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프랑스 등 독일 점령지의 군사목표를 타격하기 시작한 미국 제8 공군은 고고도 전략폭격의 이론을 실행하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희생은 폭격기 승조원들의 몫이었다.


  By this time, the men of Morgan's 91st BG had begun to realize that they were "pawns in a great experiment being tried by the Army Air Forces.... The members of the group even referred to themselves as 'guinea pigs,'" wrote their official historian. This was an experiment in blood, not a theoretical debate, as it had been in the 1930s. "Is anyone scared?" a commander barked at his men. "If not, there is something wrong with you. I'll give you a little clue how to fight this war—make believe you're dead already; the rest comes easy." (p. 106)

  이제 모건이 속한 제91 폭격비행전대의 장병들은 비정한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부대의 공식 전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육군 항공대가 벌이는 거대한 실험에 쓰이는 실험동물에 불과했다. 일부 장병들은 스스로를 '기니피그'라고 불렀다." 

  이제 1930년대에 벌어졌던 이론 논쟁은 끝이 나고, 인간의 피를 재료로 하는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 지휘관은 부하들을 이렇게 꾸짖었다.

  "무섭나? 무섭지 않은 사람은 비정상이다. 이 전쟁에 어떻게 대처할지, 그 비결을 알려주겠다. 귀관들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해라. 그러면 편해진다." (181~182 페이지)


조지프 헬러의 <캐치-22> 소설에 나오듯, 전쟁은 가해자와 피해자, 또는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비인간적 상흔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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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ong with Paris, these Biscay ports had been the chief prizes of the Nazi conquest of France. With them under German control, U-boats no longer had to make the treacherous week-long trip from bases at Kiel and Wilhelmshaven, across the North Sea, and around the top of the British Isles to their hunting grounds in the North Atlantic. They could remain at sea longer and range farther while staying closer to their sources of supply, command, maintenance, and intelligence. In 1942, twelve U-boats based along the Bay of Biscay each sank more than 100,000 tons of shipping. No American submarine in the Pacific sank more tonnage than that during the entire war. (p. 74)

  비스케이만에 위치한 이 항구들은 파리와 함께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면서 얻은 큰 성과로, 이곳이 독일 수중에 있는 한 유보트는 사냥터인 북대서양으로 나가기 위해 킬과 빌헬름스하펜 유보트 기지를 출항해 북해와 영국제도 사이를 지나는 일주일간의 위험한 항해를 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바다에서 더 오래, 더 멀리 이동할 수 있으며 보급, 지휘, 정비, 정보 측면에서 장점이 많았다. 1942년 한 해 동안 비스케이만을 따라 12척의 유보트가 배치되었는데, 이 유보트들은 각각 10만 톤 이상의 연합국 상선을 격침시켰다. 전쟁 기간 동안 이보다 많은 적함을 격침시킨 미국 잠수함은 없었다. (130 페이지)


영국에 주둔한 미국 제8 공군은 1942년 10월 말부터 프랑스 비스케이만 연안의 유보트 기지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관련하여 독일 유보트의 전과를 설명하는 부분인데, 우리말 번역에 조금 오류가 있다. "1942년 한 해 동안 비스케이만을 따라 12척의 유보트가 배치"됐다고 언급하는데, 번역문 그대로라면 숫자가 너무 작다. 원문은 '1942년에 비스케이만을 따라 배치된 유보트가 12척'이라는 것이 아니라 '비스케이만을 따라 배치된 유보트 12척', 다시 말하면 '비스케이만을 따라 배치된 유보트 중 12척'이라는 의미이다. 이 12척이 각각 10만 톤 이상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다는 것이다. 


역자는 원문에 있는 "in the Pacific"을 누락했는데 간결함을 위한 선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넣는 것이 더 좋을 뻔했다. 태평양에서 일본을 상대로 미군 잠수함도 엄청난 전과를 거두었다고 종종 얘기되기 때문이다. "전쟁 기간 동안 태평양에서 이보다 많은 적함을 격침시킨 미국 잠수함은 없었다"라고 하는 것이 더 명확하다. 


하지만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위의 언급은 잘못된 듯 보인다. 2척의 미군 잠수함(탱Tang과 플래셔Flasher)이 2차대전 동안 각각 116,454톤과 100,231톤의 격침 전과를 올렸다고 알려진다[*]. 물론 유보트의 전과는 1942년 1년 동안의 전과이고 미군의 전과는 전쟁 전 기간에 걸친 것이다. 


