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머니
이시다 이라 지음, 오유리 옮김 / 토파즈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손에 쥐었을 때의 당혹감이란..  제목부터가 ‘빅 머니’다. 거기에 표지에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매서운 눈빛으로 앞을 노려보는 젊은 남자의 옆얼굴이 푸른 색채로 그려져 있다.  책 자체에서 흐르는 남성적 경향의 분위기는 ‘과연 내가 이 책을 읽어낼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서게 만들었다. 
난 학교에 다닐 때도 경제과목에 약했었다. 뭐, 둔하디 둔한 내 두뇌 탓도 있겠지만 세상물정 모르는 막내 특유의 어리숙함도 한 몫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수요니 공급이니 하는 것도 골치 아팠고, 인플레이션이 어떻고 디플레이션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는 도무지 말끔하게 정리되어 와 닿지를 않았을 정도다.  그러니 당연히 주식투자는 먼 나라 이야기였고, 그 흔하다는 펀드통장 하나 만들어 볼 생각도 못해봤다. 

이런 내가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었다는 건 참으로 기특하고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아마도, 비록 내가 경제지식이 종잇장처럼 얄팍하고 주식이니 세계경제동향에 대한 정보에 귀를 닫고 산다고 해도 커다란 사회적 분위기-정치,경제,문화를 아우르는- 속에서 그 흐름을 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사실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이 책 안에서 랜덤워크니, 신용거래니, 위탁보증금이니 하는 감잡을 수 없는 용어들이 자주 등장하긴 하지만, 소설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닌데다가 이 책이 단순히 ‘빅 머니’를 향한 무모한 남성들의 한탕주의를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나름의 현대사회에 대한 작가의 사유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절대로 ‘숫자들이 노래하고 그래프가 춤을 추는 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작가는 시라토의 입을 통해 말한다.  “이 미친 시대에 제아무리 발버둥쳐봤자 마켓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  시장의 우산은 전 세계를 뒤덮고 있다. 서민처럼 행동하는 것도, 선량한 척 하는 동작도, 무지한 움직임도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p.10)고.  이 말에 동감할 수 있다면 이 책을 읽는 것도 그리 무해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든다.  나 같은 사람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IMF의 파도를 타야했고, 명문대를 나오고도 취업을 하지 못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정신병에 걸린 아들을 둔 이웃 할머니의 넋두리를 들어야 했으며, 경제관련 뉴스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적용할 능력은 갖추지 못했지만 불경기를 걱정하는 목소리에 불안감을 느끼기는 하니까 ‘마켓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작가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돈’에 대한 생각도 다시 해보게 된다.  “투자자가 취급하는 유리처럼 맑은 돈과, 마켓의 ‘마’자도 모르는 얼치기가 피와 땀으로 마련한 돈. 그 어느 쪽의 돈이나 똑같은 가치로 갖고 있다.”(p.207)라는 글 앞에 한참을 망연자실했다.  난 지금까지 돈은 ‘성실과 근면’의 대가라고 생각했다.  피와 땀이 어린 돈이야말로 신성하고 소중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작가는 피와 땀으로 마련한 돈이 얼치기의 돈이란다.  물론, 이 말은 소설 속에서 사채업자에게 지불해야할 이자를 마련하기 위해 피를 팔아야 하는 홈리스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소설 여기저기에서 반복된다.

소설 속 고즈카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시대가 변했어.  이제부터는 청운의 로망도, 다같이 일하고 다같이 잘 살자는 공동성장도 기대할 수 없어.  메이지의 걸출한 인물은커녕 쇼와의 근면한 위인조차 새 시대의 모델이 되지 못할 걸세.”(p.304)

근면과 성실, 검소와 절약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필요한 걸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이에 대한 작가의 대답은 냉철하고 현실적이다.  “일본인들은 돈을 뒤가 구린 것, 더러운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돈 가지고 돈 버는 일은 땀 흘리지 않고 득을 보는, 나쁜 일이라고 본다고.  이제는 그런 단계를 넘어설 필요가 있지 않을까?”(p.302)라며 슬쩍 운을 떼더니만 “나는 젊은 세대의 몇 퍼센트가 단순히 고객의 돈을 맡아 수탁거래하는 데 그치지 말고 자기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고서 마켓의 거친 파도를 헤쳐나가길”(p.305)바란다면서 앞으로는 ‘칼과 대포, 전함이 아니라 통화와 주식, 채권을 취급하는 것으로’ ‘시장이라는 새로운 프런티어’의 ‘예측불허의 파도를 넘어 이 나라의 부를 키워나갈 한 사람의 자유로운 병사가 되면 되는 거야.’라고 충고한다. 

