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포의 장사법 - 그들은 어떻게 세월을 이기고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나
박찬일 지음, 노중훈 사진 / 인플루엔셜(주)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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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읽고 뒷 표지 날개를 들춰 무심히 바라보다 보니,

그동안 그의 가게로 알려진 '로칸다 몽로' 두 곳 외에도 '광화문 국밥'에서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부터 방방곡곡 음식은 언제 먹으러 다니고, 가게에서 일은 언제 하고, 글은 언제 쓰나 싶었었다.

그의 글맛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궁금증이 더할 수밖에 없었는데,

손오공처럼 머리카락을 뽑아 분신술을 행하는게 아닌가 조용히 짐작을 해 볼 뿐이었다.

 

그간 그의 책을 얼추 다 따라읽은 나로서는 '백년식당'에 이은, '노포의 장사법'에 경의를 표하지만,

얼핏보기에는 다 같은 가게는 아니지만 겹치는 부분도 있었고,

그 집이 그 집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책을 들이면서 그럴 줄 몰랐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가 소개하는 노포들이,

'노중훈의 여행의 맛'에서 소개하던 그 노포들이고,

그의 다른 책에서 언급되는 그 노포들이어서,

뭐, 다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이 책을 사 읽었느냐 하면 글맛 때문이었다.

 

그의 글을 읽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화려한 수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구구절절 설명을 하거나 늘어놓지도 않는다.

그저 그가 보고 들은 것들을 써내려가는데,

그게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것이 깔끔한 맛이 난다.

 

요즘은 음식 만드는 법이나 맛집 소개 등 관련 프로그램의 홍수이고,

그러다보니 맛집을 자기만의 방법으로 힘 주어 광고하는 것을 보게 된다.

힘을 주는 방법 중 가장 쉬운 것이 과장과 반복이다.

막상 가보면 진짜 맛집인 경우도 있지만,

거품인 경우도 있고,

설혹 그 당시에는 맛집이었을지 모르지만 손님이 많아지면서 맛이 변질됐을 수도 있고,

맛은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손님이 많다보니 불친절해져서 입맛이 싹 달아나 버리는 그런 곳도 있다.

며칠전 이사온 아랫집 새댁은 인사를 하는데 '자신의 직업'을 '맛집 블로거'라고 소개해서 멍했었다.

요즘 맛집은 맛으로 승부하기 보다는 적극적인 광고와 홍보를 해야 하는 것인가 싶어 씁쓸하였다.

 

 노포를 오래 취재하다 보니 어떤 중요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됐다. 이른바 '살아남는 집의 이유'이다. 물론 맛은 기본이다. 운도 따라야 한다. 그 외에 가장 중요한 건 한결같음이다. 사소할 것 같은 재료 손질, 오직 전래의 기법대로 내는 일품의 맛, 거기에 손님들의 호응으로 생겨난 기묘한 연대감 같은 것들이 감탄을 자아낸다. 배포와 뚝심을 가지고 일생을 바쳐 같은 일을 지속하는 장사꾼으로서,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음식을 대하는 주인장의 진심이 변하지 않는다.

 직원들에 대해서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별나서 몇십 년씩 다니면서 고희와 팔순을 넘기는 직원이 흔하다.(6~7쪽)

 

이 책을 쓰신  박찬일 님은 노포들이 취재를 거부하는 곳이 많아서 취재를 하기까지 애를 먹었고,

어떤 곳들은 여러번 찾아갔으나 끝내 원치 않으셔서 접은 곳도 있다고 하셨는데,

그건 옛날 얘기인듯.

책에 그렇다고 한 곳 중 몇몇 곳은 먹방에 이미 여러 번 등장해서,

가게 내부를 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곳인지 짐작할 수 있겠다.

이게 대를 넘나드는 노포들이다 보니,

1세대 부모들이 돌아가시거나,

자식들이 가업을 이어받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방식으로 가게를 운영해서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을 것이고 말이다.

 

또 한가지 생각해볼 것은, 이 노포들이 오랜 경쟁에서 살아남은 집은 맞지만,

꼭 맛집이어서 살아남은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세월이 변한만큼 입맛도 변했기 때문이다.

 

이런 곳은 맛집 차원에서가 아니라,

노포라는 의미에서,

옛것을 보호하고 기린다는 의미에서,

다른 보존과 홍보가 필요한게 아닐까 싶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라듯,

몇몇 음식들은 추억과 어울렸을때 맛이 상승할테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찬일 님의 '광화문 국밥'집은 축하할 일이지만,

박찬일 님이 그곳에 상주하며 음식을 내는 일까지 하지는 않으시나 보다.

그만의 레시피를 규격화하여 요리를 해내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그가 운영하는 가게일뿐이지, 그가 요리하는 가게는 아닌 것이고,

늘 사람들에게 셰프가 아닌 요리사로 불리길 원하는 그라면,

그가 말하는 일이란 요리를 두고 애기하는 것이리라 짐작하기 때문이다.

만약 요즘 맛집들처럼 1호,2호 체인점을 내고 셰프라는 사람들을 곳곳에 두고 운영만하는 것이라면,

'일하고 있다'는 표현이 무색해진다.

