로운 에너지를 사용하는 기술 창조와 확보에 집중하기에 이 기구들은 조정자와 설계자의 역할을 한다.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에너지원의 흐름에서 박탈당하는데 그 이유는 새로운 에너지원이 그 변환을 위한 기반 건설에 주로 투입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지난 단계에서의 에너지 결핍으로 인한 고통의 기억으로 초기의 박탈을 희망을 갖고 잘 참아낸다. 

 다음 단계는 보다 많은 에너지가 사회 전반으로 흘러드는 단계다. 그리고 이 시기 엔트로피가 급격히 증가한다. 에너지는 다양한 제품이나 서비스로 변환하며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개인과 집단간 에너지 교환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그리고 에너지 폐기물이 대량으로 발생해 엔트로피가 증가하게 된다. 이렇게 2단계에서는 무질서가 크게 증가해 급기야는 이것이 에너지 흐름의 진행을 방해하게 된다. 기구들은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무질서를 청소해야하며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여 유지보수를 하기 시작한다. 위기 때마다 관료제라는 것이 비대화하는 것이다. 기구들은 더욱 중앙집권화하며 국소적으로는 한 질서가 무너질때마다 새로운 중앙집권 기구가 나타나 이를 정리하여 질서를 잡는 순환이 이뤄진다. 농경사회에서 생산력이 무너질때마다 왕조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나타나 질서를 잡는 식의 순환이 이뤄졌던 것을 상기하면 된다. 하여튼 동시에 국가는 고갈되는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영토확장을추구하며 정복을 위해 국가 기구들은 더욱 비대해진다. 이 때 제도가 와해되고 외부침략이나 내부반란에 매우 취약한 시기가 도래한다. 엔트로피의 분수령에 가까워진 것이다.

 이후 단계의 해결책은 두 가지다. 하나는 언급한 것처럼 새로운 에너지원을 사용할 수 있는 과학기술의 개발로 다시 한번 쳇바퀴를 돌리는 것이다. 다만 새로운 고도의 기술이 엔트로피 증가를 더욱 가속화하기에 쳇바퀴가 도는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다른 해결책은 에너지 흐름을 극대화하는 식민화상태대신 절정상태로 돌아가 복잡성과 중앙집중화를 늦춰 쳇바퀴가 도는 속도 자체를 느리게 하는 것이다. 즉, 저엔트로피 사회로 전환하는 것이다.

 저자는 1980년의 상황에서도 태양에너지 같은 재생에너지의 사용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해법으로 생각한 듯 하다. 하지만 태양에너지는 연료의 채취, 유통, 발전, 사용, 소비의 모든 단계가 중앙집권적인 화석연료와는 다르게 분산형 시스템이다. 태양에너지를 태양전지판에서 얻고 이것이 한곳에 집중되지 않고 여러 곳에 분산 설치되어 소유와 사용이 분산될 수 밖에 없는 만큼 분산시스템이 될수 밖에 없다. 저자는 그로인해 지금의 시스템과 태양에너지에 의존한 체계가 충돌하수 밖에 없다고 본다. 때문에 우리가 지금의 고엔트로피 지향의 정치, 사회, 문화체계를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엔트로피 문명에서는 최소한의 통치 정부가 좋은 정부가 된다. 대중 민주제, 직장과 공동체에서의 평등한 투표권과 의사발언권이 그것이다. 세계관도 변화가 필요한데 기존의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자연을 착취의 대상이 아닌 총체적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새로운 세계관이 요구된다. 인간이 자연과 하나라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모든 인간활동에 적합성 여부를 판단하는 새로운 윤리적 기반도 마련된다. 저엔트로피 사회는 다음과 같은 생산 기준을 갖는다. 우선 탈집중화와 지역화다.그리고 기업은 노동자가 관리하는 민주적 조직이 되며, 생산과정에서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소비를 최소화하게 된다. 저자는 이런 저엔트로피 사회의 건설을 통해 사회의 에너지 흐름을 최소화 하여 자연적으로 잘생하는 에너지 흐름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인간과 다른 생물 및 우주가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상당히 인상적이고 반박할 수 없는 논리를 주장하지만 모든 부분에 동의가 되진 않는다. 이 책에 나온 시점은 1980년대 초반으로 당시는 산유국의 담합으로 서방사회가 오일쇼크를 여러차례 겪고 이를 통한 경제위기와 물가상승으로 매우 높은 수준의 금리를 유지하던 시기였다. 때문에 곧 재생불가능한 자원은 한계를 맞이할 것처럼 보이는 반면 이를 대체할 재생에너지를 활용할 과학기술은 매우 미흡하였고, 자원 부족으로 인플레이션은 지속될 것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낳은 책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책이 주장하는 논리는 그러한 시점에서 상당히 상황이 달라진 오늘날에도 기본적으로 유효하다. 자원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며 인간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자원을 소모하여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것은 영원한 굴레다. 하지만 저자는 인간이 지구라는 하나의 폐쇄계를 벗어날 가능성을 상정하지 않았다. 인간이 태양계, 그리고 다른 천체에 접근하여 마이너스 엔트로피를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저자가 말한 것처럼 새로운 문명단계에 접어들어 굳이 저엔트로피 사회로의 전환 없이도 새로운 고 엔트로피 사회가 열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지금 시점에서는 상당히 가능해 보인다. 

 나는 비교적 저자가 책에서 싫어하고 비판한 낙관론자나 실용주의자에 가까워 인간이 엔트로피 위기를 겪을 때마다 새로운 해법을 찾아낼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실제 부침은 있지만 역사적 경험도 그러하다. 하지만 저엔트로피를 위해 노력하는 것, 그리고 고엔트로피의 문제점과 그것에 대해 경계하는 것은 인간이 새로운 역사적 분수령을 지나기 위한 충분한 간격을 벌어줄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엔트로피 위기란 저자의 논의는 지구수준에서는 충분하지만 언급한것 처럼 인간이 지구를 넘어설 능력이 생긴다면 아직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물론 그렇다 해도 여전히 인간이 우주의 엔트로피를 높여 우주의 마지막을 가속화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는 아주 먼 미래에 윤리적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본다. 우주에 다른 여러 생명체들이 있고 서로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속도가 매우 다르다면 한 생명체종의 행위는 다른 생명체종에게 매우 비윤리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지금 지구에서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게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여튼 많은 깨달음과 시각을 넓혀준 책이었다. 발간 후 40년이 지나도 여전히 읽히는 이유를 알만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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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5-07 17: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이하라 2022-05-07 18: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닷슈 2022-05-07 21: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님.

얄라알라 2022-05-08 1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축하드립니다

닷슈 2022-05-10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얄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