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릴 적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컸다.
하루종일 말을 나눌 친구라곤 복덕방에 모이는 할아버지 친구들과, 노인정에 모여 TV를 보는 할머니 친구들이 전부였다.
그때 포차 떼고 장기를 두어도 맨날 날 이겨 먹는 복덕방 할아버지들과 텔레비젼에 나와 강원도 정선 아리랑을 멋지게 부르는 하춘화가 내 '맞수'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학교를 들어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면서 또래의 친구들이 생겨났다.
개 중엔 나와 경쟁관계도 있었으니, 이때부터가 진짜 '맞수'였을 것이다.
'힘, 재주, 기량 따위가 서로 비슷하여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상대'를 '맞수'라고 한단다.
나는 '맞수'라는 말이 갖는 '경쟁 상대'라는 의미보다는, 나를 노력하게 하고 내 스스로를 변화시키도록 '자극하는 대상'이라는 데 방점을 찍고 싶다.
맞수는 내가 이기고 쓰러뜨려야 하는 경쟁 상대나 적이 아니라,
나를 노력하게 하고 내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그리하여 나를 깨어있게 하는 '동무'이다.
나이가 들면서 맞수가 없어졌다.
직장과 가정은 내게 어떤 경쟁관계도 요구하지 않았다.
더 이상 나를 자극하던 대상들도 없다.
"애인을 만들어봐...그럼, 일상 생활에서의 무료함, 자잘한 권태는 거기에 묻혀서 아무것도 아냐..."
하는 누군가의 자상한 충고에 나는,
일 잘하는 게 멋있어 선택한 애인은...일이 먼저라며 나에게만 올인하지 못하니까 시큰둥해지더라고 했던 것 같다.
반면, 나에게만 올인하겠다는 애인은... 내 할일 다하고 남는 자투리 시간만을 자기에게 할애해도 좋다는데, 왠지 내가 그의 또는 그가 나의 자투리 시간 땜빵 용인거 같아 끝내버린 얘기도 한것 같다.
표면적인 얘기는 애인이나 연인 등 그렇고 그런 것들이었지만, 난 거기서 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대상(상대)의 부재를 보았다.
나를 깨어있게 하는,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눈을 반짝이고,
발걸음이 가벼워져 구름 위를 걷는 듯 엉덩이를 살살 흔들어가며 사뿐히 걷고,
눈을 살짝 내리깔고 콧소리를 살짝 섞어 애교를 떨고,
그럴 수 있는 상대를 못 만난 때문이라고 툴툴 거렸지만,
한걸음 떨어져 내면을 들여다보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어느새 그 무엇도 나를 깨어있게 할 정도로, 경쟁을 할 정도로 치열하지 않아졌다.
내 삶에 제일 앞에 놓을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
그동안의 내가, 일에 나의 모든 에너지와 열정을 바쳤다면...이젠 일을 하면서 에너지와 열정이 샘 솟는 그런 일을 찾고 싶다.
그동안의 나로 미루어 찾아야 하는 건 일이 아니라 대상일테지만 말이다.
아무리 좋아하던 것이라도 일로 하게 되면...치열한 경쟁 구도로 만들어 버렸었던 그동안의 내 모습이 맘에 든다는 건 아니다.
무엇인가 나를 깨어있게 하는 그 대상을 만났을때,
그게 일이 되어 버리고,
경쟁상대=맞수가 되어버려 치열해지고,
그리하여 내가 좋아하는 걸 싫어하게 될까봐, 잃게 될까봐...지금도 좀 두렵다.
그렇다고 머리와 마음과 몸을 다 따로따로 움직여가며,
'외로워, 무료해, 권태로워...'하면서 에너지를 최대한 분산시키며 살고 싶지는 않다.
내 또래의 다른 여인네들처럼 꼬박꼬박 네일케어나 피부관리를 받으러 다니거나...
