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이야기 - Shakespeare's Complete Works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윤기 외 옮김 / 달궁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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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몇 년 만에 셰익스피어의 책을 잡은 걸까? 까마득하다. 고등학생이던 시절 우리집에는 셰익스피어 전집이 있었다.  페이지를 2단으로 나눈 세로 배열 활자들이 읽기도 전에 기가 질리게 만드는 오래된 책이었는데, 그날은 무슨 맘을 먹었었던 건지 갑자기 펼쳐들었던 것이다.  아마도 꽤나 심심했던 것 같다. 각오는 했었지만 어려웠고,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오델로>를 겨우겨우 읽고나서 <한여름 밤의 꿈>을 읽다가 포기한 기억이 난다.  그래도 셰익스피어의 그 반짝이며 흘러가는 듯한 유려한 문체의 맛이라도 봤던 셈이니 그만하면 읽으려고 노력한 뜻을 스스로 기특하게 여기고 싶다.

설명이 필요 없는 이윤기 님의 번역이라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게다가 제목이 <겨울이야기>다 보니 이 쓸쓸하고 차가운 겨울날에 꼭 읽어봐야지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다보면 <한여름 밤의 꿈>은 여름이 되어야 읽을 수 있을 듯.. )

머리글이라고 할 수 있는 ‘셰익스피어, 압축파일 풀기’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윤기 님도 고등학생 시절에 “셰익스피어를 뚫어 내지 못했다.”(p.6)고 고백하고 있는 걸 보면 셰익스피어의 작품 앞에 내가 무릎을 꿇은 건 그리 창피해할 일도 아닌 것 같다.  이윤기 님의 말로는 셰익스피어 작품이 잘 읽히지 않는 이유가 셰익스피어 작품 안에 녹아 있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신화와 고전들에 무지하기 때문이란다.

“나는 셰익스피어를, 호메로스부터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같은 신화 작가들,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뤼피데스 같은 그리스 비극 작가들, 헤로도토스, 플루타르코스 같은 역사가들로부터 흘러온 길고 깊은 강이라고 생각한다.”(p.13)고 하니 이거 원, 나 같은 사람은 아예 셰익스피어 작품 근처에는 아예 얼씬거려서도 안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책을 쭈욱 넘기다 보니 책 뒤편에 ‘<겨울이야기> 재미나게 읽기’라는 글이 하나 더 있었다.  그 글 안에 <겨울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암시하는 신화적 배경들이 설명되어 있었다.  이 이야기의 여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시칠리아의 아름다운 왕비 ‘헤르미오네’와 후반부에 등장하는 사기꾼 ‘아우톨뤼코스’라는 인물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어떤 인물들에서 차용된 것인지, 그리고 헤르미오네가 정교한 대리석상으로 등장하는 부분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실려 있는 ‘퓌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이야기와 연관지어 설명해준다.  이쯤이면 이윤기 님이 언급하신 ‘문맥에 참여하는 재미의 체험’(p.219)에 참여할 수 있는 친절한 안내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으로 무작정 뛰어들려는 독자를 붙잡고 사전에 준비시켜주는 듯해서 다른 책에 비해 독자에 대한 배려가 돋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 더 마음에 드는 것은 “‘읽히는 셰익스피어’쪽으로 기우는 해석을 선택했다.”(p.236)는 번역가의 말이다.  이리 반가울 수가! 자신감을 갖고 본격적으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다.

이윤기 님으로부터 미리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덕분인지 이야기 속에 폭 빠져서 읽을 수 있었다.  시칠리아와 왕 레온테스가 왕비인 헤르미오네와 죽마고우인 보헤미아의 왕 폴릭세네스 사이를 의심하고 질투하면서 시작되는 사건이 헤르미오네의 버려진 딸 페르디타와 폴릭세네스의 아들인 플로리젤의 사랑이야기로 이어지는데 그 안에는 달콤한 사랑의 맹세, 불같은 질투, 저주와 증오, 눈물어린 회한과 참회, 용서와 화해, 거기에다 유머까지 담겨 있어서 셰익스피어의 언어의 연금술에 홀린 듯 빠져 있다보면 가히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400년이라는 길고 험한 시간의 물살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내공을 갖고 있구나,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쉽고도 매끄러운 번역으로 예술작품의 사진까지 곁들인 친절한 설명과 함께 만나볼 수 있는 책을 만나게 된 것 같아 기쁘다.  아무래도 이 시리즈를 차곡차곡 모으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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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 1 비룡소 걸작선 49
랄프 이자우 지음, 유혜자 옮김 / 비룡소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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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미하엘 엔데를 좋아하는 건, 그의 판타지가 따뜻하기 때문이다.  <모모>나 <끝없는 이야기>를 읽으면 신비스러운 인물들과 흡인력 강한 모험담들 아래로 따뜻하고 부드럽게 흐르고 있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작가의 연민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의 판타지가 사람의 내면을 어루만져주는 힘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랄프 이자우의 책 <비밀의 도서관>을 갖고 있지만 아직 읽어보질 못했다.  그 책을 읽기 위해서는 미하엘 엔데의 두터운 책 <끝없는 이야기>를 다시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계속 다음으로 미루고 있는 사이에 미하엘 엔데에게 후계자로 인정받았다는 랄프 이자우라는 작가에 대한 궁금증은 자꾸 커질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끝없는 이야기>에 대한 부담감을 내려놓고 랄프 이자우를 만날 기회,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을 내 손에 쥐었다.

