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성모 성당 옆 조형물 글귀와 접시 위의 불꽃은 스페인이 아직도 하나의 공동체가 되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민족은 기억의 공동체인 동시에 망각의 공동체다. 인류는 오랜 세월에 걸쳐 작은 부족 집단에서 거대한 국민국가로 공동체의 규모를 확장해 왔다. 그 과정에서 매번 전쟁을 벌였고 대규모 살상을 저질렀으며 승자가 패자를 힘으로 무릎 꿇렸다. 민중이 과거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공동의 기억을 만들어야 더 큰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고구려 백제.신라가 벌였던 정복 전쟁의 기억을 지우고 중국과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공동의 기억을 새롭게 형성했다. 남북 두 국가를 언젠가 하나의 공동체로 다시 통합하려면 한국전쟁에서 저질렀던 살상 행위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과정을 반드시 밟아야 할 것이다. (130~131 페이지)

  무엇이 그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한국은 오래된 민족국가로 언어와 문화 등 모든 면에서 균질성이 높아 국민의 집단적 의지를 모으는 데 유리했다든가, 한글과 높은 교육열 덕분에 과학혁명과 지식정보화 혁명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든가, 냉전 시대를 상징하는 분단국가로서 체제 경쟁에서 북한을 이기려고 있는 힘을 다했다든가 하는 인문학적 설명과 해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역사에서 우연이라는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다. 개인의 삶도 사회의 역사도 필연적 법칙이나 인과관계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나는 한국이 상대적으로 운이 좋았고, 포르투갈은 특별히 불운했다고 생각한다. 살라자르가 저개발로 공산주의를 막을 수 있다는 기괴한 망상에 빠진 독재자가 아니었다면 포르투갈은 무척 다른 사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220 페이지)

  엔히끄 왕자는 포르투갈의 역사 영웅이지만 문명사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악당이다. 아프리카 원주민을 납치해 아조레스와 마데이라 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에 투입한 일과 최초의 노예 매매 시장이 생긴 것이 그와 관련이 있다. 칙명을 내려 포르투갈 왕에게 이교도를 노예로 삼을 권리를 부여한 가톨릭 교황청의 잘못도 크지만 직접 책임은 엔히끄에게 물어야 맞을 것이다. (266 페이지)

  그때는 인류 문명의 전환기였다. 유럽에서는 종교 권력과 세속 권력이 손잡고 민중을 지배했던 중세가 막을 내렸다. 과학기술 혁명의 문이 열렸고 새로운 산업이 등장했으며 새로운 계급이 나타나 낡은 군주정의 토대를 흔들었다. 신무기와 강력한 군대를 가진 유럽의 국가들은 지구 표면의 땅을 남김없이 정복하려고 나섰다. 21세기 문명의 보편적 질서가 된 공화정과 국민국가와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목표로 설정한 유럽의 권력자들은 책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신과 교황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과 기술이 더 큰 부와 더 위력적인 무기와 더 강력한 권력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교회를 짓던 돈으로 도서관을 만들었다. 성서를 제작하던 정성으로 책을 모았다. 구원을 기도했던 절박함으로 교육과 학문 연구를 진흥했다. 신학을 과학으로 대체하고 책을 신의 자리에 올린 것이다. 주앙 5세도 그런 왕이었으니 도서관에 이름이 남을 자격이 충분하지 않겠는가. (286~287 페이지)

  낚시는 고기가 잘 낚이면 재미있다. 지루해할 틈이 없다. 하지만 잘 낚이지 않으면? 그래도 재미있다. 지루하지 않다. 시간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간다. 수면 아래 물고기의 움직임을 상상하면서, 왜 물지 않는지 생각하면서, 몇 초 후에 찌를 올릴지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수면에 시선을 고정한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고기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 없다. 세상사든 개인사든 복잡하고 어려운 일은 다 잊는다. 머릿속을 싹 비운다. 하룻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면 머리가 개운해서 글이 잘 써진다. 남들은 어떤지 모르겠고, 나는 그렇다. (292 페이지)

