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에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언급되어, 전부터 생각했던 것을 적어 놓는다. 왜 <코스모스>는 좀 더 널리 읽히지 못하는가. 왜 그렇게 많이 언급되면서도, 아직도 못 읽은 사람이 많은가. 난 여기에 번역도 한 몫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우리말로 두 번 번역되었다. 첫 번째는 한국일보 기자이자 작가였던 서광운이 번역하고 경희대 교수였던 조경철이 감수했으며, 두 번째는 서울대 교수였던 홍승수가 번역했다. 난 서광운 역의 <코스모스>를 읽었다. 이후, 서광운 역의 <코스모스>는 절판되고 홍승수 역의 <코스모스>가 나왔는데, 난 단연코 서광운 역 <코스모스>가 낫다고 생각한다. 뒤에 나왔다고 더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히 안되며, 그 좋은 예가 <코스모스>의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헌사를 보자. 세이건이 그의 영혼의 반려자 Ann Druyan에게 바치는 글이다.


For Ann Druyan

In the vastness of space and the immensity of time,

it is my joy to share a planet and an epoch with Annie.


서광운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앤 드루언에게


광대한 우주, 그리고 무한한 시간.

이 속에서 같은 행성, 같은 시대를

앤과 함께 살아 가는 것을 기뻐하면서.


다음은 홍승수 역이다.


앤 드루얀에게 바친다


광막한 공간과 영겁의 시간 속에서

행성 하나와 찰라의 순간을

앤과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었다.


어느 번역이 더 멋진가? 난 서광운이 번역한 헌사를 보고 가슴이 뛰었다. 이후 홍승수 역의 헌사를 보고는 이 멋진 글을 망쳤다고 생각했다. 이 두 예가 두 번역자의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서광운 역은 훨씬 간결하며 시적으로 멋있게 칼 세이건의 경이와 감탄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홍승수 역은, 끝까지 제대로 읽지는 않았지만, 몇 구절만 살펴봐도 훨씬 건조하고 길며 딱딱하다.


제1장을 보자. 원제는 "The Shores of the Cosmic Ocean"이다. 서광운은 이를 "우주의 바닷가에서"라고 번역했고, 홍승수는 "코스모스의 바닷가에서"라고 번역했다. 먼저 서광운의 번역이다.


  우주Cosmos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우리의 사고력은 극히 빈약하지만 우주를 생각하노라면 우리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목소리는 달뜨며 먼 옛날을 회상하는 것 같은,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와 같은 그런 기분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참으로 위대한 신비의 세계로 다가간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흥분한다.

  우주의 크기와 나이는 인간의 보통의 이해력을 초월한다. 우리의 조그만 고향인 지구는 끝없이 영원한 우주 속의 미아이다. 우주를 생각해 보면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의 걱정거리 같은 것은 보잘 것 없는 하찮은 것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인류는 아직도 정열적이고 호기심에 넘쳐 있으며 용감하고 풍부한 장래성을 지니고 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우리들은 우주와 지구에 대하여 예기치 않았던 놀랄 만한 발견을 이룩했다. 그리고 생각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탐험을 해 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원래 의문을 갖도록 되어 있으며 인간에게 있어 안다는 것은 바로 기쁨이요, 즐거움이다. 지식은 또 생존해 나가는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아침 햇살 속에 떠돌아다니는 먼지 같은 존재에 불과하나, 우리들의 미래는 우주에 대하여 우리가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멋지다. 예전에 유시민 작가가 글쓰기 관련 책에서 다른 좋은 글을 필사하는 것도 권장한다며 예로 든 책 중에 <코스모스>가 있었는데, 난 유시민 작가도 서광운 역을 읽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홍승수 역이다.