우선은 미하엘 엔데의 작품과 분위기가 많이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시황의 진흙병사와 수메르의 쐐기문자, 고대 바빌론의 유물과 유적들, 신화적 동물들과 시대와 연대의 구분을 허무는 인물들의 등장이 호기심을 자극하고, 주인공을 돕는 세헤라자데의 유리새 니피와 나폴레옹의 외투 코퍼, 소크라테스의 잊혀진 제자 엘레우키데스, 벨레로폰의 페가수스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그런 신기함으로 흥미를 자극하는 것은 판타지 문학의 기본 조건(?)이므로 다른 판타지 작품들과의 차별화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작가의 자료수집에 대한 열성과 그 방대한 자료를 한데 엮어내는 능력은 높이 사야겠지만.

그것보다 내가 놀랐던 건 작가가 판타지 속에 엮어 넣은 이야기의 주제다.  제목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무척 새롭게 다가왔다.  작가는 우리의 본질이 ‘기억’ 속에 있다고 말한다.  현실을 중시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지나가버린 시간들이나 오래되고 낡은 사물에 대한 애정을 너무 쉽게 잃어버린 채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증오하지 않는, 그 어떤 감정도 표현하지 않아서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린’(p.367)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한 염려를 지우기 어렵다.

이 책을 읽으며 만약에, ‘이 세상에서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서 내가 사라진다면, 그렇게 하얗게 잊혀진다면, 과연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하는 물음 하나를 갖고 가게 되었다.  얼마 전에 읽은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보통은 ‘우리는 조금씩 남들이 우리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고 하면서 우리의 자아를 아메바에 비유하고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잊혀진다는 것은 우리가 존재의 본질을 잃어버린다는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야기에서 자기의 진정한 본질을 잃어버린 것들은 모두 잃어버린 기억의 세상, 크바시나로 들어가게 된다.  잃어버린 기억들, 지워진 꿈들, 잊혀진 사람들과 사물들은 크바시나에서 자기가 좋아하던 일을 계속하며 살아가지만 지배욕으로 가득 찬 크세사노의 등장으로 이쪽 세계와 크바시나의 균형이 무너지고 평화가 깨어지고 만다.  크바시나는 인간의 무의식 세계를 상징하는 공간이며 크바시나와 이쪽 세계를 모두 자기 손안에 넣으려는 크세사노는 곧 의식과 무의식 세계를 지배함으로써 세상을 정복하려는 난폭한 무법자라고 볼 수 있었다.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과거의 경험과 교훈을 소홀히 하며 엄청난 속도로 오직 앞을 향해 질주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갖고 있는 랄프 이자우의 책은 ‘도서관’이라든가 ‘박물관’과 같은 기록과 보존의 의미를 가진 낱말이 들어 있다.  망각으로 본질을 잃기 쉬운 우리에게 기록과 보존은 본질을 지켜가는 수단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에 녹아 있는 본질에 대한 사유가 참신하고, 주인공인 쌍둥이 남매 제시카와 올리버가 크바시나에서 아버지 토마스 폴락을 구하고, 지배욕으로 불타는 크세사노를 물리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이제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 2>을 펼쳐야겠다.   (08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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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나라에 간 코끼리
아르토 파실린나 지음, 진일상 옮김 / 솔출판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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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두 번째로 만나본 아르토 파실린나의 소설이다.  지난번에 읽었던 <토끼와 함께 한 그 해>도 주인공 바타넨과 토끼를 따라 핀란드 구석구석을 여행한 느낌이었는데 이번 소설 <모기나라에 간 코끼리>도 한 편의 아름다운 로드무비를 연상시킨다. 

