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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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20대를 기억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해서 잠시 들떴던 시기를 빼고, 나의 20대는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불안과, 그 불안을 무마해보고자 하는 조바심과, 그 조바심으로 인한 실수와, 그 실수가 남긴 오점들로 얼룩졌다.  세상이 너무 무섭고 거대해보였고 누가 뭐라는 사람이 없었는데도 주눅 들었다.  내가 코끼리 발 아래 놓여진 개미 같았다.

이 책에서 내 20대의 향기를 맡았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외롭고 막막하고 불안했던 그 시절의 향기가 퐁퐁 솟아올랐다.  이 책에 들어있는 열 개의 단편이 20대 청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그것도 ‘잘 나가는’ 20대가 아니라 ‘인생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 20대의 이야기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20대의 외롭고 막막한 불안은 어쩌면, 앞으로 펼쳐질 ‘나 홀로 인생’에 대한 예지가 아니었나 싶다.  이제부터 너는 세상과 혼자 맞짱을 떠야한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스푸트니크호를 타고 혼자 막막한 우주를 떠다녀야했던 라이카처럼, 그렇게 혼자서 가야 한다고 겁을 내고 있었던 거다.  “안녕, 행복했던 유년기여. 안녕, 눈부셨던 사춘기여. 만나서 반가워, 내 앞에 펼쳐진 황량하고 쓸쓸한 나날들아.” 하고 용기 있게 인사라도 건넸으면 좋았을 것을.

아무튼 그래서 나는, 이 책이 품고 있는 연민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행성의 존재에게 알려주기엔, 인류의 몽따주는 얼마나 슬픈 것인가.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파아, 하아.  그래, 전철만 다녀라, 은하철도 같은 건 아예 생각지도 말아야 한다.  지금 이대로의, 인류라면 말이다.‘ (p.81) 


'그렇군요.  문득 이 세계가 외계처럼 느껴졌다.  기하 형의 뒷모습이, 그래서 더욱 외로워 보였다.  인간은 서로에게, 누구나 외계인이다.’ (p.194)


'결국 <나>란 것은 <아무나>의 한 사람이거나, <누구나>의 한 사람과 같은 것이다.  즉 그것이, 우리의 경향이다.  아무런, 나, 누구도, 나.‘ (p.231)

'누구에게나 인생은 하나의 고시(考試)와 같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통풍구의 점검이 끝났다는 외침이 들리자, 사람들은 우르르 자신들의 밀실로 돌아갔다.  나는 그곳에 남아 다시 한 대의 담배를 더 피워물었다.  세상은 얼어붙었고, 진입로 입구의 벚꽃나무들은 긴긴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나무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인간은-누구나 밀실에서 살아간다.  그것은 고시를 패스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  누군가 그런 낙서를 끄적여놓았다면, 정말이지
이하동문이 아닐 수 없다.‘ (p.299) 


과장과 비약, 공상과 망상이 심한 소설이구나, 하다가도 이런 문장을 만나고 나면 난 “허~~”하고 숨을 늘이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정신은 잠시 먼 곳을 더듬다 돌아오고 만다.  대왕오징어와 개복치, 펠리컨과 기린, 하나의 세계를 카스테라로 변하게 할 수 있는  냉장고와 날아다니는 오리배, UFO가 등장하는 이 단편소설들을 알레고리컬하다고, 그의 문체가 독특하다고, 그래,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나는 ‘인간과 삶에 대한 연민’을 드러내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그 향기가 생각보다 오래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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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악녀
페이 웰던 지음, 김석희 옮김 / 쿠오레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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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내세우고 있는 페미니즘, 학교 다닐 때 여성학 시간에 배우긴 했지만, 그게 이런 거였던가, 싶게 같은 여자 입장에서도 주인공 루시의 복수에 감정이 이입되어 통쾌할 수 없는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성의 참정권이나 교육권, 시민권 등등을 페미니즘의 격류 덕에 얻어냈다는 성과에 대해서야 뭐라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감격스러운 일이지만, 그 이후의 페미니즘의 동향은 뭐라 석연치 않은 느낌이 있다.

