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침내 다 읽었다.

새로운 단편집이라고 하지만,

난 중편으로 나왔던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를 읽었었고,

그걸 차치하고라도,

다 다른 얘기인것은 분명한데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작 '당신 인생의 이야기'도 그렇고,

이 책 '숨'도 그렇고,

하나의 관통된 주제를 누군가는 '인간적 통찰력'이라고 얘기하던데,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미래를 예견하는 퉁찰력이 대단한 것은 확실하다.

 

나도 물론 테드 창의 오랜 팬이고,

오래간만에 나온 그의 이 단편집이 많이 반가웠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주제가 과학적이고, 과학적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 대한 애정이 깔려있다고는 하지만,

작품으로서의 성취도가 아니라,

작품을 읽었을때 드는 나의 포만감은 조금 떨어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매 단편마다 어떤 감동이나 깨달음을 주기는 하지만,

SF소설 특유의 어떤 버라이어티하고 스펙터클한 맛은 없어서 하는 얘기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깔려있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반전의 매력 또한 없다.

 

오히려 과학적 개연성을 가지고 심도있게 접근한다.

그 깊이가 때론 지나치게 학술적이어서 지루하게 느껴졌고,

반전매력이 없는 것이 하나의 매력이었고,

그게 묘한 깨달음을 주었다.

 

사실 난 김상훈 님의 번역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SF소설 번역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모르는 척 툴툴거리기만 했었다.

바로 전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때 툴툴거렸던 것이 민망 할만큼 요번 소설집은 훌륭했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의 경우,

'리멤버'에서 연유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리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등 번역이 우리의 정서와 겉돌지 않아서 좋았다.

 

이 책의 내용이 흥미로웠지만,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이 책에 나오는 내용들이 황당무개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멀지않은 미래에- 우리주변에서 벌어질 수도 있다고 어느새 확신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SF소설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우울러 말과 글의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한번쯤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나는 좋았고, 읽는 내내 행복했다.

 

그 무엇도 과거를 지울 수는 없습니다. 다만 회개가 있고, 속죄가 있고, 용서가 있습니다. 단지 그뿐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58쪽)

 

이 문제는 부부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온갖 종류의 인간관계가 용서하고, 잊는 행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288쪽)

 

처음 글쓰기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종이에 적힌 글을 읽는다면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이야기의 현장을 체험할 수 있으리라 상상했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글은 그런 효과를 내지는 않았다. 코크와가 이야기를 할 때는 단지 단어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목소리와 손짓, 눈빛까지 모두 이용했다. 그는 몸 전체로 이야기를 했고, 듣는 사람도 같은 방식으로 그것을 이용했다.종이에는 그런 것들이 전혀 포착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헐벗은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을 뿐이었다.(292쪽)


댓글(6) 먼댓글(0) 좋아요(6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19-06-19 17:53   좋아요 2 | URL
와우! 이 책 아끼느라 사두고 아직 안 읽고 있는데 빨리 읽어야겠어요. =33 양철나무꾼 님이 별 다섯 개를 주셨다니!

양철나무꾼 2019-06-20 14:14   좋아요 1 | URL
님은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를 읽으셨나요?
이 책에서 중편인 그걸 빼고 보면 너무 얇아져서 좀, 아니 몹시 아쉬웠지만,
그래도 후회를 시키진 않더라구요.
빨리 읽으시라고 부추길 생각은 없어요.
님도 언젠가는 반드시 읽으실 것이고,
열광할 것이라 믿어의심치 않습니다~ㅅ!^^

카알벨루치 2019-06-19 18:15   좋아요 2 | URL
저도 읽다가 이책 저책 왔다갔다 하기만 하는데 읽고픈 충동이...근데 충동이 행동화되길 ㅋㅋㅋ

양철나무꾼 2019-06-20 14:20   좋아요 1 | URL
저도 예전에는 그랬는데,
이젠 책을 한권을 완전히 끝내고 다른 책으로 넘어가는게 좋더라구요.
그렇게 된 이유는 기억력과 상관이 있는 것 같아요.
읽을 당시엔 그래도 경계가 나뉘는데,
시간이 흐로고나면 그 무렵 읽은 책들이 내용이나 등장 인물 따위가 뒤죽박죽 짬뽕이 되더라구요.