러시아춤 트레팍을 출 줄 아는 코끼리 에밀리아는 따뜻하고 섬세한 감정과 우아하고 선한 품성의 낭만적인 성향의 코끼리다. 그런 에밀리아를 보살피며 따스한 우정을 나누는 루치아는 강인한 성격에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매력적인 아가씨다.  유럽연합의 새 지침에 따라 동물들을 이용한 서커스 공연이 금지되자 루치나는 에밀리아를 데리고 기차를 타고 러시아를 떠돌며 서커스 공연을 벌인다.  그 자체만으로도 영상이 아름다운 한 편의 로드무비가 그려진다.

핀란드에서 러시아, 그리고 다시 핀란드로 이어지는 여정에서 에밀리아와 루치아가 만나는 사람들은 우리네 사는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러시아 기차여행길에서 에밀리아의 사육사 일을 맡은 마흔 살의 역무원 이고르 루초프스키는 에밀리아에게 트레팍을 전수한 장본인이다.  다정한 성품을 가졌지만 다분히 몽상가다운 그는 고향 헤르만토프스크에서 비록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루치아와 성대한 결혼식 축제를 벌이는 꿈을 실현한다.

루치아가 이고르와 헤어지고 핀란드로 돌아오는 길에 루비아에서 만난 오스카리 렌지외와 그의 아내 라일라는 부부로서의 미덕이나 상호존중 따위 잃어버린 지 오랜, 그저 관성에 의해 살아가는 부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정뱅이에다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서슴지 않는 오스카리를 게으르긴 하지만 ‘말짱한 상태에서는, 어느 정도 쓸모가 있는’ 남편이라며 두둔하는 라일라는 종속된 여성의 표본이라고 할만 하다.

육류가공공장의 생산부장이며 노련한 소시지 기술자 루히넨은 어떤가.  코끼리 소시지의 레시피를 짜면서 그가 꿈꾸는 것은 이윤의 극대화이고, 에밀리아를 도살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강구하는 모습은 ‘물질적 가치’가 ‘정신적 가치’에 우선하는 현대 산업 사회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타이스토 오얀페레.  루치아의 젊고 생기 있는 아름다움에 매력을 느끼고는 에밀리아가 겨울을 지낼 유리공장을 임대하고 루치아를 위한 방을 마련해주고 물심양면으로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지만, 루치아가 에밀리아를 아프리카로 보내기 위해 길을 나설 때 자신의 생활터전인 가게를 포기할 수 없었던 남자다.  타이스토라는 인물을 생각하다보면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떠오르곤 했다. 룻의 아내가 뒤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말을 어기고 자기가 살던 터전에 대한 미련을 못 이기고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타이스토 오얀페레는 어쩌면 자기의 재산, 가게에 대한 집착 때문에 아름다운 루치아를 놓치고 말았던 것 아닐까. 

그런 타이스토 오얀페레에 비해 농부 파보는 행운아다.  아내 카리나와는 애정보다는 재산상의 이유로 유지되고 있는 결혼관계였다.  게다가 그는 자기 자신을 주교 헨릭을 살해한 농부 랄리 의 후손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남성답고 유능하다.  결국 루치아의 사랑을 얻어내지만 아주 현실적인 성격이라 아내 카리나와의 이혼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만약 카리나가 이혼하면 나랑 결혼할래요?”하는 루치아의 질문에 “너한테 100헥타르 경작지가 있으면 결혼하지.”(p.188)라고 대답할 정도로 야멸차고 매정하다. 그것이 우리시대의 사랑일까? 현실적인 이유를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열정적인 사랑은 이제 가능하지 않은 걸까? 파보의 아내 카리나도 체육 교사이자 소방대 대장인 타우노 리이지칼라와 부정을 저지르지만 파보와 카리나는 타협과 묵인 아래 상대방의 부정을 서로 눈감아준다. 이제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관계라는 것도 쿨하다 못해 서류상의 기록, 재산의 공유, 공적으로 인정받는 규범적 틀만으로 유지되는 삭막한 관계로 이행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게 삭막한 가정이 양산하는 것은, 부도로 사업이 망하고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우울증을 앓다가 잠수함 만들기에 심취해 살아가는 고독한 인물 레오 발카마 같은 인물일 것이다. ‘가진 것은 고양이와 자신의 원대한 꿈 뿐’(p.201)인 그는 파보와 루치아에게 자신의 쓸쓸함을 호소하지만 그 또한 파보와 루치아를 따라 훌쩍 떠나지는 못한다.  그에겐 고양이와 잠수함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귀향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떠남’이라는 것 자체가 쉬운 것은 아닌가 보다.  지금 여기서 이루어야 할 꿈이, 크고 작게 맺어진 여러 관계들이, 지금까지 다져온 생활 터전이, 매일매일 해결해야할 일들이 자유로운 유목민으로 훌쩍 떠나려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아르토 파실린나의 소설들이 모두 한편의 로드무비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내가 읽은 두 편의 소설을 생각해보면 자유로운 유목민에 대한 꿈과 떠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집착이 소설 속의 ‘독특한 여정’ 안에 어우러져 우리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되는 것 같다.

