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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절 - 42곳 사찰에 깃든 풍물과 역사에 관한 에세이
장영섭 글.사진 / 불광출판사 / 2009년 4월
평점 :
절들은 오래 살아온 만큼 쉽사리 상상할 수 없는 곡절을 한둘쯤은 갖고 있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사연을 알아주면 절들은 대번에 반색을 하고 아예 곳간까지 내주었다.
외로웠던 것이다.
그들이 허락한 자리엔 이런저런 깨달음이 쌓여 있었고,
나는 그것들을 쏙쏙 빼먹으며 하루를 보냈다...<여는글 중에서>
쉽사리 상상할 수 없는 곡절을 삶에서 겪을 때 떠오르는 것이 사찰이다. 크게 자리잡고 많은 중생들의 발걸음이 바쁜 사찰이 있는가하면, 있는 듯 없는 듯 한두분의 스님과 공양주가 전부인 소박한 사찰도 있다. 물론 두 곳 모두 마음이 외로울 때 삶이 곡절에 지칠 때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불자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때론 부처님 앞에 엎드려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수행하면 이생에서 겪고 있는 모든 괴로움과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어보고 되뇌이던 적이 있다.
<길위의 절>이란 커다란 제목만으로 이왕가는 절이라면 좀더 알고 가보자는 마음에 접했다만 <풍물과 역사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가 말하듯이 절을 통하여 삶과 인간이 되풀이해온 역사를 깊은 안목과 철학으로 말하는 책을 만났다.
<불교신문>에 2008년 한 해 동안 올려졌던 글을 모은 이 책은 길을 따라 여행을 하다보면 만나게 되는 절을 소개하고 있다. 보통의 여행을 위한 답사의 글과는 다르게 절 안에서 느끼게 되는 깨달음, 생명, 역사, 풍경이라는 주제로 42곳의 사찰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워 찾는이가 있다 하더라도 쉽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절이다. 절을 찾아가려면 깊은 산속을 향해야하고 길을 따라 오랜 걸음을 해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절간이다. 어찌보면 산속으로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세속의 풍파를 겪지 않고 고즈넉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리라 여겨보지만 그 속에는 오랜 세월을 견뎌내는 조건으로 우여곡절의 역사와 느낌을 안고 있다.
인간사와 더불어 살아가려니 불교와 그것이 머무는 곳인 절은 무수히 많은 사연을 숨기고 있다. 만일사 앞마당에서 햇볕과 물과 바람의 포만이 빚어낸 깊은 맛의 순창 고추장을 만들어 살아가면서 고운사 가운루마냥 고독하지만 청승을 떨지 않는 그런 수행자의 모습은 어찌보면 관촉사의 미륵마냥 민중의 꿈을 먹고 사는 평범한 부처님의 모습이리라. 인간의 모습과 부처님의 모습과 그를 수행하고 부처를 알리는 수행자의 모습은 어쩌면 똑같은 하나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욕심을 품고 산들 그것이 내세로 이어질 것도 아닌것을..
잘난척하고 있는척 해봤자.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은 먹고 싸는 일이고 더럽다고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거늘..공주 갑사에 남아있는 불족적을 보더라도 가장 학대받고 신체 중에서 더럽게 사용되던 발이 결국은 석가모니 온몸의 하중과 그의 깊은 가르침을 떠받들었음을 떠올려보자.
부처와 중생은 다름이 아니라는 생각이 또다시 떠오른다.
지독한 악취가 나고 외면하고 혐오하는 해우소를 보고 이런 생각까지 미친다면 욕심을 놔버릴 수 있을까.
스스로가 곧다고 그것을 누가 받아주고 알아주랴. 고고한 불교도 살아 남기 위해 산 속으로 쫓겨 들어가 민간신앙과 손잡았다. 중악단은 경내안에 있는 어쩌면 다른 이질감을 느끼는 곳이지만 그 또한 경내의 한 일원이다.
서산 부석사에는 유명한 철새도래지가 가까이 있다. 일 년 중 겨울에만 볼 수 있는 새들의 군집에서 서로를 볼 수 있는 시간적 거리. 영장류와 조류라는 생물학적 거리를 따져 보면서 결국 믿음과 사랑과 그리움은 서로 떨어져 있어야만 귀함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곁에 두면 귀찮음의 존재이지만 멀리서 서로 바로볼 때 나 아닌 존재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려나.
아름다움과 소박함을 자연 그대로 두지 못하고 파헤쳐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의 욕심에서 밀양 표충사는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는 결단을 내린다. 화산 폭발로 토양과 이탄이 뒤섞여 산들늪이 생겼다. 100년에서 200년의 시간이 지나야만 이탄 1센티미터가 생성된단다. 1급수 지표종 버들치가 사는 원시 상태의 작은 생태계를 절이 나서서 보호한 것이다.
논산의 개태사역, 사천의 다솔사역, 의정부의 망우러사역, 장성의 백양사역, 경주의 불국사역, 창원의 성주사역, 김천의 직지사역, 여수의 흥국사역, 영주의 희방사역...사찰의 이름을 따온 역이다. 교회나 성당에서 명칭을 빌려 온 역은 없다. 사찰의 오랜 역사성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기차는 현대의 상징이다. 자본과 기술이 더 멀리 운반되고 신문물이 퍼져 나간다. 우리나라 역시 철도는 귀향과 여행의 길이면서 수탈과 징용의 길이었다. 철길의 발달에 따라 크게도 변하고 작게도 변하던 절은 지금은 기찻길과 함께 하나의 고즈넉한 풍경으로 남는다.
선지식들은 세상의 욕망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잘나고 멋진 것을 혐오하고 못나고 추한 것에 귀 기울였다.
그것만이 궁극적인 평화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잘나고 멋진 것을 구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얻으려면 반드시 남과 싸워야 하기 마련이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그냥' 산다는 건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장춘에 장고(長考)가 필요하다...<함안 장춘사의 불두화 中에서>
길을 걷다보면 작은 절이든 큰 절이든 만나게 된다.
때론 인간의 수행도량으로 만나게 되기도 하고 때론 민중의 피난처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뿐이랴 마냥 이어질 것 같던 권력자들의 도피처로도 이용되고 새로운 시대의 발원점으로도 이용된다.
절에 대한 역사와 풍경과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좋은 기회였다. 직접 발길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적 이야기는 마치 여행서와 역사서와 지리서를 함께 읽는 듯 하였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주변의 풍경을 객관적으로 풀어가는 부분은 무척 많은 도움이 되지만 에세이라고 여기기에는 너무 사실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에 다소 이해가 어려운 부분도 있다. 선지식善知識 부족한 이들이 읽기에는 어렵다. 그저 읽다가 작가의 감정을 통해 동질감을 느끼면 그것 역시 큰 가르침 아닐까.
앞으로 겪을 삶에서 힘듬을 느낄때 절을 향해 갈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산속에 있는 절에 갔다온 것이 이전의 행동이었다면 이젠 절이 안고 있는 그 오랜 연륜을 들여다 보리라. 오래 세월을 버티고 서있던 그들을 혜안으로 바라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