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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처녀의 사랑 ㅣ 옛이야기 그림책 7
강숙인 글, 김종민 그림 / 사계절 / 2008년 10월
평점 :
삼국유사 속의 「김현감호 설화」를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서 펴낸 책이다. 삼국유사를 읽어보지 않았어도 어디선가 들은 듯 친숙하게 여겨지는 이야기다. 신라 원성왕 때 김 현이라는 청년과 어여쁜 아가씨로 둔갑한 호랑이가 흥륜사에서 탑돌이를 하다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인데, 구미호 이야기만큼이나 안타깝고 비극적인 결말이다. 아니다. 구미호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노력하다가 실패했을 뿐이지만, 이 호랑이 처녀는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게 되니 구미호보다 더 기구하고 슬픈 운명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재빨리 자기 잇속을 챙기는 게 미덕이 되어버린 요즘의 현실에서 자기를 희생해서 세 오라비를 구하고 사랑하는 남자의 입신양명을 도우려는 이 호랑이 처녀의 사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성의 희생이 본질적이고 운명적이라는 전통적 여성관을 보여주고 있는 옛이야기들은 폐기처분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바리데기나 심청이 같은 옛이야기 속 인물들도 함께 지워버려야 하는 걸까.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모든 것을 끌어안는 여성성을 부정한다면 그 대안으로 우리는 어떤 여성성을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걸까.
옛이야기들 속에 나오는 여성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하지만 무던히 참고 자기를 희생하면서 난관을 이겨내고 가족과 연인을 지켜내는 여성성에는 간단히 폐기처분하기에는 어려운 위대한 힘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그 힘은 여성이라서 본질적이며 운명적으로 타고난 게 아니라 여성이 능동적으로 선택해서 발휘하는 힘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그런 여성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희생적인 숭고한 여성성을 너무 당연하거나 너무 하찮고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는 우리 시대의 시선이 아닐까.
책을 덮으며 이 ‘호랑이 처녀의 사랑’을 현대 버전으로 바꾼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달라질까, 궁금해졌다. 세 마리의 오라비 호랑이들은 김 현을 잡아먹으려고 하기 보다는 여동생을 김현에게 시집보낸 뒤 자기들이 인간 세상에 나아가 적응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요즘의 아이들은 왜 호랑이 처녀가 세 오라비의 잘못을 대신해 벌을 받아야 하느냐며 따지고 들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들었다. 아니, 호랑이인 세 오라비가 인간인 김 현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건 본능인데 왜 그게 벌을 받을 만큼 큰 잘못이냐는 것부터 따지고 들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화려하고 밝은 색채의 그림은 ‘슬프도록 아름다운’이라는 표현을 떠오르게 했다. 그림이 밝고 화려할수록 호랑이 처녀의 죽음은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밝고 화려한 세상과 비극적인 호랑이 처녀의 처지가 극명하게 대비되기 때문인 것 같다. 호랑이 처녀의 치켜 올라간 눈매와 옅은 눈동자 빛도 인상적이다.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그림 구석구석을 살피고 (곳곳에 놓인 작은 불상과 탑, 그리고 새, 뱀, 토끼, 도마뱀 같은 동물들, 화려한 꽃의 빛깔들...) 감상하는 것으로도 큰 즐거움을 느꼈다.
그나저나 호랑이 처녀의 죽음을 기려 지은 호원사라는 절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지금은 그 절터만 남아있는데, 그것도 사유지가 되어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불쌍한 호랑이 처녀의 넋은 어쩌나, 하며 잠시 걱정하다가 갑자기 이 그림책이 종이로 지은 작은 호원사라는 생각을 해본다. 자기를 기꺼이 희생하며 세상에 아름다운 가치를 심어온 모든 여성들에 대한 호원사, 아니 여원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