‘돈’에 대한 나의 고리타분하고 경색된 생각이 조금 더 넓게 확장되고 유연해지는데 도움이 되는 충고였다.  천박한 자본주의 속에서 살면서 혼자서 고고한 척 해봤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격을 가진 게 바로 나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과 경제의 그 시퍼런 칼날의 예리함이야 IMF를 통해 충분히 겪어보지 않았나.. 그러고도 아직 그 칼날의 위험 앞에 대책 없이 무딘 안전불감증을 자랑할 배짱이 남아있다면 비정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세계를 지배하는 ‘돈’에 대한 현실감각만을 소설 속에 드러냈다면 이 책은 작가적 사유가 없는, 독자의 말초적 흥미만을 자극하는 이야기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작가는 ‘무엇을 위해서’라는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시장을 지배하는 자가 곧 세계를 지배하는 현실에 대한 냉철한 시각 뒤에 ‘인간’에 대한 끈끈한 애정 또한 놓치지 않고 있다.  고즈카 노인이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마쓰바 은행의 몰락을 보고자 한 것도 젊은 시절 연모했던 하타나 데루코라는 여인을 위해서였다. ‘장사 아이템에 시답잖은 정 따위는 들이지 않는 게 좋“(p.211)다던 고즈카 노인도 결국엔 자기의 모든 것을 ’사랑‘을 위해 올인했던 것이다.

또한 성실과 근면, 피와 땀을 경시하는 듯하지만 시라토에게 고즈카 노인은 ’훈련하고 공부하고 깨우치기‘를 요구하고 있다.  절대로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마켓의 영역도 성실과 근면한 삶의 자세 없이 살아남기란 불가능하며 그 영역 안에서도 피 흘리고 땀을 쥐는 노력 없이 성과를 일구어내기란 쉽지 않으리라는 경고다.  씨를 뿌리면 거둘 수 있는 정직한 땅과 자연의 법칙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살벌하고 무서울 것이며 내 피와 땀에 대한 보상을 보장받을 수 없는 잔인함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항상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말이 담고 있는 행복한 성공과 참혹한 실패의 양면이 마켓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리라.

나는 여전히 마켓의 언저리도 서성이질 못할 게 분명하다. 그러나 경제와 정치, 사회와 문화, 그리고 세계 동향을 살피는 일에 관심을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내가 가진 보잘것없지만 소중한 물질적 가치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의 쓰임새와 목적성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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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8-19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돌아오셨군요. 반가워서 달려왔어요. 역시 너무나 멋진 리뷰입니다.
저도 경제에 대해 잘 모르고 숫자관념도 부족해요. 이재에 밝지 못하구요.
요즘 주위에 인터넷주식으로 짭잘한 사람도 있더군요. 그런 건 그닥 감동되지 않았는데
고즈카의 말들을 읽어보니 저의 시야와 이해도 그런점에서 좀 넓혀야겠단 생각이 들어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문득 어제본 영화 리턴이 생각났어요. 완전 다른 의미지만)
일요일아침이에요^^

섬사이 2007-08-21 00:29   좋아요 0 | URL
예, 잘 다녀왔어요. 그리고 저도 워낙 숫자에 약해서 사실 이 책을 읽고도 뭐가 뭔지 모를 부분들이 있어요. ^^

장난스런kiss 2007-08-19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흥분되는 맘이 느껴집니다. 꼭 읽어봐야겠어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당~

섬사이 2007-08-21 00:31   좋아요 0 | URL
처음 뵙네요. 반갑습니다. 사실 제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한 건지 의심스럽기도 해요. 워낙 경제에 대해 무지한 터라.. 장난스런 키스님이 읽으시고 혹시 제가 잘못 이해한 부분을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어요. ^^;;