언젠가 한겨레신문에서 도리스 레싱을 ‘페미니즘 문학의 선구자’라고 소개한 적이 있었다.  스웨덴 한림원이 그녀의 문학을 ‘남녀관계에 관한 20세기적 관점에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책’이라고 평했다고 하는데, 정작 도리스 레싱은 페미니즘이 지나치게 이념적이고 남녀 관계를 과도하게 도식화한다며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규정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는 내용이 그 기사에 실려 있었던 것 같다. 대학 시절 여성학 교수님도 그런 점을 염려하셨던 건지, 강의 내용 중에 여성운동은 남녀평등이 아니라 남녀의 조화를 추구한다는 식의 말씀을 하셨던 게 유독 기억에 남아 있다. 

아름다운 연애소설 작가 메리 피셔와 바람을 피우는 잘생기고 능력 있는 남편 보보는 끝내 못생긴 외모를 가진 조강지처 루시를 헌신짝처럼 버린다.  그 때까지 그래도 요리와 청소, 정원돌보기와 육아에 헌신하며 가정을 지킨 루시는 언젠가 남편이 자기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모욕과 수모를 참아내는데, 어느 날 보보에게 ‘악녀’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손바닥 뒤집듯 사람이 싹 달라져 버린다.  세상이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내가 변한 것이라는 루시의 외침이 이해가 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루시의 복수를 지켜보는 마음이 그리 썩 개운치가 않다. 

루시가 그렇게 독하게 변화해서 보여주는 모습이란 게 고작 메리 피셔 따라하기, 바로 그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루시의 복수는 점점 더 역겨워지고 뒷부분으로 갈수록 메리 피셔가 가여워지기 시작한다. 이런 불쾌감은 아마도 앞에서 언급한 도리스 레싱의 ‘너무 과도하게 도식화한 남녀관계’를 설정한 탓이 아닐까. 어쩌면 루시의 복수는 보보나 메리 피셔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외모지상주의와 사회적 편견에 대한 조롱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메리 피셔 정도의 외모를 갖추지 않으면 받아주지 않는 세상(심지어 가정에서조차도!!!), 너무나 쉽게 무너져 버리는 원칙과 가치들(심지어 판사나 신부까지도!!!), 약자에게 더욱 가혹한 갖가지 규칙과 법률들(여자에게 불리한 이혼법과 배변조절이 불가능한 노인들을 내치는 노인요양원의 규범들), 악녀가 되어야만 자아를 확인받을 수 있을 정도로 여성에게 팍팍한 이 세상을 향해 썩소 한 방 날리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소설을 읽고난 뒤끝이 뭐 그리 깔끔하진 않다.  루시처럼 악녀가 되어야 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고, 사랑에 사로잡히고 양심에 신경쓰다보면 메리 피셔처럼 결국 가진 것도 다 잃게 된다는 이야기 자체가 상쾌하고 깔끔한 느낌을 주기엔 무리이지 싶다.

그런데 이 책의 묘한 마지막 구절이 또 너무 허탈하다.  솔직히 어렵지 않은데도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던 특이한 책이었는데, 마지막 구절로 힘을 쪽 빼놓는다.  결국 내가 읽었던 게 ‘허구 속의 허구’였단 말인가 하는 애매모호한 결말.  어릴 때 책 속 모험 이야기에 빠져서 실컷 재미있게 읽으며 아슬아슬한 절정까지 올라 과연 어떻게 될까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결국 꿈이었더라 하는 무책임한 결말로 배신감에 떨게 했던 동화가 떠오르는 마지막이었다고나 할까.