님의 충동이 행동으로 연결되리라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고양이라디오 2019-06-19 23:08   좋아요 1 | URL
저도 무척 재밌게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양철나무꾼 2019-06-20 14:22   좋아요 1 | URL
벌써 읽으셨군요.
님과 같은 책을 읽은 동질감을 느낄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오늘의 메뉴는 제철 음식입니다 - 박찬일 셰프의 이 계절 식재료 이야기
박찬일 지음 / 달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ㆍㆍㆍㆍㆍㆍ뜨거운 밥을 퍼서 양념장 해서 입에 딱 넣으면 '나 잘 살았다, 오늘 떠나도 여한이 없다'고 느껴져. 음식이 주는 그런 행복이 있어."

어느 방송에서 이영자가 한 말이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맛있는 음식 한 그릇을 먹고 '나 잘 살았다, 오늘 떠나도 여한이 없다'고 말하게 되진 않는다.

그저 '맛있게 잘 먹었다'정도가 내겐 최고의 찬사이다.

 

요즘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방송 따위를 보면 먹방이 대세다.

먹는 것도 그냥 맛있게 잘 먹기만 해선 부족하고,

'맛있게', '잘'과 더불어 '많이' 먹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고,

그러다 보니 인터넷에선 누가 카메라 앵글 밖에선 먹은 걸 '다 토한다더라' 해가며 이슈 몰이를 하기에 이르렀다.

먹방의 취지는 이영자의 저 말처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나 잘 살았다, 오늘 떠나도 여한이 없다'고 하는 것일텐데,

그런 사람이라면 먹은걸 다 토하는 만행은 저지릴 수 없을 것 같다.

 

'박찬일 셰프의 이 계절 식재료 이야기'라는 소제목을 단 '오늘의 메뉴는 제철 음식입니다'를 읽었다.

어디선가 박찬일은 셰프라는 말보다 주방장이라는 말을 좋아한다는 글을 읽은 것 같다.

그렇다면 원하는대로 '박찬일 주방장의~'라는 수식어가 그럴 듯하지 않았을까 잠시 딴지를 걸어보고 싶었을 뿐이고, ㅋ~.

 

박찬일 님의 요전 책 '오사카는 기꺼이 서서 마신다'를 좀 재미없게 읽었다.

어쩜, 여행 안내서 내지는 맛집 안내서 형태로 된 정보를 전달하는 책을 가지고.

재미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컬 하지만,

박찬일 님의 글이 주는 매력을 느낄 수 없어서 좀 아쉬웠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고,

바로 다음 책이 나와줘서 감사할 일이다.

내용은 뭐 색다를 것이 없다.

박찬일 님의 전작들을 즐겨 읽은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접했을 얘기들을,

말로 풀어내도 이렇게까지 맛있었을까 싶은 얘기들을 글로 맛깔스럽게 버무려낸다.

 

11쪽에,

'전국 대합 고교야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전국 '대항'이 아닐까 싶다.

 

내가 박찬일 님의 문장에 혀를 내두르는건 이런 문장 때문이다.

노량진수산시장은 가게별로 주 전공이 있다. 대구를 잘 다루는 '은하네'가 읶고, 문어라면 '진성수산'이요, 고등어라면 눌러만 봐도 뭘 주로 먹고 살았는지 아는 '진성집'이 있으며, 병어 한평생의 '품길상회'도 있다.(72쪽)

가게마다의 전공을 나누는건 오랜 발품을 파는 사람들이라면 알아낼 수 있는 정보라고 쳐도,

고등어를 눌러만 봐도 뭘 주로 먹고 살았는지를 안다는 표현은,

고등어가 한가지 먹이만을 먹는 어종이 아니라,

아무거나 먹어치우는 잡식성이라는 걸 안다는 전제 하에서 얘기되어지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걸 먹는 방법이 좀 그렇다. 불판 위에 그대로 올려 구워버린다. 하긴, 어느 텔레비전 '먹방'을 보니 해물탕에 산낙지를 넣는 장면에서 박수를 쳐대는 출연자도 있지 않았나. 자막에 '산낙지, 산 채로 투하!' 뭐 이런 저렴한 문장을 새겨넣으면서. 인간이 처먹는 거야 본디 대상에 고하가 없지만, 그걸 남에게 보여줄 때는 예의가 있는 법이다.(99쪽)

장어를 얘기하며 등장하는 이런 문장도 편하지는 않았다.