알맹이 2007-08-20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아오셨네요! 이시다 이라, 왠지 이름이 맘에 안 들어서 절대 안 읽고 있는 일본 작가인데요 ^^

섬사이 2007-08-21 00:38   좋아요 0 | URL
ㅎㅎㅎ 요즘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본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게 되는 것 같아요. 근데 읽으면서 뭐가 찜찜한 기분이 들곤 해요. 사실 우리나라 작가가 오쿠타 히데오나 온다리쿠 등등의 일본작가들의 작품 같은 글을 쓴다면 이만큼 호평을 받고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읽힐 수 있을까, 어쩐지 우리가 너무 우리 작가들에게 엄숙함과 진지함, 근엄함,, 뭐 이런 것들을 강요해 왔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구요. 문단의 분위기도 좀더 자유스러워져야 할 것 같고 또 저를 포함한 우리 독자들도 우리 작가들을 향한 잣대를 좀 유연하게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쏟아지는 일본작가들의 작품을 보며 이것 또한 문화 종속이나 사대주의에 그림자가 아닐까 하는 노파심도 생겨나던걸요. 그래서인지 이제 일본작가의 작품은 당분간 그만 읽고 싶어져요. ^^
 

내일부터 3박 4일 동안 제주도로 휴가 다녀올게요.

가서 맑은 바람 쐬고 맑은 바다에 몸 담그며 심기일전(?)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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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13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제주도
잘 다녀오셔요 :)

비로그인 2007-08-13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섬으로 가시는군요? 즐거운 시간 되셔요~ ^^

무스탕 2007-08-13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시간 보내고 오서소.. ^^

2007-08-13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08-13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데려가요, 섬사이님~~~

알맹이 2007-08-13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휴가 되세요~~ 그리고 날씨도 좋으면 좋겠어요.

마노아 2007-08-13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휴가 다녀오셔요~

비로그인 2007-08-13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사한 시간 만들고 오세요.

이매지 2007-08-13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좋은 추억 많이 만들어서 돌아오세요! ^^

twinpix 2007-08-13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시간 되세요!^^ 3박 4일 제주도 정말 멋진 시간 되시길.^^/

섬사이 2007-08-19 0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무사히 잘 다녀왔습니다. 걱정했던 것보다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었어요. ^^
 
아틀라스 중국사 - 역사읽기, 이제는 지도다! 아틀라스 역사 시리즈 3
박한제 외 지음 / 사계절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중국사를 접한 방법은 세계사 속에 단편적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우리나라 역사와 연관되어 있는 중국사의 편린들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오로지 중국사만을 따로 떼어서 볼 수 있는 기회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처음의 기회가 이 책을 통해서였다는 건 내게 참 행운이었다.

그 이유는 이 책이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해석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중국 고대사 편을 보면 기존에 우리가 ‘황하문명’이라고 부르던 것을 ‘동아시아 문명’이라고 부르고 있고, 다시 그것을 앙소문화, 대문구문화, 하모도문화, 신락.홍산문화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아시아의 신석기 문화는 황하 중심 문화가 주변으로 확대되는 형태가 아니라, 기원과 계통이 다른 문화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p.13)고 하고 있다.  게다가 하-은-주로 이어지는 중국 고대국가 중 은나라를 상商나라로 명명한 것도 특이한 점이었다.  왜 은이 아니라 상일까, 궁금했는데 ‘상의 마지막 수도인 은허궁전과 상왕의 무덤이 발견되고 결정적으로 商이라는 글자가 갑골문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은나라’가 잘못된 명칭임을 분명하게 짚고 있다.

두 번 째는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와 서양의 문명과 제도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주봉건제’와 서양 중세의 봉건제와의 다른 점이라든지,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사상을 논하면서 서양의 사상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 지를 설명하면서 읽는 이의 이해를 돕는 세심함이 돋보였다.