패미니즘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다른 책을 읽거나 ‘Fried Green Tomatoes'나 ’바그다드 카페‘, ’The Color Purple' 같은 페미니즘 영화를 감상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편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다거나 아니면 적어도 복수를 상상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이 책이 어느 정도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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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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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고 밝은 어감으로 다가온 ‘촐라체’가 히말라야 줄기 속에 서 있는 2천여 미터 거벽의 이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당연히 이 책이 험준한 빙벽을 오르내리는 이야기일 거라는 것도 짐작하지 못했으니 일종의 ‘산악등반소설’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염려스러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살인적인 추위와 싸우며 로프 하나에 의지한 채 빙벽을 오르는 이야기야 이미 영화로 많이 만났던 것 아닌가.  영화가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실감나는 묘사를 소설이 능가할 수 있을까?  영화가 느끼게 해주는 아슬아슬한 긴장감,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흰 봉우리의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풍경들과 어떻게 겨루겠다는 걸까?  작가의 말에서 ‘나는 ’존재의 나팔소리‘에 대해 썼고,’시간‘에 대해 썼으며, 무엇보다 불가능해 보이는 ’꿈‘에 대해, '불멸’에 대해 썼다.‘고 주장하고는 있지만, 지금까지 만들어진 산악영화들, 이를테면 K2라든가 클리프 행어 같은 것들도 오로지 ’산을 오르는‘ 이야기만을 담았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글 속에서 만나는 산악등반에 관련된 전문용어들 때문에 짜증이 났다.  레지, 모레인, 백 앤 니, 비박, 등로주의, 알파인 스타일, 크러스트, 침니, 크레바스, 트레버스....  일일이 책 뒤편에 있는 ‘등반용어’를 뒤적여가며 소설을 읽어야 한다는 건, 몰입에 걸림돌이 되었다.  영화라면... 이라는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나 중반을 넘어서면서 나는 어느덧 등반용어를 찾아보지 않고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영화에서 보여줄 수 없는 이야기를 소설이 들려주고 있었다.  촐라체를 오르는 아버지가 다른 형제 박상민과 하영교, 그리고 스님이 되겠다는 열일곱 살 아들을 절로 보내놓고는 자신의 헛헛한 인생을 어쩌지 못하는 베이스 캠프지기 ‘나’.  셋 모두 인생살이에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어딘지 모를 존재의 밑바닥부터 어긋나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인물들이다.  그들에게 촐라체 정상을 넘는 일은 명예나 성공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촐라체가 숨기고 있는 크레바스와 같은 위험한 함정들, 목숨을 걸고 한 줄 로프에 의지해 타고 올라야 하는 오버행과 청빙의 빙벽들, 언제 몰아닥칠지 모르는 난폭한 블리저드와 눈사태, 화이트 아웃이나 고소증, 동상 같은 치명적인 질병 같은 것들이 우리네 ‘삶’에 대한 은유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그들이 악착같이 넘고자 하는 것은 삶도 인생도 아닌 그들 자신이라는 생각에 어느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그들에게 촐라체는 ‘다르마타’의 다른 이름이다. 작가는 조난당한 박상민과 하영교를 찾아 나선 ‘나’를 통해 ‘다르마타’를 설명하고 있다.  ‘히말라야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은 죽음과 탄생 사이의 과도기적 시간을 ’다르마타(Dharmata)'라고 불렀다. 그것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잠과 꿈 사이의 밝은 틈새라고 했다.  목숨 값에 억눌려 온갖 욕망으로 이지러져 있던 이른바 불멸의 본성이, 하나가 통째로 끝나고 다른 하나가 통째로 시작되는 그 틈새에서, 금강석보다 견고한 본체를 보이고, 보여주는, 은혜와 축복의 시간이 바로 다르마타였다.‘(p.292)라고. 촐라체를 넘어선 그들은 다르마타를 건너 어긋나버린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맞추어간 것이 아닐까.

극한의 한계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 삶에의 의지, 고난 극복 등에 영화가 초점을 맞추었다면(그 속엔 영웅적인 인물 하나가 늘 들어있기 마련이다.) 이 소설 속엔 영웅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불안한 그늘을 가진 세 사람이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채 오열하다가 결국 자신의 불안과 그늘을 환하게 끌어안은 채 스스로 촐라체가 되어 우뚝 서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자신이 스스로 넘어서야 하는 동시에 늠름하게 솟은 촐라체여야 한다는 것, 그것이 세상을 향해 작가가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아등바등 사는 일에 엄살을 떨며 들끓기 좋아하고 한없이 가벼워지는 우리의 존재 앞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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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티볼리의 고백
앤드루 손 그리어 지음, 윤희기 옮김 / 시공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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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적인 나이를 일흔부터 시작한다는 충격적인 설정 때문에 기대가 컸던 소설이다.  표지의 우수어린 눈빛의 소년은 또 얼마나 책의 내용을 궁금하게 만들었던가.  그러나 빨리 내용을 확인하고 싶다는 기분이 너무 앞섰던 걸까.  이 책에 충분히 젖어들지 못한 것 같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모두 읽은 내 기분은 무척 우울하고 좀 짜증스럽다.

