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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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직장 파티에서 서로에게 이끌리게 된다. 그 둘은 직장 내에서 그다지 인기가 없었고, 괴짜 취급을 받았는데 그 이유를 책에서는 '섹스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해리엇은 '처녀란 올바른 사람에게 사려깊게 줄, 예쁜 종이로 여러 겹 포장한 선물 같은 것'(p.10)이라고 생각했고, 데이비드는 '마지못해 사랑하게 된 한 여자와 길고도 어려운 관계를 한번'(p.9)가진적이 있지만 그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런 두 사람이 서로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들이 꿈꾸는 가정의 모습은 전통적인 의미의 가정이었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모습을 지켜보자면, 자식을 많이 낳아 사랑으로 키우고, 올바르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서 존경을 받고, 그들에게 둘러싸여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행복해하는 서양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 떠오른다. 손님을 초대해서 함께 식사와 차를 마시고, 손님들에게 자기들이 이루어놓은 화목한 가정의 정경을 자랑스러워하는 모습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떠한 여성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았다. 해리엇은 자신의 미래가 구식이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왕국의 열쇠를 그녀 손에 쥐어줄 것이고 그곳에서 자신의 본성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발견할 것이며, 그것은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그녀는 인생의 모든 굴곡이나 진창을 처음에는 잘 모르면서 그러나 점차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그곳으로 나아갔다. 반면에 데이비드에게 미래는 그가 목표로 삼고 보호해야 하는 어떤 것이었다. 자기 부인은 이런 점에서 그와 같아야만 했다. 즉 그녀는 행복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지키는가를 알아야만 했다. 해리엇을 만났을 때 그는 서른 살이었고 야심찬 남자가 지닌 완고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일해 왔었다. 그러나 그가 일해 온 목표는 가정이었다. (p.13~14)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호텔로 써도 좋을만한 아주 커다란 빅토리아식 저택을 구입하고 아이를 낳고 친지들을 초대한다. 머리 속에 그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해리엇은 갓난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좀 흐트러진 모습으로 천장이 높은 거실 한 쪽에 놓은 편안하고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아 있고, 데이비드는 그 안락의자에 살짝 몸을 기대고 서서 따뜻한 눈빛으로 미소지으며 해리엇과 아기를 바라보고 있고, 놀러온 친척들은 소파에 앉아 새로 태어난 아기와 크고 고풍스러운 집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겠지. 다른 아이들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저희들끼리 웃고 떠들며 놀다가 우르르 정원으로 뛰어나가기도 할 것이다.

해리엇의 친정어머니 도로시의 헌신과 데이비드의 아버지 제임스의 재정적 지원이 없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정경이지만 그래도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자기들이 이룩한 가정의 모습에 행복해하고 뿌듯해한다.

 

행복. 행복한 가정. 로바트 가는 행복한 가족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선택한 것이었고 누릴 자격이 있었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얼굴을 맞대고 누워 있으면 때로는 그들의 가슴속 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아직도 자신들을 놀라게 할만큼 엄청나게 강렬한 안도감과 감사의 정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 아주 오랜 기간처럼 보이는 그 시간 동안 인내하기란 사실 쉽지 않았다.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60년대의 시대 정신이 그들을 비난하고 고립시키고 자신들의 가장 좋은 면을 축소시키던 때에,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기가 어려웠었다. 이제 보아라, 자신들의 완고한 개성을 방어하려고 사력을 다한 것이 옳았다. 그 개성은 너무나도 고집스럽게 가장 최상을 선택했다 - 바로 이 삶.  (p.30~31)

 

그리고 해리엇은 폴을 출산한 이후 곧바로 다섯째 아이를 임신한다.

 

그녀는 쉽게 토라지고 화를 냈다. 복받치게 울기도 했다. 데이비드는 그녀가 턱을 괴고 식탁에 앉아 뱃속의 아기가 자기에게 독을 퍼뜨린다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았다. 폴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 유모차에 누워 낑낑대며 울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보름 간 휴가를 내어 집안일을 도왔다.  (p.44)

 

다섯째 아이는 처음부터 좀 달랐다. 도로시는 해리엇의 자매인 사라를 도우러 가서 없었고, 해리엇은 처음으로 곤란을 겪고 예민해졌는데 이것은 데이비드가 바라던 '행복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지키는가를 알아야만' 하는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이 아니었다.  데이비드는 현실적인 문제들에 부딪치고 따져보게 된다.

 

사실 그는 3주나 한 달 동안은 사람들로 집안이 가득 차지 않기를 바랐다. 돈도 너무 많이 들었고, 또 자신들도 항상 돈이 모자랐다. 그는 부수입을 위해 일을 더 했고 또 오늘 같은 날은 집에서 유모 노릇까지 하고 있었다. (p.45)

 

온갖 폭력이 난무하고 도덕적 가치관이 무너지는 바깥 세계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지는 행복한 공동체로서의 가정은 서서히 균열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섯째 아이 벤은 해리엇의 태중에서부터 심상치않은 태동으로 해리엇을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들고,  태어난 후에도 가족의 행복을 파괴해나가지만 의사나 학교선생님, 다른 가족들은 벤이 '정상 범위 안에 있다'고 하면서 오히려 해리엇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아니, 그는 볼 수 없었다. 어쩌면 보기를 원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요점이었다. 그 의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번 경우가 얼마나 다른지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시골길을 활보하거나 질주할 때 그녀는 커다란 부엌 칼을 잡고 자기 배를 갈라서 애를 꺼내는 상상을 했다. 마침내 이 긴 맹목적인 투쟁 끝에 실제로 서로 눈을 마주칠 때 그녀는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p.66)

 

의사의 얼굴에서 그녀는 자신이 기대했던 것을 보았다. 그 여인이 느끼고 있는 것이 투영된, 어둡고 고정된 시선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정상인의 거부, 이질성에 대한 공포, 또한 벤을 낳은 해리엇에 대한 공포였다. (p.143)

 

이 책을 읽으면서 섬뜩하게 느껴지는 건,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는 아이 벤이 아니었다. 벤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중성이었다. 사람들은 벤에게서 뿜어져나오는 파괴력과 괴기스러움을 잘 느끼고 있으면서도 그게 너무 공포스러운 나머지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해리엇에게 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고, 네가 히스테릭한 거라며 진정제를 처방하는 것으로 공포를 피하는 것이다. 해리엇 또한 벤에 대한 모성과 두려움 사이에서 자신의 이중성을 확인한다.