창 넓은 카페에서 브런치를 즐기는 세련된 바지런함 또한 절대 따라갈 수도, 따라가고 싶지도 않다.
더 늦기전에, 내 자신을 깨어있게 하는 게 무엇인지...내 자신의 내면과 마주앉아 곰곰히 고민해 보아야겠다.
그런데, 아직 난 내 자신의 내면과 다른 언어나 다른 음역대로 얘기하나 보다.
아직 답을 찾을 수 없다.
게임의 명수
이언 M. 뱅크스 지음, 김민혜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이언 M.뱅크스'가 쓴 <게임의 명수>를 보면, 구게라는 게임플레이어가 나온다.
그는 실은 인간이 아니다, 작가가 만들어낸 컬쳐란 종족으로 죽지도 않는다.
컬쳐란 종족에는 돈이란 개념이 없고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에, 자연 내기 게임도 시큰둥해진다.
삶에 의욕도 없다.
구게는 게임의 일인자이다.
게임을 그렇게 시큰둥하게 하다가 그만 위기에 몰리게 되고 속임수를 쓰자는 유혹을 받게 된다.
실제로 속임수를 쓰지 않았지만, 속임수를 쓰자는 유혹을 받아 들인걸 빌미로 다른 (아자드)제국과의 게임을 강요받는다.
다른 제국과의 게임은 실제 전쟁과 흡사하다.
처음 구게는 자신의 종족, 컬쳐의 방식대로 게임에 임하다가 위기에 몰린다.
점점 게임에 익숙해지면서, 아자드 제국의 문명에도 익숙해지고 아자드 제국의 이질적 문화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야만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냥에까지 동참하게 된다.
구게는 다른 문명에 익숙해지고 이질적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게임에 이기게 되고,
구게 자신은 느꼈는지 못 느꼈는지 모르지만...다른 제국과 게임을 하는 동안 적어도 치열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을때, 가정의 소중함마저 깨닫게 된다.
구게의 진정한 맞수는 구게와 게임을 하였던 다른 제국의 게이머들이 아니라, 구게를 유혹하고 게임으로 내몰아 치열하게 살도록 한 '모린-스켈'이란 드론이 아니었나 싶다.
이창호의 부득탐승不得貪勝
이창호 지음 / 라이프맵 /
2011년 8월
'맞수'하면 아무래도 바둑을 빼놓을 수 없고, 이창호와 그의 스승 조훈현이 생각난다.
그런 이창호의 책'부득탐승(不得貪勝)'이 나왔다, 어떤 책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바둑계에는 내제자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내제자란 일본문화에 깊숙이 뿌리내린 도제(徒弟) 제도가 바둑계에 접목된 형태로, 스승의 집으로 들어가 숙식을 함께하며 기예를 배우는 제자를 말한다.
선생님은 이 일로 “이제 겨우 서른둘인데 무슨 제자냐”, “창호네가 전주의 알부자라던데, 아마 돈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매달 상당한 수업료를 받고, 입단하면 거액의 사례금을 받기로 했다더라”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억측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내제자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선생님이 일본유학 시절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 선생의 내제자로 들어가 아무 대가 없이 가르침을 받았듯이, 나에게 또한 대가 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다.
내가 그렇게 선생님 댁으로 들어섰을 때 불과 몇 년 뒤 우리 사제가 타이틀을 놓고 치열하게 맞서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과 나는 물론, 선생님의 가족도 나의 가족도 그 누구도 내가 가까운 장래에 ‘절대자 조훈현’으로부터 타이틀을 쟁취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훈현이 한국바둑 최초로 내제자를 받아들였다”는 소식이 관철동(한국기원 종로회관)에 퍼지자 선생님의 동료들은 일제히 “호랑이새끼를 키워서 나중에 물리는 거 아니냐”며 농담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특유의 속도감이 배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유쾌하게 웃었다고 한다.
“제자에게 지면 행복한 거지. 그래도 한 10년은 걸릴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