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음악과 대중가요는 각각 그 나름의 장르로 분류되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대중음악과 고전음악을 바라보는 시선은 두 장르를 거의 넘나들기 어려운 처지로 만들고 말았다. 때로 고전음악에 심취한 애호가들은 대중음악을 경시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고전음악에 대한 일종의 우월의식반영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거 세종문화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대중가수와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여준 세종문화 회관의 관계자가 힘을 겨루던 모습은 이를 반증하는 분명한 예라 하겠다. 마치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 혹은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하는 대중가수는 그렇지 못한 대중가수들과의 차별 의식 혹은 우월의식을 가질 수 있는 의식이 깔려있는 것도 무관한 일은 아니다. 또 그 자체를 자신의 자존심과 연결지으려는 심리를 잘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고점음악과 대중음악의 경계를 짖는 또 다른 측면은 고전음악가들의 태도이다. 그들 역시 대중음악을 경시하는 분위기속에서 성장해왔고 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때로 고전음악가와 대중가수의 협연에 감동하는 경우를 흔히 목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협연을 꺼려하는 고전음악가가 훨씬 압도적임도 사실이다. 이것이 한국 음악의 분위기인 것이다. 연주가는 연주가대로, 대중들은 대중대로 두 장르의 간극을 서로 멀어지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의 영상물은 매우 철학적인 장면들을 연출하고 있다. 회전목마는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고,  바다 속의 썰물안에서 태어나는 장면과 인어가 바다위 잠든 장면은 생명의 탄생을 상징한다. 벌거벗은 어린아이는 바다로를 향해 달려가며 손짖한다. 마치 연어가 회귀하는 모습과 유비가 통하는 상징성을 부여한 장면이라 하겠다. 

 

 이젠 시간을 거꾸로 돌린다. 아이들은 그동안 걸어온 길을 거꾸로 돌아간다. 교각 아래의 처자는 멀어지지만 트럭은 반대로 달려간다. 과거로 회귀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과정에서 회전목마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향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는 방향으로 설정했다는 점이 유일하게 아쉬움을 주는 장면이다. 탄생과 과거로의 회귀는 단순한 보수적 태도를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태고의 순수함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제작자의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감독의 의도와 노랫말의 동질성 그리고 삶을 투영하는 노랫말과 영상의 이질감은 서로 상충하며 갈등하는 대목이 특이하다. 그러나 이러한 양면성의 충돌은 결코 낮선 모습이 아니다. 우리 인생의 바로 그러한 모습이다. 대단히 흥미로우면서도 의도는 파격적이지만 신선하다. 그런 연유로 매우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성을 지닌 노래와 철학적 사고의 만남이라니...정말 멋지지 아니한가...    

 

 

 

위의 노래는 패닉의 노래이다. 사실 패닉이 이 노래를 부른지는 10여년도 훨씬 넘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나는 패닉을 알지 못했다. 대중음악에 민감하지 않은 탓이다. 물론 여전히 대중음악에 민감한 편은 아니다. 이 노래를 최근 가수 박정현이 새로운 버전으로 모 프로그램에서 부른 적이 있어 관심있게 들었다. 새로 편곡한 버전이라는 것을 알게되었고 패닉이 원곡을 부른 사람들이라는 것도 이 때 알게된 것이다.

 

박정현의 이 노래를 듣고 참 곡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노래도 아주 잘 불러주었다. 하여 서로 비교해보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 영상물과 함께 패닉이 부르는 그 원곡을 찾아냈다. 위의 영상물이 바로 원곡자들의 노래이다. 

 원곡과 편곡버전 모두 대단히 멋진 음악이다. 원곡의 산뜻함은 청자에게 정갈하고도 음악의 투명성을 보여주는 듯 하다. 마치 깊은 바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처럼 맑은 그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흑백의 영상물인지라... 여하튼 이 가수들 참 멋진데...라고 생각했다.  

 

 

박정현 선수가 뮬란의 주제곡 중 하나를 부를 때 부터 알아본 분들이 계실 것이다. 박정현은 흑속의 진주와도 같은 가수이다. 노래를 부르는 솜씨로 본다면 최고의 사랑을 받아도 되었건만...과거 박정현 선수는 그 실력에 걸맞는 영광을 채 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자신의 진가를 잘 어필한 가수 중 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프로그램 출연 후 바로 광고도 따내던 걸...

 

 

 

 

 

 

대중음악의 폐쇠성과 그 권태로움

 

대중음악과 고전음악의 극명한 차이점은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중가수의 의식, 혹은 대중과 고전음악가의 편견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사항들은 사실상 표면적인 이유들에 불과하다. 이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단 하나, 버전의 다양성이 있다. 즉 단조로운 버전의 특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대중 음악의 특성이 그것이다.

 

대중음악은 작곡가가 있고 이를 노래로 부르는 가수가 있다. 그리하여 특정 곡을 한 사람 만이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 리메이크 버전으로 다른 가수가 부르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의 비율은 지극히 미미하며 일반적인 현상은 절대로 아니다. 이러한 대중음악계의 특성은 대중음악을  지극히 폐쇠적인 장르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대중음악이 폐쇠적이라니...이건 말도 안된다 싶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폐쇠성이라는 말은 버전의 다양화를 구현할 수 없는 대중음악의 한계성을 지적하는 용어이다.

 

오직 한 사람의 가수만이 특정 곡을 부를수 있다는 점은 이를 부르는 가수의 색깔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이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폐쇠성이 주는 치명적인 약점을 또한 동시에 지닐 수 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그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익숙함에서 오는 지루함, 바로 그것이다. 익숙함, 혹은 친숙함이라는 말은 때로는 친교를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때로는 권태로움이라는 양면성의 성질을 가진 말이기도 하다. 어떤 이가 달에 지구의 우주선이 착륙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한탄하며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이제 달을 쳐다보며 상상하던 달 나라의 토끼와 절구방아의 전설은 사라지고 말겠구나...'  익숙함의 반복은 상대방으로하여금 때로 무관심, 나아가 권태로움을 유발할 수 있는 조건이 되어주기도 한다.

 

어느 한곡이 히트를 친다. 거리를 지나다보면 똑같은 노래를 수없이 들 을 수 있다. TV 방송마다 같은 곡 투성이이다. 많지도 않은 TV의 채널은 돌리는 곳 마다 같은 노래를 들려 준다. 라디오의 채널들은 그 곡을 집중 조명한다. 이러한 일이 몇 달간 벌어지는 것이 대중음악의 현실이다. 그러니 아니 권태로움을 느끼랴....하여 청자는 딴 곡으로 갈아타게 된다. 또 다른 신선한 곡이 사회를 강타하게되면 바로 매체는 미련없이 갈아 탄다. 대중들도 역시 미련없이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다. 이 것이 대중음악의 치명적 약점이랄 수 있다. 아마도 곡에 대한 저작권 때문은 아닌지... 뭐 그런 생각을 해봤다.

