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음악과 대중가요는 각각 그 나름의 장르로 분류되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대중음악과 고전음악을 바라보는 시선은 두 장르를 거의 넘나들기 어려운 처지로 만들고 말았다. 때로 고전음악에 심취한 애호가들은 대중음악을 경시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고전음악에 대한 일종의 우월의식반영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거 세종문화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대중가수와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여준 세종문화 회관의 관계자가 힘을 겨루던 모습은 이를 반증하는 분명한 예라 하겠다. 마치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 혹은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하는 대중가수는 그렇지 못한 대중가수들과의 차별 의식 혹은 우월의식을 가질 수 있는 의식이 깔려있는 것도 무관한 일은 아니다. 또 그 자체를 자신의 자존심과 연결지으려는 심리를 잘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고점음악과 대중음악의 경계를 짖는 또 다른 측면은 고전음악가들의 태도이다. 그들 역시 대중음악을 경시하는 분위기속에서 성장해왔고 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때로 고전음악가와 대중가수의 협연에 감동하는 경우를 흔히 목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협연을 꺼려하는 고전음악가가 훨씬 압도적임도 사실이다. 이것이 한국 음악의 분위기인 것이다. 연주가는 연주가대로, 대중들은 대중대로 두 장르의 간극을 서로 멀어지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의 영상물은 매우 철학적인 장면들을 연출하고 있다. 회전목마는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고, 바다 속의 썰물안에서 태어나는 장면과 인어가 바다위 잠든 장면은 생명의 탄생을 상징한다. 벌거벗은 어린아이는 바다로를 향해 달려가며 손짖한다. 마치 연어가 회귀하는 모습과 유비가 통하는 상징성을 부여한 장면이라 하겠다.
이젠 시간을 거꾸로 돌린다. 아이들은 그동안 걸어온 길을 거꾸로 돌아간다. 교각 아래의 처자는 멀어지지만 트럭은 반대로 달려간다. 과거로 회귀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과정에서 회전목마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향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는 방향으로 설정했다는 점이 유일하게 아쉬움을 주는 장면이다. 탄생과 과거로의 회귀는 단순한 보수적 태도를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태고의 순수함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제작자의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감독의 의도와 노랫말의 동질성 그리고 삶을 투영하는 노랫말과 영상의 이질감은 서로 상충하며 갈등하는 대목이 특이하다. 그러나 이러한 양면성의 충돌은 결코 낮선 모습이 아니다. 우리 인생의 바로 그러한 모습이다. 대단히 흥미로우면서도 의도는 파격적이지만 신선하다. 그런 연유로 매우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성을 지닌 노래와 철학적 사고의 만남이라니...정말 멋지지 아니한가...
위의 노래는 패닉의 노래이다. 사실 패닉이 이 노래를 부른지는 10여년도 훨씬 넘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나는 패닉을 알지 못했다. 대중음악에 민감하지 않은 탓이다. 물론 여전히 대중음악에 민감한 편은 아니다. 이 노래를 최근 가수 박정현이 새로운 버전으로 모 프로그램에서 부른 적이 있어 관심있게 들었다. 새로 편곡한 버전이라는 것을 알게되었고 패닉이 원곡을 부른 사람들이라는 것도 이 때 알게된 것이다.
박정현의 이 노래를 듣고 참 곡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노래도 아주 잘 불러주었다. 하여 서로 비교해보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 영상물과 함께 패닉이 부르는 그 원곡을 찾아냈다. 위의 영상물이 바로 원곡자들의 노래이다.
원곡과 편곡버전 모두 대단히 멋진 음악이다. 원곡의 산뜻함은 청자에게 정갈하고도 음악의 투명성을 보여주는 듯 하다. 마치 깊은 바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처럼 맑은 그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흑백의 영상물인지라... 여하튼 이 가수들 참 멋진데...라고 생각했다.