한편 책을 펴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지도와 다양한 사진 자료들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만나게 되는 한 두 개의 지도는 그야말로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지도들의 파노라마라 할 수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수많은 지도들은 어쩌면 너무 시시콜콜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지도를 읽을 수 있는 능력 여하에 따라 그 진가가 발휘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쉽게도 나는 ‘지도를 못 읽는 여자’에 속하는 부류라 그 자세하고 세심한 지도들이 제 빛을 발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인쇄 상태 말끔한 사진 자료들 또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데 나는 특히 BC.3500-BC.1600년 경 신석기 문화의 유물 사진을 보고 무척 놀랐다.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라고는 빗살무늬토기와 간석기, 기껏해야 반달돌칼이던가? 하는 것들만 알았었는데 이 책에 실린 신석기 시대 유물은 그 정교성이나 예술성에 있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길고 긴 중국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통치제도와 법령들에 대한 용어와 소개는 입이 벌어질 만큼 그 수가 엄청나다.  군국제, 봉건제, 군현제 등의 익숙한 것들부터 강간약지정책, 사민정책, 평균균수법 등등의 용어와 시대적 필요성에 대한 설명은 비교적 간결하게 잘 되어 있는 편이다.  예로 들자면 오호에 멸망한 한족들의 대규모 冷渡(냉도) 이후 다수 본지인과 관계를 맺으며 동진, 남조 역사에 중요 변수로 작용하게 되는 ‘교구체제’라든가 북송말의 민중 반란의 직접적 원인이 된 ‘화석강’, 여진족(금)의 군사제도인 ‘맹안 모극제’, 위진남북조시대의 관리 선발 제도인 ‘구품관인법’, 당나라의 몽골지배정책인 ‘기미정책’, 청나라 강희제의 관료통제제도인 ‘주접제도’, 근대 중국사회에서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등장한 ‘중체서용론’과 ‘전반서화론’ 등등,,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도 비교적 중립적 시각을 갖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72쪽 ‘정관의 치세’편에서 당 태종 이세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당 태종 이세민이 등극하는 과정에서 형제를 살해하고 동생의 부인을 妃(비)로 끌어들이는 패륜을 저질렀으며 제위기간 중에도 몇몇 도덕적 결함이 드러나는데 이는 수 양제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하면서 “그럼에도 그(당 태종)는 천하의 명군으로, 양제는 폭군으로 후대에 정형화 되었다.  이는 명군과 폭군의 구별이 반드시 공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명군이 되려면 최소한 정치적 승자가 되어야 하고, 후손들이 오랫동안 계속 집권해야 하며, 생애의 ‘뒤끝’이 좋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현종이 안사의 난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開元(개원)의 치’도 정관의 치 못지않게 평가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중국의 역사와 관련된 우리역사의 부분에서도 명청교체기에 여러 가지 구실로 명과 청에 차례로 덜미를 잡히는 조선의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명과 청의 눈치를 보며 쩔쩔매는 선조나 인조에 비해 폭군이라고만 알고 있는 광해군이 명의 파병요구를 묵살해버리는 실리추구정책을 펴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몇 가지 사실을 이 책 속에서 만나다 보면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그동안 ‘공평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역사의 격동기 때마다 출현하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도 마음에 와 닿았다. 남송이 금으로부터 무력공략을 당할 때 맞서 싸운 농민출신 장군 악비와 금과의 굴욕적인 강화조약 ‘소흥의 화의’ 체결에 앞장 선 진회의 이야기라든가, 또 남송이 몽골의 침략을 받았을 때 기회주의자 가사도의 비굴한 모습과 쿠빌라이까지 감동시킨 21세의 청년 문천상의 분연한 항전과 의연함은 좋은 대조를 이루며 본보기가 되어준다. 