 

이 책의 사진들은 단짝 노중훈 님이 찍었다는데,

다 나름 좋았지만,

이 사진은 제목과 책의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유독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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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5-17 18:23   좋아요 0 | URL
사진 속의 주전자가 빈 공간에 시선이 머무릅니다.
누군가의 테이블에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고요.
그분들은 저 주전자를 기울이면서 이야기를 하겠지, 그런 생각이 이어집니다.

양철나무꾼님, 오늘도 비가 오고 있어요.
따뜻하고 맛있는 저녁 드시고,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sslmo 2018-05-18 13:56   좋아요 1 | URL
오홀~^^ 눈썰미가 좋으신 서니데이님.
님의 눈썰미와 상상력이 부럽습니다~^^
저는 저 주전자를 보면서 불 위에는 한번도 올라간적이 없을 막걸리 전용 주전자로군 했는데 말예요.

아픈 건 어떠세요?
사나흘 지나면 본격적으로 아파지던데,
비가 와서 더 찌뿌둥 하시려나?
잘 돌보시기를~^^


서니데이 2018-05-18 17:08   좋아요 1 | URL
저기 주전자 너무 새 것 같아요. 반짝 반짝하고 찌그러진 부분도 하나도 없고요.
어쩌면 그만큼 아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불 위에서 끓어서 넘치는 일은 아직 없었을 것 같은 느낌이, 저도 들어요.

며칠 지나면 더 아픈 거군요. 어제부터 조금 더 아프더니, 앗 그런 비밀이.^^;;
빨리 나았으면 좋겠는데요.;;

양철나무꾼님, 즐거운 금요일 되세요.^^

겨울호랑이 2018-05-17 18:33   좋아요 0 | URL
잘 되는 집 사장님에서 프랜차이즈 기업인으로 바뀔 때 우리가 기억하는 맛집의 모습을 더이상 보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움을 느낍니다...

sslmo 2018-05-18 14:06   좋아요 1 | URL
같은 상호의 프렌차이즈라도 지점마다 맛이 약간씩 다른듯 해요.
계량화 되고 수치화된 그것 말고,
맛을 이루는 그 나머지 것들, 이를테면 손맛 같은 것, 그리고 뜸들이기, 적절한 타이밍에 김빼기 같은 온도나 습도에도 좌우될테니 말예요.

제가 기억하는 맛집은 어릴적 할머니가 해주시던 집밥입니다.
그래서 아플때는 그 할머니 딸인 고모를 찾아가요~^^

지금행복하자 2018-05-17 18:52   좋아요 0 | URL
책 제목을 보고 양철나무님 글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ㅎㅎ

sslmo 2018-05-18 14:07   좋아요 0 | URL
체가 박찬일 님을 좀 애정하는게...그곳까지 소문났나요?^^

북다이제스터 2018-05-17 22:38   좋아요 0 | URL
‘광화문 국밥’ 꼭 가보고 싶네요.
알게되어 고맙습니다. ^^

sslmo 2018-05-18 14:09   좋아요 1 | URL
몽로는 퓨전 주점 느낌이라면 이곳은 왠지 서민 냄새 폴폴 풍기는 국밥집일것 같아서 정겨워요.
저도 함 가보고 싶네요~^^

북다이제스터 2018-05-19 11:36   좋아요 1 | URL
덕분에 와 봤습니다.
지금까지 먹은 평양냉면 중 가장 압권입니다. ^^ 장난 아니네요. ㅋ
다음엔 국밥도 꼭 먹어봐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2018-05-17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8-05-18 14:13   좋아요 1 | URL
저는 상큼한 오이고추에 쌈장 찍어서 막걸리 먹고 싶어요.
요즘 같은 꿀꿀한 날씨에는 신김치 송송 썰어넣고 국물도 얼마간 쪼옥 따라넣은 빈대떡도 좋겠네요~^^

2018-05-21 14: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1 1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계절의 여왕인 5월이다.

5월로 접어든지도 벌써 열흘이나 지났는데,

독서는 일단 멈춤이다.

꽃들이 자신을 봐달라고 손짓을 하는데 어떻게 책따위를 읽을 수 있겠어...는 아니어 주시고,

인터넷으로 들어야할 강좌가 있어서 밍기적거렸다.

참으로 안 좋은 버릇인데, 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면서도,

옆으로 읽고싶은 책을 펼쳐 독서대 위에 올려두고 호시탐탐 읽을 기회를 노리는데,

옛날에는 한번에 두가지, 세가지 일을 거뜬하게 하며 멀티테스킹을 구사하였는데,

언제부턴가 한가지 일만 하기에도 버거워 머리를 콕 들이박는다.

 

읽고 싶었던 책들을 5만원이라는 제한된 범위내에서 들이려는데,

왜 한 권 읽고 또 사고 그러지 않고 5만원이냐고 한다면,

책 쿠션이 갖고 싶어서라고나 할까?

조신하게 고르고 보니 '안평'이 빠진다.

친구에게 추사 김정희는 샀고 안평은 못 샀다고 했더니,

안평은 좀 거창하다고 하길래,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그래도 돈 있으면 사두고는 싶다고 했더니,

글쎄~--;

나보고 정신을 차리란다.