  코스모스COSMOS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 코스모스를 정관靜觀하노라면 깊은 울림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나는 그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아득히 높은 데서 어렴풋한 기억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주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코스모스를 정관한다는 것이 미지未知 중 미지의 세계와 마주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울림, 그 느낌, 그 감정이야말로 인간이라면 그 누구나 하게 되는 당연한 반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류는 영원 무한의 시공간에 파묻힌 하나의 점, 지구를 보금자리 삼아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주제에 코스모스의 크기와 나이를 헤아리고자 한다는 것은 인류의 이해 수준을 훌쩍 뛰어 넘는 무모한 도전일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사는, 우주적 입장과 관점에서 바라볼 때 중요키는커녕 지극히 하찮고 자질구레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인류는 아직 젊고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으로 충만하며 용기 또한 대단해서 '될 성싶은 떡잎'임에 틀림이 없는 특별한 생물 종이다. 인류가 최근 수천 년 동안 코스모스에서 자신의 위상과, 코스모스에 관하여 이룩한 발견의 폭과 인식의 깊이는 예상 밖의 놀라움을 인류 자신에게 가져다주었다. 우주 탐험,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가슴은 설렌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는다. 진화는 인류로 하여금 삼라만상에 대하여 의문을 품도록 유전자 속에 프로그램을 잘 짜놓았다. 그러므로 안다는 것은 사람에게 기쁨이자 생존의 도구이다. 인류라는 존재는 코스모스라는 찬란한 아침 하늘에 떠다니는 한 점 티끌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인류의 미래는 우리가 오늘 코스모스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가에 따라 크게 좌우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만 앞의 글이 더 좋다고 느끼는지 모르겠다. 예전에 <부분과 전체>의 번역에 관한 글을 썼을 때와는 다른 차이를 느낀다. <부분과 전체>의 새 번역은 너무 우리말로 풀어 적느라 오히려 의미 전달이 부정확해지는 면이 있었다. <코스모스>의 새 번역은 나중에 나왔음에도 오히려 한자어가 더 많으며 딱딱해진 느낌이다. 이에 따라 감흥이 줄어든다. 


원문은 이렇다.


The Cosmos is all that is or ever was or ever will be. Our feeblest contemplations of the Cosmos stir us--there is a tingling in the spine, a catch in the voice, a faint sensation, as if a distant memory, of falling from a height. We know we are approaching the greatest of mysteries.

  The size and age of the Cosmos are beyond ordinary human understanding. Lost somewhere between immensity and eternity is our tiny planetary home. In a cosmic perspective, most human concerns seem insignificant, even petty. And yet our species is young and curious and brave and shows much promise. In the last few millennia we have made the most astonishing and unexpected discoveries about the Cosmos and our place within it, explorations that are exhilarating to consider. They remind us that humans have evolved to wonder, that understanding is a joy, that knowledge is prerequisite to survival. I believe our future depends on how well we know this Cosmos in which we float like a mote of dust in the morning sky.


어느 번역이 더 나은지? 난 종종 잃어버린 것이 아쉽다.


---

[*] 유시민 작가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2023년 출간)를 보면 그가 코스모스를 처음 접한 때는 2009년 봄이다. 내 생각보다 훨씬 늦게 그는 코스모스를 읽었다. 그렇다면 그는 홍승수 역을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문장은 아마 잘못되었으니 수정해야겠지만 그냥 남겨두고 이렇게 주를 달아 놓는다(20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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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27 20: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코스모스 최근에 출간 된 책의 번역에 문제가 많습니다
오역 만큼 번역 하지 않고 건너띈것 부터 수치나 계량 숫자도 틀려서 감수를 했다는것도 믿기 힘듭니다
편집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올려주신 첫 문장 부터 서광운님 번역이 빛이 납니다.

헌사에서 칼 세이건이 쓴
[In the vastness of space and the immensity of time,]
의 번역에서 vastnes 번역을 두 번역자가 ‘광대한‘과 ‘광막한‘으로 번역 했는데
광대한은 더 넓은 범위의 땅과 대지를 의미하고 광막한은 사막이나 평야를 의미 할때 쓰는 단어 입니다.
그러니 우주라는 공간을 의미하는 ‘광대한‘ 이라는 표현이 맞습니다
[the immensity of time] 번역도 ‘무한한‘과 ‘영겁‘으로 번역한것도
영겁은 세상이 한번 이루어 졌다가 없어지는 긴 시간을 의미 하기 때문에 영어로는 Eternal time이라고 표현 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 서광운 번역본으로 읽고 너무 낡아서 새 번역본을 서점에서 읽다고 그냥 내려 놓았습니다
블루 욘더님이 이렇게 비교 해주시니
새삼 명문장을 빛나게 하는 번역이 어떤건지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ㅅ^




blueyonder 2021-09-27 21:31   좋아요 2 | URL
scott 님께서 잘 지적해 주신 것처럼 번역한 용어도 이상한 곳이 여러 군데입니다. epoch를 왜 ‘찰라의 순간‘이라고 번역하는지 이해불가입니다. 새 번역 <코스모스>가 여전히 과학분야의 스테디셀러인 것 같은데, 사 놓고는 번역 때문에 읽다가 마는 일이 있을까 하는 노파심이 듭니다.
사실 원로 학자께서 번역한 것을 제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영어를 아는 것과 ‘잘‘ 번역한다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제가 이러쿵저러쿵 불평을 얘기하지만 번역은 어려운 일이 맞습니다. 잃어버린 것이 너무 아쉬워서 글을 올렸습니다.