박정현 선수가 뮬란의 주제곡 중 하나를 부를 때 부터 알아본 분들이 계실 것이다. 박정현은 흑속의 진주와도 같은 가수이다. 노래를 부르는 솜씨로 본다면 최고의 사랑을 받아도 되었건만...과거 박정현 선수는 그 실력에 걸맞는 영광을 채 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자신의 진가를 잘 어필한 가수 중 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프로그램 출연 후 바로 광고도 따내던 걸...
대중음악의 폐쇠성과 그 권태로움
대중음악과 고전음악의 극명한 차이점은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중가수의 의식, 혹은 대중과 고전음악가의 편견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사항들은 사실상 표면적인 이유들에 불과하다. 이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단 하나, 버전의 다양성이 있다. 즉 단조로운 버전의 특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대중 음악의 특성이 그것이다.
대중음악은 작곡가가 있고 이를 노래로 부르는 가수가 있다. 그리하여 특정 곡을 한 사람 만이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 리메이크 버전으로 다른 가수가 부르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의 비율은 지극히 미미하며 일반적인 현상은 절대로 아니다. 이러한 대중음악계의 특성은 대중음악을 지극히 폐쇠적인 장르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대중음악이 폐쇠적이라니...이건 말도 안된다 싶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폐쇠성이라는 말은 버전의 다양화를 구현할 수 없는 대중음악의 한계성을 지적하는 용어이다.
오직 한 사람의 가수만이 특정 곡을 부를수 있다는 점은 이를 부르는 가수의 색깔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이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폐쇠성이 주는 치명적인 약점을 또한 동시에 지닐 수 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그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익숙함에서 오는 지루함, 바로 그것이다. 익숙함, 혹은 친숙함이라는 말은 때로는 친교를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때로는 권태로움이라는 양면성의 성질을 가진 말이기도 하다. 어떤 이가 달에 지구의 우주선이 착륙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한탄하며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이제 달을 쳐다보며 상상하던 달 나라의 토끼와 절구방아의 전설은 사라지고 말겠구나...' 익숙함의 반복은 상대방으로하여금 때로 무관심, 나아가 권태로움을 유발할 수 있는 조건이 되어주기도 한다.
어느 한곡이 히트를 친다. 거리를 지나다보면 똑같은 노래를 수없이 들 을 수 있다. TV 방송마다 같은 곡 투성이이다. 많지도 않은 TV의 채널은 돌리는 곳 마다 같은 노래를 들려 준다. 라디오의 채널들은 그 곡을 집중 조명한다. 이러한 일이 몇 달간 벌어지는 것이 대중음악의 현실이다. 그러니 아니 권태로움을 느끼랴....하여 청자는 딴 곡으로 갈아타게 된다. 또 다른 신선한 곡이 사회를 강타하게되면 바로 매체는 미련없이 갈아 탄다. 대중들도 역시 미련없이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다. 이 것이 대중음악의 치명적 약점이랄 수 있다. 아마도 곡에 대한 저작권 때문은 아닌지... 뭐 그런 생각을 해봤다.
물론 세월이 수십년 흘러도 '명곡'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는 곡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좋은 곡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잊혀지고 그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아쉬움이 더 크다는 것이다. 위의 '내 낡은 서랍속의 바다'는 두 버전의 노래이고 분명히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고전음악, 그 버전의 다양성과 매력
대중음악의 폐쇠성과는 달리 같은 곡에 대한 버전은 무려 100개 이상 되는 곡이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베토벤의 곡들이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그 다양한 버전이 100개를 훨씬 넘어선다. 연주가로서 입문하여 명성을 얻는 가장 기초적 과정이 베토벤 교향곡의 사이클링이다. 그 사이클링 없이 세계적인 지휘자라는 명함을 기대 할 수 없다. 또한 애호가들은 그 각각의 버전을 구매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이는 고전음악의 가지는 특징이다. 애호가들은 엄청난 중복 투자를 마다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왜 그들은 경제적 비효율성의 극치를 달리는 중복투자를 하고 있는 것일까...다름 아닌 다양성 때문이다. 각각의 연주자마다 그 특징이 다르고 그 차별화된 연주는 감상의 또 다른 맛을 준다. 이것이 애호가들이 중복투자를 하는 유일한 이유이다. 심지어 교향곡을 피아노 버전으로 편곡하여 연주하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던가...