 

물론 세월이 수십년 흘러도 '명곡'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는 곡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좋은 곡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잊혀지고 그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아쉬움이 더 크다는 것이다. 위의 '내 낡은 서랍속의 바다'는 두 버전의 노래이고 분명히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고전음악, 그 버전의 다양성과 매력

 

대중음악의 폐쇠성과는 달리 같은 곡에 대한 버전은 무려 100개 이상 되는 곡이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베토벤의 곡들이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그 다양한 버전이 100개를 훨씬 넘어선다. 연주가로서 입문하여 명성을 얻는 가장 기초적 과정이 베토벤 교향곡의 사이클링이다. 그 사이클링 없이 세계적인 지휘자라는 명함을 기대 할 수 없다. 또한 애호가들은 그 각각의 버전을 구매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이는 고전음악의 가지는 특징이다. 애호가들은 엄청난 중복 투자를 마다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왜 그들은 경제적 비효율성의 극치를 달리는 중복투자를 하고 있는 것일까...다름 아닌 다양성 때문이다. 각각의 연주자마다 그 특징이 다르고 그 차별화된 연주는 감상의 또 다른 맛을 준다. 이것이 애호가들이 중복투자를 하는 유일한 이유이다. 심지어 교향곡을 피아노 버전으로 편곡하여 연주하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던가...

 

이러한 고전음악의 다양성은 어느 한 개인에게는 일생을 함께하는 음악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 연주의 수명에는 끝이 없다. 오직 애호가만이 늙어갈 뿐이다.

 

 아래의 두 영상물은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이다. 지휘자도 연주자도 노래하는 사람도 다르다. 같은 지휘자가 같은 곡을 두 번 연주해도 두번 다 같지 않다. 다가오는 감동은 서로 다르며 감상의 포인트도 서로 달라진다. 물론 호불호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 그 나름의 특징을 가진 연주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것이 다양성의 확보이다. 생물의 다양성 만큼이나 음악의 다양성도 중요한 것이라 하겠다.  

 애호가들이 지루해하지 않으며 권태로움을 느끼지 않고 평생 한 곡을 또 듣고 들을 수 있는 이유는 비로 다양성에 있는 것이다. 그럴리가 없다며 내게는 영원한 명반이 있다며 큰소리를 칠 수있는 애호가가 있다면 스스로 자문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비교 감상할 수 있는 기타의 음반들이 없다면 과연 명반이 존재할 수 있을까..라고...가사가 있는 대중음악이 주는 감동과 가사가 없는 고전음악이 주는 감동은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생명력을 가지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다.

 

대중음악과 고전음악은 음악이라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서로 다른 특징이 같은 음악이면서도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도록 한다. 대중음악에도 이러한 다양성의 시대가 올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은 대중음악의 이권을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시대는 변하여 요즘은 음반의 시대라기보다는 음악 파일의 시대이다. 좋아하는 곡을 하나 씩 다운로드하여 플레이어로 듣는 시대인 것이다. 다양한 대중 음악의 버전들은 원곡이 같지만 또다시 다운로드하는 중복성을 띌 수 있지 않을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소스는 비록 같지만 다른 버전을 서로 비교감상할 수 있는 대중음악의 시대가 올 수는 없는 것인가... 여하튼 대중음악의 다양한 버전에 대한 아쉬움에 쓸데없는 소리 한 것 같다 ㅠ.ㅠ  

 

 

카랴얀은 히틀러 못지 않은 지휘자이다. 토스카니니가 그러했던 것 처럼 독선 그 자체였다. 오죽했으면 베토벤 9번을 영상물로 제작한 디비디 중 하나는 연주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카라얀만 비추고 있을까....카라얀에게 연주는 오직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일 뿐이다. 베토벤을 드러내려 했던 토스카니니와의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주는 치열하고 뜨거우며 차갑다. 이러한 모순은 연주를 더욱 화려하게 빛낸다. 조화란 애초에 갈등이라는 배우자를 전제로 하는 것인가...콤팩트 디스트의 크기를 결정할 정도로 카리스마가 넘쳤던 카라얀, 그를 최고의 지휘자 중 한사람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자신의 독선을 유려하고 빛나는 음악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연주는 아마도 영원할 것이다.

 

 

 

 

 

 

 