가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물리적인 나이와 정신적인 나이를 일치시키지 못한다는 게 꽤나 비극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고.  그런데 이 책의 주인공 막스가 바로 신체적 나이와 정신적 나이의 불일치라는 선천적인 형벌을 타고난 인물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올드맨’이라고 불렀고 “사람들이 네 나이가 얼마쯤이라고 생각하면 그에 맞춰 행동해야 한다.”(p.38)며 막스가 어릴 때부터 나름의 처세를 가르친다.  그러나 그가 짊어진 비극적인 형벌은 쉰셋의 몸을 가진 열일곱 살 막스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사랑 앨리스와의 만남으로 인해 더욱 가혹해진다.  노인의 몸에서 점점 어린 아이의 몸으로 시간의 흐름을 역행해가는 막스가 평생을 바쳐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그리고 막스의 유일한 친구, 휴이.  명랑하고 밝은 모습을 지녔으면서도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에 평생 슬프고 우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살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 책 속의 또 다른 비극적 인물이다. 

책은 이미 쉰여덟 살이 되었지만 열두 살 쯤의 어린이의 몸을 가지게 된 막스가 앨리스의 양아들이 되려는 시점에서 자신의 아들 새미와 앨리스에게 자신의 일생을 고백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책 표지에는 작가의 ‘유려한 말솜씨와 화려한 문체’를 자랑으로 삼았지만 유려한 말솜씨와 화려한 문체를 이야기의 진행보다는 배경묘사나 심리묘사 쪽에 비중을 두고 있어 좀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읽다보면 ‘이 표현 참 세밀하고 기가 막히다.’며 감탄할 문장들을 만나기도 하니 그리 억울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이 책에서 느끼는 우울과 짜증은 어쩌면 애초에 내가 기대를 걸었던 충격적인 설정이 오히려 감정이입을 방해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 기이하고 현실감 없는 존재, 그런 존재가 보이는 섬뜩하리만큼 집요한 사랑, 그리고 그에 대한 기록.  어쩌면 나는 막스가 이런 고백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주기를 바란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고백이 앨리스와 새미가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 이 고백조차도 막스의 이기적이고 집요한 사랑의 한풀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우울과 짜증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광고문구가 생각났다.  그 광고를 볼 때마다 쓴웃음 지었던 기억도.  나이가 어찌 단순한 숫자에 불과하랴.  사람들이 구분해놓은 ‘나이’라는 시간의 갈피마다에 꽂혀진 삶과 그 삶이 드리운 그림자들을 몽땅 가려놓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호기롭게 외치는 그 광고가 내 눈에는 처연하게 보였었다.  막스 티볼리의 삶은 그의 가혹한 천형에 의해 뒤틀리고 꼬이고 엉망진창으로 엉켜버렸지만 그래도 막스는 ‘그러나 난 내 인생을 사랑했소.’(p.406)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는 역행하는 신체의 나이와 순행하는 정신의 나이 양쪽에 새겨진 삶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것일 게다.  인생이라고 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어떻게 꼬이고 엉켜버리든 그 속에 담긴 삶의 내용을 사랑할 수 있을까.  여전히 우울하다.  고백은, 하는 쪽도 어렵지만 듣는 쪽도 부담스러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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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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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겨웠다.  성폭행, 살인, 복수에 대한 이야기로 처음부터 독자를 꼼짝달싹 못하게 하다니 시작이 불손하다 싶었다.  너무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이라고 비난받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이 책의 시작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섬뜩하고 잔혹하고 오물을 뒤집어쓴 듯 불쾌했다.  그렇게 유난스런 감정을 느꼈던 건, 아마도 내가 여성이며 두 딸의 엄마이기 때문일 것이다.