이 글의 논리대로라면 장어만 그렇겠으며 산낙지만 그렇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먹방'에 대한 경계의 끈을 다잡게 되는데,

먹는 대상은 물론이거니와,

먹는 걸 남에게 보여줄 때에도 예의는 필요한 법이니까 말이다.

 

한국의 기후 온난화에 따른 포도생육에 대한 얘기도 유용했고,

선상에서 먹게 되는 갈치회 얘기도 재밌었다.

ㆍㆍㆍㆍㆍㆍ갈치는 선상에서 회가 된다. 선장님이 잘 벼린 칼날로 회를 뜨는데, 족보도 없는 칼솜씨이건만 속도와 효율 하나는 끝내준다. 갈치 살점이 척척 발라져 접시에 오르고, 나는 그저 나무젓가락을 딱, 하고 갈라서 깔아둔 김치를 지분거리며 횟감을 기다리면 된다. 회 맛이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탄탄하게 씹히다가 이내 녹아버리는, 갈치가 먹은 온갖 바다 생물의 맛이 응축된 살점이 혀에 축축하게 젖는다.(191쪽)

 

요즘은 어지간한 음식은 계절에 상관없이 나와서 딱히 제철음식이란 것이 없어졌다.

어떤 재료들은, 이를테면 오징어 따위는 더 이상 잘 잡히지 않아 서민의 식재료라고 할 수가 없다.

(며칠 전, 작은 물오징어 두 마리를 이만원에 구입하였다.)

 

이 책의 글들은 '하퍼스 바자'와 '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것을 엮은 글이란다.

어디선가 봤던 느낌이 들었던 것은 그런 연유인것 같다.

다시 읽어도 충분히 재밌고 글맛이 좋았다.

다른 책이 나와도 기꺼이 사서 읽을 의향이 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9-06-17 17:10   좋아요 4 | URL
99쪽 문장을 보니 인간의 음식이 되는 생물들의 최후를 촬영하는 미디어의 시선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살아있는 닭의 모가지를 칼로 쳐서 죽이는 방식이 잔인하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미디어는 그런 장면을 보여주지 않아요. 그러나 펄펄 끊는 탕에 문어가 산 채로 넣어지는 장면과 살아있는 낙지를 잘게 썰어 낙지회로 만드는 장면은 편집없이 그대로 나와요.

양철나무꾼 2019-06-18 08:44   좋아요 3 | URL
님의 얘길 듣고 보니 더 실감이 나네요~^^
우리는 자꾸 동물이나 어류 따위에 대해서만 언급하는데,
시선을 조금만 바꾸면 식물에도 적용시킬 수 있을거 같아요.

그나저나 날 더운데 이 여름 잘 지내시나요?
따로 댓글을 달진 않았지만,
가끔 님의 서재에 가서 글을 읽다보면,
님의 독서편력사랄까, 글쓰기 스타일의 변천사 따위를 엿볼 수 있어서 좋아요.
비슷한 시기에 알라딘 서재를 시작한 동지애 같은거 말예요.

님의 꾸준한 독서생활과 글쓰기생활을 응원하겠습니다~ㅅ!^^

cyrus 2019-06-18 12:17   좋아요 3 | URL
그러고 보니, 내년이면 알라딘 서재에 활동한지 딱 10년이 되네요. ㅎㅎㅎㅎ
10년 전에 알라딘 서재에 활동했던 분들의 닉네임이 뭐 있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네요. 우리 20년까지(그때도 알라딘이 있을까요? ㅎㅎㅎ) 쭉 여기서 무탈하게 글을 쓰면서 지내요. ^^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 - 독보적 유튜버 박막례와 천재 PD 손녀 김유라의 말도 안 되게 뒤집힌 신나는 인생!
박막례.김유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이율'이었나,

'죽을 수도 살 수도 없을 때 서른은 온다'는 제목의 명언집이 있었다.

그때 그 제목을 보며 서른이란 나이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 같다.

이번에 1947년생, 우리 나이로 일흔 셋의 할머니가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는 제목의 책을 내셨다.