가정집과 도서관을 구분하란다.

 

하긴, 미니멀 라이프를 꿈꾼다며,

하루에 한권씩은 버리자고 하는데,

물건도 한 점씩은 버리려고 하는데 쉽지 않은 나의 현실을 꿰뚫어보고 있는게다.

 

 

 

 왕의 하루
 이한우 지음 / 김영사 /

 2012년 11월

암튼 요즘 펼쳐뒀던 책은 '왕의 하루'이다.

제목은 '왕의 하루'지만 왕의 하루나 일과에 대한 책은 아니고,

역사 속의 그날들을 드라마틱하게 재조명해 내고 있다.

 

왕의 하루라고 해서 생각이 난건데,

어제가 문대통령 취임 1주년이었다.

잘 하고 있는 부분도, 있고 부족한 부분도 있겠지만,

여론조사(갤럽) 결과 지지율이 10%P 급등하여 83%에 이른다는 것만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평화가 일상이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에 울컥하였다.

'사는 것이 나아졌다'는 말을 꼭 듣고 싶다는데, 조만간 그렇게 되리라 희망해 본다.

 

분위기를 바꾸어,

'왕의 하루'를 읽다 느낀건데, 왕도 삶이 그렇게 편하지는 않았을것 같다.

문안 인사도 아침마다 드려야 했고,

조회와 경연에도 참여해야 했으며,

밥도 초조반이라고 하여 새벽부터 시작하여 계속 먹어야 했던걸 보면 말이다.

아침 수라를 10시경에 시작하였다고 하니,

수라를 한시간 정도 들었다고 치고,

11시부터 정사를 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래도 통상 5시면 하루의 일과는 끝난다고 하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평화가 일상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왕의 하루'식으로 해석해보자면,

전쟁이나 당쟁 따위로 다툴일이 없어진다는 것이니,

백성들의 삶이 나아진다는 것이 되겠다.

부디 그리 되었으면 좋겠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윤시윤이 나온 드라마 '대군'의 모티브가 '안평대군'이라는 말이 있다.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으니 큰 의미는 없고,

'안평'을 사려는 타당성을 확보중이다, ㅋ~.

 

 

 

 안평
 심경호 지음 / 알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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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5-11 11:46   좋아요 0 | URL
^^:) 양철나무꾼님께서 「안평」을 구입하시는 타당성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음을 믿고 ‘신뢰성‘으로 선택하심이 어떨런지요^^:)... 가격의 부담은 조금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ㅜㅜ

sslmo 2018-05-11 11:57   좋아요 1 | URL
ㅎ,ㅎ,ㅎ...겨울호랑이 님께서 타당성에 한표 힘을 실어주셨으니,
조만간, 곧...들여야겠어요~^^
감사~(__)

근데 연의 어린이 머리가 많이 자랐네요.
두갈래로 묶여지다니, ㅋ~.
정말 예뻐요~^^

겨울호랑이 2018-05-11 12:10   좋아요 1 | URL
^^:) 연의가 얼마 전 감기걸렸는데, 아프고 난 후에는 키가 좀 자랐어요. 아픈만큼 성장하는 것을 아이를 통해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sslmo 2018-05-11 18:17   좋아요 1 | URL
아이들은 한번씩 아플때마다 부모는 속을 끌이고 마음을 쓸어내리고,
그럴때마다 아이들은 크는 것 같아요~^^
연의도 이제 제법 어린이 티가 나는 걸요.

제가 지금 무슨 공부를 하는데,
거기서 말하는 성인의 기준 만 8세부터예요.
아무리 양보해도 만8세가 성인이 되긴 좀 그렇죠?^^

겨울호랑이 2018-05-11 20:17   좋아요 0 | URL
^^:) 예전에는 결혼할 나이라지만 8살 성인이면 많이 이른 것 같네요 ㅋ 8살에 부양 의무를 던다면 저야 좋겠지만요

2018-05-11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1 1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타락시아 2018-05-12 10:48   좋아요 0 | URL
왕의 하루, 안평 모두 관심이 가네요.^^ 한반도 평화와 교류가 정착되면 좋겠습니다.

sslmo 2018-05-14 10:1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아타락시아 님~^^
왕의 하루는 님 처럼 역사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한번쯤 접했을 내용들을 이한우 님의 주관으로 펼쳐나가신 책이었고,
안평은 가격이 후달려고 저도 벼르고만 있습니다~--;
 
여름의 끝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이곳 서재의 호평에 혹해서 구입하였으나,

사랑이야기라고 해서 잠시 주춤거렸다.

제목인 '여름의 끝'과 사랑이야기 라는 정보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내용을 짐작하겠기 때문이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짐작하던 대로의 그런 줄거리는 맞지만,

그걸 어떻게 묘사하고 표현해 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멋진 소설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 책은 사랑 얘기는 맞지만,

사랑에 대한 어떤 묘사나 표현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서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는 얘기를 무언중에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걸 남자와 여자의 사랑의 온도 차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남자와 여자라고 구태여 편을 나누지 않더라도 서로 어긋난 사랑은 이런 사랑이야기의 끊이지 않는 주제이니까 말이다.