후우톨라의 타락한 목사와 탐페레의 녹색당원들도 묘한 대조를 이루며 등장한다.  후우톨라의 목사는 술에 빠져 살면서 스스로를 비관할 뿐 아니라 삶의 목적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에 비해 탐페레의 녹색당원들은 지나치게 과장된 목표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목적을 상실했건 또는 과장했건 간에 진실한 삶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에선 같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에밀리아를 아프리카로 보내기 위한 여정 속에 만나는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은 에밀리아와 루치아, 파보의 여행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인간군속의 지지고 볶고 아등바등한 삶에 비해 코끼리 에밀리아가 내딛는 걸음은 얼마나 자연스럽고 듬직하고 품위 있게 느껴지는지..  핀란드의 울창한 침엽수림 사이를 누비고, 맑은 호수 속에서 수영을 즐기고, 유연한 코로 인간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하고, 눈물을 쏟으며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고, 즐거울 땐 코로 트럼펫 소리를 내거나 트레팍을 추는 코끼리 에밀리아의 모습은 삶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마다 가슴 속에서 떠오를 것만 같다.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남아프리카의 아도 자연공원에서 에밀리아를 만났다고 했다. 물론 소설의 연장선에서의 이야기겠지만, 아프리카의 사바나를 배경으로 서있는 에밀리아를 생각하니 가슴이 다 후련해진다.  에밀리아에게 우리 인간이 사는 모습이란 모기 떼들의 앵앵거림과 별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언젠가는 나도 이 모기 나라를 벗어나 에밀리아가 살아가는 그 큰 세계를 느껴보고 싶다. 거침없는 큰 걸음으로 흔들림 없이 내딛고 싶다.   (080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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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 지음 / 창비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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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 김선우 시인의 <우리 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그 책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시인인 김선우 님께 조금 미안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시집이 아닌 산문집으로 두 권을 더 구입했었다.  그 중 하나가 <물밑에 달이 열릴 때>이다.  <우리 말고 또 누가~>는 지난 2007년도에 출간된 따끈따끈한 신간이었지만 <물밑에 달이 열릴 때>는 2002년도에 펴낸 책이다. 그래서인지 조금 더 감성적이고 조금 더 물기를 많이 가진 듯, 습윤한 분위기다.

읽어가는 내내 호두 같은 단단함이 느껴지는 글의 견고한 밀도가 내 마음에 공명의 울림을 만들어내고 자연과 생명, 원초적인 몸에 대한 작가의 몽환과 그 몽환이 현실과 맞닿는 글의 찰랑한 흐름에 푹 젖어들었다.

관념적이라든가 추상적이라든가 하는 수사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김선우의 글은, 그래서 그 느낌이 직접 피부에 닿는 듯 생생하게 전해져온다.  마치 원시적이고 감각적인,  그래서 인위적이거나 가식적인 관습이나 규범 따위로부터 자유로운 한바탕의 내림굿 같다고나 할까.... 시인의 예민한 감수성이 빚어내는 풍부한 시적 상상력 덕분에 나는 글을 읽다가 숨겨진 신화를 만난 듯 잊혀졌던 동화를 만난 듯 아련한 느낌에 젖어 종종 멍해지곤 했다.  더구나 먼 우주 품에 안긴 별빛을 바라보는 듯 아스라한 느낌으로 뻗어갈 즈음 갑자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일갈할 때엔 작가의 사유의 깊이와 통찰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울릉도 기행을 담은 글에서는 무차별한 개발에 대한 우려를 드러내고,  허난설헌 생가에 대한 어릴 적 추억담을 꺼내놓는가 했더니 여성성과 약자에 대한 착취와 폭압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은은한 정취를 풍기는 달의 이야기는 꾸르베와 프리다 깔로, 뚤루즈 로트레끄, 장욱진의 그림에다 조선시대 춘화까지 보태어진 정직하고 당당한 에로스의 세계로 이어진다.  이어서 모네와 베이컨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가하면  미클로시 얀초의 영화 ‘붉은 시편’이라든가 따르꼬프스키의 영화 ‘잠입자’, ‘희생’, ‘향수’등을 가지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감독도 영화도 다 처음 들어봤다) 경주나 작가의 고향인 강원도에 대한 이야기와 <그리스인 조르바>나 <침묵의 세계>를 비롯한 몇 권의 책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이 책 속에서 작가가 다루고 있는 글의 소재는 다양하고, 그 다양한 글의 소재들이 각각 하나의 문이 되어 작가가 그려내는 몽환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그렇게 몽환의 세계에서 습윤한 물기를 머금고 작가의 글을 따라 걷다보면 현실의 문제로 빠져나오는 문을 하나 더만난다.  학교문제, 약자와 제3세계에 대한 착취, 억압된 성,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혁명, 인간의 오만, 정신적 가치의 빈곤을 이야기하는 현실은, 몽환의 경로를 거쳤기에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그것이 이 책의 매력이고 내가 김선우라는 시인에게 각별한 관심을 두게 되는 이유가 된다.