 

심심할때면, 아니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우울할때면,

박막례 할머니의 유튜브 채널을 찾아서 봤다.

지난 가을이 경계가 되어 웃음을 잃어버렸지만,

산 사람은 살아지더라고 세월은 그렇게 흘러만 갔다.

우울의 늪에서 빠져 나와야지 할때 박막례 할머니의 유튜브를 찾아서 보고 생각 없이 한 번씩 웃기도 했다.

 

언젠가 얘기했었던 것도 같은데,

박막례 할머니 말고 즐겨보는 유튜버는 '리도동동'이다.

이 사람은 영화를 좀 제대로 배운 것 같은데,

홍콩 영화의 아류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웃음 코드를 지녔다.

여기선 리도동동의 아버지 켈빈의 활약이 눈부시다.

리도동동의 아버지 켈빈은 박막례 할머니 만큼의 연세는 아니신 것 같지만,

유튜버의 연령대를 올려놓는데 한 몫을 했다.

 

유튜브가 대세라고는 하지만,

난 먹방이라던가, 여행, 젊은 친구들의 브이로그, 라이브 방송 따위로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데,

이런 할머니, 할아버지 들이 등장하는 영상이 오히려 편안하게 와 닿는다. 

물론 이런 영상의 촬영, 편집, 업 로드 까지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하면 더 좋겠지만,

중간에 손녀나 아들 젊은 감성이 끼어들어 올드함을 중화시키는 것도 같고,

이것들도 고도의 전략이라는 생각도 든다.

 

영상 속에 보여지는 할머니는 쿨하고 멋져서 부러움의 연속이었는데,

책을 통해서 할머니의 간난신고를 알게 되었다.

할머니가 그동안 편하고 여유로운 삶만을 살았다면,

유튜브 속의 그런 행복한 영상, 긍정적으로 즐기고 누리는 영상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할머니가 이렇게 탄탄한 유튜버가 될 수 있었던 또 한가지 이유는 CJ라는 대형기획사랑 손을 잡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장 짠하고 마음 아팠던 부분은 독일에서 있었던 유럽 최대 가전 전시회의 삼성 행사에  참석한뒤 남긴 글을 보고나서이다.

 

난 진짜 다음 생엔 결혼 안 하고 기계랑 살 거다.

기계가 다 해주더라?

진짜 남편 데리고 살면 손해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해줘야 되고 빨래 해줘야 되고 옷 다려줘야 되고 밤에는 좋아하는 드라마 못 보고 스포츠 틀어야 하고ㆍㆍㆍㆍㆍㆍ.

기계하고 살면 그런 일 없겠더라. 걔는 말도 없고 일 다 도와주고 조용하고 바람도 안 피고 좋겠더라.

남자하고 살면 항시 마음이 불안할 때가 있더라.

내 남편도 결국 바람 나가꼬 나갔다. 아주 죽고 없어져버리니까 마음이 편해.

ㆍㆍㆍㆍㆍㆍ(273쪽)

 

책 뒤에 보면 '막례쓰 명언 대찬치'라고 해서 이런 구절들이 나온다.

 

*왜 남한테 장단을 맞추려고 하나. 북 치고 장구 치고 니 하고 싶은 대로 치다 보면 그 장단에 맞추고 싶은 사람들이 와서 춤추는 거여.

*고난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여. 내가 대비한다고 해서 안오는 것도 아니여. 고난이 올까 봐 쩔쩔매는 것이 제일 바보 같은 거여. 어떤 길로 가든 고난은 오는 것이니께 그냥 가던 길 열심히 걸어가.

*귀신이고 나발이고 난 무서운게 아무것도 없어. 다시 내 인생을 돌아다보기 싫어. 내 인생이 제로 무섭지. 네 인생만치 무서운 게 어디 있어.

*이쁜 것은 눈에 보일 깨 사야 돼요. 내년에는 없어요. 뚱뚱하고 날씬해 뵈는 것에 집착하지 마세요. 내 맘에 들면 사는 것이니까.

*다이어트면 다이어트지. 다이어트 음식 같은ㆍㆍㆍㆍㆍㆍ놀고있어. 살 빼려면 처먹지를 말어.

*화장품은 웃으면서 바르세요. 주름이 쫙쫙 펴지게.