같은 사랑을 놓고도 누구는 육체적인 사랑, 정신적인 사랑, 편가르는가 하면,

사랑의 행위를 놓고도 누군가는 사랑의 표현이었네, 누군가는 우정에서 비롯된거네 딴청을 부리기도 한다.

 

이 책은 두 사람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주변 상황을 에둘러 표현하는데 그게 결과적으로 두사람의 얘기가 된다.

그래서 일까,

반어법처럼 무심하게 드러나는 문장과 감정이,

무덤덤한 사람들의 일상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그런 속에서도 사랑은 얼마든지 짧은 시간에도 정열적으로 불타오를 수 있다고 얘기하는 듯 여겨졌다.

마을 사람들은 라스모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도 대부분 이곳에서 계속 살았다. 마을을 뜨는 쪽은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더블린이나 코크나 리머릭으로, 잉글랜드로, 어떤 이들은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다수가 되돌아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 또한 과장이었다.ㆍㆍㆍㆍㆍㆍ(9쪽)

다음의 문장은 많은 얘길 함축하고 있는 듯 하다.

엘리는 그렇게 될 줄 알고 사랑을 하게 된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자신이 한게 아닌 것도 아니고,

누구 다른 사람이 시키거나 상대방이 갈구한 것도 아니다.

행위의 주체가 자신이라는 얘기는 결과의 책임도 자신의 몫이란 얘기다.

자기도 모르게 하게 되는 일들을 조심해야 한다. 수녀들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무슨 일이든 그걸 행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117쪽)

 

남자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는데,

그러고 나서 셜해나로 향하다가 길가 술집에서 추억에 잠긴 것은 그날의 심란함을 떨쳐버리려는 노력이었음을 깨달았다. 여름이라는 계절로 인해 더욱 목가적으로 느껴졌던 우정을 되도록 길게 끌고 싶었다는 것이 정확한 진실이었다. 하지만 그 우정의 불가피한 종말이 얼마나 깊은 낙심을 안겨줄지는 에상하지 못했다. 그는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는 사랑받는 느낌을 사랑했고, 다정함만으로는 충분한 보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189~190쪽)

플로리언은 어쩌면 책임감도 없고 응석쟁이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한걸음 떨어져 객관적으로 바라보니,

이건 어쩜 이 책의 플로리언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남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우정을 오래 지속시키고 싶은 자신의 행동이 상대방에겐 얼마든지 호의 이상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것이고,

그리고 한가지 더 '사랑받는 느낌'을 사랑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걸, 바꿔 말하면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았다는 얘기이다.

상대방의 감정과 자신의 감정이 같은 종류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땐,

함구할 것이 아니라 감정을 명확히 표현해야 하는게 아닐까.

적어도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다정함만으로는 충분한 보답이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사랑에 대한 보답은 다정함이 아니다.

사랑에 대한 보답은 오로지 사랑 뿐이다.

 

ㆍㆍㆍㆍㆍㆍ플로리언은 엘리 딜러핸을 잊기 힘들기를, 적어도 그런 마음이 남기를 바랐다.(230쪽)

 

"좋은 여름을 보냈잖아요, 엘리."

플로리언은 거짓을 물리치며 부드럽게, 가능한 한 다정하게 그렇게 말했다. 거짓은 시간이 지나 진실이 드러나며 상처에 상처를, 고통에 고통을, 수치심에 수치심을 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시간의 엄중한 지혜가 두 사람 모두를 벌할 터였다 무자비하게.(234쪽)

 

  그냥 가는 게 낫겠다, 엘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가지 않았다. "모든 일엔 끝이 있어요." 자신의 이야기를 전부 하던 날 플로리언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말을 이해했으며 한동안은 받아들이기도 했다.

  플로리언은 넥타이를 매고 재킷을 입었다. 엘리의 컵받침에 살짝 엎지러진 차를 그가 행주로 닦았다.

  "미안해요." 그녀가 속삭였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엇이 미안한지도 모른 채. 그러다 그건 모든 것이 미안하다는 뜻임을 깨달았다. 후회 아닌 후회로, 갈망으로, 눈물로 그를 귀찮게 해서, 용기가 없어서, 오늘 이곳에 와 모든 것을 더 어렵게 만들어서.

  "나도 미안해요." 그가 말했다. "내가 일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

  엘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가 따라준 차를 마셨다. 아무런 맛이 없었다.

  "나한테는 그런 성향이 있어요." 그가 말했다, "입 다물고 있으면 안 되는 때 말을 아끼는."(251쪽)

 

어떤 의미에서든 이 책을 무척 재밌게 읽었고, 그의 다른 작품이 읽고 싶어졌다.