  여행지에서 무엇을 하는 게 좋은지는 각자의 취향에 달렸다.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객관적으로 더 고상하다든가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다. 책과 서점이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책이 총포와 같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총포처럼 위력 있는 것은 새롭고 유용한 지식과 정보이지 문자 텍스트를 인쇄한 종이책이 아니다. 세상은 인터넷과 검색엔진의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 시대에 들어섰다. 책은 지성의 상징이 아니며 숭배할 대상 또한 아니다. 책을 쓰는 일로 세상과 관계를 맺고 살아온 나는 책을 전성기가 지난 전통 미디어로 여긴다. 서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는 통념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 좋다. (307 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럽 도시 기행 3 -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리스본, 뽀르투 편 유럽 도시 기행 3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번 책에서는 이베리아 반도의 도시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리스본, 포르투를 둘러본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도시이며, 대항해시대에 번성하던 나라들의 대표적 도시이다. 이전 책들과 마찬가지로, 방문하는 도시들의 명소만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고 한국인으로서 느끼는 감상을 나눈다. 나만의 인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전보다 좀 더 느긋해진 작가의 모습이 그려진다. 우리 입맛에 잘 맞는 음식과 와인과 노래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여행자는 낯선 곳에서 자신의 인생과 우리의 모습을 객관화하며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데, 그 역시 이런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무신론자인 그는 유럽의 큰 전통이며 도시와 문화의 중심인 성당에서는 큰 인상을 받지 않는다. 어찌 보면 당연하리라. 종교가 벌였던 전쟁과 착취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종교가 인류의 해악이(었)다는 생각을 그는 가지고 있는 듯싶다. 종교로 표출되는 인간의 갈망에 대한 그의 탐구를 기대하는 것은 아마 무망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에 던지는 화두와 복잡한 주변 현상에 대한 통찰로써 그는 이미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혹시 이 도시들의 여행에 다녀올 분들이나 이미 다녀온 분들에게 일독을 추천한다. 명소들의 중요한 사진도 알맞게 들어 있어서 본문에 나오는 설명에 대한 궁금증을 나름 해소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할매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명의 이어짐’에 관한 노작가의 고찰. <클라우드 아틀라스>처럼 흐르다가, 현 시대의 개발에 대한 비판으로 끝나서 철학성이 조금 반감된 느낌이 든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황석영다움일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근식의 잠수함 세계 KODEF 안보총서 66
문근식 지음 / 플래닛미디어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대한민국 해군 장보고급 잠수함인 나대용함의 함장이었으며 현재 예비역 대령인 저자가 언론(국방일보)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은 책이다. 1,2차 대전을 거친 잠수함의 역사와 특징, 한국 잠수함의 어제와 오늘, 잠수함 함장으로서의 경험과 원자력잠수함(핵추진잠수함)의 필요성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풀어내고 있다. 연재했던 내용을 모은 것이라는데 챕터별 글의 분량이 일정치는 않으며 반복되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수함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책은 2013년 출판되어 현재는 절판된 상황인데, 이 책에서 그렇게 강조하던 원자력 잠수함을 드디어 우리도 도입한다고 그 추진계획을 최근 정부가 발표한 바 있다. 원자력 잠수함은, 잠수함 함장을 한 저자가 그렇게 강조하듯, 한 번 잠수하면 디젤 잠수함과 달리 다시 축전지 충전을 위해 일정 시간 후에 반드시 수면 근처로 떠오를 필요가 없으며, 잠항 시 속도가 디젤 잠수함의 2~3배 이상 빠르다[*]. 그래서 장거리 항해 시 한 달 걸릴 거리를 열흘 정도면 갈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공격 후 이탈도 훨씬 용이하다.


