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와 함께한 그해
아르토 파실린나 지음, 박광자 옮김 / 솔출판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마흔을 가리켜 ‘불혹의 나이’라고들 말한다.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인데, 막상 마흔이 되고 보면 ‘불혹’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여전히 세상일에 판단이 안 설 때가 많다.  물론 스물이나 서른처럼 열에 들뜨거나 근거 없는 자신감에 휘둘리는 일은 드물어진 것 같지만 그 대신 세상만사가 새로울 일없이 시들해지고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하는, 일종의 체념이 짙어지는 건 사실이다.  그걸 ‘안정감’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따분한 인생’의 매너리즘에 빠진 채‘결국 사는 게 이런 거였어?’하며 한탄하는 나이, 이미 닳을 만큼 닳아 버리고 만만하지 않은 인생에 반쯤 무릎을 꿇어 버리는 나이인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바타넨 역시 청년 시절의 희망을 엇비슷하게라도 이루지 못했고, ‘무시당하며 살아가는 절망한 남편’(p.7)이며 ‘소화불량이었고 일상의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p.7)하고 ‘불행하고 냉소적’(p.7)인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마흔의 남자다.  함께 출장 간 동료와 하루의 일정을 두고도 말싸움을 벌여야 하는 처량한 인생의 이 남자가  차로 토끼를 치는 사고를 낸다. 출장 간 동료를 버리고 (책에서는 동료가 바타넨을 버리고 차를 몰아 떠나버린 것으로 나오지만 내용상 엄밀히 따지면 바타넨이 동료를 버린 것이다.) 뒷다리가 부러진 어린 토끼를 안고 숲으로 들어가는 순간 바타넨의 따분한 삶은 변화하게 된다.

토끼와의 조우 이전의 그의 삶은 그다지 건강하지 못했다. ‘온갖 불공정한 일을 보도한다면서 막상 사회의 근원적인 병폐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침묵하는(p.17) 잡지사의 기자로서‘정보가 희석되고 더러워지고 경박한 오락거리로 변조되는 것'(p.17)을 방관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목소리 듣는 것조차 지긋지긋해진 아내와 값비싼 집세에 짓눌리며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답답하면서도 공감되는 바가 적지 않다.  작가는 현대 도시문명의 삶이 겉만 번지르르한 속 빈 강정이며, 그 안에서 우리들은 심신이 지치고 병든 채로, 임금님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도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동화 속 신하들과 다를 바 없이 뻔뻔함을 방패삼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듯 하다.

어쩌면 바타넨은 뒷다리가 부러진 토끼에게서 자기를 발견한 건지도 모르겠다. 부러져 버린 꿈, 부러져 버린 열정, 부러져 버린 희망 때문에 절뚝이게 된 자기 삶의 모습.  그래서인지 바타넨은 토끼를 버리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토끼와 자신의 삶을 다시 싱싱하게 되돌리기 위해 그는 토끼와 함께 낯선 곳을 떠돌며 가지각색의 사람들을 만나고 온갖 사건들과 부닥치게 된다. 마치 기운차게 펄떡이며 강의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 떼처럼 그는 자기가 닥치는 낯선 삶의 물결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며 나아간다. 핀란드의 거대한 숲에서 벌목꾼 등의 일을 하는 그의 노동은 단순하고 정직했으며 삶은 소박하고 건강했다.  그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개의치 않고 힘든 일에 몰두’(p.97)할 수 있었고 전보다 강인해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묻는 이들에게 작가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런 생활은 과거의 생활을 포기하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p.97)고. 그러나 마흔이라는 나이는 ‘시작’도 어렵지만 ‘포기’도 어려운, 그런 나이 아니던가.. 이쯤에서 나는 바타넨의 변화된 삶이 부러우면서도 그 삶을 현실에 적용시키기는 두려운, 소심과 비겁의 얼굴을 가진 나와 대면하고 만다.

작가는 바타넨의 변화된 삶의 여정을 따라가며 인간에 대한 비판과 애정을 한꺼번에 쏟아놓는다.  위선과 가식, 폭력과 횡포, 뻔뻔함과 몰염치, 의심과 몰인정, 권력의 남용과 그 권력에 대한 굴종, 자기만의 논리에 빠져버린 자가당착의 인물들을 등장시키는가 하면 반대로 식물학에 관심이 있다던 택시기사처럼 온화하고 친절하며 소박하고 따스하고 순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는 것이다. 