나이를 먹으면서 느끼는 것은,

수려하고 빼어나며 아름다운 문장보다는,

이 책처럼 수수하고 간결한 문장,

이렇게 일상이 모여 글이 되었는데도

뚯모를 감동을 주는 그런 문장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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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8-05-03 13:35   좋아요 1 | URL
<수려하고 빼어나며 아름다운 문장보다는 수수하고 간결한 문장, 일상이 모여 글이 되었는데도 뜻모를 감동을 주는 그런 문장>이 저도 좋습니다
생각보다 그런 문장이 쓰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나무꾼님, 여전히 잘계시라 믿어요
바쁜 걸음 지나 조금 여유를 찾는 나날입니다
읽은 책들은 정리를 해놨는데 올릴 짬을 안 내고 게으름 피우고 있답니다~

sslmo 2018-05-04 14:45   좋아요 0 | URL
이제 좀 여유로워지셨군요?
게으름도 때론 필요해요~^^
그래도 언젠가는 귀한 글 올려주실거죠?^^
 

얼마 전 길거리에서 '빅이슈'라는 잡지를 판매하는 걸 흘려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 잡지를 몇 번 봤는데,

표지는 항상 '빅이슈'가 될만한 아이돌이 등장하곤 했었다.,

요번엔 '셰이프 오브 워터'의 포스터가 차지하고 있었다.

 

 

 

빅이슈 코리아 The Big Issue No.175 : 셰이프 오브 워터
빅이슈코리아 편집부 지음 /

빅이슈코리아(잡지) / 2018년 3월

 

빅이슈에 등장한게 책인지 영화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쪽이 되었든 간에,

빅이슈가 될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한 나는 영화를 볼 때를 놓쳤으니 책으로 구입하였다.

 

 

 

 

 

 

[블루레이]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20세기폭스 / 2018년 6월

 

 

 

셰이프 오브 워터
기예르모 델 토로.대니얼 크라우스 지음, 김문주 옮김 /

온다 / 2018년 3월

 

책을 다 읽은 지금 내 느낌을 얘기하자면 '완전 '별로'다.

소재가 신선하고 줄거리는 괜찮을지 몰라도,

나는 제대로 읽기가 버거워 책장을 대충 넘겨버렸다.

작가가 누군가 책날개를 펼쳐보니,

내가 싫어했던 영화 '헬보이', '판의 미로'들을 만들었던 그 감독이었다.

'헬보이'는 눈을 질끈 감고 영화를 봤어서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고,

'판의 미로'를 보고나선 재미와 기분 전환을 위해서 보는 영화가 이렇게 어둡고 참담할 필요가 있나 했었다.

요번 경우도, 영화를 보지 않아 장담하기 어려우나,

책으로만 읽어선 잔인하고 폭력적이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이건 나의 개인적인 취향에 관한 문제일뿐, 책의 완성도, 작품성까지 낮은 건 아니다.

스트릭랜드가 길들여지지 않은 땅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겉과 속에 반드시 얼룩을 남긴다는 사실이었다.

 오지를 제대로 안다면 그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옷은 입지 않으리라.(22쪽)

 

스트릭랜드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증오와 혐오, 공포를 억눌렀다. 이 세가지는 인간을 방해하고 속마음을 들키게 만든다고 호이트가 한국에서 가르쳐 주었다. 묵묵히 임무를 수행해야만 한다. 이 상황에서 가장 이로운 감정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다.(25쪽)

 

예전엔 책이 좋아서 읽기도 했었지만,

어떤 책들은 재밌다기 보다는 의무감으로 읽기도 했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느슨하고 여유로워 졌는지,

내 취향이 아닌 책들까지 구태여 꾸역꾸역 읽을 필요는 없지 싶다.

내가 앞으로 얼마를 더 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하루가 다르게 눈이 침침해지는것만 봐도,

(책의) 세계는 넓고 읽을 책들은 많지만,

내가 읽을 수 있는 책들은 많지 않으니까 말이다.

책을 읽기 전에 좋은 책인지, 내 취향의 책인지 검증할 수 없는 고로,

읽다가 재미없으면 치워버리고 새로운 책을 골라읽고 그래도 괜찮다.

한권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해방되어도 괜찮겠다...고 내 자신을 세뇌시켜 본다.

 

책 구입을 최대한 자제하는데도, 구입하고 싶은 책이 3권 있다.

 

 

 

추사 김정희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이 책은 나오자마자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친구가 언급하여 더 보고싶어졌다.

그런데 친구는 '완당평전'이랑 거의 비슷한 책일거라는 말까지 보탠다.

덕분에 욕심이 누그러졌다.

 

다음은 심경호 님의 '안평'

심경호 님의 책은 '한문'이나 '한학'에 관한 게 많아서 어렵고 지루하지만,

읽는다기보단 공부하는 느낌에 가깝지만,

읽고나면,

(실은 소장하는 것만으로도, ㅋ~.)

심신이 건강해지고 지식이 마구 쌓여 머리가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안평
심경호 지음 / 알마 / 2018년 3월

 

구입하고 싶은 마지막 한권은 '사흘 그리고 한인생'이다.

 

 

 

 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이 책은 알라딘 이웃 ㅈ님의 리뷰를 보다가 혹한 것도 있지만,

스릴러라는 장르도 내 취향이었지만,

저자가 55세부터 소설을 썼다는 것도 좋았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몸소 보여준 것 같아서 이다.

 

나이를 먹다보니,

매사에 느긋하고 여유로워지는게 있다.