근현대사 쪽으로 오면서 동서양을 잇는 찬란한 문명의 중심이었던 중국이 서양열강에 의해 침탈당하고 무너지는 장면은 같은 동양권 국가의 국민으로서 안타까웠다.  물론 그 중국도 상대적으로 약소국인 우리나라에 끼친 피해가 적지 않지만 말이다.  결국 역사는 강자들 편에서 흐른다는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럽게 여겨지면서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심란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교양으로서 한번 가볍게 휘 훑어볼 역사서는 아니란 생각이 든다. 물론 나의 역사지식이 너무 짧아서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 책의 가치는 한 번 휘익 읽고 ‘참 재밌네, 참 잘 엮었구나.’라는 한 마디 평으로 끝나버릴 가치의 책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를테면 잘 엮어진 역사 사전이라고나 할까? 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고 처박아 두는 사람은 없다.  곁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들춰보고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사전의 소장가치다.  이 책의 말미에 붙어 있는 ‘찾아보기’편은 이 책의 사전적 역할에 무척 유용한 쓰임새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의 풍부한 지도와 도표, 사진자료들이 본문의 글을 보충하는 부가적 의미의 보충자료로 쓰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강했다. 읽는 이가 본문의 글과 지도, 도표, 사진들을 보고 그 사이를 유기적으로 오가며 파악하고 이해하면서 역사를 이루는 종횡의 조밀한 그물망을 스스로 엮어갈 수 있다면 이 책의 가치는 더욱 그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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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13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의 내용을 꼼꼼하게 설명해 주셨네요. 중궁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갈 수 있는 책이란 느낌이 드네요.^^

섬사이 2007-08-19 04:30   좋아요 0 | URL
중국에 대해선 늘 세계사나 국사 안에서만 배웠더래서 아는듯 모르는듯 했는데 중국사만 따로 떼어서 보니까 훨씬 낫더라구요. 역사지식이 짧아서인지 읽기가 쉽진 않았지만요.^^

프레이야 2007-08-13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고학년/중학 중국사책에도 은나라를 상나라로 명시해두었더군요.
마지막 단락, 역사를 이루는 종횡의 조밀한 그물망을 스스로 엮어가는 일,
이게 역사를 공부하는 기본조건 같아요. 추천^^

섬사이 2007-08-19 04:32   좋아요 0 | URL
어머, 전 이 책에서 '상나라'라는 말을 처음 보았는데 이미 '상나라'로 출판된 중국사책들이 있었군요.

마노아 2007-08-13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지를 것인가 계속 고민 중이에요. 사실 사고 싶은데 며칠 내로 살 것인가 몇 달 내로 살 것인가의 고민이에요^^ㅎㅎㅎ

섬사이 2007-08-19 04:34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이 아틀라스 세계사에 조목조목 달아놓은 오자와 잘못된 점을 지적해 놓은 리뷰를 보았어요. 마노아님이 이 책을 읽는다면 역사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는 저보다 훨씬 도움이 될 서평을 쓰실 수 있을텐데..이 책에 대한 저의 느낌 중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수정할 기회도 얻을 것 같구요. 님의 서평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
 

우리딸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최근 내리는 비의 작태를 고려한 결과,

"하늘이 요실금에 걸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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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2007-08-10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머에요^^;;; 오늘 부산에선 햇살이 반짝이다 못해 이글이글 타고 있어요^^ 아휴~^^ㆀ

섬사이 2007-08-10 13:55   좋아요 0 | URL
어머, 여기는 해가 나와 반짝하는 듯하다가 다시 비가 오고,,, 그래요. 벌써 며칠 째 비가 오다말다하고 있어요. 어제는 딸 둘을 데리고 시장에 나갔다가 비한테 봉변을 당했다니까요.
더위 먹지 마시고 건강 잘 챙기세요. 이제 입추도 지났으니 더위도 서서히 물러가지 않을까요?^^

조선인 2007-08-10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하 딱 맞는 기발한 표현이에요.

비로그인 2007-08-10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화- 그렇게 어려운 단어를 다 알다니 :)

무스탕 2007-08-10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쩜 좋아... ^^;

hnine 2007-08-10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절대 비 맞지 말아야겠네요.

twinpix 2007-08-10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똑똑한 걸까요? 전 굉장히 늦은 나이에 요실금이란 단어를 알았다죠.^^;;; 아무튼 즐겁게 웃고 갑니다.

치유 2007-08-10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울 아들녀석은 오늘 하늘이 요즘 너무 많이 운다고 하던걸요..ㅋㅋ
아이들도 장마지난 후에 내리붓는 이 비가 많이 많이지겹나봐요..
 