이러한 고전음악의 다양성은 어느 한 개인에게는 일생을 함께하는 음악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 연주의 수명에는 끝이 없다. 오직 애호가만이 늙어갈 뿐이다.
아래의 두 영상물은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이다. 지휘자도 연주자도 노래하는 사람도 다르다. 같은 지휘자가 같은 곡을 두 번 연주해도 두번 다 같지 않다. 다가오는 감동은 서로 다르며 감상의 포인트도 서로 달라진다. 물론 호불호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 그 나름의 특징을 가진 연주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것이 다양성의 확보이다. 생물의 다양성 만큼이나 음악의 다양성도 중요한 것이라 하겠다.
애호가들이 지루해하지 않으며 권태로움을 느끼지 않고 평생 한 곡을 또 듣고 들을 수 있는 이유는 비로 다양성에 있는 것이다. 그럴리가 없다며 내게는 영원한 명반이 있다며 큰소리를 칠 수있는 애호가가 있다면 스스로 자문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비교 감상할 수 있는 기타의 음반들이 없다면 과연 명반이 존재할 수 있을까..라고...가사가 있는 대중음악이 주는 감동과 가사가 없는 고전음악이 주는 감동은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생명력을 가지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다.
대중음악과 고전음악은 음악이라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서로 다른 특징이 같은 음악이면서도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도록 한다. 대중음악에도 이러한 다양성의 시대가 올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은 대중음악의 이권을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시대는 변하여 요즘은 음반의 시대라기보다는 음악 파일의 시대이다. 좋아하는 곡을 하나 씩 다운로드하여 플레이어로 듣는 시대인 것이다. 다양한 대중 음악의 버전들은 원곡이 같지만 또다시 다운로드하는 중복성을 띌 수 있지 않을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소스는 비록 같지만 다른 버전을 서로 비교감상할 수 있는 대중음악의 시대가 올 수는 없는 것인가... 여하튼 대중음악의 다양한 버전에 대한 아쉬움에 쓸데없는 소리 한 것 같다 ㅠ.ㅠ
카랴얀은 히틀러 못지 않은 지휘자이다. 토스카니니가 그러했던 것 처럼 독선 그 자체였다. 오죽했으면 베토벤 9번을 영상물로 제작한 디비디 중 하나는 연주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카라얀만 비추고 있을까....카라얀에게 연주는 오직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일 뿐이다. 베토벤을 드러내려 했던 토스카니니와의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주는 치열하고 뜨거우며 차갑다. 이러한 모순은 연주를 더욱 화려하게 빛낸다. 조화란 애초에 갈등이라는 배우자를 전제로 하는 것인가...콤팩트 디스트의 크기를 결정할 정도로 카리스마가 넘쳤던 카라얀, 그를 최고의 지휘자 중 한사람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자신의 독선을 유려하고 빛나는 음악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연주는 아마도 영원할 것이다.
카라얀과는 반대로 마주어선생님은 독선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흑인 가수에게도 거리낌없이 연주를 초빙하는 자휘자이다. 아마도 가장 많은 유색인종과의 협연을 이끌어낸 분이 마주어 일 것이다. 정열은 카라얀에 뒤질 분이 아니다. 다만 연주는 대중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을 자신의 지휘로 드러낼 뿐이다. 카라얀이 아니라 마주어선생님을 존경하는 이유일 것이다. 흑인 연주자 제시 노먼은 마주어의 단골 초빙 손님이다. 흑인 연주자 제임스 바그너와의 협연은 가장 감동적인 베토벤 9번의 연주였다. 그토록 노래를 잘 부르는 제임스 바그너를 다른 그 어떤 영상물에서도 다시는 만나본 적이 없다. 지휘자들은 제임스 바그너가 흑인 연주자라서 초청을 하지 않는 것인가...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마주어가 초청하여 연주한 제임스 바그너의 영상을 찾을 수 없는 것이 그저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