그렇게혜윰 2021-09-27 21: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서문부터도....전 원래 집중이 안 되는 글인가 내 탓인가 이러면서 꾸역꾸역 읽었는데 번역 핑계를 좀 대도 되겠는걸요??

blueyonder 2021-09-27 22:06   좋아요 2 | URL
저만 옛 번역이 더 좋은 건 아닌 모양이군요. ^^

yamoo 2021-09-28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수가 번역한 코스모스는 비문이 넘치네요~
국어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걸 해석문을 통해 알겠네요. 저건 번역이 아닙니다. 기자분이 번역한게 진짜 번역이지요~
저두 교수 번역본은 갖다 버려야겠습니다~~

blueyonder 2021-09-28 10:54   좋아요 1 | URL
문제는 오래전 절판된 옛 번역은 이제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ㅠ

2021-09-28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쿠우 2021-10-01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번역이 엉망이라 가독성이 떨어져서 차라리 원서로 읽으려고 찾다가 이 글을 봤어요. 전 예전 번역판이 있는줄도 몰랐네요. 영미권에서 오래 살았어도 한글책을 읽는 재미가 있는데 번역이 명작을 망치는 경우를 종종 봐서 참 아쉬워요. 요즘은 영어 잘하는 사람도 많은데 왜 굳이 저런 올드한 사람을 번역가로 내세워서 독자들을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네요.

blueyonder 2021-10-01 21:31   좋아요 1 | URL
번역가 선정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홍승수 교수께서는 유학을 다녀오신 천문학 전문가이시니, 어찌 보면 적임자라고 출판사에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썼듯이, 영어와 전문지식만이 좋은 번역의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물론 현 번역본이 완전히 못 읽을 수준은 아니겠지요. 여전히 잘 읽고 감동을 받으실 분도 계실 겁니다. 어쨌든 저는 옛 번역본이 더 좋다고 생각하고요, 이 옛 번역본의 절판이 아쉽습니다.
 















... We are species poised between an awareness of our ultimate insignificance and an ability to reach far beyond our mundane lives, into the void, to solve the most fundamental mysteries of the cosmos. (p. 5)

... It is said that astronauts returning from space carry with them a changed perspective on the world, the "overview effect," in which, having seen the Earth from above, they can fully perceive how fragile our little oasis is and how unified we ought to be as a species, as perhaps the only thinking beings in the cosmos.

  For me, thinking about the ultimate destruction of the universe is just such an experience. There's an intellectual luxury in being able to ponder the farthest reaches of deep time, and having the tools to speak about it coherently. When we ask the question, "Can this all really go on forever?," we are implicitly validating our own existence, extending it indefinitely into the future, taking stock, and examining our legacy. Acknowledging an ultimate end gives us context, meaning, even hope, and allows us, paradoxically, to step back from our petty day-to-day concerns and simultaneously live more fully in the moment. (p.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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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를 여니 양자역학이 나왔다 - 읽을수록 쉬워지는 양자역학 이야기
박재용 지음 / Mid(엠아이디)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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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에 대한 백과사전식 소개이다. 조금 더 어깨에 힘을 빼고 다루는 주제를 줄여서 더 친절하게, 때로는 더 깊이 다뤘으면 좋았겠다. '백과사전식'이란 말은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는데, 내게는 단점으로 더 다가왔다. 이 책으로 기본적 호기심을 해결한 후, 더 깊이 있는 책을 찾아본다면 소개서로의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물리에 관심 있는 고등학생, 또는 대학생이 보면 좋을 듯 싶다. 지식 전달이 주요 목표이기 때문에 김상욱 교수의 글과 같은 '감상'을 기대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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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설계도를 훔친 남자
스튜어트 클라크 지음, 김성훈 옮김 / 살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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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에서 근대 과학으로 넘어가는 세계관의 전환기를 그린 역사 소설이다. 케플러와 갈릴레이가 주인공인데, 등장인물 중 조연급 추기경 1명만 창조된 인물이고 나머지는 모두 실존 인물이며, 역사 기록을 참고하여 최대한 사실을 드러내려고 애썼다고 한다.