이 책의 끝 부분에 바타넨이 숙취에 절어 깨어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단순하지만 정직한 노동, 소박하지만 건강한 삶을 누리던 바타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궁금하던 나는 그 이야기가 병든 토끼를 치료하기 위해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로 들어온 바타넨에게 벌어진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도시의 삶 속으로 들어온 바타넨의 휘청거리는 나날들은 어쩌면 토끼와 조우하기 전의 바타넨의 삶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전의 그 삶이 지금의 바타넨에게는 어쩐지 생뚱맞고 어색하고 불편해 보인다.  바타넨에겐 이제 도시의 삶이 일탈이 되고 그의 삶의 본질을 위협하는 것이 되어버린 것 같다.  카르야로야라는 곳에서 별장 수리 일을 하던 바타넨은 이웃에게 심한 굴욕을 당하고서야 다시 북쪽으로 떠날 결심을 한다. 

도시에서 만난 사랑스런 여인 레일라와 헤어지면서까지 자신의 삶을 위협하던 도시의 삶을 결연하게 떨치고 산 속에 들어가 자기의 진정한 보금자리를 찾은 것이다. ‘사람들이 많은 지역으로 돌아갈 생각만 해도 끔찍스런 거부감이 들’(p.189) 정도로 바타넨은 자기 삶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한다.  하지만 북쪽에서 힘들지도 않고 아무런 구속도 없는 즐거운 나날을 보내던 바타넨에게 위협적인 존재 곰이 나타난다. ‘곰’으로 상징되는 삶의 위협, 그것은 반드시 제거해야 마땅한 것이었고, 그것을 잘 아는 바타넨은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국경을 넘으면서까지 끝까지 좇아가 맞서고 마침내 숨통을 끊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타넨이 자기의지로 선택한 눈부시게 싱싱했던 삶은 스물두 가지의 죄가 되어 돌아온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현대의 조직 사회에서 바타넨처럼 살아가는 건 사회기반을 뒤흔드는 범법행위가 될 수 있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를 살고 있다는 믿음은 조작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  나는 정말 자유로운 것일까, 나의 의지로 선택한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왜 나의 하루는 바다 속을 기운차게 유영하는 싱싱한 물고기의 비늘처럼 빛나지 않는 걸까, 하는 의심도 뒤따른다.

자유에 대한 열망의 힘이 얼마나 센 지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토끼와 지내던 고통스런 어느 날 자유에 대한 너무도 큰 열망으로 바타넨은 감방 벽을 부수고 마당을 지나 담을 뚫고 자유 한가운데로 나갔다. 이후 아무도 그와 토끼를 다시 보지 못했다.”(p.212)라고. 


나를 둘러싼 감방, 밖에서 주어지거나 내 스스로 만들어낸 온갖 규범과 금기들을 부수고 자유 한가운데로 나설 만큼의 열망을 나는 갖지 못했다. 열망을 품고 자유 한가운데로 나서기보다 적당히 타협하고 규범과 습관, 금기의 틀 안에 안주하기를 바라는 나는, 내가 바타넨과 같은 나이 마흔이라는 사실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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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09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계시잖아요.
저는 바타넨이 이룬 자유가 무언지 잘 알것같아요.
저도 최근에 '자유'에 대해 무지 많이 생각했거든요.
나중에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으면 해요.

섬사이 2007-08-10 13:33   좋아요 0 | URL
자유라는 건 여러가지 모양과 빛깔을 지녔으니까, 제가 서재를 꾸리고 책을 읽고 허접한 리뷰를 써 올리는 일도 저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좀 더 적극적인 자유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여전히 전 '틀 안에서의 안주'를 자유라고 이름 붙이고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마노아 2007-08-09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서른인데, 나 어릴 적에 나이 서른은 정말 '어른'이었거든요. 근데 그 나이가 되고 보니 왜 이리 아직도 철딱서니가 없을까요. 마흔되어서도 그럴까 봐 걱정이에요..;;;;

섬사이 2007-08-10 13:33   좋아요 0 | URL
전 환갑에도 그럴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