이 작가가 쓴 두 권의 책이 모두 만족스러웠던 까닭에 다음 책에 대한 기대와 혹 실망하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 반반이다. 시인이라는 직함을 앞에 둔 작가이니만큼 시집도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나서 시집 두어 권도 읽어볼 생각이다.  단, 너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08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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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수필 범우 한국 문예 신서 1
김용준 지음 / 범우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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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후반, 월북 작가들의 책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월북’ 또는 ‘납북’이라는 이유 하나로 출판도 읽기도 금지되었던 이들의 책은 정지용과 김기림을 시작으로 문학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었다.  우리 집에도 그 당시 구입한 민음사에서 출판된 정지용 전집과 기민사에서 출판된 정지용 시집이 있다.  이제 책의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된 그 책들은 이제 더 이상 새롭지도 않은 일상의 책이 되었다.  책장에서 꺼내보니 오히려 ‘3000원’이라는 책값과 깔끔하지 못한 활자들이 더 새롭게 다가와 웃음이 났다. 

오랜만에 월북 작가의 책을 접했다.  ‘월북’이라는 딱지가 이제는 책의 희귀성을 높일만한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문학적 가치를 논하는데 특별히 고려해야 할 기준이 되지도 못하지만 해방 전후의 사회상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이 겪었을 삶의 고단함과 예혼藝魂의 갈증에 안쓰러운 마음이 더해지는 건 사실이다.

김용준.  월북 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창설에 힘을 보탰고 광복 전후에 미술가이자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로도 활약했던 그는 글쓰기에도 남다른 재주를 지녀 그가 쓴 이 <근원수필>이란 책은 ‘한국 수필문학의 백미’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를 ‘평생 남의 흉내나 겨우 내다가 죽어버릴 인간’이라 여기고 ‘근원(近猿)’이라 호를 지었다는 글은 갑갑한 현실 속에서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예술적 욕망의 표현처럼 느껴져 책을 읽는 내내 예술과 삶을 향한 그의 암담한 번민이 풀지 못하는 엉킨 실타래를 앞에 둔 것처럼 안타깝고 애잔했다.

고졸하고 담박한 그의 글은 맑은 계곡 조용한 그늘 아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자기 자신과 주변의 인물들, 각별한 애정이 가는 늙은 감나무와 예술과 조선조의 화가들에 대한 관심을 예스럽고 격조있는 언어로 진솔하게 풀어낸 그의 글의 품위는 어쩐지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와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를 쓰신 최순우 님의 글들을 연상시킨다.  갑자기 최순우 님의 책을 다시 읽고 싶은 욕심이 생길 정도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요즘 출판되는 책들 중에 요란스럽고 시끄러운 책들이 참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술가와 세인과의 현격한 차이는 요컨대 예술가는 성격의 솔직한 표현이 그대로 행동되는 것이요 세인의 상정은 성격이 곧 행동될 수 없는 곳에 있다.  예술가가 예술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능력은 이 솔직한 성격의 고백이 가능하기 때문”(p.139)이라던 그는 “언제나 철책에 갇힌 동물처럼 답답하고 역증이 나서 내 자유의 고향이 그리워 고함을 쳐 보고 발버둥질 하다 보니 그것이 이따위 글"(p.175)이 되었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이 <근원수필>은 ‘답답하고 역증이 나는’ 그의 ‘솔직한 성격의 고백’이라서 이처럼 우리 수필문학의 백미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나 보다. 

“다방면의 책을 읽고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맛본 뒤에 저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글이고서야 수필다운 수필”(p.174)이라 한 그의 말은 글쓰기의 신중함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나의 글이 미흡한 것은 아직 부족함이 많아서, 채워야할 것을 다 채우지 못해서 그런가 보다.  세밑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새해엔 나를 새롭게 채워갈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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