 

어느 날 아침 일찍 해리엇은 어쩐 일인지 재빨리 침대에서 나와 아기방으로 갔다. 거기서 그녀는 벤이 창문턱에 균형을 잡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높은 곳이었다. 그 애가 어떻게 그 위에 올라갔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일이었다. 창문은 열려 있었다. 일순간 그 애는 밖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해리엇은 생각했다. 하필이면 이때 내가 들어오다니.... 그러는 자기 자신에게 대해 충격을 받지도 않았다. (p.81~82)

 

그 애는 갑자기 이유도 없이 정원으로 달려 내려가 문 밖의 길로 뛰어나가곤 했다. 어느 날 그녀는 그 애를 잡으려고, 빵빵대는 차들이나 경고하는 사람들의 비명을 무시하고 신호등을 건너는 뭉퉁하게 웅크린 작은 모습만 보면서 1마일 이상 뛰었다. 그녀는 울면서 숨을 헐떡였고 반쯤 정신이 나가서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 애를 잡으려고 결사적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오, 그 애를 치어요, 제발, 그래요... 하고 기도하고 있었다. (p.85)

 

책 중간에 데이비드가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길 잃은 아이와 연못에 대한 이야기도 이중적 자아에 대한 은유로 느껴졌다. 해리엇과 다른 사람들의 이런 이중성은 극단의 결정을 하기도 한다. 벤을 공포영화에 나올 법한 요양소로 보내는 것이다. 거기서 벤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걸 알면서. 해리엇의 모성이 요양소에서 벤을 구해내지만 벤이 집에 돌아온 이후 해리엇의 가정은 빠르게 해체되어버린다. 그리고 벤은 더이상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통제가 불가능할만큼 자라고 빅토리아식 커다란 저택은 벤의 패거리들의 아지트처럼 변해버리고 만다.

책 속에서 해리엇은 나름대로 자신들이 원하지 않았던 벤같은 아이가 태어난 것에 대해 이유를 찾아보려고 애쓴다.

 

그녀는 데이비드에게 말했다. "우리는 벌 받는 거야. 그 뿐이야"

"무엇때문에?"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증오하는 톤이 있었기 때문에 방어적으로 그가 물었다.

"잘난 척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행복해서."

"헛소리" 그가 말했다. 그는 화가 났다. 이런 해리엇이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이건 우연이야. 누구나 밴 같은 애를 가질 수 있어. 그건 우연히 나타난 유전자야. 그것뿐이야."

"난 그렇게 생각 안해." 그녀가 완고하게 주장했다. "우린 행복해지려고 했어!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아니, 나는 행복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결코 없어.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려고 했지. 그래서 바로 번개가 떨어진 거야." (p.159)

 

하지만, 우리가 불행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고 내내 내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은 그것이었고, 나는 우리는 불행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올해 우리에게 닥쳤던 불행들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불행 그 자체는 물론이고,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관련법을 제정하고.. 그런 일련의 과정 속에 드러난 여러 문제들까지도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해리엇은 아주 오래전 이 지구에 살던 난쟁이나 거인이나 도깨비 같은 것들의 유전인자가 우리 속에 남아 있다가 벤과 같은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펴곤 한다. 그렇다면, 불행을 만드는 유전자도 우리 안에 깊이 숨겨져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 우리가 맞닥뜨렸던 불행은 우리가 가진 유전자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해할 수 없다'는 핑계 속으로 나는 또 도망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문장 하나에 뜨끔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그를 제대로 보는 일을, 그의 본질을 인식하는 일을 거부할 것인가? (p.177)

 

사람들이 벤을 거부했던 것처럼 나도 '제대로 보는 일'을, '본질을 인식하는 일'을 거부하면서 살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본다는 것은, 본질을 인식하려고 애쓴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불편한 일이니까.

 

루쉰의 <광인일기>에서 모씨 형제 중 아우는 사람들이 자기를 잡아먹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설 말미에 이런 글이 나온다.

 

사천 년간 내내 사람을 먹어 온 곳. 오늘에서야 알았다. 나도 그 속에서 몇 년을 뒤섞여 살았다는 걸. 공교롭게도 형이 집안일을 관장할 때 누이동생이 죽었다. 저자가 음식에 섞어 몰래 우리에게 먹이지 않았노라 장담할 순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누이동생의 살점 몇 점을 먹지 않았노라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젠 내 차례인데.....

사천 년간 사람을 먹은 이력을 가진 나. 처음엔 몰랐지만 이젠 알겠다. 제대로 된 인간을 만나기 어려움을!

사람을 먹어본 적이 없는 아이가 혹 아직도 있을까?

아이를 구해야 할 텐데....  <광인일기>

 

<다섯째 아이>에서 말하는 유전이 <광인일기>의 식인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불행에 대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비록 그 불행을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런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사람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아이가 아직도 있을까?

 

이제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다섯째 아이>를 들어야겠다. 이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는 대신 빨간책방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는데, 처음에 김중혁 작가가 이걸 듣기 전에 책을 읽고 글을 써보고 생각해 본 다음 듣는 게 좋겠다고 하는 거다. 하, 그래, 정리해볼게. 리뷰를 써 볼게. 그리고 나와 네가 어떻게 다르게 읽었는지 확인하러 다시 올게.