카라얀과는 반대로 마주어선생님은 독선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흑인 가수에게도 거리낌없이 연주를 초빙하는 자휘자이다. 아마도 가장 많은 유색인종과의 협연을 이끌어낸 분이 마주어 일 것이다. 정열은 카라얀에 뒤질 분이 아니다. 다만 연주는 대중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을 자신의 지휘로 드러낼 뿐이다. 카라얀이 아니라 마주어선생님을 존경하는 이유일 것이다. 흑인 연주자 제시 노먼은 마주어의 단골 초빙 손님이다. 흑인 연주자 제임스 바그너와의 협연은 가장 감동적인 베토벤 9번의 연주였다. 그토록 노래를 잘 부르는 제임스 바그너를 다른 그 어떤 영상물에서도 다시는 만나본 적이 없다. 지휘자들은 제임스 바그너가 흑인 연주자라서 초청을 하지 않는 것인가...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마주어가 초청하여 연주한 제임스 바그너의 영상을 찾을 수 없는 것이 그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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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12-04-04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봤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중음악을 옹호하는 쪽의 댓글을 쓸 생각입니다...^^ 먼저 대중음악과 고전음악을 일련의 패턴화된 경향으로, 그 창작과 수용 그리고 효과를 이해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해볼까 합니다. 전 이것이 음표와 화음 또는 음악적이라 불리는 일련의 장치들을 이용해서 작동하고 동일한 감각기관과 동일한 대상에게 측정되지만 다른 범주의 미학적 경험을 불러온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즉 음악이라는 이름의 동일성으로만 묶일 수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이의 연계를 위한 크로스오버니 퓨전,하이브리드같은 것 역시 하나의 시장으로 존재하겠지요. 대중음악의 폐쇄성이란 것은 대중음악의 반복단순성이라는 측면에서 오래전에 비판이 있었습니다.아도르노식의 문제제기였는데, 아도르노식의 반복성 문제를 지적하려면 그 변별성이 쇤베르크나 빈악파정도의 조성파괴까지 수용되는 틀 안에서 받아들여져야 그나마 유용성을 갖을 듯 합니다. 거기에 아도르노식의 대중음악관이 대중음악의 생성적 가능성에 대해, 그리고 대중음악의 지역적,역사적 다양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이 글에서 논거의 문제는 대중음악과 고전음악이라는 프레임속에 정확히 지목되고 있는 것이 '한국가요'와 '(서양의) 고전음악'입니다. 대중음악은...생각보다 매우 지역적 역사적 스펙트럼이 넓습니다. 물론 서구 중심의 팝음악이 시장지배적이어서 문화적 동일성이 이루어져가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보면 각 민족음악적 공동체 내부의 영향력이 작동합니다. 예를 들어 터키나 남미 쪽의 대중가요를 듣는다면 비슷한 팝성격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뉘앙스를 느낄 수 있게 됩니다. 클래식 음악의 다양성을 연행과정의 일회성,해석의 다양성에서 찾고 계시는데요...저 역시 클래식적 차이를 향유할 수있는 정도는 되기때문에 -그리고 그것에 매력이 있다는 것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때문에...이것은 다른 말로하자면, 연주 되는 곡들의 협소함의 반증일 수도 있습니다. 그 예를 보자면, 국내 연주되는 클래식 곡들을 보면 대개 베토벤-말러 중심의 고전낭만주의 곡들입니다. 레퍼토리의 수가 대단히 제한적입니다. 클래식을 음반으로 듣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상황에 문제를 느껴서 숨은 작곡가들을 찾지요. 국내에서는 페르난도 리스나 라프같은 이들이 꽤나 반응을 얻었던 걸로 압니다. 클래식 음반사들도 최소한 협화음시대에 살던-그 시대라야만 소비될 수 있기때문에- 숨은 작곡가의 곡들을 음반화하는데 신경을 씁니다. 메이저레이블들이 세계적 연주가들을 데리고 2차대전 이후 녹음해 놓았던 방대한 아카이브에 경쟁하려는 마이너 레이블들이 누구보다 앞장 서겠지요. 연주에서의 차이를 말씀하시는데...대중음악에서는 그 점을 그다지 강조하지 않는 수용자인식의 차이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대중음악/고전음악의 수용자 태도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대중음악을 수용하는 측에서는 참여적 측면이 강합니다. 즉 노래를 따라 부르게 되기때문에 멜로디 중심적이 됩니다. 그리고 작은 차이보다는 음악적 경험에 동참하는 것을 우선시 하게됩니다. 클래식의 현대적 수용방식은 이것과 좀 다르지요. 원초적으로 연주자와 수용자가 이질적 존재로 설정됩니다. 연주하는 행위와 감상하는 행위가 분리된 상태에서 음악적 경험에 참여하게 됩니다. 창작이나 참여과정이 원초적으로 배제된 수용적 차원에서 결국 인간의 감각은 귀에 집중될 도리 밖에 없습니다. 모든 감각이 청각을 중심으로 차이를 구별하기 시작합니다...대중음악은 그보다 넓은감각 사용을 전제합니다. 요즘은 비주얼이 너무 강하긴합니다만. 연주 과정에서의 차이를 말씀하시는데...모든 음악은 시간적 일회성을 특징으로 갖기때문에 공연이라는 연행과정에서는 모두 일회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그건 클래식이던 대중음악이던 상관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공연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에릭 클립튼의 서울공연과 에릭 클립튼의 뉴욕공연이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이지요.대중음악을 전문적으로 듣는 분들은 그런 차이를 클래식 수용자층과 똑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입니다.같은 라이브 음원이어도 어디 어디 공연라이브가 최고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일단 저는 클래식을 주로 듣는 사람이긴 합니다만...출생이 락과 오만장르라서...클래식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대중음악에 대한 애정도 많기때문에 대중음악을 옹호하는 차원에서 긴글을 올렸습니다. 참고로 대중 음악 전공하는 사람아닙니다.ㅎㅎ 그냥 오만가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일뿐입니다.

차트랑 2012-04-05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드팀전님,
별 대단치 않은 글인데 댓글을 다시느라고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글이 대중음악을 옹호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결국 대중음악을 향한 사랑의 메시지가 담겨있는 글이라는 점도
잊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중용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고 합니다.
其次致曲, 曲能有誠,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唯天下至誠爲能化.

기차치곡 곡능유성 성즉형 형즉저
저즉명 명즉동 동즉변 변즉화.
유천하지성위능화.

학습은 물론 좋은 발전의 단계를 의미하는 글이라더군요.
음악에도 예외는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의 서재를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드팀전님~
 

클릭 전 권유사항:

 

아래의 영상물을 클릭 하시기 전에 아래의 권유 사항을 먼저 읽어보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다음의 심리적 현상에 계신 분이시라면 영상물을 보시거나 듣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1. 그 어떤 이유로든 일시적으로 불안 하신 분

2. 현재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 신 분

3. 조금이라도 우울한 느낌을 가지고 계신 분

4. 영화를 안 보신 분(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ㅠ.ㅠ.)

 

5. 그동안 사귄 애인과 슬픔의 이별을 하신 분 

6. 오래 전에 헤어졌지만 그 혹은 그녀를 잊지 못하고 계신 분

7. 받을 돈을 6개월 이상 받지 못해 마음이 상 하신 분

8. 직장 상사에게 꾸중을 들으 신 분

9.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을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만 참고 계신 분

 

10. 막 부부싸움을 하고 화해를 아직 하지 않은 분 ㅠ.ㅠ

11, 좋은 기분 망치고 싶지 않은 분 ㅠ.ㅠ

12. 왠지 가슴 팍 한 구멍으로 바람이 시리게 불어오는 분

 

등등...어쨋거나 여러가지 상황으로 보아 기분이 별로이신 분은

1번 밥딜런의 버전과 3번 타루 버전은 스킵을 권해드립니다 ㅠ.ㅠ

 

 

노래를 들으셔도 좋은 분

1. 기분이 지금 좋은 편이라 잠시 망가져도 그쯤이야~

2. 오늘 어디 한 번 쿨하게 고독해보자~

3. 이정도 쯤이야 약발도 안선다~

4. 우울이란 내 사전엔 없다~

5. 데낄라 한병정도 쯤이야~

6. 누굴 뭘루보구...

7. 돌아서면 끝~

 

이런 분들은 들어보셔도 좋습니다.사실 노래는 꽤 좋거든요 ㅠ.ㅠ

타루버전은 묵직하게 끌어내리는 현악기를 뒤에 배치하는 바람에 ... 

마음까지 쭉...밑으로 끌려 내려가는 그.... 

 

 

1. Bob Dylan 버전

 

 

 

 

  2.  Avril Lavigne 버전

 

 

 

 

 

  3.Taru 버전

 

 

 

 

 

 

 

 

 

 

 

 

 

 

 

 

 

 

Mama take this badge from me
I can't use it anymore
It's getting dark too dark to see
Feels like I'm knockin' on heaven's door

Kn-kn-knockin' on heaven's door
Kn-knockin' on heaven's door
Kn-knockin' on heaven's door
Kn-knockin' on heaven's door

Mama put my guns in the ground
I can't shoot them anymore
That cold black cloud is comin' down
Feels like I'm knockin' on heaven's door

Kn-kn-knockin' on heaven's door
Kn-knockin' on heaven's door
Kn-knockin' on heaven's door
Kn-knockin' on heaven's do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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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3-31 0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은 괜찮은데 나가봐야 할 일이 있어 마음이 바빠~~~ 다녀와서 들어보겠습니다!^^

2012-03-31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04-03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낙킹온더헤븐즈 도어의 엔딩이군요.
저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고, 얼마나 울었는지... 음악도 정말 좋지요.
저는 DVD도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더 좋은 영화를 많이 봤던거 같아요.
요즘은 헐리우드 물만 주구장창.... ㅠㅠ.