과학철학입문서인 <당신 지식의 한계 세계관>에서 다뤘던 17세기 과학혁명의 시기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책 표지에 <다빈치 코드>의 댄 브라운을 언급하며 띄워보려 했던 시도가 보이는데, 댄 브라운의 책보다 훨씬 더 사실적이고 과학적으로 정확한 내용을 다룬다. 가톨릭에서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억압하는 부분은 차라리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 


대화의 번역이 살짝 아쉬워 별 하나(사실은 0.5개?)를 뺀다. 소설이니 여러 대화가 나오는데, 존대말, 반말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 어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 있겠다.


주요 배경 중 하나가 체코의 프라하인데, 사실 티코 브라헤나 케플러의 주요 활동지 중 하나가 이곳인지 잘 몰랐다. 프라하에 가면 브라헤나 케플러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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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은 그가 받았던 다음의 질문을 인용하며, 개인과 인류, 더 나아가 정신(의식)의 존재 의의에 대해 숙고한다:


"다음 중 어떤 질문이 당신을 더 흔들어 놓습니까? 당신은 앞으로 1년 밖에 못 삽니다. 1년 후 지구는 멸망합니다."


그린은 첫 번째 질문은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지만, 두 번째 질문은 삶의 무상함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는 1년 후 지구의 멸망과 궁극의 시간 후 우주에는 아무런 정신도 남지 않는다는 것 사이에 아무런 질적 차이가 없다고 말하며, 아름다운 수학 정리나 물리 법칙을 알아줄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우주, 그리고 그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의 무상함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그의 영원함에 대한 갈망이 아직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플라톤주의자가 아니라고 얘기하지만(머리말에서 내가 느낀 것과 다르다), 그는 여전히 영원함을 갈망한다. 그의--인류의-- 업적을 누군가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그린의 말이다.


"나 자신이 죽을 날을 알았을 때 보일 반응과 [지구가 멸망할 날을 알았을 때 보일 반응의] 대비는 놀랍다. 하나는 삶의 가치를 강화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하나는 그것의 가치를 없애버린다. 이 깨달음 이후 미래에 대한 내 생각이 바뀌었다. 수학과 물리학의 능력이 시간을 초월한다는 어릴 때의 깨달음을 오래 동안 지녀오며, 나는 미래의 존재 의의를 이미 확신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미래에 대한 내 이미지는 추상적이었다. 내 미래는 방정식과 정리와 법칙의 나라이고 바위와 나무와 사람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나는 플라톤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수학과 물리학이 시간 뿐만 아니라 물질 세계의 속박을 초월한다고 암묵적으로 생각했었다. 세상의 종말이라는 질문은 이러한 내 생각을 수정해서, 방정식과 정리와 법칙이 근원적 진실을 포함하고 있을지라도 어떠한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음을 명백히 보여줬다. 결국 이것들은 칠판과 출판된 저널과 교과서에 위에 그려진 선과 꼬부랑 글씨의 모음일 뿐이다. 이것들의 가치는 이것들이 머무는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I found the contrast with how I would react to learning the date of my own demise surprising. While one realization seemed to intensify awareness of life's value, the other seemed to drain it away. In the years since, this realization has helped shaped my thinking about the future. I had long since had my youthful epiphany regarding the capacity of mathematics and physics to transcend time; I was already convinced of the existential significance of the future. But my image of that future was abstract. It was a land of equations and theorems and laws, not a place populated with rocks and trees and people. I am not a Platonist but, still, I implicitly envisioned mathematics and physics transcending not only time, but also the usual trappings of material reality. The doomsday scenario refined my thinking, making it patently evident that our equations and theorems and laws, even if they tap into fundamental truths, have no intrinsic value. They are, after all, a collection of lines and squiggles drawn on blackboards and printed journals and textbooks. Their value derives from the minds they inhabit. (p. 319)


위의 글은 한 이론 물리학자의 내밀한 고백이다. 모든 이들이 그린의 상념--무상함--을 공유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죽는 것, 인류가 멸망하는 것, 마지막 남은 의식이 사라지는 것, 그리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이 우리 인생의 무상함만을 강조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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