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상이는 마음이 어수선하다. 서희를 생각하는 마음을 용이에게 푸념하듯 털어놓고 있는 길상. '지금 애기씨는 내게 있어 한 마리의 꾀꼬리새끼란 말일까? 나는 애기씨를 위해 누구의 목을 비틀고 있는 게지?' (5권206쪽) 길상이도, 서희도, 상현도, 용이도, 월선이도, 용정촌에 있는 사람들도, 조선 땅에 있는 사람들도 죄다 불쌍하구나.
'서희의 대상으로서 상현은 사모(思慕)와 기혼자(旣婚者), 이 두 상극선상(相剋線上)의 존재며 길상은 야망(野望)과 하인(下人),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상극된 것은 아니다. 야망은 불순물이다. 불순물은 혼합될 수 있는 것이다. 상현과 사이에 질러놓았던 지름목은 길상과 서희 사이에는 제거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드러내려는 서희의 모험을 길상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서희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다던 길상은 그러나 그것만은 용납할 수가 없없다. 서희와의 거리는 절체절명의 것이다. 왜냐? 자존심 따위, 사내로서의 오기 따위 그런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랑의 순결 때문이다. 순결을 지키고 싶은 때문이다. --(중략)--서희의 보다 깊은 영혼 속에는 숙명적인 길상과의 애정이 잠을 자고 있었다 할 수는 없을까. 무시무시한 내적 투쟁은 과연 야망의 좌절에서만 빚어졌다 할 수 있을까. 강렬한 질투, 강렬한 패배감, 광적인 증오심-.(6권12쪽)
-심장을 쪼갤 수만 있다면 그 가냘픈 작은 벌레에게도 주고, 공작새 같고 연꽃 같은 서희 애기씨에게도 주고, 이 만주 땅 벌판에 누더기같이 찾아온 내 겨레에게도 주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운명신에게 피 흐르는 내 심장의 일부를 주고 싶다.'(6권 20쪽)
서희는 자존심을 누르고 길상이 살림을 내어주고 결혼할 거라는 소문의 주인공 옥이네를 만나 침모로 자신의 집에 가자 청하지만 옥이네는 거절한다. 팽팽한 신경전은 둘이 탄 마차가 사고를 당해 서희가 병원에 눕게 되면서 조금 누그러진다. 그리고 드디어 움직이는 환과 그 주변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자넨 잠자코 있어. 지랄 같은 소리 아니한다 해서 왜년을 데리고 사는 그 누구더라? 이름 한번 유명하지. 이인직, 지금은 경학원 사성 이인직보다 위대할 것 한푼 없다고.'(6권 248쪽)
'몇해 전 일본으로 건너갔던 용운이 무슨 심산으로 왜중의 가취법(嫁聚法)을 들고 나왔느냐'(337쪽)
신소설 <혈의 누>를 쓴 이인직과 <님의 침묵>의 한용운. 이렇게 둘이 다 친일파로 언급되었으나 아는 이름들이 나오니 괜히 반가웠다. 교과서에 박힌 이름들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라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