*꽃은 꺾으면 안 돼. 놓고 봐야제.

*여행 갔다 오고 나면 세상이 확 달라져. 내가 한 10년은 젊어진 것 같고 내가 몰랐던 세상을 알게 된 것 같고,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거야.

*다친 것도 추억이여. 내가 도전하려고 했다가 생긴 상처라 괜찮아.

*여행은 눈으로 하지만 추억은 돈으로 만들어야 된다아?

 

뭐, 자서전이나 이런 건 아니어서 그리 심각하진 않았고,

지극히 상업적인 측면도 배제할 수 없었지만,

박막례 할머니만의 삶의 자세를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필로 쓰기 - 김훈 산문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훈을 읽다가 울컥하였다.

울컥한 대목은 이 대목이었는데, 울컥한 이유는 상상에 맡기겠다.

내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소와 그 노인의 아내의 묘소가 바로 이웃이다. 묘비를 보니까, 노인의 아내는 40대에 죽었고 자식은 없었다. 노인은 늘 혼자서 아내의 무덤에 왔다. 제사음식도 없고, 절도 하지 않았다. 낫 한 자루와 호미 한 개를 들고 와서 풀을 깎고 잡초 뿌리를 뽑았다. 그 묘지에는 넝쿨이 우거져서 봉분을 덮었다. 걷어내려면 한나절이 걸렸다. 노인은 힘이 부쳐서 자주 쉬었다. 나는 노인의 작업을 거들어주었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갈 때, 노인은 무덤을 향해서 나 간다, 라고 말했다.(24쪽)

시동이 걸린 건 장기에서 象상을 잘 쓰던 사람 얘기에서 였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을 더 눈물을 찔끔 거리기도 하고, 울컥하기도 하고, 꺼이 꺼이 울다가 대성통곡을 하기도 하였다.

울기는 하였지만 마음 속에 애잔함이 남아있다기보다는,

오래간만에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그리하여 지금 황홀하고 행복하다.

이게 내가 김훈에게 바라던 글이고, 그런 맞춤한 김훈을 읽으면서 누리는 행복이다.

단정하고 똑 떨어지는 느낌.

입말로 쓰여진 것이 아닌데도,

읽다보면 소리내어 읽고 싶어지고,

그렇게 발음하다보면 묘한 쾌감을 느낀다.

 

처음 연꽃이 등장하는 것부터가 그렇다.

시각적인 연꽃이 등장하는게 아니라,

소리내어 읽히는 청각이 먼저 오고,

연꽃 내음 후각이 뒤따른다.

그리고는 이내 차례차례로 온갖 공감각이 잘 버무려져서 몰려드는 느낌이랄까,

흡족하게 온 감각기관을 열고 온몸으로 샤워하듯 받아들이면 된다.

 

'호수공원의 산신령'만 하더라도 읽고나면 호수공원을 사뿐사뿐 꽃이 등장하는대로 동선을 밟으며 산책을 한 느낌이 든다.

슬리퍼를 신고 어슬렁 어슬렁 거리는 느낌이 아니고,

슬립온 따위를 단정히 꿰어신고 또박또박 한걸음씩 내딛는 느낌이랄까.

모든 꽃이 지는 순간을 어슬렁거릴게 아니라,

원고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쓰듯이 또박또박 한걸음씩 내딛으며 온몸으로 누리고 맞이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쩜 이 책은 너무 젊거나 어린 사람들은 읽어도 그 맛을 모를 수도 있겠다.

나도 아들의 일을 겪지 않았으면, 매일 만나는 환자의 많은 부분이 노인인데도 불구하고,

김훈의 노년이 이렇게 깊숙이 이해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호수공원의 산신령' 속 노인이 듣던 레파토리는 남인수와 배호이다.

요즘 내 핸드폰 속 주요재생 목록은 최백호의 '아씨', 정미조의 '개여울', 김진호의 '가족사진' 따위이다.

 

이 글을 인용하며 책을 읽은 소감을 갈음하여야겠다.

나는 말하기보다는 듣는 자가 되고, 읽는 자가 아니라 들여다보는 자가 되려 한다. 나는 읽은 책을 끌어다대며 중언부언하는 자들을 멀리하려 한다. 나는 글자보다는 사람과 사물을 들여다보고, 가까운 것들을 가까이하려 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야, 보던 것이 겨우 보인다.(76쪽)

 

매년 만나는 봄이지만 올봄은 유난히 흐드러진다.