불량청소년이라는 표현이 너무 순진하게 느껴질 정도로 뻔뻔하고 악독한 열여덟 살의 아쓰야와 가이지는 납치해서 성폭행한 소녀 에마가 죽자 강물에 사체를 유기한다.   몇 년 전 아내를 잃고 딸 에마 하나만을 삶의 이유로 여기며 살아가던 나가미네는 휴대전화로 걸려온 익명의 제보자에 의해 딸 에마가 잔인하게 성폭행당하고 죽임을 당한 아쓰야의 집을 찾아가게 되고 그 곳에서 에마가 유린되는 비디오테이프를 보게 된다.  분노와 증오에 휩싸인 나가미네는 마침 집에 들어온 아쓰야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이미 도주한 가이지를 찾아 다니기 시작한다.  딸을 성폭행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그들이 단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그들이 저지른 악독한 범죄에 합당한 처벌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보호받는다는 사실을 잘 아는 나가미네는 자기 손으로 직접 딸의 원한을 풀어주고자 한 것이다.

사건만 놓고 보자면 독자의 호기심을 확 끌어당기지 않을 수 없다.  성폭행, 살인, 복수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관음증을 자극하고 잔인함을 즐기는 사람의 본성에 잘 영합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가볍지 않다고 느껴졌다. 

작가는 미성년자의 범죄 문제와 그에 대응하는 법적인 처벌이 과연 합당한가에 대한 사회적 이슈를 이 책을 통해 제기하고 있는 걸까.  실제로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의 글들이 이 책 여기저기에서 많이 눈에 띈다.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나가미네의 입을 통해서는 물론이고, 또 다른 피해자의 아버지 아유무라, 나가미네와 가이지를 좇는 형사 오리베와 하싸스카 등을 통해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책을 더 읽어가다 보면, 표면에 드러나는 그런 사회적 이슈를 넘어 소년 범죄에 대한 현실성 없는 이상주의적인 대처와 미성년 범죄자의 ‘갱생’에 대한 맹목적 희망이,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방임하는 기성세대의 또 다른 과오임을 이야기한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 예로 작가는 아쓰야와 가이지의 부모들의 무책임하고 뻔뻔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묘사하고 있으며 청소년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사회적 방임과 무관심에 대해 성토한다.
‘왜 그런 녀석들이 태어나고 방치된 것일까? 세상은 왜 그런 녀석들이 일을 벌이도록 놓아둔 것일까? 아니, 놓아둔 것이 아니다.  다만 무관심할 따름이다.
......(중략).......
그러나 그도 그러했다.  자기의 생활만 보장되면 다른 사람의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소년범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느냐?  문제 해결을 위해서 무슨 노력을 했느냐? 그렇게 물으면 그도 대답을 할 수 없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자기 역시 세상을 이렇게 만든 공범자라는 사실을.  공범자에게는 죗값을 치러야 할 책임이 똑같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번에 선택된 사람은 자신이었다.‘(p.481)
작가는 이 글을 통해 이 책을 읽는 사람 모두를 사건의 공범자로 끌어들이며 언젠가 우리가 저지른 무관심과 방임의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또 작가는 우리가 믿고 있는 ‘정의’를 문제 삼는다.  우리가 정의라고 생각하고 믿는 것들이 과연 올바른 것이냐고.  그 ‘정의’에 입각해서 과연 악을 처단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정의란 무엇이며 그 정의를 어떻게 행사할 수 있으며 그 ‘정의’에 입각해서 과연 악을 처단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우리의 삶이 부조리하고 이율배반적이니만큼 그 어떤 명제도 절대적인 선이 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쥐고 있는 ‘정의의 칼날’은 - 이 책에서는 국가의 법 - 무력하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방황하는 칼날’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 이 작가의 책으로 <흑소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단편을 묶은 책이었는데 읽으면서 작가가 사회를 꼬집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방황하는 칼날>이 내가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두 번째 책이 되었는데, 결코 실망스럽지 않았다.  다만 사족 하나를 달자면 이 책이 제기하는 진지한 메시지에 비해 옮긴이의 말이 너무 가볍다는 인상을 받아서 좀 아쉽다.  이 책의 초점을 너무 사이코패스 쪽에 맞추어 ‘어쩌면 당신 옆에 끔찍한 사이코패스가 있을지도 모른다.....’라며 무슨 공포영화 예고편처럼 글을 맺는 게 오히려 이 소설의 깊은 맛을 망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어디까지나 나의 사족일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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