토끼와 함께한 그해
아르토 파실린나 지음, 박광자 옮김 / 솔출판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마흔을 가리켜 ‘불혹의 나이’라고들 말한다.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인데, 막상 마흔이 되고 보면 ‘불혹’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여전히 세상일에 판단이 안 설 때가 많다.  물론 스물이나 서른처럼 열에 들뜨거나 근거 없는 자신감에 휘둘리는 일은 드물어진 것 같지만 그 대신 세상만사가 새로울 일없이 시들해지고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하는, 일종의 체념이 짙어지는 건 사실이다.  그걸 ‘안정감’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따분한 인생’의 매너리즘에 빠진 채‘결국 사는 게 이런 거였어?’하며 한탄하는 나이, 이미 닳을 만큼 닳아 버리고 만만하지 않은 인생에 반쯤 무릎을 꿇어 버리는 나이인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바타넨 역시 청년 시절의 희망을 엇비슷하게라도 이루지 못했고, ‘무시당하며 살아가는 절망한 남편’(p.7)이며 ‘소화불량이었고 일상의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p.7)하고 ‘불행하고 냉소적’(p.7)인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마흔의 남자다.  함께 출장 간 동료와 하루의 일정을 두고도 말싸움을 벌여야 하는 처량한 인생의 이 남자가  차로 토끼를 치는 사고를 낸다. 출장 간 동료를 버리고 (책에서는 동료가 바타넨을 버리고 차를 몰아 떠나버린 것으로 나오지만 내용상 엄밀히 따지면 바타넨이 동료를 버린 것이다.) 뒷다리가 부러진 어린 토끼를 안고 숲으로 들어가는 순간 바타넨의 따분한 삶은 변화하게 된다.

토끼와의 조우 이전의 그의 삶은 그다지 건강하지 못했다. ‘온갖 불공정한 일을 보도한다면서 막상 사회의 근원적인 병폐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침묵하는(p.17) 잡지사의 기자로서‘정보가 희석되고 더러워지고 경박한 오락거리로 변조되는 것'(p.17)을 방관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목소리 듣는 것조차 지긋지긋해진 아내와 값비싼 집세에 짓눌리며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답답하면서도 공감되는 바가 적지 않다.  작가는 현대 도시문명의 삶이 겉만 번지르르한 속 빈 강정이며, 그 안에서 우리들은 심신이 지치고 병든 채로, 임금님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도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동화 속 신하들과 다를 바 없이 뻔뻔함을 방패삼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듯 하다.

어쩌면 바타넨은 뒷다리가 부러진 토끼에게서 자기를 발견한 건지도 모르겠다. 부러져 버린 꿈, 부러져 버린 열정, 부러져 버린 희망 때문에 절뚝이게 된 자기 삶의 모습.  그래서인지 바타넨은 토끼를 버리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토끼와 자신의 삶을 다시 싱싱하게 되돌리기 위해 그는 토끼와 함께 낯선 곳을 떠돌며 가지각색의 사람들을 만나고 온갖 사건들과 부닥치게 된다. 마치 기운차게 펄떡이며 강의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 떼처럼 그는 자기가 닥치는 낯선 삶의 물결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며 나아간다. 핀란드의 거대한 숲에서 벌목꾼 등의 일을 하는 그의 노동은 단순하고 정직했으며 삶은 소박하고 건강했다.  그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개의치 않고 힘든 일에 몰두’(p.97)할 수 있었고 전보다 강인해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묻는 이들에게 작가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런 생활은 과거의 생활을 포기하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p.97)고. 그러나 마흔이라는 나이는 ‘시작’도 어렵지만 ‘포기’도 어려운, 그런 나이 아니던가.. 이쯤에서 나는 바타넨의 변화된 삶이 부러우면서도 그 삶을 현실에 적용시키기는 두려운, 소심과 비겁의 얼굴을 가진 나와 대면하고 만다.

작가는 바타넨의 변화된 삶의 여정을 따라가며 인간에 대한 비판과 애정을 한꺼번에 쏟아놓는다.  위선과 가식, 폭력과 횡포, 뻔뻔함과 몰염치, 의심과 몰인정, 권력의 남용과 그 권력에 대한 굴종, 자기만의 논리에 빠져버린 자가당착의 인물들을 등장시키는가 하면 반대로 식물학에 관심이 있다던 택시기사처럼 온화하고 친절하며 소박하고 따스하고 순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는 것이다. 