난 빨간책방 들으러 간다. (듣고나서 이 리뷰가 부끄러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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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카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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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으면 슬슬 발이 시려왔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오면 서늘한 기운에 재채기를 하고 한기를 달래줄 가디건을 찾아 걸치기 시작했다. 뜨거운 커피 잔에서 올라오는 따뜻하고 하얀 김이 좋아졌다. 가을이 점점 깊어져서 겨울과 서둘러 만나려는 것 같았다.

큰일을 마무리 짓고 난 후, 하루이틀은 그냥 멍하니 지냈다. 잠을 자고, 만사가 귀찮아 실컷 게으름을 부렸다. 그러다 갑자기 아, 소설을 읽어야겠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 현실을 아득한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는 시간은 현실과, 현실하고는 다른 세계가 서로의 위치를 맞바꾸는 시간. 현실은 아득해지고 지금까지 내가 모르고 있던 다른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 소설은 그걸 가능하게 하니까.

여러모로 <나의 미카엘>은 요즘의 날씨,  나의 기분과 상황에 참 잘 맞아떨어졌다.

 

우리는 이렇게 만났다.

어느 겨울날 아침 아홉시에 나는 계단을 내려오다가 미끄러졌다. 한 낯선 청년이 내 팔꿈치를 잡아주었다. 그의 손은 강하고 엄청나게 자제력이 있었다. 나는 짧은 손가락과 납작한 손톱을 보았다. 관절 부위가 약간 거뭇한 창백한 손가락이었다. 그는 서둘러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막아주었고 나는 아픔이 사라질 때까지 그의 팔에 기대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넘어지는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탐색하고 묻는 듯한 눈과 심술궂은 미소들. 그가 나를 잡아 주었을 때 나는 어머니가 짜주신 푸른 울 옷소매 사이로 그 사람 손가락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예루살렘의 겨울이었다. (p.5-6)

 

한나와 미카엘은 이렇게 만났다. 한나는 감수성이 예민한 동시에 격렬하고, 충동적이며, 자주 환상과 꿈의 세계로 빠져드는 여자이고, 그 반면에 미카엘은 지적이고 섬세하며 자제력이 있고, 책임감이 강하고, 배려심 깊은 남자다. 이 책을 읽어가다 보면 이 첫 만남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을 만나게 된다. 계단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한나를 잡아주었던 것처럼 미카엘은, 한달치 수입을 쇼핑에 써버리고 쇼파와 안락의자 세 개를 사느라고 새 아파트의 계약금을 모을 수 없게 만들고 자기의 병이 더 심해도록 만들며 희열을 느끼는 한나를 받쳐주고 보살핀다. 그렇다고 한나가 잘못한 것이라고 질책할 수는 없다. 뭐랄까, 서로 딛고 있는 세계가 다를 뿐이라고 해야할까.

한나와 미카엘의 차이는 아들 야이르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엄마는 모든 걸 아는 것 같아요. 절대로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적이 없으니까. 엄마는 늘 알지만 설명은 못하겠다라고 하는데요. 만일에 설명을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안다고 말할 수 있나요? 이제 끝났어요."  (p.120)

 

"아빠도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지만 아빠는 모르면 모른다고 해. 아빠는 알고는 있지만 설명할 수는 없다고 그러지 않아요. 뭔가를 알면 설명할 수 있는 거야. 말 끝났어요." (p.239)

 

미카엘은 '설명이 가능해야 존재하는 세계'에 있고, 한나는 '존재하지만 설명은 불가능한 세계'에 있다면 그 두 세계는 잘 어울릴 수 있을까. 미카엘과 한나는 계속 어긋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한나는 자꾸 현실의 계단에서 미끄러지고 미카엘은 그런 한나를 붙잡고... 그건 어쩌다 한 번은 로맨틱할지 몰라도 일상이 늘 그런 식이라면 두 사람 모두 견디기 힘들어질 테니까. 어쩌면 한나는 현실의 계단에서 넘어져 굴러 상처를 입더라도 다시 자기 발로 자기 세계에서 우뚝 일어서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느 쪽 세계에 있을까.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존재하지만 설명은 불가능한 세계'가 있다는 걸 느끼고 그 속에 손끝 하나라도 담그고 있지 않을까.

 

한나가 꿈의 세계로 들어갔을 때 드레곤 호니 타이그레스 호니 하는 군함이 등장하는데 그와 함께 '노틸러스 호'가 나온다. 쥘 베른의 <해저 2만 리>에 나오는 '노틸러스 호'. 그런데 실제로 세상에는 3척의 노틸러스 호가 있었고, 그중 마지막 세 번째 노틸러스 호가,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50년 대에 미국이 만든,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이었다. 공상과학소설 속의 노틸러스 호와 실재했던 원자력 잠수함 노틸러스 호. 그 이중적 의미가 이 소설의 신비감을 더하며 다가왔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 위태롭게 서있는 한나가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운 건 이미 내가 그 경계에서 아주 멀리 떠나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나와 미카엘의 사랑은 점점 속부터 녹슬어간다. 어느 날 한나는 무화과나무 가지 위에 몇 년 동안 매달려 있던 녹슨 그릇이,  미풍도 불지 않고 고양이나 새가 건드린 것도 아닌 데 갑자기 나무에서 떨어지는 걸 보았다. 그것을 보고 한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순간 강한 힘들이 실현된 것이다. 녹슨 금속이 부서졌고 그릇은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렇다. 나는 여태까지 내내 하나의 물체에서 완벽한 휴지를 관찰해 왔는데 그 안에서는 여태까지 내내 숨겨진 작용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p.119)

 

설명하기 어려운, 혹은 설명이 불가능한 '숨겨진 작용'이 한나와 미카엘 사이에서도 일어나, 사랑은 무화과 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녹슬어가던 그릇처럼 서서히 녹슬고 조금씩 부서지다가, 어느날 갑자기 가지 끝에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다.

