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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이곳 서재의 호평에 혹해서 구입하였으나,
사랑이야기라고 해서 잠시 주춤거렸다.
제목인 '여름의 끝'과 사랑이야기 라는 정보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내용을 짐작하겠기 때문이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짐작하던 대로의 그런 줄거리는 맞지만,
그걸 어떻게 묘사하고 표현해 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멋진 소설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 책은 사랑 얘기는 맞지만,
사랑에 대한 어떤 묘사나 표현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서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는 얘기를 무언중에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걸 남자와 여자의 사랑의 온도 차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남자와 여자라고 구태여 편을 나누지 않더라도 서로 어긋난 사랑은 이런 사랑이야기의 끊이지 않는 주제이니까 말이다.
같은 사랑을 놓고도 누구는 육체적인 사랑, 정신적인 사랑, 편가르는가 하면,
사랑의 행위를 놓고도 누군가는 사랑의 표현이었네, 누군가는 우정에서 비롯된거네 딴청을 부리기도 한다.
이 책은 두 사람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주변 상황을 에둘러 표현하는데 그게 결과적으로 두사람의 얘기가 된다.
그래서 일까,
반어법처럼 무심하게 드러나는 문장과 감정이,
무덤덤한 사람들의 일상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그런 속에서도 사랑은 얼마든지 짧은 시간에도 정열적으로 불타오를 수 있다고 얘기하는 듯 여겨졌다.
마을 사람들은 라스모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도 대부분 이곳에서 계속 살았다. 마을을 뜨는 쪽은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더블린이나 코크나 리머릭으로, 잉글랜드로, 어떤 이들은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다수가 되돌아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 또한 과장이었다.ㆍㆍㆍㆍㆍㆍ(9쪽)
다음의 문장은 많은 얘길 함축하고 있는 듯 하다.
엘리는 그렇게 될 줄 알고 사랑을 하게 된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자신이 한게 아닌 것도 아니고,
누구 다른 사람이 시키거나 상대방이 갈구한 것도 아니다.
행위의 주체가 자신이라는 얘기는 결과의 책임도 자신의 몫이란 얘기다.
자기도 모르게 하게 되는 일들을 조심해야 한다. 수녀들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무슨 일이든 그걸 행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117쪽)
남자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는데,
그러고 나서 셜해나로 향하다가 길가 술집에서 추억에 잠긴 것은 그날의 심란함을 떨쳐버리려는 노력이었음을 깨달았다. 여름이라는 계절로 인해 더욱 목가적으로 느껴졌던 우정을 되도록 길게 끌고 싶었다는 것이 정확한 진실이었다. 하지만 그 우정의 불가피한 종말이 얼마나 깊은 낙심을 안겨줄지는 에상하지 못했다. 그는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는 사랑받는 느낌을 사랑했고, 다정함만으로는 충분한 보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189~190쪽)
플로리언은 어쩌면 책임감도 없고 응석쟁이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한걸음 떨어져 객관적으로 바라보니,
이건 어쩜 이 책의 플로리언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남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우정을 오래 지속시키고 싶은 자신의 행동이 상대방에겐 얼마든지 호의 이상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것이고,
그리고 한가지 더 '사랑받는 느낌'을 사랑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걸, 바꿔 말하면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았다는 얘기이다.
상대방의 감정과 자신의 감정이 같은 종류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땐,
함구할 것이 아니라 감정을 명확히 표현해야 하는게 아닐까.
적어도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다정함만으로는 충분한 보답이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사랑에 대한 보답은 다정함이 아니다.
사랑에 대한 보답은 오로지 사랑 뿐이다.
ㆍㆍㆍㆍㆍㆍ플로리언은 엘리 딜러핸을 잊기 힘들기를, 적어도 그런 마음이 남기를 바랐다.(230쪽)
"좋은 여름을 보냈잖아요, 엘리."
플로리언은 거짓을 물리치며 부드럽게, 가능한 한 다정하게 그렇게 말했다. 거짓은 시간이 지나 진실이 드러나며 상처에 상처를, 고통에 고통을, 수치심에 수치심을 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시간의 엄중한 지혜가 두 사람 모두를 벌할 터였다 무자비하게.(234쪽)
그냥 가는 게 낫겠다, 엘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가지 않았다. "모든 일엔 끝이 있어요." 자신의 이야기를 전부 하던 날 플로리언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말을 이해했으며 한동안은 받아들이기도 했다.
플로리언은 넥타이를 매고 재킷을 입었다. 엘리의 컵받침에 살짝 엎지러진 차를 그가 행주로 닦았다.
"미안해요." 그녀가 속삭였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엇이 미안한지도 모른 채. 그러다 그건 모든 것이 미안하다는 뜻임을 깨달았다. 후회 아닌 후회로, 갈망으로, 눈물로 그를 귀찮게 해서, 용기가 없어서, 오늘 이곳에 와 모든 것을 더 어렵게 만들어서.
"나도 미안해요." 그가 말했다. "내가 일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
엘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가 따라준 차를 마셨다. 아무런 맛이 없었다.
"나한테는 그런 성향이 있어요." 그가 말했다, "입 다물고 있으면 안 되는 때 말을 아끼는."(251쪽)
어떤 의미에서든 이 책을 무척 재밌게 읽었고, 그의 다른 작품이 읽고 싶어졌다.
나이를 먹으면서 느끼는 것은,
수려하고 빼어나며 아름다운 문장보다는,
이 책처럼 수수하고 간결한 문장,
이렇게 일상이 모여 글이 되었는데도
뚯모를 감동을 주는 그런 문장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