---

[*]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most_successful_American_submarines_in_World_War_II


참고 - 유보트 잠수함별 전과 요약 웹사이트: https://uboat.net/ops/successful_boats.htm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most_successful_German_U-bo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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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urchill did not share Harris's confidence that bombing alone would bring down Nazi Germany, but in the absence of alternatives, he endorsed a bombing program of ruthless resolve, carried out by the man he called--half in admiration, half in abhorrence--the Buccaneer. (Harris's adoring crews, whom he supported unreservedly, called him Butcher, Butch, for short. And the prime minister had no moral reservation, then or later, about unrestricted air warfare. After the war, he wrote to a former officer in Bomber Command: "We should never allow ourselves to apologize for what we did to Germany." (p. 55)

  처칠은 폭격만으로 나치 독일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해리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해리스가 제안한 이 무자비한 폭격 계획을 승인했다. 처칠은 해리스를 '해적'이라고 불렀다. 이 표현에는 경의와 혐오의 의미가 섞여 있었다. 해리스가 총애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영국 폭격기 승무원들은 해리스를 '도살자'라고 불렀다. 처칠 총리는 그 당시에도, 그 후로도 이러한 항공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 종전 후 그는 폭격기사령부 소속 전직 장교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독일에게 했던 일에 대해 절대로 사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10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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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민간인의 살상을 낳았던 고고도 전략폭격은 2차대전 중 탄생했다. 처음으로 전략폭격을 수행했던 폭격기 승조원 또한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제트기와 미사일로 인해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역사이다. <Masters of the Air마스터스 오브 디 에어>는 영국에 기지를 두고 독일 점령 지역 및 독일 본토 폭격을 맡았던 미국 제8 공군에 대한 이야기이다. 국역판은 2권으로 나뉘어 출간됐다. 전쟁사 전문 번역가가 맡아서 번역은 전반적으로 깔끔해 보인다. 


  This was an air front. From recently built bases in East Anglia, a new kind of warfare was being waged--high-altitude strategic bombing. It was a singular event in the history of warfare, unprecedented and never to be repeated. The technology needed to fight a prolonged, full-scale bomber war was not available until the early 1940s and, by the closing days of that first-ever bomber war, was already being rendered obsolete by jet engine aircraft, rocket-powered missiles, and atomic bombs. In the thin, freezing air over northwestern Europe, airmen bled and died in an environment that no warriors had ever experienced. It was air war fought not at 12,000 feet, as in World War I, but at altitudes two and three times that, up near the stratosphere where the elements were even more dangerous than the enemy. In this brilliantly blue battlefield, the cold killed, the air was unbreathable, and the sun exposed bombers to swift violence from German fighter planes and ground guns. This endless, unfamiliar killing space added a new dimension to the ordeal of combat, causing many emotional and physical problems that fighting men experienced for the first time ever. (p. 2)

  이스트앵글리아는 항공전에 있어서 최전선이었다. 이곳에 세워진 지 얼마 안 된 항공기지들은 '고공 전략폭격'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을 수행하는 곳이었다. 고공 전략폭격은 전쟁 역사상 유례도 없었고, 앞으로 다시 반복될 수도 없는 지극히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장기적이고 전면적인 전략폭격 전쟁에 필요한 기술은 1940년대 초반까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전례 없는 전쟁이 끝나갈 무렵, 이 기술은 제트엔진 항공기, 로켓추진 미사일, 원자폭탄의 등장으로 이미 구식이 되었다.

  폭격기 승무원들은 북서 유럽 상공의 차갑고 희박한 공기 속, 역사상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혹독한 환경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항공전은 1만 2,000 퍼트(3,600미터) 상공에서 벌어졌으나, 이 새로운 항공전은 그보다 2, 3배 높은 고도에서 벌어졌다. 성층권에 가까운 이곳의 환경은 폭격기 승무원들에게는 적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하늘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지만, 기온은 살인적일 만큼 춥고, 대기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밀도가 낮았다. 그리고 눈부신 햇살 속에 노출된 폭격기들은 독일 전투기와 대공포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익숙지 않은 이 끝도 없는 살인 공간은 전투로 인한 시련과는 또 다른 차원의 시련을 안겨주었으며, 지금껏 그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수많은 정신적 및 신체적 문제를 야기했다. (1권 11~12 페이지)

In October 1943, fewer than one out of four Eighth Air Force crew members could expect to complete his tour of duty: twenty-five combat missions. The statistics were discomforting. Two-thirds of the men could expect to die in combat or be captured by the enemy. And 17 percent would either be wounded seriously, suffer a disabling mental breakdown, or die in a violent air accident over English soil. Only 14 percent of fliers assigned to Major Egan's Bomb Group when it arrived in England in May 1943 made it to their twenty-fifth mission. By the end of the war, the Eighth Air Force would have more fatal casualties--26,000--than the entire United States Marine Corps. Seventy-seven percent of the Americans who flew against the Reich before D-Day would wind up as casualties. (p. 7)