한결같고, 도덕과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자기의 의무와 책임에 충실하고, 충동적 욕구에 흔들리는 일 없이 변함없을 것 같던 미카엘도  파출부 포르투나를 보며 흔들리고, 초록색 눈에 풍성한 금발을 가진 친구 야르데나의 시험준비를 도와주기 시작하면서 우스꽝스럽게 안절부절한다. 그런 미카엘을 보고 한나는 질투하거나 분노에 휩싸이지도 않는다. 이미 사랑은 그 둘을 떠났고 녹슨 그릇처럼 부서졌다.

 

당신의 환상을 깨지는 않겠어요. 난 당신과 함께가 아니에요. 우리는 두 사람이지 한 사람이 아니랍니다. 더 이상은 내 사려 깊은 장남 노릇을 할 수는 없어요. 잘 가세요. 당신에게 달려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게 너무 늦은 건 아니겠죠. 나에게도 말이에요. (p.289)

 

미카엘에게 '잘 가세요'라고 한 뒤에도 여전히 한나는 꿈의 세계를 넘나들었을까.

 

미카엘이 떠나고 처음으로 나는 일어나서 밖에 나갔다. 그것은 변화를 일으켰다. 날카롭고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갑자기 멈춘 것처럼. 밖에서 하루종일 진동하던 모터가 저녁 때가 되어 갑자기 꺼진 것처럼. 그 소리는 하루종일 눈치채지 못하게 지나다녔다. 멈추고 나서야 느껴진 것이다. 갑작스러운 정적. 그 소리는 존재했었고 지금은 멈췄다. 멈췄고, 그러므로 존재했던 것이다. (p.234)

 

찾아보고 싶었다. '멈췄고, 그러므로 존재했던 것'들.

멈춘지 너무 오래돼서, 이미 정적에 너무 익숙해져버려서, 존재했었지만 멈춰버린 게 무엇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것들.

이 책 속 한나의 나이는 서른. 그 나이로 돌아간다면 그게 뭐였는지 찾을 수 있을까.

찾을 수 있다고 한들, 그걸 다시 붙잡을 수 있을까. 한나처럼 잊지 않을 수 있을까.

 

저녁에 비가 올거라고 한다. 예루살렘의 겨울이 여기에도 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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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10-28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저도 정말 좋았어요, 섬사이님.
그런데 섬사이님의 리뷰를 읽다보니 저는 섬사이님처럼 전체를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그저 손에 집착했던 것 같아요. 자꾸만 나오는 손. 그리고 반복된 문장. `나는 잊지 않았다` .
문득 내 소설읽기는 언제나 부분에 집착하고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옵니다. 저는 어쩌면 그간 읽었던 모든 소설들을 죄다 다시 읽어야할지도 모르겠어요.

섬사이님, 리뷰 잘 읽었어요.
좋은 리뷰에요. 이 책을 읽었던 당시가 떠올랐어요. 다읽고 서늘했던 그 느낌까지도요.

섬사이 2014-11-01 18:21   좋아요 0 | URL
아, 다락방님~! (와락 ^^)
다락방님도 이 책을 읽으셨군요.
저는 부분을 보여주는 다락방님의 글이 좋아요.
저는 전체를 뭉뚱그려서 밋밋하게 느낌을 적어가는 반면에
다락방님은 아주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생생한 글을 쓰시거든요.
다락방님의 글을 읽으며 소심하게 `공감하기`를 누르면서,
제 글을 반성한 적이 얼마나 많은데요.
나는 왜 글에다 나를 다 드러내지 못하나,
나는 왜 이 부분에서 이런 생생한 느낌을 받지 못했을까,
나는 왜 성실하게 책 읽고 성실하게 글을 쓰지 못하나.. 하고요.

다락방님의 글이 사랑받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요.
암튼 지금은, 나, 다락방님께 칭찬받은 거... 맞죠?
신난다. ^^
 
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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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책꽂이에 꽂혀있던 세계문학전집의 갈색 책등을 훑어 보고 있었다. 아마 무지 따분하고 지루한 날이었나보다. <죄와 벌>, <적과 흑>, <전쟁과 평화>, <보봐리 부인>, <이방인>... 여기저기서 들어본 제목들이 가지런하게 줄지어 서 있었는데 그 중에 내 눈을 붙잡는 제목이 있었다. <달과 6펜스>. 단발머리 중학생 여자아이가 보기에 그 책은, 묵직하고 심각한 다른 제목들 사이에서 무척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제목으로 돋보이고 있었다. 한 번 읽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책을 뽑아 들었고, 방학 때였는지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이 책을 붙들고, 제목에서 느꼈던 낭만과 감성의 문맥을 만나려고 애쓰며 씨름했던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지루하고 힘든 씨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긴 시간이 흐르고 이 책에 대해서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읽었다'는, '읽어냈다'는 사실 뿐이었다. 책을 읽으며 만났을 문장 한 줄은 커녕 낱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누가 그 책이 어떤 내용이었냐고 묻는다면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과연 읽었다는 건 사실일까? 그 날 나는 도대체 책을 붙잡고 뭘 했던 걸까? 말 그대로 읽은 게 아니라 씨름을 했었나 보다.