느리고 더디다는게 무언가를 하는데 장애로 작용하지만은 않는다.

느리고 더디더라도 천천히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수도 있는 것이고,

어떤 분야에서는 자신도 몰랐던 새로운 자질을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제목은 '셰이프 오브 워터'인데 내내 '셰이프 오브 러브' 라고 읽었다.

'셰이프 오브 러브'여도 좋고 '셰이프 오브 라이프'여도 상관없겠다.

오늘 나는 '셰이프 오브 리딩'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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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4-25 13:19   좋아요 2 | URL
빅이슈는 노숙자 재활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발행하는 잡지로 알고 있어요. 길에서 판매원을 보면 구매하려고 하는데, 요즘은 만나기도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sslmo 2018-04-25 14:17   좋아요 2 | URL
알라딘에서 판매되는 것은 여성 홈리스의 일자리를 위해 쓰여진대요.
저는 한번인가 산 적이 있지만,
판매하는걸 봐도 구입하기가 쉽지 않은게 5천원이라는 금액인데,
지갑에 현금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지 않아서 입니다.
제가 자주 만나는 곳은 여학교 근처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주로 여학생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돌 덕후질하려고 사모으는 것 같더라구요.
표지가 A형, B형 따로 있을 경우 둘 다 구입하더라구요.

프로필 사진이 바뀌셨네요.
연의 어린이 완전 예뻐요~^^

겨울호랑이 2018-04-25 14:39   좋아요 2 | URL
^^: 그렇군요. 이의로 빅이슈가 학생들에게 인기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네요. 연의를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아이가 이제는 책상에 앉아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하네요. ㅋ 양철나무꾼님 행복한 하루 되세요!

단발머리 2018-04-25 13:48   좋아요 1 | URL
<사흘 그리고 한 인생>은 <오르부와르> 작가의 신작이라 광고하더라구요.
<오르부와르>도 안 읽어봤지만, 이 책은 좀 눈길이 가네요.

전 나이가 먹어도 아직 여유가 부족한 듯 하지만 ㅎㅎㅎㅎㅎㅎㅎㅎ
한 권을 꼭 끝까지 읽지 않아도 괜찮다는 여유는 좀 생긴것 같아요.
세이프 오프 리딩, 근사해요^^

sslmo 2018-04-25 14:28   좋아요 0 | URL
저는 작가조차 낯설어요~^^

아직 여유가 부족하다 하심은...아직 나이를 덜 먹으셨다는 얘기인 것입니다, ㅋㅋㅋ~.
어느 나이에 이르니 여유있고 싶지 않아도 자연 느긋하고 여유 있어지더라는~--;
(느려지고 게을러지기도 하겠죠~--;)
그동안 너무 열심히 살려고,
한눈 팔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거 같아요.

앞으로 대충 살겠다는 건 아니고,
새가슴이어서 그럴 수 있는 위인도 아니지만,
아둥바둥 살지는 않으려구요.
삶도 그러하고, 사랑도 그러하고,
책도 그러하고 말이죠~^^

갱지 2018-04-25 22:00   좋아요 1 | URL
쉐입오브워터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받는 걸 보고, 줄거리를 찾아봤는데
...
그나저나 빅이슈라는 잡지가 여러가지 기능을 하고 있군요. 음:-)

sslmo 2018-04-26 09:03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좋은 영화평에 혹해서 구입하게 됐어요.
줄거리만 놓고보면 완전 아름답고 처연한 사랑 얘기잖아요?^^
그런데 책에서 묘사하고 서술하는 방식이 쫌 그래요~--;

그렇게 아이돌이나 유명 연예인이 표지에 등장하는 잡지에,
‘셰이프 오프 워터‘ 포스터가 등장해서 깜.놀. 했지 뭐예요~^^

나와같다면 2018-04-25 22:58   좋아요 1 | URL
빅이슈 - 셰이프 오브 워터
길에서 빅이슈 파시는 분을 보면 걸음 멈추고 되도록 사려고 저 자신하고 약속했어요..
커피 한 잔 덜 마시더라도요..

sslmo 2018-04-26 09:11   좋아요 1 | URL
저도 마음은 그렇게 먹고 있으나,
지갑에 잔돈이 없을때가 많아서요~--;

완전 멋진 ‘나와 같다면‘ 님, 저도 본받을래요~^^

박균호 2018-04-25 23:43   좋아요 0 | URL
안평..저 책은 장정이 참 탐나요. 오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문학동네에서 발간을 해서 살까 생각중이에요. 몇번 반복해서 읽고 싶은 책인데 같은 버전은 지겹고 새 출판사에서 새 버전을 낼 때마다 읽고 있거든요.ㅎㅎ

sslmo 2018-04-26 09:17   좋아요 0 | URL
ㅎ,ㅎ...님 책 콜렉션 하는 건 알아줘야 합니다.
전 박형규 님 번역본으로 가지고 있는데,
(아직 읽을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고, ㅋ~.)
요번 문동 표지가 쫌 예뻐서 저도 어찌할까 고민 중입니다.

