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아주 큰 고구마
아카바 수에키치 지음, 양미화 옮김 / 창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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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충격적인(?) 그림에 놀랐다.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 뭐 이렇게 허술한 그림이 다 있어? 싶어 기막혔기 때문이다.  유난히 그림에 재주가 없는 아들 녀석은 이 책의 그림을 보고는 이렇게 못 그린 그림도 책이 되어 나올 수 있다는 걸 신기하게 여기며 좋아했었다.  아마도 끈끈한 동지의식 내지는 ‘나도 이 정도는 그릴 수 있다’는 난데없는 자신감을 잠시 느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평소에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책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느끼던 나도 아무라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이 허술하고 엉성한 그림이 그려진 책 앞에서 무장해제를 당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앉은 자리에서 그림책을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아무 거부감 없이 읽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러고도 모자라 도서관에서 책을 두 번이나 대출받을 리가 없으니까.  완벽하다 싶을 만큼 잘 그려진 그림들, 그림 작가의 정성과 개성이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그림들 앞에서 그동안 나도 모르게 긴장하며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걸까.  검은 윤곽선으로 삐뚤빼뚤 엉성한, 도가 지나치다 싶게 단순화한 이 책의 그림들은 “그냥 나를 즐겨봐!”하며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편해진다.  엉성하게 그려진 이 그림책 속 선생님과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친근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물론 이 책이 좋았던 게 단지 엉성하고 재밌고 편안한 그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간결하고 짧은 문장, 비가 오는 바람에 고구마를 캐러가지 못하게 된 유치원 아이들이 펼치는 상상들도 내 눈을 사로잡았다.  아이들이 그린 거대한 고구마 그림을 놓고(고구마 그림만으로 14쪽의 지면이 할애될 만큼) “이렇게 큰 고구마 어떻게 캐지?”하며 아이들이 상상의 꼬리를 이어가게 만드는 유치원 선생님도 매력적이고(그림만으로 선생님의 매력을 느끼기는 불가능하다), 그렇게 거대한 고구마가 ‘고구마 우주선’이 되기까지의 상상의 과정들과 아이들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놀이를 꾸려가는 모습, 그리고 변신을 거듭하는 고구마의 모습을 흐뭇하게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있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하는 그림책이 바로 이런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책 앞에서 긴장을 풀고 무장해제 되어 느슨하고 편안한 기분으로 낄낄거렸듯이 아이들도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도, 딱딱한 교훈이나 가르침도, 모두 던져버린 책을 바라는 게 아닐까.  아이들을 가볍게 동동 떠있는 알록달록 고운 빛깔의 풍선처럼 만들어 줄 이런 책이 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단순하고 엉성한 그림들과 거침없이 쭉쭉 시원하게 뻗어가는 고구마 상상을 보며 나도 자유로운 해방감 비슷한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책 뒷면에 적힌 작가 소개글을 찾아 읽다가 이 책이 ‘이찌무라 하사꼬’라는 사람이 낸 ‘쯔루마끼 유치원 활동 보고’를 기초로 만든 그림책이라는 글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일본의 쯔루마끼라는 유치원에서는 이런 식의 활동을 실제로 했었다는 뜻일까?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엉성한 그림을 그린 아까바 스에끼찌라는 작가가 국제 안데르센 상을 비롯해 꽤 많은 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이 작가의 그림 6천여 점이 ‘찌히로’라는 미술관에 기증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그림책의 엉성한 그림은 뛰어난 작가의 엄청난 내공이 담긴 그림으로 밝혀진 셈이다.  게다가 이 그림책이 일본에서 30년이 넘게 아이들의 사랑을 꾸준하게 받아온 그림책이라니, 겉으로는 허술해 보일지언정 결코 만만한 그림책이 아니다.  아무래도 쉽게 아무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그림책은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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