 

쉰이 멀지 않은 나이에 다시 이 책을 펼쳤다. '읽었다'는 사실만 있을 뿐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책. 그런데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범상한 삶에 대한 낭만적 정신의 저항'(p.11)이라는 글 위에서 잠시 멈췄다. 하하, 웃음이 났다. 이런 류의 글이 이어진다면 여중생이었던 내가 이 책과 어떻게 공감을 나눌 수 있었겠는가. 오래 전 그 여중생도 틀림없이 범상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범상한 삶이 주는 무기력과 공허감 따위는 없었다. 심심하고 지루하고 따분한 시간조차도 다가올 미래에 대한 반짝임을 내포하고 있었으니까. 대책없는 낭만의 꿈은 꾸었을지언정 '낭만적 정신의 저항'의 처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쨌든 나는 저 문장 하나로 이 책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처럼 책을 읽는다기 보다 씨름을 했던 사람이 아니라면, 섬세하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행간의 깊은 의미를 짚어내려고 눈을 부릅뜨고 읽지 않더라도,  이 책이 후기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쓴 소설이라는 건 알게 된다. 산업혁명 이후 변화를 겪으며 문명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타히티로 떠난 고갱에 대한 이야기는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이 책에서 고갱과 겹쳐지는 인물은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인물인데, 고갱의 비참했던 삶에 소설의 극적인 픽션이 더해지면서 비상식적이고 기괴한 성품을 얻게 된 스트릭랜드는 독자를 책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얼마쯤 책을 읽어가다 보니까 스트릭랜드라는 인물에서 자꾸 니코스 키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올랐다. 아마도 허위와 가식으로 뒤덮힌 세상을 조롱하듯 거침없이 신념대로 밀고 나아가는 성격 때문인 것 같은데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한 내 어렴풋한 기억을 더둠어 보자면 조르바가 건강하고 유쾌하고 자유롭게 삶을 통째로 끌어안고 살아간다면, 스트릭랜드는 비극적 운명의 그림자를 품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리스인 조르바>도 다시 한 번 더 읽어봐야겠구나..)

 

예를 들면 이런 글들. 증권브로커였던 스트릭랜드가 그 안락하고 편안한 삶과 가족을 버리고 파리로 떠나고 난 후, 글 속의 화자인 '나'는 스트릭랜드 부인의 부탁을 받고 파리로 가서 스트릭랜드를 만나는 장면이다.

 

한 번은 이렇게 비꼬아보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런 격언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그대의 모든 행동이 보편적인 법칙에 맞을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격언 말입니다."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돼먹지 않은 헛소리요."

"칸트가 한 말인데요."

"누가 말했든, 헛소리는 헛소리요."

이런 인간을 상대로 양심에 호소해 보았자 효과가 있겠는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는 격이었다. 나는, 양심이란 인간 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을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속의 파수꾼이라고 본다. (중략) 남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고,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우리는 스스로 적을 문안에 들여놓은 셈이다. (중략) 양심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에 두라고 강요한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을 전체 집단에 묶어두는 단단한 사슬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 제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받아들인 집단의 이익을 따르게 됨으로써, 주인에게 매인 노예가 되는 것이다.  (중략) 그리고 양심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온갖 독설을 퍼붓는다. 왜냐하면 사회의 일원이 된 사람은 그런 사람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p. 77

 

한편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열린책들) 에서는 이런 글이 나온다.

 

재수없는 사람은 자기의 초라한 존재 밖에도 스스로 자만하는 장벽을 쌓는 법이다. 이런 자는 거기에 안주하며 자기 삶의 하찮은 질서와 안녕을 그 속에서 구가하려 하는 게 보통이다. 하찮은 행복이다. 만사는 정해진 순서를 따라 진행된다. 험한 길, 신성한 길을 따르다 안전하고 단순한 법칙을 따르기도 한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로부터의 공격이 차단된 하찮은 확신의 테두리 안에서 지네처럼 꼼지락거리다 보면 아무 도전도 받을 수 없다. 숙명적인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강력한 적은 오직 하나, 터무니없는 확신뿐이다. 확신은 내 경험의 벽을 허물고 내 영혼을 덮치려 하고 있었다. -p.507

 

스트릭랜드와 조르바가 어쩐지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뒤적이다 발견한 문장들이다. 양심이니 질서와 안녕이니, 정해진 순서를 따라 안전하고 단순한 법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그러니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방식이 스트릭랜드와 조르바 앞에서는 여지없이 갈가리 찢겨져서 편안하고 안락하고 폼나게 사는 게 꿈이었던 내 자신이 지네만도 못한 보잘 것없고 좀스러운 것이 되어버린다. 자기만의 확신을 가진 두 인물 앞에서 나는 놀라고 당황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통쾌한 해방감과 막연한 동경과 경외심을 같이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찬찬히 두 책을 읽다 보면 서로 비슷한 듯 어울리지 않는, 어딘가 통하지만 사뭇 다른 두 인물을 드러내줄만한 더 적당한 문장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스트릭랜드 주변을 둘러싼 인간 군상들을 책을 통해 관찰하는 것도 씁쓸한 재미를 주었다. 가난하고 날 것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지만 진솔한 사람들과 우아하고 지적인 영국 중상류층 삶의 가식과 허례가 대비를 이루며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 면면의 틈바구니에는 내 모습이 슬쩍슬쩍 보이기도 한다.

 

스트릭랜드는 문둥병에 걸려 자기가 살던 낡은 오두막 벽에 마지막 작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함께 살던 원주민 여자 아티에게 자기가 죽으면 작대기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오두막을 완전히 태우라는 유언을 남기고. 실제 고갱은 타히티에서 심장마비로 죽었고, 유언같은 작품으로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작품을 남겼다. 다행스럽게도 불에 타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현재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 묘사한 스트릭랜드의 마지막 작품이 작가가 이 작품을 염두에 두고 묘사한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달과 6펜스>를 읽고 나서 고갱의 마지막 작품을 보는 내 마음은 그 전과 같지 않다.

 

 

여전히 달을 향해 날아오를 수 없는 나. 앞으로도 달을 향해서 날아오를 일이 없을 것 같은 나.

달을 잊지 않고 매일매일 바라보기라도 한다면 좋을 텐데, 난 자주 내 머리 위에 떠 있는 달마저도 잊고 산다.