그런 흐드러짐이 오히려 사무친다.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5-02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3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갱지 2019-05-02 20:08   좋아요 1 | URL
저만 이 봄에 눈시울이 붉어져 쌌는 건 아닌가보아요. 마음 뎁혀지는 글, 잘 보고갑니다-

양철나무꾼 2019-05-03 15:50   좋아요 1 | URL
그러고 보면 봄에 피는 꽃들은 눈시울 붉히지 말라고 대신 붉게 흐드러지는게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님의 붉어진 눈시울은 따땃한 햇볕이 어루만져 줄거라 의심치 않습니다.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2019-05-02 2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3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3 0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3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5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6 0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4 2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7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7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9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31 2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4 1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4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7 1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10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면술사 : 마크 트웨인 단편집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 3
마크 트웨인 지음, 신혜연 옮김 / 이소노미아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어준을 챙겨듣기 위하여 팟캐스트를 검색하다가,

'지.라.시.'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거기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라는 코너 시작 부분에 웃음에 관한 격언이 나온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격언 한줄을 마크 트웨인이 담당해도 좋겠다 싶었다.

책의 끝부분 편집 여담에 등장하는 "인간에게는 아주 효과적인 무기가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웃음"(205쪽)이라는 인용구를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이 책은 그러니까 여러가지 면에서 획기적인 책이지만,

내가 고전을 아우르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좀 재미없었다.

이 책의 덕목으로 얘기되는 '덜하지도, 넘치지도 않은 번역' 이,

내겐 약간 겉돌게 여겨졌다.

책의 처음 등장하는 '최면술사'의 경우, 화자가 어린 남자 아이 정도되는 것 같은데,

내겐 여성의 어투로 읽혔다.

누가 내게 어린 남자 아이와 여성의 어투가 어떻게 다르냐고 한다면 딱 꼬집어 얘기하지는 못하겠지만,

어린 남자 아이의 호기로움과는 비교되는 여성의 섬세함을 지녔달까?

암튼 내겐 그렇게 읽혔다.

'최면술사'의 일부이다.

힉스는 타고나기를 정직한 사람이었지만, 나는 그런 거추장스러운 덕목이 없었거든요. 몇몇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랬다는 얘기입니다. 힉스는 눈에 보이는 것을 본 대로 얘기했지만, 나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보았고 최대한 살을 덧붙여 얘기했어요. 힉스는 상상력이 형편없었지만 나는 남들보다 갑절은 뛰어난 상상력의 소유자였거든요. 타고나길 차분한 성품인 그와 달리 쉽게 흥분하는 성격이었습니다. 말로 표현하려고 하면 말문이 막히기 일쑤였죠. 반면 나는 내가 본 환상에 사전에 나오는 온갖 미사여구를 쏟아붓고 혼까지 남김없이 다 털어 넣었답니다.(25쪽)

 

앞의 여덟편은 산문이고, 뒤의 두편은 단편 소설이라는데,

사실 그 경계도 잘 모르겠다.

 

또 하나는 공들여쓴 것 같은 글과 대충 쓴 것 같은 글이 혼재한다는 느낌이었는데,

이 정도로 글쓰기가 쉬운가, 글을 묶어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내기가 쉬운가, 하는 씁쓸한 생각을 했다.

내가 마크 트웨인에 대해선 1도 모르면서 오늘날의 정서로 옛날 글을 판단하려해서 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이 태어나기까지 편집과 출판에 들인 공은 곳곳에서 엿볼 수 있었다.

단정한 하드커버와 띠지, 책배의 파란색 컬러링 따위는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책배의 컬러링은 수작업이라는데,

1쇄독자를 향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2쇄부터는 없어진단다, 아쉽다.

 

암튼, 마크 트웨인은 해학과 기지의 작가로 알려졌는데,

난 이 책에서 해학과 기지의 뉘앙스를 잘 읽어내지 못하였다.

'톰소여의 모험', '허클베리핀의 모험', '왕자와 거지'를 쓴 마크 트웨인의 다른 면을 보고싶은 사람이라면 읽어봐도 좋을 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