오랜만에 볼륨 한껏 올리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차트랑 2012-04-03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사는 매우 퇴폐적이고...
선율도 그렇습니다만 뭐...
그래서
노래만 들으면 꽤 우울하다는...
그러나 영화는 참...
좋다는 ㅠ.ㅠ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
 

 최근 강신주의 춘추시대와 제자백가 시리즈를 읽고 있는 중이다. 1권은 이미 읽은 상태이고 2권을 절반 읽었는데 갑자기 제갈공명이 생각났다. 2권은 관중와 공자를 집중 조명한 책이다. 그런데 왠지 제갈량이라는 인물이 자꾸만 떠오른다. 아마도 중국 최초로 패국을 이루는데 혁혁한 공로를 가진 이가 관중이기 때문인 듯도 하다.

 

 한 때 제갈공명이라는 인물에 빠져 공명과 관련한 서적들을 찾아 읽은 기억이 있다. 중고 서적들을 뒤지면서 찹아낸 책들이라 지금껏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데 그 당시 읽었던 공명과 관련한 책 중에는 다음과 같은 양보음과 관련한 스

토리가 들어있다. 중국 5패를 이룬 제나라와 관련한 비하인드 스토리인지라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당시 양보음이라는 한 편의 시를 공명이 즐겨 읊었다고 되어있는데 그것이 사실인지를 잘 몰르 겠다. 다만 그 책에 그렇게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양보음 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양보음 


                        제나라 성문을 걸어나오니

                        아득히 탕음 마을이 바라다보이네.

                        마을에 무덤 셋이 있는데

                        이것이 저것 같고, 저것이 이것 같구나.

                        묻노니 이것이 누구의 무덤인가.

                        전강과 고야자의 무덤이로다.

                        힘은 능히 남산을 밀어낼 만하고

                        또한 땅마저 끊어버릴 수 있었도다.

                        그런데도 하루아침에 참언을 당해

                        복숭아 두 개로 세 용사가 죽임을 당했네.

                         누가 그런 꾀를 내었는가,

                         제나라 재상 안자(晏子)이어라..........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제갈공명은 어린 시절 양보음을 곧잘 부르곤 했다고 한다. 제갈량이 양보음을 곧잘 불렀다는 것은 아마도 주인공 안자(晏子)를 흠모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다.

  양보음에 서린 전설은 제나라 경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제나라의 경공 때 공손접, 전개강, 고야자는 각각 매우 뛰어난 장수였다. 위의 詩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이들의 무예는 흔히 일기당천의 하늘을 찌를듯한 실력이었던 것 같다. 이들은 자신들의 무예 때문인지 그 자부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도가 지나치면 화를 부른다고 이들의 높디높은 자긍심은 결국 제나라의 경공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품절....ㅠ.ㅠ 사실 이 책은 그 전에 나온 '공명의 선택'과 같은 내용으로 제목만 살짝 바꾼 버전이다.

 

당시 제나라의 재상은 위의 시에 등장하는 안자(晏子), 즉 안영이었다. 그는 불안해 하는 경공에게 해결책을 제시하기에 이르 른다. 저 세 장수들의 오만이 하늘 높은 줄을 모르옵니다. 만일 저들이 결탁한다면 경공께서는 위태로워지실 것입니다. 시절이 이상하니 저들을 제거하심이 옳을 줄로 압니다.

 이에 경공은 그래, 내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저토록 강한 셋을 어떻게 제거한단 말이냐...라고 말하자 안영이 대답했다. 제게 좋은 방도가 있습니다. 공께서는 아주 탐스런 복숭아 두 개만 준비해주십시오...했다.

 

경공은 잘 익은 복숭아 두 개를 준비해놓고 공손접, 전개강, 고야자 세 장수를 부르게 했다. 대령한 세 장수에게 경공은, 여기 아주 잘 익은 복숭아가 둘이 있소. 나는 이 복숭아를 그대들에게 줄 것이오. 다만, 그대들 중 가장 무예가 좋고 국가에 기여한 공로가 가장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줄 것이오 라고 말한다.


그들 세 장수는 서로 제나라의 가장 훌륭한 장수이며 공신으로서 나라를 위해 기여한 공로가 가장 크다고 주장했다. 실상 그들의 무예와 공로로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의 출중한 무예와 공로를 서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두 훌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숭아는 두 개 뿐, 우열을 가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손접이 먼저 나섰다. 일찍이 나는 커다란 멧돼지와 호랑이를 한꺼번에 때려잡은 적이 있다. 고금을 막론하고 이러한 용맹을 보인 자는 없었다, 누가 나를 천하 제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쏘냐~고 말하며 복숭아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전개강이 나서며, 나는 국운이 달려있는 큰 싸움에서 두 번이나 복병을 내어 승리를 거두었고, 크고 작은 전쟁에 나아감에 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내가 어찌 다른 장수에 뒤질수 있겠는가 라고 호통을 치며 남은 복숭아 한 개를 집어 들었다.


복숭아가 상징하는 의미를 잘 알고 있던 고야자는 두 사람의 행동에 몹시 불쾌했다. 두 사람이 가소롭고 괘씸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를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면 이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고야자는 두 사람을 향해 쏘아 붙였다. 일찍이 주공이 황하를 건너실 때, 커다란 거북이 나타나 주공의 말을 물고 물속으로 끌어간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헤엄을 칠 줄을 몰랐지만 강물에 뛰어들어 거북과 싸우며 물길을 거슬로 올라간 것이 1백보요, 물길을 따라 내려간 것이 9리 였다. 그리고 그 거북을 잡아 죽이고 주공의 말을 빼앗아 왔다. 그러자 사람들이 나를 일러 하백(河伯)이라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내가 어찌 그대들보다 힘이나 용맹에서 뒤진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대들은 그 복숭아를 내 놓으라!!! 고 일갈했다.

 

 

이 책이 바로 절판된 책으로 후에 '제갈공명'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그 원판이고 '양보음'이라는 詩가 실려있는 그 책이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양보음 관련 정보는 이 책에서 따온 것이라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고야자의 모습은 너무도 당당했고 그 위풍이야말로 천하 명장의 그것이었다. 그러자 공손접과 전개강은 고야자의 용맹과 당당함에 자신들이 차마 미치지 못한다고 여기며 부끄러워 했다. 두 사람은 스스로 가져갔던 복숭아를 고야자에게 내 놓으면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우리들의 용맹이 고야자에게 미치지 못하면서도 탐욕을 부렸도다...아아, 부끄럽고 부끄럽구나..이제 세상 사람들을 어찌 대한단 말인가...라고 말하며 각기 스스로의 목을 칼로 찔러 자결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모습에 고야자는 그만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내가 무슨짖을 한 것이란 말인가...자신이 그들을 부끄럽게하여 죽음에 이르르게 했다는 자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고야자 역시 그 자리에서 자결을 하며 말한다...아아, 부끄럽고 또 부끄럽도다...남을 부끄럽게하여 나의 이름을 드높이려 했던 것도 불의일진대, 두 용사마저 죽게했으니 나  혼자 살아가는 것은 또한 불의이노라...