이 책의 끝 부분에 바타넨이 숙취에 절어 깨어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단순하지만 정직한 노동, 소박하지만 건강한 삶을 누리던 바타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궁금하던 나는 그 이야기가 병든 토끼를 치료하기 위해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로 들어온 바타넨에게 벌어진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도시의 삶 속으로 들어온 바타넨의 휘청거리는 나날들은 어쩌면 토끼와 조우하기 전의 바타넨의 삶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전의 그 삶이 지금의 바타넨에게는 어쩐지 생뚱맞고 어색하고 불편해 보인다.  바타넨에겐 이제 도시의 삶이 일탈이 되고 그의 삶의 본질을 위협하는 것이 되어버린 것 같다.  카르야로야라는 곳에서 별장 수리 일을 하던 바타넨은 이웃에게 심한 굴욕을 당하고서야 다시 북쪽으로 떠날 결심을 한다. 

도시에서 만난 사랑스런 여인 레일라와 헤어지면서까지 자신의 삶을 위협하던 도시의 삶을 결연하게 떨치고 산 속에 들어가 자기의 진정한 보금자리를 찾은 것이다. ‘사람들이 많은 지역으로 돌아갈 생각만 해도 끔찍스런 거부감이 들’(p.189) 정도로 바타넨은 자기 삶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한다.  하지만 북쪽에서 힘들지도 않고 아무런 구속도 없는 즐거운 나날을 보내던 바타넨에게 위협적인 존재 곰이 나타난다. ‘곰’으로 상징되는 삶의 위협, 그것은 반드시 제거해야 마땅한 것이었고, 그것을 잘 아는 바타넨은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국경을 넘으면서까지 끝까지 좇아가 맞서고 마침내 숨통을 끊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타넨이 자기의지로 선택한 눈부시게 싱싱했던 삶은 스물두 가지의 죄가 되어 돌아온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현대의 조직 사회에서 바타넨처럼 살아가는 건 사회기반을 뒤흔드는 범법행위가 될 수 있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를 살고 있다는 믿음은 조작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  나는 정말 자유로운 것일까, 나의 의지로 선택한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왜 나의 하루는 바다 속을 기운차게 유영하는 싱싱한 물고기의 비늘처럼 빛나지 않는 걸까, 하는 의심도 뒤따른다.

자유에 대한 열망의 힘이 얼마나 센 지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토끼와 지내던 고통스런 어느 날 자유에 대한 너무도 큰 열망으로 바타넨은 감방 벽을 부수고 마당을 지나 담을 뚫고 자유 한가운데로 나갔다. 이후 아무도 그와 토끼를 다시 보지 못했다.”(p.212)라고. 


나를 둘러싼 감방, 밖에서 주어지거나 내 스스로 만들어낸 온갖 규범과 금기들을 부수고 자유 한가운데로 나설 만큼의 열망을 나는 갖지 못했다. 열망을 품고 자유 한가운데로 나서기보다 적당히 타협하고 규범과 습관, 금기의 틀 안에 안주하기를 바라는 나는, 내가 바타넨과 같은 나이 마흔이라는 사실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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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09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계시잖아요.
저는 바타넨이 이룬 자유가 무언지 잘 알것같아요.
저도 최근에 '자유'에 대해 무지 많이 생각했거든요.
나중에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으면 해요.

섬사이 2007-08-10 13:33   좋아요 0 | URL
자유라는 건 여러가지 모양과 빛깔을 지녔으니까, 제가 서재를 꾸리고 책을 읽고 허접한 리뷰를 써 올리는 일도 저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좀 더 적극적인 자유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여전히 전 '틀 안에서의 안주'를 자유라고 이름 붙이고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마노아 2007-08-09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서른인데, 나 어릴 적에 나이 서른은 정말 '어른'이었거든요. 근데 그 나이가 되고 보니 왜 이리 아직도 철딱서니가 없을까요. 마흔되어서도 그럴까 봐 걱정이에요..;;;;

섬사이 2007-08-10 13:33   좋아요 0 | URL
전 환갑에도 그럴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