그나 저나 님의 글도, 책도, 뜸하고 적조합니다.
잘 지내시는거죠?^^

AgalmA 2018-05-08 17:51   좋아요 1 | URL
<완당평전> 안 읽어서 저는 <추사 김정희> 더 재밌게 읽을 듯^^! 굿즈 폭풍 공세가 어찌나 심한지 많이 팔릴 거 같더군요ㅋ

<사흘 그리고 한 인생>도 알라딘 굿즈로 주는 파우치가 어찌나 탐나는지 매일 참고 있어요;_;)... 범죄와 심리 다루는 게 도선생 비슷한 스타일 같아 더 끌리고용~

민음사, 열린책들 버전이 다 있어서 이쪽 다 보고 문동 카라마조프도 보자 싶은데 표지는 정말 잘 뽑아낸 듯ㅎ! 번역자와 제 궁합도 있는 것이어서 무턱대고 살 건 아닌 거 같고 오프라인에서 좀 살펴봐야 할 거 같아요.

전혀 셰이프 오브 리딩같지 않은 소인배의 수다였습니다ㅎ;;;

sslmo 2018-05-08 17:35   좋아요 0 | URL
셰이프 오브 리딩이 뭐 별건가요?
책수다, 굿즈 수다가 바로 그것이지요, ㅋ~.

전 요즘 인터넷으로 강의를 들을게 있어서, 책을 좀 멀리하는 중인데,
강의를 들으면서도 읽을 책을 펼쳐놓고 눈으로는 독서를 귀로는 강의를 듣는 멀티테스킹을 감행하고 있어요.
말이 멀티테스킹이지 암것도 제대로 못 하는데,
그래도 읽을 책은 꾸역꾸역 펴놓는 제 자신이 우껴요~^^

요즘 알라딘 굿즈가 날로 진화해요.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겠다며 굿즈 욕심을 잠재웠는데,
이렇게 예쁘게 나오면 대책이 없지 싶습니다.

전 이상하게 박형규 님 번역이 좋더라구요, 완독을 하든 건드리기만 하든~^^.
 
검사내전 - 생활형 검사의 사람 공부, 세상 공부
김웅 지음 / 부키 / 2018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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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 용어가 어렵고 복잡해서 머리 뽀글거리는 것도 있지만,

나는 법 없어도 살 사람이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고,

만약 무언가 필요하다고 해도 그건 법보다는 주먹이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때문에 책 제목에 '검사'가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이 책을 법률 용어 사전 보다 어렵게 여겼었고,

굳이 어려운 책을 머리 뽀글거려가며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여러 저기서 권하길래 예전에 사뒀는데 남편이 집어가 버려 그렇게 잊혀졌었다.

늘 내게 읽을 책이 넘쳐나는걸 아는 남편은 책을 집어가거나 가져다 줄때 별다른 코멘트가 없다.

그런데 이 책을 돌려주면서는 책장에 꽂는 대신 거실 탁자 위에 잘보이도록 올려놓았고,

그러고도 뭐가 못 미더운지 재밌다며 제일 먼저 읽으라고 귀띔까지 하는데,

책은 여러 사람들의 말처럼 재밌었다.

 

처음 집어들었을때만 해도,

이런 종류의 책이 재밌으면 얼마나 재밌을까...감안하고 읽어야지 했는데,

그건 기우에 지나지 않았고,

정말 재미있었다.

 

내용도 재미있었고,

문장력까지 갖추었으며,

문장의 구성이나 호응도 완벽한거라.

거기다가 인터넷 게임 용어나 스포츠 선수 이름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데,

어려운 법 공부를 하면서 이런 데 한눈을 팔 시간이 어디 있었을까 싶은 것도 잠시,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책은 엄청 재밌게 읽었지만,

난 아직 귀족형 검사와 생활형 검사를 구분하지 못하겠다.

그들이 우리 삶에 어떤 식으로 스며들어 있는지도 모르겠으며,

법이나 변호사, 검사, 판사 등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 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에 나오는 일례들이 웃다가 배꼽을 분실할 정도로 재밌기는 하지만 설득력있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것은 저자 김웅이 내는 목소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저자 같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미미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수민씨 등 피해자에 대한 지원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산도 부족하고 인원도 부족해서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죄 지은 자들의 갱생과 재활을 위해서는 그렇게 많은 돈을 쓰면서 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지원을 하지 않는지 궁금하고 짜증났다. 그녀들은 주변의 도움이 절실했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했고, 정신과 치료와 법률적 조언이 시급했으며, 따뜻한 위로가 절실했다. 그러나 어디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정의를 외치는 그 많은 단체와 변호사들 중에서 수민 씨 같은 피해자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것이 명예나 정치적인 입지를 주는 것이었다면 그렇게 무관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121쪽)

죄 지은 자들은 벌을 받는다...까지는 불문률만큼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남겨진 피해자들의 처우에 대해선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시말해, 교과서 적으로 죄를 지으면 벌을 받지만,

죄를 짓고 송사를 다투고 하는 사이에도,

아니 판결이 난 후에도 여전히,

삶은 쭈욱 연결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일들이 가해자 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삶을 얼마나 참혹하고 피폐하게 만드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백과사전급 지식이나 적절한 예문 또한 이 책을 돋보이게 한다.