 

 

 

 

 

 

 

 

그 때만 해도 나는 인간의 천성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몰랐다. 성실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가식이 있으며, 고결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비열함이 있고, 불량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있는지를 몰랐다. -56쪽

삶의 전환은 여러 모양을 취할 수 있고,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성난 격류로 돌을 산산조각내는 대격변처럼 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마치 방울방울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에 돌이 닳듯이 천천히 올 수도 있다. 스트릭랜드의 경우는 그 전환이 광신자에게처럼 단숨에, 사도들에게처럼 광포하게 왔다고나 할까. -75쪽

고통을 겪으면 인품이 고결해진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행복이 때로 사람을 고결하게 만드는 수는 있으나 고통은 대체로 사람을 좀스럽게 만들고 앙심을 품게 만들 뿐이다. -90쪽

그야 인간이라는 예측불능의 존재를 두고 얘기할 때는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긴 하나, 어쨌든 블란치 스트로브의 행동에 대해서는 그럴싸한 설명이 가능했다. 하지만 스트릭랜드의 경우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생각했던 인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도무지 납득이 안 되었다. 친구의 신뢰를 비정하게 저버린 행위는 이상할 것이 없다. 남의 불행이야 어찌 됐든 제 기분만 만족된다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는 것, 그것은 그라는 인간에게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이었다. 고마움이라고는 전혀 몰랐고 동정심도 없었다. 보통 사람이면 으례 갖기 마련인 감정들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에게 왜 그런 감정이 없느냐고 탓한다면 우스운 일이 되고 만다. 야수더러 왜 그렇게 사납고 잔혹하냐고 탓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158쪽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홀로이다. 각자가 일종의 구리 탑에 갇혀 신호로써만 다른 이들과 교실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신호들이 공통된 의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 뜻은 모호하고 불확실하기만 하다. 우리는 마음속에 품은 소중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고 안타까이 애쓰지만 다른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나란히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211쪽

인생은 우스꽝스럽고 지저분한 일들의 뒤범벅이고 웃기에 적절한 소재였다. 하지만 웃으려니 슬펐다. -223쪽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 그리고 연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가 되는 것이 성공인 것일까? 그것이 인생에 부여하는 의미, 사회로부터 받아들이는 요구, 그리고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기사 작위를 가진 사람에게 내가 어찌 감히 말대꾸를 하겠는가. -260쪽

세상은 이상한 짓을 하는 이상한 사람들로 가득 찼다는 것, 사람은 자기 바라는 대로 되는 게 아니라 생겨먹은 대로 된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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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봤어 - 김려령 장편소설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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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등장하는 서영재라는 젊고 발랄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남의 책 분석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내 거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뽀개질 것 같은데. 다른 사람 작품은 오락이고 휴식이에요. 고통은 작가가 쓰면서 충분히 받았을 테니까 나는 즐기는 거죠. 시간과 돈을 투자한 독자의 위엄입니다. 하하하” (35쪽)

생각해보면 정말 즐기면 그 뿐인데 나는 왜 또 꾸역꾸역 리뷰를 쓰겠다고 이러고 있는 걸까.

나는 이 곳을 출판물 가락시장이라고 부른다. 글쟁이들이 농사짓듯 써낸 많은 원고들이 이곳에서 책으로 다듬어져 전국으로 유통된다. 이제 책의 운명은 독자의 몫이다. 날로 먹든 가공해 먹든, 삼으로 죽을 써서 개를 주든, 파뿌리를 구워 임금님 상에 올리든, 작가는 그것에 토를 달 수 없다. (63쪽)

그러니까 내가 이 밤에 컴을 켜고 책상머리에 앉아 이러고 있는 건 책을 요리해 먹는 내 나름의 방법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방법.

 

『완득이』로 처음 만났던 김려령이라는 작가가 19금 성인 소설을 썼다는 말이 들렸다. 김려령 작가가 쓴 책이라면 첫 책 『완득이』에 대한 강한 인상이 남아서인지 기대감을 갖고 꼬박꼬박 챙겨 읽는 편인데 지금까지『완득이』만한 작품을 만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쉬웠다. 그래서일까. 어린이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이 아니라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소설이라면 완득이만큼 강한 캐릭터가 등장하지는 않더라도, 뭔가 훅 밀려오는 감동이라든가 가슴 속에서 한동안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뭔지 모를 단단한 알맹이 하나를 얻을 수도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어린이나 청소년 책을 비하해서가 아니라 아무래도 어린이나 청소년 대상의 책들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지 못하는 제약이 있을 테니까, 다 큰 성인을 상대로 이야기를 한다면 작가 입장에선 더 자유롭게 막힘없이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나의 섣부른 짐작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린 것 같다.

 

마흔여섯 살의 미남 작가 정수현은 삶의 첫단추가 잘못 끼워진 불행한 사람이다. 삶을 시작하는 지점에서 제대로 끼워져야 할 단추는 바로 가족일 터. 따뜻하고 다정하고 안정적이고 편안한 분위기의 가정에서 태어난다면 그건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고 태어난 거나 다름없다. 비록 살아가는 날들 내내 그럴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유년의 행복한 기억이란 얼마나 값진 것일까. 불행하게도 정수현은 지독하게도 운이 없었다. 책에서는 정수현을 개천에서 난 용으로 표현하지만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형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나온 곳은 개천이 아니라 수렁이나 늪인 것 같다. 빠져나오려고 기를 써보지만 결국은 붙잡히고 마는. 태어났더니 난 이미 살갗 밑에 불행이라는 진피가 하나 더 끼워져 있더라, 하는 거나 다름이 없다. 도저히 벗겨낼 수 없는 불행이다.

어머니는 아내가 보통이 아니라고 경고했다. , 정신 똑바로 차려. 여자는 골라도 어머니는 못 고른다고 했어. 발에 채는 게 여자라도 어머니는 하나라고! ......어머니, 내가 고른 사람도 아닌데 평생 버리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머니인 건 어떠세요? 발에 채는 여자는 좋으면 만나고 싫으면 헤어지면 되는데, 발에 스치기도 싫은 여자가 어머니라고 딱 붙어 있는 건요? 내가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까지 어머니일 당신, 숨이 막힙니다. (51)

숨막히는 어머니도 그랬지만 갈비뼈가 부러지고 고막이 터질 정도로 자신을 두들겨 패는 형이나 그 형에게 주먹질을 해대는 아버지도 수현의 잘못 끼워진 첫단추였다. 더 불행한 건, 다시 고쳐 끼울 수 없는 첫단추라는 거다.