바로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양보'인 것이다. 공명이 살던 당시에는 양보라고 불렸지만 제나라 당시에는 탕음이라고 부르는 작은 마을 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본문에서는 탕음마을 이라고 되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설을 가진 노래가 양보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공명이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면 세 용사가 의가 무엇인지 깨닫게하는 고결한 죽음을 찬미했다기 보다는 안자라는 인물의 지모를 흠모했던 것 같다.


시대는 춘추전국시대로 춘추 5패가 각기 패업을 이루려던 시기였고 전국시대의 상황에 제갈량이 앞으로 나서게 될 촉한은 유교의 이념이 지배적인 시대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충효와 인의가 핵심이었던 때이다. 양보음은 세 용사가 보여준 仁과 義의 아름다운 죽음에 詩의 주제를 두었을 것이지만(이는 반대로 안자의 잔머리를 의식하고자 하는 뜻도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제갈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듯하다. 제갈량이 촉한의 사실상의 권력을 모두 장악한 상태에서 행한 정치의 양상은 유교적 개념의 仁과 禮를 행함과 동시에 엄격한 상벌기준을 가진 兵家의 정치를 수용한 혼합형 정치시스템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제갈량은 세 장수의 고결함보다는 이 셋을 지혜로 자결하게 만든 晏子에 그 초점을 두었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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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스트셀러는 그만한 가치를 가진 책이라는데 이론을 달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배울 점이 있으며 인생을 살아가는지 중요한 지침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여 늘 베스트셀러는 주목을 받을 수 밖에 없고 또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지향하는 가치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베스트셀러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표면적인 그 이상의 무엇을 나타내는 지표와도 같은 것이다. 바로 우리 사회를 비추는 자화상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만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늘 있기 마련이니까...


우연한 기회에 ‘과학자처럼 사고하기’라는 책을 읽게되었다. 그동안 일반적으로 생각해오던 과학이라는 용어에 함축된 의미를 실제로는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만든 책이다. 흔히 과학적 사고를 우리들의 실생활과는 거리가 먼, 과학자들만이 사고하고 고뇌하는 그런 부류의 것으로 취급해왔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과학자처럼 사고하기라는 책을 읽으며 이러한 개인적인 편견을 떨 쳐낼 수가 있었다.


우리들은 첨단과학에 바탕을 둔 기계문명과 늘 접하며 살아가고 있다. 다수의 사람들이 첨단 기계문명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 기계적 매커니즘의 작동원리를 잘 아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것이 바로 과학과 사용자들 간의 괴리감을 형성해온 인자이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이 주는 메인아이디어는 대중들에게 과학적 소양의 필요성을 자각토록 권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생물과 무생물간의 유기적 관계를 인정하고 인간의 본질을 위한 과학에로의 방향성을 제시하는데 있다. 다수의 과학적 소양은 과학의 올바른 지향점을 일궈내는 밑거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 서구의 과학적 사상이 과거 철저한 이성주의적 서양철학이라는 바탕위에 이루어진 결과물들 임을 부인 할 수는 없다고 볼 때, ‘과학자처럼 사고하기’는 서구인들의 입장에서 새로운 사고의 가능성, 즉 유기론적, 통합적 사고의 지향점을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되어 주리라 생각한다. 늘 그래왔듯이 미래의 과학적 방향은 현대인들의 사고에 달려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서구의 최 첨단에 서있는 사람들이 피력하고 있는 유기론적 사유는 타자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는 과거의 서구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사유의 방식이다. 물론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했더라도 지극히 국부적이었으며 이처럼 한 분야의 리더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친 적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그것도 상대방이 있으므로 나의 존재가 가능하다는 상호 유기론적 사유의 방식 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깊은 관련성을 가진 존재들이므로 그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한다면 그 결과는 고스란히 스스로에게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내 것을 내 놓아야 하는 순간들에 직면한다. 서구인들의 이러한 사유의 변화는 그동안의 서구를 바라보던 시선을 조금은 다르게 만든다.

  

 

 

최근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인가’라는 책이 연일 베스트셀러의 상위항목에 랭크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타자로부터 내가 얻어내고 싶은 그 무엇을 어떻게하면 잘 얻어낼 수 있는가가 핵심인 듯 하다. 책의 소개에서는 기존의 방법과는 차원이 다른 강의 내용이라고 한다. 다이아몬드 교수가 말한 인용문은 매우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협상이란 ‘상대의 감정이 어떤지 헤아리고 기분을 맞춰가면서 호의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뒤 점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바를 얻어내기 위해서 상대방의 감정과 기분을 헤아리는 방법을 잘 소개하고 있을 것이다. 점진적인 접근법은 상대방에게 방어기제를 작동시킬 기회를 빼앗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에게 그가 원하는 바를 내어주게 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윈윈이라는 기본적 이념이 깔려있을 것이다. 상대방에게도 그에 해당하는 것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겠다. 이는 표면적으로 매우 유익해 보이는 방법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중국의 제나라 재상이었던 '관중'도 얻으려면 먼저 주라고 말 하기는 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잠시 깜박하고 있는 것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누구를 위해서인가’ 라는 문제이다. 그 무엇을 원하되 과연 그것을 누구를 위해 원하는 가이다. 자신이 원하는 그 목적이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타자도 그 범주에 포함되어 있는가라는 전제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이유이다. 수많은 자기 개발서들이 가지는 전제는 자기 스스로를 목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흔히 자기개발서들의 특징이랄 수 있다. 대한민국 서점가의 베스트셀러는 대부분 그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데, 오로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자기 개발서들이다. 그 궁극적인 목적에 타자는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자기 개발의 중요성을 깍아내리는데 이 글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개발의 중요성을 그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자기 개발서라는 이름으로 베스트셀러로 팔리고 읽히는 책들은 그 중심에 오직 자신 밖에는 없다. 이러한 현상이 최근 들어 더욱 정도가 심화되고 있음을 부인할 독자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부동산 투자법, 주식 투자법, 그리고 경매투자법 등이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말이 좋아 투자이지 이는 사실상 법적 한계를 넘어서지는 않지만, 법이 허용한 도박이나 다름이 없는 행위이다. 누군가가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하여 막대한 이익을 남겨 행복을 추구한다면 그 반대 급부의 누군가는 아파트 맨 꼭대기 층의 옥상으로 올라가는 이도 분명 발생하는 것이 이치이다. 이러한 슬픈 현실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요즘 뉴스거리도 아닌 그런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렇게 말한다면 주식의 기본 개념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발언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주식이 가지는 긍정적 효과를 무시해도 유분수라고 말이다. 그러나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서 위험성이 뒤따르는 새로운 투자를 삼가하고 인력을 줄여 그 차익을 주주들에게 나누어주는 현실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인력이 필요하면 계약직 근로자를 쓰면 되는 세상이라는 것도 망각해서는 안된다. 주식의 긍정정 효과를 기대하는 시대는 이미 물건너 간 세상이다. 오직 합법적 투기의 대상일 뿐이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자기 개발은 목표하는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대부분 상대방의 마음을 얻어내고 투자의 호기를 이용하여 금전적인 이익을 취하는데 지향점을 가진 서적들이 자기 개발이라는 포장을 하고 세상에 나온다. 이익의 추구를 외면하자는 말은 결코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력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경제력은 생활의 필수불가결한 수단이 되고, 경제력의 바탕이 되지 않는 행복도 상상할 수 없는 일임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과학자처럼 사고하기라는 책에서 배운 좋은 교훈은 인간은 환경이라는 유기적 공생관계를 떠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분명한 인식은 사고의 방향을 설정해주는 북극성의 역할을 한다. 북극성은 길을 잃은 항해사들이 의지하던 빛나는 별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 만을 모두가 지향할 때 모두는 방향성을 잃을 위험에 빠지게 된다. 때로는 손해를 보는 일도 알면서 행해야 할 때가 있게 마련이다. 왜냐면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그 어떤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누어 줄 수 있는 문화도 그만큼 필요한 세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없다. 그러나 특히 부의 균형이 무너져가고 있는 시대적 현상을 외면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사회가 빈곤하다거나 부유하다면 큰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는 일은 없다. 2500년 전에 이미 공자는 대동사회를 역설하면서 부의 분배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물론 이는 공자의 대동사회를 조금 더 살펴보면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발상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미 아주 오래 전에 사회가 가지는 문제점을 공자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하겠다. 오죽했으면 제러미 벤담의 적통이랄 수 있는 ‘존 스튜어트 밀’도 2500년 전 소국과민을 주장했던 노자와 같은 주장을 끝까지 고집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짐을 택했을까...그가 결코 바보라서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다. 그는 지극히 순수했으며 인류를 향해 우환의식을 가지고 모두를 위한 자신의 생각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했던 훌륭한 사람이었다.