 

이 책을 통하여 새롭게 알게 된게 있는데 法이란 용어와 관련해서 이다.

 法이란 말의 어원은 물이 가는 것이란 뜻과 전혀 관련이 없다. 원래 법이란 더러운 것을 싫어하는 상상 속의 동물인 '해태(獬)''가 죄지은 사람 쪽으로 '가서(去)' 그 사람을 물어 죽인다는 뜻이다. 성질이 더러워서인지 해태는 그 글자가 너무 복잡했기 때문에 결국 물 수 변으로 줄인 것이다. 물이 아니라 해태가 가는 것처럼 우연적이고 응보적이며 냉정한 것이 법이라는 뜻이다. 그걸 두고 '물이 가는 것처럼 순리대로 따르라는 것이 법'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신림사거리를 줄인 '신사리'를 두고 신사가 많은 곳이라고 설명하는 것과 같다.(225쪽)

 

 '식스센스'라는 영화와 'X-파일'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끈 이후로 사람들은 반전과 숨은 음모를 당연시 하고 현실에서도 그런 추측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런 얘기를 한다.

  신묘한 추측과 귀신같은 추리는 대개 독이다. 그런 추측과 망상을 댓글로 쓰는 거야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검사가 그런 추리소설을 써나간다면 무척이나 죄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공명심과 대중의 환호는 양심을 마취시키고 사람들이 바라는 결말을 만들어내고 싶은 욕망을 만든다. 대개 언론 플레이를 잘하고 거물 행세하는 검사들에게 그런 면이 있다. 빈약한 상상력 대신 후흑의 심장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대중이 원하는 결론을 만들어내 정의의 사도로 각광 받는다. 정의의 사도가 각광을 챙기고 떠나면 다음 세대는 그 부작용으로 고통을 받는다.

  물론 꼭 공명심이나 각광을 탐해서 직선적인 추측을 하는 것은 아니다. 직선적인 추정은 편리할 뿐 아니라 피로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세상 일이 어떻게 인천공항 활주로처럼 직선이겠는가. 모든 살아있는 것은 곡선이고 움직인다. 사람이 경직되는 것은 오직 죽었을 때뿐이다. 그래서 직선적인 추측은 죽음을 상징한다.(253쪽)

 

저자 김웅의 독서습관과 관련해서도 나랑 닮은 부분이 많아서 공감이 갔다.

  나이 먹어서 읽는 책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지금도 꾸준히 읽는 편이지만 마치 철새 같다. 내 것인 것 같지만 내 것이 아니다. 게다가 생각이 아집으로 굳어버려 그에 맞는 책이 아니면 불편해진다. 이해가 안 되는 책이 대부분이고 그럴 때면 늘 번역 탓을 하며 겸손과 교양이 들어가야 할 자리를 비난으로 메워버린다. 무엇보다 이제는 책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많아졌다.(263쪽)

 

책 중간중간에 지금의 그를 있게 만든 것들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데, 길동도사에 관한 얘기는 흥미로웠다.

길동도사 비슷한 사람에 관한 얘기는 여기저기서 종종 들었었지만,

그들 자체의 기행에 관한 애기였을뿐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는 처음이어서 흥미로웠다.

저자 김웅은 그때의 얘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빨래터에서 내가 미친 짓을 하자 사람들은 날 더 이상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800도로 타오르지 않았다. 주위의 시선, 경멸의 눈초리, 그렇게 두려웠던 것들이 실상 살을 뚫고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부끄러워도 사람의 시선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다. 내가 아무리 이상해도 사람들은 나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세상에는 정상적인 사람보다 비정상적인 사람이 더 많다. 남과 다르다고 숨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자신이 보고 있기 때문에 어디로 숨을 수도 없다.(270쪽)

오늘날의 김웅을 있게 만든 힘이 아닌가 싶다.

 

내가 법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이런 구절들도 있다.

  문제는 법률서비스란 되도록 받지 않는 것이 좋다는 점이다. 목적지가 바로 집앞이라면 굳이 차를 타고 갈 필요가 없듯이, 법률서비스도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되도록 이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법률서비스는 보약이 아니다. 불가피할 때 부작용을 각오하고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하는 일종의 치료약이다, 많이 이용한다고 몸과 정신이 건강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하지만 변호사가 늘어나면 굳이 다툴 것 없이 합의로 해결할 문제도 소송이나 고소로 이어지게 된다.(소송은 재판을 말하고, 고소는 피해자가 범죄 사실을 수사기관에 알리는 것을 말한다.) 소송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르침이라곤 다시는 송사에 휘말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 정도일 것이다.(283쪽)

 

재밌게 읽었고,

세상에는 이런 저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법이나 변호사, 검사,판사 등을 친근하게 또는 만만하게 생각할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적당히 거리두기를 할 것이다.

다만 김웅 님의 이 책을 통하여 검사 내부에서도 이런 자정의 목소리가 있다는 정도는 기억할 것이다.

기억하겠다는 말의 숨은 이면에는 가해자든 피해자든 누구든 간에 지금 이 순간도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사람 사는 이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지금 이순간에도 누군가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삶은 그렇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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