 

수현의 아내는 모래바람 몰아치는 사막 같이 황량하고, 남극의 겨울처럼 차갑다. 이 여자에게는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레 이리 꼬이고 가시가 돋았을까, 궁금했지만 끝끝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그저 나름의 아프고 고달픈 상처가 있었겠구나 짐작할 뿐. 그래도 용기내어 수현의 사랑을 얻고자 했던 것 같은데, 캄캄한 밤 차갑게 내리는 '습설'같은 삶을 살아온 수현에게 아내는 또 하나의 습설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집에는 늘 이길 원하는 아내가 있었다. 아내의 첫 자살시도를 막은 건 그런 죽음이 곁에서 벌어지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까다로운 작가에게도 직업적 친절을 보여야 하는 편집자의 자세, 그것으로 아내를 살렸다. 그것이 사랑이 아님을 안, 영원히 불가능할 것을 안 아내가 끝내 목숨을 버렸다. 많은 사람이 요절한 아내를 애도하고 아내를 잃은 나를 위로한다. 나도 아내를 애도한다. 그러나 사랑은 아니다. 목숨으로 흥정하는 사랑은 죽어서도 그것을 얻지 못한다. 사랑은 흥정이 아닌 삶의 모습으로 얻는 것이다. (64)

 

그렇게 숨막히게 답답하고 눅진하고 무거운 나날을 살아가던 수현 앞에 서영재가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 영재라는 인물은 가장 도드라지는 매력을 갖고 있다. 수현에게는 영재가, 아마도 온통 눈앞을 가리며 내리던 습설 속에서 노랗게 빛나고 있는 동그란 해님처럼 보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랑은 흥정이 아닌 삶의 모습으로 얻는 것'이라 했던 수현에게 영재는 싱싱하고 밝고 따뜻한 삶의 면면을 열어 보여주었던 것이다. 수현이 영재의 집을 찾아갔던 날 보았던 노란 패브릭 커텐처럼.

왜 웃어요, 사람 말하는데. 나야 워낙 개 같으니까, 이 새끼 작업 들어갔구나 하고 마는데, 아시잖아요, 글 쓰는 애들 은근히 순진한 거. 가끔 선배님이 하도 유명하니까, 작가답지 않게 좆나게 예쁘게 생겼으니까, 아 뜨거워, 아 씨, 이 담배 왜 이렇게 짧아.”

주유소에서 받은 물티슈로 영재의 손가락을 감쌌다.

왼손. 검지와 중지 안쪽으로 작고 붉은 반점이 돋았다.

이거 봐, 이거! 막 벌렁벌렁해. 이렇게 해서 꼬신 애들 몇 명이에요? 왜 자꾸 웃어요!”

너 예뻐서.”

예쁘죠, 얼마나 예쁘냐면요, 내가 눈가에 주름만 없애면 십대로 회춘한대서 성형외과에 갔잖아요. 나는 단지! 주름 하나 없애려고 갔는데, 거기 간호사 언니가 환자님은 이마랑 눈이랑 코랑 팔자주름이랑, 그러면서 자꾸 나보고 환자래. 내가 아주 중환자였더라고! .......왜 자꾸 해장국이 술처럼 올라와. 내가 지금 어디 아파서 환자는 돼봤어도, 못생겨서 환자 돼보기는 처음이야. 이거 의료보험 적용해야 해. 타인의 생명에 지장이 있어. 나 보는 순간 안구에 치명적인 피해가 간다고! , 우리 엄마 맨날 골골대더니만 못생긴 병에 걸린 거였어. 가족력이야. 왜 자꾸 웃어요? , 그래, 선배님 얼굴은 건강하다 그거죠? 만수무강하세요. , 손 따가워.” (47쪽)

영재가 쓰는 이 언어의 싱싱함이란. 수현은 이런 영재의 말을 '영재의 목소리와 어투가 결합하면서 발생한 화학반응으로 말의 온도가 올라간다. 영재가 따뜻한 이유다.'(101쪽) 라고 했다. 사랑에 대해서 영재는  '사랑은 잘 놀고 있는 고무줄 끊고 도망가는 게 아니라, 무거운 쓰레기통을 살짝 들어주는 거거든.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헛갈리게 굴지 않는다고. 고무줄 끊는 건 진짜 나쁜 놈도 하잖아. 사랑은 앞뒤 잴 것 없이 명확한 거야.” (117쪽) 라며 수현을 예쁘게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표지의 그림이 말하듯, 수현의 삶에 잘못 끼워진 첫번째 단추, 절대로 다시 고쳐 끼울 수 없는 그 첫 단추는 수현을 음산하고 끈끈한 수렁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수현은 영재와의 사랑이 아프다. '내가 바란 건 오직 하나였다. 나를 그냥 가만히 두는 것'(101쪽)이라고도 하고,  '우리가 지금 하는 것이 제발 사랑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영재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103쪽)라고 하면서 견디기 힘든 죄책감과 사랑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어떻게 괴롭지 않을 수 있을까.

 

삶은 왜 걸핏하면 어깃장을 놓고 뭐 하나라도 손에 거저 쥐어주는 게 없는 것인지. 첫번째 단추는 운이 없었더라도 두 번째나 세 번째에서 제대로 끼워서 다시 하나씩 하나씩 잘 끼울 수도 있는 걸 텐데 말이다.  너, 영재 사랑해? 그래, 그럼 그동안 네가 잘못한 거 다 용서하고 없던 걸로 해줄 테니까, 이제 착하고 예쁘게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 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더이상은 안되겠다고 생각한 순간 수현은 영재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어디쯤을 계속 분주하게 오간다. 때문에 이야기의 흐름이 엉켜 있어서 긴장하고 따라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 번 더 읽으면 이야기의 깊은 속을 좀 더 잘 들여다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끌리는 소설은 솔직히 아니었다. '와, 재미있다'와 '와, 감동적이야' 사이의 어중간한 자리에 붕 떠있는 소설이랄까. 그저, 수현만큼은 아니지만 내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약간의 고단함과 그 고단함을 이기고도 남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잠시 생각했을 뿐이다. 삶을 온통 사랑으로 채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내가 그릇이 작고 품도 넓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분명하고 명확하고 밝고 따뜻한 무언가가 늘 내 가까이에 있기를 바란다. 그게 나 자신이라면 더 좋고.