과학의 첨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오로지 이성만으로 연구에 몰입 할 것 같은 현대의 과학자들조차도 통섭과 유기적 사고를 바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기존의 과학적 사고로는 함께 어우러져 살기가 어렵다는 전언이 아니던가...그러한 시점에서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기술과 방법이 제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미래를 위해 지향해야 할 가치관으로 자리 잡는다면 자녀들의 미래는 더욱 어둡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얻기만 바라는 세계에 살고 있을 테니 말이다. 장 지글러의 저서인 빼앗긴 대지의 꿈은 얻기만을 바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임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한 권의 책 이라 하겠다. 이 책을 읽어보신 분들은 얻기만을 바라는 것이 그 어떤 참혹함을 연출해 내는지 잘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런 점에서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은 뜻하는 바가 크다 할 수 있겠다. 자신의 것을 내 놓음으로서 사회는 더욱 어울려 살 수 있는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 하여 간혹 기부문화의 정착을 호소하는 분들이 계시다. 안타까운 이웃을 어떻게 보살피는지...학비가 모자라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학생들의 처지를 보살피는 것을 중시하는 사회 이런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법정 스님께서 무소유를 주장하셨다고 해서 소유를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법정스님은 스님이셨기에 사실상 사유재산이 필요치 않은 분이셨다. 다만 오직 얻으려만 하는 사회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를 요구하는 시대정신을 말하려는 것이고, 법정스님의 높은 정신을 우리 사회가 좀더 가질 필요가 있다고 느낄 뿐이다. 우리는 나만'이 아니라 '서로'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타자가 원하는 것을 내놓는데 인색하지 않은 사회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적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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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2-03-22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의 글에서 참 다양한 책을 소개하시네요. ^^
장 지글러의 <빼앗긴 대지의 꿈>은 벌써부터 읽어야겠다 맘만 먹고 계속 잊고 있었는데,
이 글에서 만나니 뜨끔하군요!

저는 베스트셀러 집계 같은거 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서점에 나가보면 참 책이 많은데,
어떤 책은 수백권씩 쌓아놓고 팔고 있고,
어떤 책은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검색해보면 아예 재고가 없다고 나옵니다.
저마다 나름의 가치를 담고 있을 책이
출간되자마자 판매순위라는 잣대에 따라 운명이 완전히 엇갈리게 되지요.
베스트에 한번도 올라본 적이 없지만 가치있는 책들이 많겠지요.
그런 책을 찾아서 소개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차트랑 2012-03-22 15:13   좋아요 0 | URL
어구, 감은빛님께서 와주셨군요

책에도 사주가 있는 것인지 원..^^
베스트는 베스트인데 진짜 베스트가 아닌 책들이 베스트 노릇을
하고 있을 때 그게 좀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장지글러의 저서들은 읽어도 좋은 책들이라 생각합니다.
감은빛님께서 좋은 책을 소개해주시면
독자들께 많은 도움이 되어주리라 믿습니다.

저의 서재를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낭만인생 2012-03-24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답게 베스트셀러에서 생존의 문제까지 논리적으로 잘 끌고 오셨네요. 글을 읽으면서 저도 주변 사람들을 생각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년부터 두 아들의 이름으로 해외 고아들을 지원하는 캠페인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무소유는 곧 모두가 소요하는 공유가 될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나의 소유권을 내려놓고 타인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는 것 말입니다. 몇해 전에 읽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이 떠오르네요. 상생의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꿈꾸어 봅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2012-03-24 1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03-25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 엉뚱한 댓글을 달게 될거 같습니다...
최근 나온 책 중에 중국이 세계를 지배해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한 책이 있더군요...
그런데, 중국은 그렇게 유기론적이고 세계를 전체로 바라보는 좋은 이념을 발전시켰는데
현재 세계에서 하는 행동을 본다면 어이없기 그지 없습니다. 사실 과거에도 그랬죠....

저는 사실, 지배를 받아야한다면 중국보다는 미국이 낫다고 아주
현실적이고도고 공격받을만한 결론을 내리는 중이랍니다... 엉뚱한 댓글 죄송합니다.
요즘 뉴스를 볼 때마다 제 머리에서 헤매는 생각이거든요... 이긍.

차트랑 2012-03-25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뚱한 말씀이라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말과 행동이 다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요

지적해주신 중국도 그러하고
일본의 경우도 남에게 절대로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각 가정에서나 사회적으로 가르친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게 어디 앞 뒤가 맞는 말이던가요..
과거 우리나라에는 물론 동아시아에 그 얼마나
많은 폐를 끼쳤고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요 ㅠ.ㅠ

제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한들
행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도루묵입지요.