한 가지 불편한 진실을 말하자면, 1943년 10월 당시 제8 공군 폭격기 승무원 중 무사히 파견 기간(비행 임무 25회)을 마친 것은 전체 인원의 4분의 1도 안 된다. 작전에 참가한 대원 중 3분의 2는 작전 중 사망하거나 적의 포로가 될 팔자였고, 17퍼센트는 심각한 신체적 또는 정신적 부상을 입거나 영국 내에서 항공기 사고로 사망할 운명이었다. 1943년 5월, 영국에 도착한 이건 소령의 폭격전대원 중 25회의 작전 임무를 무사히 마친 비율은 14퍼센트에 불과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제8 공군의 전사자 수는 무려 2만 6,000명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병대의 전사자 수보다 많았다. '노르망디상륙작 전Normandy invasion 이전까지 독일에 대항해 출격한 미국 항공병 중 무려 77퍼센트가 죽거나 부상당했다. (1권 20 페이지)


애플 TV에 이 책을 기반으로 한 동명의 미니시리즈가 있다(2024년 1월 26일 처음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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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박태균 지음 / 책과함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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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둘러싼 정치, 사회, 경제, 그리고 군사에 대한 교과서적 책. 저자가 대학에서 강의하며 정리한 내용을 책으로 낸 것이다.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에 대해 알고 싶은 이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1차 사료도 군데군데 나오고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 단, 이 책은 전쟁의 전황에 대해서 거시적으로만 살펴보고 자세히 서술하지는 않는다. 


우리 민족사에서 한국전쟁만큼 비극적인 사건은 없을 것이다. 그 여파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우리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통일은 차치하고라도 남북한 사이에 다시 평화가 정착하기를 염원한다. 


책 속 몇 구절:

... 정전협정을 통해서 전쟁을 끝내되, 적에게는 최대한 타격을 주고 남한군의 전력은 최대한 강화하면서 끝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38선 이북으로 진격할 때의 전략은 수정된 것이다. (250 페이지)

... 화력에 자신 있던 유엔군 측은 당시의 전선을 새로운 군사분계선으로 정하자고 제의한 데 반해, 공산군 측에서는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자고 제안하였다. 

  유엔군 측의 제안에는 깊은 의미가 있었다. 물론 일차적인 이유는 시간을 끌수록 화력이 우세한 유엔군 측이 좀 더 많은 영역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때문이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료 44>에 나타나는 것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적에게 더 많은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전투는 계속되었고, 폭격기들은 계속 북한 지역을 폭격했다. 화력에서 우세한 유엔군은 무기가 뒷받침되는 한 계속 38선 이북 지역에 인적, 물적 피해를 줄 수 있었다. (254 페이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승만은 자신을 지지하는 소수 국회의원들로 하여금 '대통령 직선제'를 골간으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내놓게 했다. 그리고 관제 시위를 조직하여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는 국회의원들에 대한 소환운동을 벌였다. 1952년 초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통해 국회 밖에서 세력을 획득한 이승만은 이들을 동원하여 국회의원들을 '매국노'로 몰아붙이며 압박한 것이다. 

  그러나 국회는 아랑곳 않고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전방에 있는 일부 부대를 부산으로 빼돌려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 지역에 계엄을 선포하였다. 부산 지역에 공비가 나타났다는 게 이유였지만,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정부에 의해 동원된 가짜 공비들이었다. 계엄령이 선포된 뒤, 국회의원들이 타고 가던 통근버스가 출근길에 통째로 견인되어 그들 중 일부가 '국제공산당' 연루 혐의로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입법부의 기능은 완전히 정지되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과 함께 유엔군으로 전쟁에 참여한 국가들의 대사관과 UNCURK에 참여한 각국 대표단의 항의가 주한미국 대사관, 유엔군 사령부, 심지어는 워싱턴에까지 쏟아졌다. 자기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북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귀중한 젊은이들의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한국을 돕고 있는데, 정작 한국 정부가 자유민주주의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참전 명분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289~290 페이지)

  한국전쟁 시기 북한 정권의 안정은 반미 이데올로기로부터 나왔다. 북한은 전쟁의 모든 책임을 미국에게 돌렸으며, 북한 주민들은 미 공군의 폭격으로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이것이 195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북한이라고 하는 특수한 체제가 존재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다. (33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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