잠수함은 그 은밀성으로 인해 현대해군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며, 숨어서 공격을 할 수 있는 강력한 보복 무기라서 오히려 적국의 공격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우리나라는 독일에서 건조하여 1993년 취역한 장보고함(수상 배수량 1,280톤) 이래 손원일급(1,880톤)을 거쳐 최근에는 도산안창호급(3,350톤)을 독자설계하여 건조했다. 약 30년에 걸친 우리나라의 잠수함 발전사는 산업 발전사와도 궤를 같이 한다. 그동안 사고 없이 잠수함을 운용한 승조원들과 건조에 애를 쓴 전문인력에게 박수를 보낸다.


---

[*] 원자력 잠수함은 잠항시 평균 속도가 20~25노트(시속 40킬로미터), 디젤 잠수함은 6~8노트(시속 12킬로미터)라고 한다(344 페이지). 


AIPAir Independent Propulsion System(공기불요추진체계)를 탑재한 잠수함은 원자력 추진 잠수함을 갖지 못하는 중소 해군국에서 디젤 잠수함이 스노클 빈도를 줄이고 수중지속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운용하는 잠수함이다. AIP 탑재 잠수함은 스노클을 하지 않고 수중에서 수주 동안 견딜 수 있어서 기존의 디젤 잠수함보다 수중지속능력은 3~5배 증대되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능력도 4~6노트의 저속 기동 시에만 가능하고, 수중에서 적에게 탐지될 경우 회피 등을 위해서 고속으로 기동하려면 주 축전지에 있는 전기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주 축전지를 사용하면 축전지 충전을 위한 스노클이 불가피하다. 결국 AIP 탑재 디젤 잠수함은 일정한 해역에서 저속으로 감시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적합하나, 높은 기동력을 가지고 원하는 위치에서 전략목표를 타격하거나, 피탐 시 생존을 위해 회피할 수 있는 능력은 디젤 잠수함처럼 제한되므로, 근본적으로 원자력 잠수함의 대안이 되지는 못한다. (360 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사IN(시사인) 제971호 : 2026.04.28
시사IN 편집국 지음 / 참언론(잡지) / 2026년 4월
평점 :
품절


주간지로서 할 수 있는 최고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과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 


  노무현은 거의 명시적으로, 그리고 김대중도 잠재적으로, 우리가 '혁신주의' 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최초의 두 대통령 이다(그리고 지금까지는 후계자가 없다). 두 사람이 21세기 도약과 중산층 보존을 이끈 영웅이라는 뜻이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거함의 항로는, 책임이든 영광이든 그들에게만 돌릴 수 없는 거대한 조류의 산물이다. 우리는 그들이 가졌던 세계관, 사상가의 일관성이 아니라 현실과 하루하루 투쟁하며 미끄러지듯 도착한 세계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당대에는 거리가 너무 가깝고 적절한 렌즈도 없어서 식별할 수 없던 세계관을, 거리와 지식을 확보한 후대의 특권을 활용해 재구성하고 있다. (35 페이지, 천관율의 '오늘의 기원')

  왜 쓸까? 무엇을 쓸까? 어떻게 써야 할까?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다만 글쓰기 비법을 따오기 위해 꺼내든 책에서 오히려 더 눈에 띄었던 건 세상을 향한 이들의 호기심과 애정, 헌신 같은 것이었다. 왜 그런지 책을 덮고 나니 '어떻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69 페이지, 기자가 추천하는 책 <논픽션 글쓰기 전설들>)

  나 역시 '저는 기자예요'라고 자신 있게 말하며 살고 싶다. 주식 이야기를 한참 듣다가 지쳐서 집에 돌아오던 어느 밤에는 휴대전화 메모장을 열어 이런 다짐을 적었다. '가난뱅이로 죽을게.' 동시에 나는 가진 자산과 무관하게 나를 둘러싼 사회적 자본이 나를 가난뱅이로 죽게 만들지 않을 것임을 믿는다. 노동하는 몸으로 스스로를 책임지다가, 국가의 도움을 기쁘고도 당연하게 받고 싶다. 그 믿음과 낙관이 나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중산층'의 자리에 가져다 둔다는 것도 안다. 그 자리가 내게 주는 특권을 깊이 셈해 들어다보려 애쓰며 살고 싶다. (71 페이지, '프리스타일' 장일호 기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