마녀 고양이님께서 중국에 대해 지적해주신 바
틀린 것 하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책이 어떤 책인지
좀 알려주시면 안될까요?
저도 읽어보고 싶어서요^^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
 
과학자처럼 사고하기 - 우리 시대의 위대한 과학자 37인이 생각하는 마음, 생명 그리고 우주
에두아르도 푼셋 & 린 마굴리스 엮음, 김선희 옮김, 최재천 감수 / 이루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과학의 지향점은 어느 곳인가?

        -독자들에게 과학적 소양을 기대하고 있는 과학자들-


우리는 과학자들을 일반적인 생활과 거리감이 있는 존재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과학은 과학자들이나 하는 것 혹은 우리는 과학을 잘 알지 못한다고 여기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과학’이라는 용어는 기술적 접근을 바탕으로 한 배타적 본질을 다루는 성질의 괴리감을 가진 용어이다.


그러나 이 책이 피력하고자하는 것은 과학 그 자체가 아니다. 이 곳에 등장하는 모든 과학자들은 각 분야에서 최고의 성과를 내놓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자신들의 과학적 성과를 알리고 싶어서 인터뷰에 응한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이들을 과학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싶어서이다. 과학과 생활 영역이라는 장벽을 허물어버리고 독자들에게 과학적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과학적 소양'을 기대하는 그들의 진실된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결코 과학적 지식을 전달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싶다.


과학자들이 소망하는 바는 사유의 과학이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의 우리는 과학을, 과학의 사유를 오로지 과학자들에게만 맡겨왔던것 같다. 과학이 전문가들의 과학적 기술만을 필요로 하는 배타적인 성향을 가진 분야였기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배타성을 지닌 과학적 기술이 아니라 과학적 사유이다. 사회가 올바른 과학적 소양을 지니지 못할 때 발생할 수 있는 결과물이 가지는 진실들을 우리는 현대에 목도하고 있질 않은가...


 과학자처럼 사고하기’는 현대의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타자와의 유기적 관계를 강조하는 연구결과들을 쏟아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과학자 당사자들이 과학적인 사고라는 매체를 통하여 인류를 위해 과학적인 소양이 무엇인가를 또한 보여주려 한다. 비록 과학이라는 분야에서 출발하고는 있지만 이는 정치, 경제, 교육, 윤리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를 움직여가는 모든 것들의 작동원리와 부합하게 마련이다. 왜냐면 진리는 어느 한 분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영역을 불문하고 통섭의 기능을 하는 핵심의 한 축이 과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과학자는 아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다수가 과학적 인식과 소양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의 가치평가는 과학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소양을 갖춘 대중들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우리는 달걀을 낳을 수는 없지만 그 달걀이 상했는지는 판단 할 수 있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르는 이유이다.



과학의 눈부신 편리함에 인류가 도취되다-과거 과학의 목적


과거 과학의 지향점이 어느 곳을 향하고 있었는지는 현대의 과학적 진실들을 돌아본다면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과학이 그동안 수많은 문제점들을 일으키게된 배경에는 서구의 기계론적 자연관이라는 철학적 사고가 자리하고 있다. 즉, 과학이 자라온 환경의 영향을 벗어 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과거 과학이 자라온 환경은 인류에게 큰 기여를 한 바 없는 것은 아니나 그 못지않게 큰 허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허점들은 인류에게, 지구에 부정적 영형력을 행사해왔던 것이다.


 그동안 서구의 기계론적 자연관은 실용적 기술로 전이되었고, 인류의 역사, 사회, 경제 및 교육등 모든 분야의 작동원리가 되어왔다. 우리는 이것을 ‘발전’이라 명명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 발전이 거듭될수록 ‘인간다움이 무엇인가?’라는 의문과 인간의 정체성에 위협을 가져오면서 과학적 소양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된다. 어쩌면 인류는 과학이 끈임 없이 제공해온 그 눈부신 ‘편리함’에 취해왔던 것은 아닌가... 인간은 어쩌면 정치력, 권력, 경제력, 곧 타자들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데 그 가치를 부여했고 과학 기술은 그들의 시종노릇을 해왔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바탕으로 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 바로 이 책이랄 수 있다.



과학적 사유의 중요성

 

모든 것의 판단에 앞서 가치 평가의 기준은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과학과 그 기술에 대한 평가 역시 예외가 되어서는 안된다. 지난 200 여 년 간의 과학기술이 걸어온 발자취가 이를 반증하고 있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그 당위성과 조건을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과학적 소양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어떻게’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과학적 사유의 방식이 중요하다 하겠다. 성과물이 지향하는 방향은 사유의 방향과 일치하게 마련이다. 인문학적 소양과 더불어 과학적 소양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있는 것이다.


과거, 과학은 지식의 결정체라고 생각해왔다. 인류를 위해 헤아릴 수 없는 이익을 가져다 주리라고 믿어왔지만 그 믿음은 현재 옳았는가? 지구의 한편에서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수없이 많은 인간의 생명들 병들거나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과학이 인류를 위해 공헌한 것은 무엇인가. 첨단 무기인가, 첨단 기술인가. 철저한 빈부의 격차인가.

 이 뿐이 아니다. 앞으로 기대되는 과학의 성과물들이 인류의 미래와 어떤 관계를 맺어갈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이다. 자연을 단순히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사유의 방향성은 이제 유기적인 자연관으로 선회해야 할 것이다.


노화의 연구에 일생을 바치고 있는 커크우드는 ‘인간의 삶에 생물학적 한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간의 수명에 앞으로 비약적으로 늘어갈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말이라 하겠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다. 또한 ‘이기적 유전자, 만들어진 신, 눈먼 시계공’을 저술하여 우리들에게 익히 잘 알려진 도킨스와의 인터뷰를 만나면 과학적 사유의 중요성이 좀 더 분명해진다. 그에 따르면 아주 빠른 속도로 진화하는 소수의 생명체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생명체들이 인류 발생 이전의 세계에 살기위해 적응해왔다.


 그러나 인간의 출현과 그 테크놀로지는 세계의 생명체계를 급격하고 변화시키고 있다. 이 급격한 변화는 늘 모든 생명에 위협이 되어왔다. 인간은 자연적인 급변못지 않은 변화를 지구에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구에에로는 우리의 조상이 박테리아였다고 단언한다. 과연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해본적이 있던가...우리들에게 과학적 사유가 정말 중요한 이유들이다.