그것은 때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가지 않은 모든 만약의 길은 후회와 미련으로 남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삶을 지키며 잘 살아내길 바랄 뿐이다. 살아 있는 당신에게 행운이 가닿길.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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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미초 이야기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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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리고 이만큼 멀어지고 나서야 그게 빛나는 것인 줄 알았다.  반짝이는 그 안에 머물러 있던 동안에는 그게 빛인 줄도 몰랐다.  은행나무는 빛나던 한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비오는 날 하늘도 도시도 회색빛으로 흐릿하게 번지던 저녁무렵 홀로 황홀한 노란빛을 내뿜으며 서있는 은행나무를 본 적이 있다.  모두가 흑백인 사진 속에서 따로 칼러를 따서 붙인 것처럼 온 세상에서 은행나무 하나만 빛깔을 갖고 서 있어서 그 은행나무가 혹시라도 쓰러지는 날엔 온 세상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 갈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청춘, 그게 바로 비 내리는 쓸쓸한 가을 저녁에 홀로 빛나는 은행나무 같은 거였다.  청춘의 시기를 건너온 사람들 가슴마다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한 그루씩 우뚝 서있을 것이다.  그 은행나무에 기대어 내 삶에서 빛나던 한 순간이 있었음을 위로받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그 청춘의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 이만큼 지치게 걸어와 돌아본 나는 이제서야 그 빛남을 깨닫고 마는 것이다.  여기, 이 회색의 칙칙한 하늘 아래 저만치에서  반짝 노란 불을 켜고 서있는 은행나무는 반갑고 따뜻하고 조금 슬프다.  아니, 슬픈 건 여기 서 있게 된 나다.



표지의 노란 은행잎이 그 순간을 연상시키고, 그 앞의 벤치에 나란히 단정하게 앉은 흑백의 두 남자.  한 사람은 목에 카메라를 걸친 백발의 노인이고 한 사람은 검정 교복의 학생같아 보이는데, 서로 너무나 닮았다.  뒤 표지에서는 두 사람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앉아있던 벤치에는 노인이 매고 있던 카메라만 덩그라니 남아 있다.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철도원>의 작가 아사다 지로의 작품이라는 명성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빼고는 일본 문학에 별 관심을 두고 있지 않고 지냈기 때문에 '아사다 지로'라는 작가의 이름이 내 책읽기에 미치는 영향은 적었다.  저 표지의 눈부신 노란 빛, 그 앞에 흑백의 부동자세로 앉은 두 남자를 무시하고 지나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라는 유치하고 감상적인 이유가 전부였다.   

지도 상에서 그 이름이 사라진 마을 가스미초 아자부 10번지엔 쇠락한 사진관이 하나 있다.  개점 휴업 상태인 그 사진관에는 어용사진가이자 명장이라 불리던 치매를 앓고 있는 할아버지와 데릴사위로 들어와 가업을 잇고 있는 아버지, 그리고 고등학생인 나, '이노'가 있다.  소설에서는 현재를 살고 있는 '나'가 1960년대 쯤의 자신과 가족,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잔잔하게 들려주고 있다.   그 이야기가 저 표지 속의 은행나무를 닮았다.  내가 생각해오던 은행나무의 이미지와 너무 비슷해서 책을 읽다가 멍하니 내 안의 은행나무를 기억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불안하고 치기어렸던 시절.  무모하고 지나친 감정소모로 쉽게 지치곤 하던 그 어디쯤에서 난 어른의 세계로 훌쩍 건너와 또 이만큼 늙어가고 있는 것일까.  이 소설 속 이노는 어디쯤에서 조금씩 불안한 청춘의 시기를 넘어서 어른의 세계로 가는 다리를 건넜을까.  할머니가 멋진 노신사에게서 받은 꽃다발을 지저분한 수로에 던져버렸을 때일까.  아니면 후두암에 걸린 할머니가 가족들이 깨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 혼자 병원을 향해 꼿꼿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일까.  어쩌면 여름날 함께 어울렸던 선배 료코와 도키타의 죽음을 알고 영혼을 만나러 음침한 터널을 찾아갔을 때인지도 모르겠다.  어설프고 멍청해보였던 선생 해리가 떠나던 날 '굳바이'라는 말대신 '쌩큐 해리, 씨유 어게인'이라고 인사하던 순간.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가 졸업사진을 찍어주겠다는 말에 친구들과 함께 카메라 앞에 섰던 순간, 서로 너무나 다르고 티격태격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호흡을 맞춰서 꽃전차 사진을 멋지게 찍어냈던 함박눈 쏟아지던 크리스마스 이브, 애지중지하던 카메라 라이카를 손에 들고 스튜디오 등나무 의자에 앉은 채 할아버지가 숨을 거둔 날, 삼촌 신이치가 전쟁으로 군에 끌려가던 날 라이카의 셔터를 누를 수 없었다는 할아버지의 고백....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일, 모든 순간들이 고등학생인 '이노'를 성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나도 그랬겠지, 하며 쓸쓸한 웃음을 짓게 되는 건 모든 것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사라진 도시 가스미초처럼, 내가 다른 이름의 다른 거리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잔잔하고 여운이 향기처럼 남는다.  그것도 지나간 추억,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시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애틋한 재생불가능의 그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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