 

과학자처럼 사고하기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의 생각


매우 인상적인 등장 인물 중 하나이며 흔히 인류학자라고 명명하는 로버트 새폴스키는 신경학, 신경과학, 생물과학등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과학자이다. 푼셋의 새폴스키와의 인터뷰는 강렬하게 다가온다. 지극히 과학적인 사고를 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지만 그는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과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이해하는 통로’라는 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


 이는 ‘인권과 물권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구달의 생각과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달은 일생에 걸쳐 침팬지를 연구한 인물로 국내의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과학자이다. 이들은 서로 전혀 다른 분야의 과학적 사유를 하고 있지만 인류를 위한 공통된 견해 피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새폴스키는 ‘톡소플라즈마’가 쥐에게 작동시키는 원리를 인간은 아직 이해하고 있지 못한다고 한다. 인간이 왜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구달은 ‘ 연구하고 그 해결책을 찾는 것은 비로 인간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물권과 인권의 동시에 인정하는 구달은 인간을 동물계에서 분리할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동물은 우리의 일부로 여길 때 인간의 과학적 사유는 기존의 그것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새폴스키와 구달이 설명하는 도구는 비록 서로 다르지만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에 못지 않게 동물행동학과 영장류동물학을 연구 해온 조르디 사바테르 파이는 연구를 통해 동물들이 자의식과 문화를 가진 존재임을 증명했다. 그는 일차적으로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지금까지의 것과는 달라져야 함을, 자연주의자로서 인간의 모습을 투영시키고 있음을 설파하고 있다.



그토록 깊은 과학적 연구를 해온 세계적인 명사들이 자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서는 것일까?

일일이 다 거론할 수 없는 목차에 수록된 과학자들의 견해는 매우 고무적이다 못해 서양사상의 새로운 흐름을 감지하기에 충분한 근거자료가 된다. 비교동물학자 윌슨에 따르면 자연계의 모든 생명체들은 진화하는 과정에서 환경에만 적응해 온 것이 아니라 공생을 통해 서로에게 적응하여 진화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서구의 사상적 흐름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기존의 인간의 부정적인 활동은 그들이 적응해온 자연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새로운 종의 멸종에 일조하는 방식의 인간적 행위에 대한 타당성을 고찰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코자 하는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과학의 미래 뿐만 아니라 인류의 미래에 큰 의미를 부여할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겠다. 어느 종의 멸종은 어쩌면 인류의 멸종과 무관하다고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과학자들의 연구를 토대로 형성해온 서구 사상은 종래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띄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관의 변화라고도 볼 수 있다. 자연의 모든 존재는 생존하기 위해서 상호 에너지의 흐름을 요구한다. 이러한 사고는 매우 중요한 인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서구의 과학계에서 불어오는 철학적 흐름의 변화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이다.


 인터뷰에 등장하는 철학교수 대니얼 데넷이 지적한대로 인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존재를 알아보는 존재인데, 이는 인간이 자의식을 가진 존재임을 뜻한다고 한다. 과거 과학에 대한 올바른 인식 혹은 소양을 가지지 못한 댓가를 우리는 충분히 목도해왔다. 이제 진정한 자의식이 무엇인지를 되짚어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미래를 위한 우리의 설계


과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전정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고 설계할 필요가 있다. 신경학자 이나스가 말한 대로 이를 위해 과거 인간은 두뇌를 필요로 했다. 하여 인간은 올바른 미래의 예측과 설계를 위해 뇌를 지속적으로 진화시켜왔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를 바르게 설계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마인드를 가진 두뇌에 의존해야 하는가.


과거 동양은 물론 서양에서도 과학, 수학, 예술, 철학이라는 분야가 따로이 정립된 경계를 가지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다. 혹자는 이를 미개한 형태의 학문 간주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거 서양에서는, 수학자가 곧 음악가요, 건축가가 곧 예술가였다. 동양의 고전에서도 수학 및 천문학이 등장한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가. 미개한 형태로서의 학문이 아니라 오히려 최근 강조하고 있는 통섭의 학문적 소양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브레너는 이러한 현상을 명료하게 지적해주고 있다. 그는 물리학자들의 문제는 화학을 대부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학문을 다양한 분야로 쪼개어 나누어 공부하고 연구하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분야 이외의 것에는 무지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지극한 전문성을 띄고 있으므로 그 효율성에서는 불필요한 에너지의 낭비를 예방하는 듯 보인다. 즉, 집중력을 향상 시킨 연구 방법이라 하겠다. 그러나 문제는 상대 영역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소통의 부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소통의 부재는 원활인 흐름을 막아 혈관을 결국 파열시켜 그 기능을 마비시키는 의학적 이치와 다를 바가 없다는 문제점을 브레너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폐단을 가진 것이 현대의 학문이다. 같은 아파트에서 살아가면서도 바로 옆 라인에 사는 사람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학문의 형태라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형태의 학문이 가져오는 역기능은 좁게는 그 사회, 나아가서는 모든 인류 공동체에 의학적 마비상태를 일으키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할 수가 있다. 소통의 부재가 불러오는 폐단이다. 인문학적 소양과 과학적 소양을 다르게 분류하는 것도 이제는 조심성있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철학적 사고가 과학과 예술의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듯이 인문학적 과학적 소양이 미래에 끼칠 영향력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에 등장하는 다수의 과학자들이 사실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주연은 이 책을 읽고 있는 바로 우리 독자들이다. 우리들에게 과학자들은 인류 미래를 위해 지구와 더불어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면 우리야말로 지구를 살아가는 주인공이자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은 아마도 지금까지 와의 사고에서 한 발 앞으로 더 나아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유기론적 자연관이 가져올 우리의 미래를 예측하고 설계하는 일은 바로 독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에서 나올 것임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분자 생물학을 정립한 브레너의 말을 인용하며 끝을 맺고자 한다. ‘생명이 가지는 무생명과의 유기적 상관관계를 무시하지 말라.’  브레너는 과학에서 비롯한 절대적 진리를 이제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과학적 사유를 재장전 할 때이다. 우리는 더 이상 지구를 망쳐서는 안된다. 무생물과 생물의 진화체계는 서로 교합한다. 지구는 생명체가 존재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우리는 그런 이곳을 파괴할 것인가? 우리의 원천을 파괴할 것인가” 라는 닐슨의 강도 높은 일갈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게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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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3-19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이라면 경끼부터 하고 보는 분야라...ㅠ

차트랑 2012-03-19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은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ㅠ.ㅠ

마녀고양이 2012-03-2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기론적 자연관이라는 말씀에 절대 공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단편으로 보고 있고, 현대 사회로 나아갈수록 점점 파편화되고 있기에 그것을 제대로 통합하는 자가 미래를 예측하고 잘 살아가는 사람일거라고 생각이 드네요. 하기사 워낙 깊게 들어가니, 전문성과 다른 분야의 화합이 그리 쉽지는 않을거 같아요.

봄인데, 너무 춥네요. 좀 있다 나가야하는데, 오늘은 두껍게 입어야지 싶습니다. ^^

차트랑 2012-03-20 17:37   좋아요 0 | URL
"통합하는 자가 미래를..."
이 말씀 상당히 공명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전문성 = 밥그릇 이라는 공식이 성립되고
그러므로 서로 이전투구인지라 수월하지 않아보입니다.
그러니 전문성이 배타적일 수 밖에 없지요.

이기론적 자연관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가 될 듯도 싶구요 ㅠ.ㅠ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